아직은 시작일 뿐/ 유럽에서 CO2 1톤 배출 허가 취득 가격 (단위:유로)/ 출처: Ember
배출권 거래제(ETS)가 유럽의 배출량에 미친 영향도 이와 비슷한 대체 효과에 따른 것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로 몇 년 동안 탄소의 가격은 낮은 상태로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EU가 배출권의 수량을 줄인 2018년부터 탄소 배출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표3 참조). 이로 인해 석탄의 가격이 상승했다. 석탄은 천연가스에 비해 1와트당 두 배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하기 때문이다. 2019년 유럽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재생 에너지가 석탄 발전 전기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다.
잔해에서 벗어나
탄소를 배출하지 않기 위해 당장 적용할 수 있는 대안이 없을 때에는 가격을 매긴다고 해도 변화는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많은 지역에서 자동차에 대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대부분의 회원국들이 부유한 국가들인 OECD의 2018년 연구에 따르면 42개국 중 32개국에서 도로 교통으로 인한 탄소 배출량의 최소 90퍼센트에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를 탄소 가격으로 환산할 경우 톤당 60유로가 넘는 가격이다. 하지만 당장 이용 가능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세금을 부담하면서 여전히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탄소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기업들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대안이라도 개발하기 위한 투자를 할 것이다. 하지만 탄소 가격이 미래에도 충분히 높게 유지되어 이러한 비용 투자가 가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경우에만 그렇다. 그럼에도 정부의 탄소 가격 정책 폐기를 막을 방법은 없다. 실제로 호주에서는 “세금을 축소하라(axe the tax)”는 운동이 2013년 총선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2014년에 탄소 가격 정책이 폐지됐다. 영국은 ETS를 도입할 당시 석탄 경제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전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탄소 가격의 하한선을 설정했지만, 2014년 영국 정부는 하한선을 높이겠다는 약속을 어겼다. 엑손모빌(ExxonMobil)과 같은 거대 석유 회사들이 미국의 캠페인 그룹인 기후리더십위원회(CLC)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탄소 가격 정책을 지지했을 때, 회의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분석하기도 했다. 이 회사들은 이런 정책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유지되더라도 로비를 통해 가격을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높은 탄소 가격을 어떻게 신뢰하게 만들 수 있을까? 옥스퍼드대학교의 벤 칼데콧(Ben Caldecott)은 탄소에 가격을 매기는 정책의 성과가 저조할 경우에는 다른 방식으로 비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예로 드는 것은 영국의 삼림 지대 탄소 보증 제도(Woodland Carbon Guarantee, WCaG)라는 것이다. 배출 상한 및 거래제(cap-and-trade) 탄소 시장이 가진 장점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배출량 감축 방안을 찾지 못하고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기업들도 배출량 여유가 있거나 공기 중에서 탄소를 빨아들이는 사업을 하는 업체들에게서 허가권을 사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WCaG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배출량을 상쇄할 수 있는 나무를 심도록 장려하는 프로그램이다. 장기간에 걸친 시행 과제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심은 나무에 저장되는 탄소에 대한 최저 가격을 2056년까지 보증해 준다. 이런 제도하에서 나무를 심은 사람이 그 신용도를 판매하려고 하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만약 나무에 저장된 탄소가 정부가 지급하는 가격보다 (배출권과 여유분을 교환하는) 상쇄 시장(offset market)에서 더 높은 가치를 갖게 된다면 정부도 부담을 덜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가 (보증된 가격으로) 돈을 지불해야만 할 것이다. 자연히 정부에게는 상쇄 시장의 탄소 가격을 높게 유지하고자 하는 동기가 부여되는 것이다.
결과는 매력적이지만, 실제로는 작은 규모에서만 실현 가능한 방법이다. WCaG의 전략은 5000만 파운드(756억 2850만 원)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가격을 지탱해 주거나 상승시킬 수 있는 믿을 만한 궁극적인 보증 제도는 결국은 공공적이며 정치적인 지원일 수밖에 없다.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속적인 공적 투자로 결과를 얻어 탄소세 준수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즉, 민간 부문에서 위험하다고 여기는 일을 공공 부문이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탄소 가격 정책으로 벌어들이는 세수를 활용해서 전략을 유지 및 확대하는 데 유리한 정치적 로비 활동을 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역사적으로 탄소세로 벌어들인 세수로 다른 세금을 줄이고자 했다. 이는 워싱턴주의 두 가지 정책 가운데 첫 번째에 숨어 있는 논리다. 여기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세금의 부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줄임으로써 경제에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고, 세금을 내야 하는 가구에게도 보상금을 줄 수 있다. 이렇게 탄소세 수입을 재활용하는 사례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탄소 부담금(carbon levy)이 유일하다. 이들의 탄소 부담금은 세금을 낮추는 데 사용되고, 일부는 각 가정과 정책의 영향을 받는 기업들에게 지원된다. 탄소 부담금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정책이다. 화석 연료 업계의 영향력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2008년 이 제도의 도입 이후 부담금은 상당한 수준으로 인상되었다.
조세 제도를 통한 재활용은 효율적이다.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빅터(David Victor)는 제도를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준다면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세수가 친환경 조치에 쓰이는 지역도 있다. 유럽에서 ETS로 벌어들이는 수입의 대부분도 이런 방식으로 사용된다. 다른 방법으로는 미국의 CLC가 선호하는 방식이 있다. 세수를 시민들에게 “수수료 및 배당금(fee-and-dividend)” 형식으로 직접 되돌려 주는 것이다. 효율성이나 실효성 면에서는 부족할 수 있지만, 매달 지급되는 수표는 유권자에게 아주 훌륭하면서도 확실한 인센티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배당금의 규모를 늘린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탄소 가격이 오를 수 있다는 의미다.
가격 정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범위도 설정해야 한다. ETS가 처음 만들어질 때, EU 집행 위원회에서 이 과정에 깊게 관여했던 요스 델베키(Jos Delbeke)에 따르면 정치인들은 이 정책을 빨리 도입해 시행하고 싶어 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배출량이 많고 모니터하기 쉬운 발전소, 중공업과 같은 산업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가격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ETS는 확대되었다. 현재는 유럽 내의 항공 운항을 포함해 EU 내 전체 배출량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까지 적용되고 있다. EU 집행 위원장인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은 친환경 정책의 일환으로 ETS를 한 단계 더 확대해서 교통, 해상 운송, 건물 난방 부문의 탄소 배출까지 포함해 전체 배출량의 90퍼센트 이상에 적용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는 무역과 관련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서
경제학자들의 유토피아에서 지구상에는 단일한 탄소 시장이 존재하고 있다. 모든 오염원 배출 기업과 여유분을 가진 이들이 이 시장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처지가 다른 국가들이 거래할 때 이익이 가장 크다. (부유한 세계에서는 대부분 탄소를 배출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 반면에 가난한 세계에서는 배출을 줄이는 정책이 더 저렴한 방법이다.) 캠페인 그룹인 환경 보호 기금(Environmental Defence Fund)이 수립한 모델에 따르면 각 지역의 시장에 독자적으로 맡겨 두는 것보다는 파리 기후 협약을 이행하는 것이 전체적인 비용의 79퍼센트를 줄일 수 있다. ETS나 미국 북동부의 주들이 시행하고 있는 온실가스 시책과 같은 기존의 탄소 시장들은 점점 동질화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시장은 보다 효율적일 뿐 아니라, 편법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적다. 정책의 적용 대상이 아닌 업체들과 경쟁하는 불리한 위치에 서고 싶은 기업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정책이 적용되지 않는 지역으로 공장을 이동시키고자 하는 기업들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시나리오가 없는 상황에서는 에너지 집약적이며 무역에 의존하는 기업들은 경쟁을 우려할 것이다. 정부는 기업들이 소위 “국경 탄소 조정(BCA·border carbon adjustment)” 방식이라고 하는 보호 장치의 규제가 적용되지 않는 지역으로 공장을 이동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국경 탄소 조정은 탄소 가격 정책이 없는 국가들에 대한 사실상의 관세 역할을 한다. 이런 제도가 없다면 수입되는 상품에 “내재되는” 방식으로 숨어 있을 탄소 배출량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EU는 ETS 확대의 일환으로 내년에 BCA 방식을 제안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 CLC가 주장하는 수수료 및 배당금 정책에는 수출업자에 대한 면제 조항과 수입품에 대한 탄소 관세 부과 방안이 포함되어 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 바이든은 자신이 주장하는 기후 정책으로 자국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국경 탄소 조정을 약속하고 있다. 최근에 의회에 상정된 두 건의 탄소 가격 정책 입법안은 모두 일종의 BCA를 제안하고 있다.
중공업 생산의 상당수를 외주화한 선진 경제권은 BCA로 상당한 양의 탄소를 잡아내게 될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수입품을 포함한 모든 소비재와 관련된 탄소 배출량은 수출품을 포함해 자국에서 생산하는 모든 활동과 관련된 탄소 배출량보다 15퍼센트가 더 많다. 게다가 BCA는 아직 탄소 가격을 도입하지 않은 나라들에게 관련 정책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수단이 된다. 국경 통관 시 탄소 관련 세금을 다른 나라에 뺏기는 것보다 역내에서 탄소 가격을 부과해서 세수를 늘리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뭔가 더 좋은 게 있을 거야
BCA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만큼 수많은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야기할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물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에 대한 적절한 부담금이 얼마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끔찍할 정도로 복잡할 것이다. 2018년 EU 집행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상적인 BCA는 “각각의 생산자들이 사용한 에너지원의 종류, 그리고 생산국의 기후 정책이 가진 실효성”에 달려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시스템은 “현 단계에서는 관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 유일하게 존재하는 BCA는 이러한 우려를 입증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주 전역에서 배출 상한 및 거래제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있고, 캘리포니아로 수입되는 전기에는 BCA가 적용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전기 수입 기업들은 해당 전기의 발전 원료와 그에 따른 탄소 배출량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전기는 비교적 효율적인 천연가스 발전소에서 생산된 것과 동일하게 취급받게 된다.
이런 시스템은 당연히 불완전하다. 수입된 전기는 천연가스 생산 전기보다 더 많은 오염 물질을 배출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책 기준이 강화된다면, 시스템을 왜곡하려는 시도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더러운 전기를 사용하면서 캘리포니아에는 청정 전기를 수출하는 것이다. 전기를 수입하는 데에도 이러한 왜곡이 발생한다면, 수많은 역외 지역에서 수입되는 수많은 부품들로 만들어지는 물품이 얼마나 많은 복잡한 상황에 얽히게 될지 상상해 보라.
다른 나라가 BCA에 보복할 가능성도 문제다. 국제 무역 과정의 탄소 배출량에 대한 OECD의 데이터를 활용한 《이코노미스트》의 계산에 따르면 유럽으로 들여오는 모든 상품에 대해 톤당 30유로의 BCA를 부과할 경우, 중국에서 오는 수입에는 100억 유로(13조 5005억 원), 미국에서 오는 수입에는 30억 유로(4조 501억 원)의 부담금이 발생하게 된다. 중국에는 2.8퍼센트, 미국에는 1.2퍼센트의 관세와 맞먹는 금액이다. 인도 수입품에는 5.1퍼센트의 관세와 비슷한 수준인 20억 유로(2조 7000억 원)가 부과될 것이다. 세 가지 모두 기존의 평균 관세를 두 배 인상하는 것과 맞먹는 효과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