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종주의 문제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노예제 폐지 후 한 세기 반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을 병들게 하고 있는 불의(injustices)의 만연이다. 다른 하나는 인종적 분열을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하는 우익의 일부 파벌들이다. 전자의 예시는 백인 경찰이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한 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허름한 길모퉁이에서 찾을 수 있다. 후자의 예시는 7월 3일 미국의 위대한 전직 대통령들의 조각상이 새겨진 러시모어산을 배경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인종을 둘러싼 문화 전쟁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인종적 정의를 위한 사회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문제 모두 다뤄야 한다.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과 같은 지도자들은 사회가 기회 균등과 평등권이라는 비전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강력하게 항의하고 끈질기게 논쟁하는 방법을 택했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정당한 분노로 행진했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처럼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여전히 이러한 고전적인 자유주의 이상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대학가에서 위험한 경쟁 상대가 나타났다
(2화 참조). 새로운 접근법은 자유주의의 관념인 진보를 거부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인종으로, 모든 행위는 인종주의적이거나 반인종주의적인 것으로 정의된다. 이 이념은 아직 지배적이지는 않지만 역동적이며, 학계에서 일상의 삶으로 확산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자유주의적 가치를 대신하게 된다면 겁박(intimidation)은 열린 토론을 얼어붙게 만들고, 균열은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해를 입힐 것이다.
이 이념을 뒷받침하는 전제는 옳다. 인종 불평등이 놀랄 만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종에 대한 태도는 개선됐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의 질은 그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2001년에 태어난 흑인 남자아이들 가운데 감옥에 수감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은 3분의 1에 달한다. 백인 남자아이의 경우는 17분의 1에 불과하다. 1968년에 흑인 가구 소득은 백인 가구 소득의 60퍼센트 정도였다. 자산 규모는 보통의 백인 가족의 1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몇 가지 타당한 통찰도 있다. 인종 차별은 부당한 제도와 실천들로 지속된다. 경찰의 치안 유지 과정처럼 부당함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무수하게 많은 작은 비하 발언, 행위, 편견과 같이 더 많은 경우에 불의는 미묘하지만 만연하며 또한 해롭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인종 이념은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튼다. 겁박과 힘으로 이념을 강제로 주입하려 하는 것이다. 이 힘은 설득과 투표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비판하는 이들을 침묵시키고 함께하지 않는 자들을 적대시할 것을 주장하며 특권을 가졌거나 자신의 인종에 충성하지 않는 이들을 배제하는 데서 온다. 누구의 책과 논문이 출판되는지, 누가 채용되는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등 이념의 프리즘으로 모든 것과 모든 이를 바라보는 세계관인 것이다. 이 이념을 따르는 집단은 교육, 문화, 그리고 사회적 유산에 있어 정통에 집착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정책 하나하나, 문단 하나하나에서 완전한 결과의 평등이 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념을 대학 캠퍼스의 과열된 급진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생각을 따르는 정당이 아직 없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이 백인의 특권 철폐를 언급할 때 대다수의 이들은 소수자 포용이나 정의와 같이 타당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관념은 중요하며 대학가의 학술 용어가 언론과 기업으로 확산되면 강력한 주창자들(ideologue)이 생겨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이미 사회에 짐이 되고 있다. 대학에서는 연구 의제가 왜곡되고, 대학 밖에서는 공공연한 망신 주기나 겁박으로 공적 토론이 제한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관념들이 미국의 인종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인종 이념은 유익한 변화를 일으키기에 적절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불평등을 해소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유롭게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통념을 의심할 수 없다면 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 비난당할 두려움 없이 타인과 사회의 관행을 비판할 수 없다면 효율적인 정책을 설계할 수도, 나아가 이를 고쳐 나갈 수도 없다.
새로운 인종 이론은 또 다른 방식으로 사회의 진보를 막는다. 이론에 따르면 인종 차별의 장벽은 폭로되어야만 제거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과정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공론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영원히, 사회 곳곳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막아설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은 그 자체로도 장벽이다.
게다가 인종 이념은 권력과 분열에 집중하는 탓에 우익의 일부가 인종을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할 기회를 더 만들어 낼 뿐이다. 설득이 아닌 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은 연합 형성의 노력을 좌절시킨다. 꼭 필요한 연대 세력들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끌려다니게 된다. 직장, 가정, 학교에서의 모든 교류를 인종적 권력의 프리즘으로 보면, 그 어떤 인종 간의 만남도 순수하게 이해할 수 없다.
새로운 인종 이념은 그릇되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 자유주의는 개혁으로 가는 더 평등하고 더 실현 가능한 경로를 제시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피부색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존엄성과 모든 사람의 법적, 시민적, 도덕적 평등을 주창한다. 논쟁과 토론, 즉 이성과 공감을 통해 진실한 생각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편협과 거짓을 배제하는 논쟁과 토론으로 진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관념의 시장에서 번영하는 자유주의는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새로운 목소리와 경험은 토론을 풍부하게 해준다. 자유주의는 권력에 힘으로 대항하여 폭력적인 정권을 다른 폭정으로 대체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대신 검증된 팩트와 증거로 토론하고, 약자가 강자를 상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유주의는 진보를 위한 이념이다. 이 진보에는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는 것도 포함된다. 그동안 많은 실책이 있었다. 특히 제국주의와 노예 제도를 수용할 논리를 제공한 것을 비롯해 인종에 관한 과오가 있었다. 자유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해 온 250년 동안 인류가 전례 없는 물질적, 과학적, 정치적 성과뿐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 및 정치적 권리의 신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과오의 개선이었다. 인종 불평등 문제에서 이룬 진보도 그 성과의 일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자유주의자들이 노동조합,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를 침몰시키기 위해 힘을 합쳤던 것처럼 말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미국에서도 변화를 도울 수 있다. 약자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경제 정책을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백인들 간 물질적인 격차의 대부분은 완화될 수 있다. 정체성에 기반한 국가를 건설할 필요는 없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 배상금 지급과 같은 정책 역시 필요하지 않다. 피부색이 아닌 빈곤을 통해 대상이 선정되는 인종 중립적인 경제 정책은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 정책은 미국인들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결시킬 수 있다. 현재의 분위기가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전된다면 이 정책들은 정치적으로는 설득력을, 사회적으로는 응집력을 확보할 수 있다.
사회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에 직면했을 때,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의 변화를 도왔다.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개혁, 여성에 대한 참정권 부여가 그 사례다. 오늘날 미국이 이러한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면 정체성 정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불관용, 겁박, 그리고 분열에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 인종주의와 관련한 의미 있는 개혁을 위해서는 자유주의를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