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Liberalism, 미국 좌익의 사상이 아닌 계몽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사상)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도덕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에서 출발한다. 모두에게 부여되는 평등한 권리에 대한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자유 지상주의자들은 이러한 원칙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좌파 자유주의자들에게 평등한 도덕적 가치의 원칙은 개인이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에 대한 권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인종에 관한 한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주창한 가치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토마스 제퍼슨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며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10년 뒤,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은 노예는 일반 시민의 5분의 3만큼 인간성을 갖는다는 문구를 헌법에 포함시켰다. 유럽에서는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노예제를 반대하면서도 해외의 압제적인 제국주의 지배를 지지했다. 뉴욕시립대의 우데이 싱 메타(Uday Singh Mehta)는 1999년에 “자유주의 사상과 자유주의의 역사는 한밤의 바다에서 서로를 지나치는 배들과도 같다”고 평가했다.
자유주의의 실패의 뒤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가? 지금 이 질문은 특히 중요하다. 규범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 살해 사건 이후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시위는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한 인종주의를 규탄했다. 많은 기업들은 직원들의 압박을 받으면서 최고위층을 포함한 사내의 다양성 부족 문제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방송사와 신문사들은 뉴스를 어떻게, 누가 다뤄야 하느냐에 대한 규칙을 다시 쓰고 있다. 사회적 지위와 유산에 대한 갈등도 벌어지고 있다. 인종 차별적이라고 생각되는 발언이나 행위로 직업을 잃거나 공공연하게 망신을 당한 이들을 둘러싼 논쟁도 촉발됐다.
지금은 결정적인 순간이다. 조지 플로이드의 장례식에서 알 샤프튼(Al Sharpton) 목사는 “지금은 조지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당신들의 무릎을 우리의 목에서 치우라’고 말할 때”라고 천명했다. 지난 7월 3일 러시모어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극좌 파시즘”을 규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토론장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논쟁의 한편에는 퇴색된 자유주의가 있다. 다른 쪽에는 오늘의 대학가에서 이에 도전하며 부상하고 있는 반자유주의적 사상들이 있다.
지난 2세기 동안 광범위한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기대 수명, 물질적인 풍요, 빈곤, 문해력, 시민권, 그리고 법의 지배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이것은 계몽적 자유주의자들만의 성과는 아니지만, 자유주의는 번영했고 마르크스주의와 파시즘은 실패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인종,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해서는 기여하지 못했다. 소득, 재산, 교육, 그리고 수감 비율은 인종과 놀랄 만한 수준의 상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공공연한 인종적 적대에 반하는 큰 변화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차별 철폐 측면에서의 성과 부재는 자유주의자들이 모두가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했거나, 아니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건국은 두 개의 인종 차별적 시도에 의존하고 있다. 하나는 거의 250년간 지속된 뒤, 이후 한 세기 가까이 제도화된 백인 우월주의로 이어지고 있는 노예제였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일곱 명의 헌법 제정자 중 존 애덤스(John Adams)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만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었다. 미국 초기 대통령 중 9명이 노예를 소유했다. 계몽주의 이전의 구미 사회에서 노예제가 보편에 가까운 제도이긴 했지만 대서양 노예 무역이 인종 우월주의 관념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대영 제국의 식민주의자들이 세계 각지의 원주민들을 쫓아낼 때의 제국주의다. 많은 18세기의 유럽 자유주의자들이 제국 건설을 비판했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식민 통치가 본국과 식민국 모두에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는 독점과 중상주의의 실패라고 봤고, 대영 제국의 동인도회사를 “약탈자들”이라고 불렀다. 넒은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로 볼 수 있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영국의 식민지들에서 일어난 “터무니없는” 부정을 비난했다. 여기에는 피지배자에 대한 책무를 지지 않는 압제 체제 탓에 일어난 인도에서의 “구조적인 불평등과 억압”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카고대의 제니퍼 피츠(Jennifer Pitts)는 《제국으로의 전환(A Turn to Empire)》에서 19세기 유럽의 가장 저명한 자유주의자들이 “제국적 자유주의”에 끌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프랑스와 영국의 점점 커지는 우월감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양국은 경제적, 기술적 성공에 힘입어 보편적인 도덕적, 문화적 가치를 전파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노예제를 혐오했다. 그는 1863년 미국의 남북 전쟁 중 “나는 완전한 해방 외에는 그 어떠한 합의에도 만족할 수 없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전제 정치는 신민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고 방법이 목적 달성을 통해 정당화되기만 한다면 야만인들을 통치하기에 정당한 정부 형태”라고 썼다(밀은 동인도회사에 35년간 재직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프랑스 제국을 옹호했으며 특히 알제리에 대한 폭력적인 정복과 식민화 역시 지지했다.
언급된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유사하며 진보를 향해 가는 방식도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믿음이 식민지에 총구를 들이대서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로 이어졌다. 이러한 가부장적 간섭주의(paternalism)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통치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회의적 사고의 저항을 받았어야 한다. 밀이 대영 제국의 잔학한 행위들을 비판하긴 했지만 그는 버크가 그랬던 것처럼 책무성을 결여한 체제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보지는 않았다.
자유주의 사상에서 일어난 변화는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들에도 반영되어 있다. 1843년에 창간된 이후 본지는 노예제에 반대해 왔으며 발행 초기에 제국주의를 비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본지는 영국이 중국에서 일으킨 제2차 아편 전쟁, 1857년의 인도 세포이 항쟁에 대한 잔혹한 진압, 그리고 1861년 프랑스의 멕시코 침공을 지지하기도 했다. 당시 기사는 인도인들이 “그들 고유의 미신과 고유의 정념을 억누르기에는 무력하다”고 썼다. 1861년부터 1877년까지 편집장을 지냈던 월터 베이호트(Walter Bagehot)는 영국인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가장 성공적이며, 대부분의 측면에서 최고인 식민지 개척자들”이라고 썼다. 본지가 노예제에 대한 반대를 굽힌 적은 없지만 기괴하게도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 남부가 승리하면 노예제 폐지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20세기 초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이 사회 개혁의 동력으로 성장하면서 《이코노미스트》는 다시 제국에 대한 회의론을 펴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중반에 거대한 자유주의적 전환이 있었다. 노예제의 유산에 대처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의 후손들을 개인뿐 아니라 집단의 구성원으로도 대우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산드라 데이 오코너(Sandra Day O'Connor)는 소수 집단 우대 정책( affirmative action)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철폐되어야 하지만, 사회 내 집단 간의 타당한 기회 균등을 이루기 전까지는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인, 사회학자, 외교관이었던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Daniel Patrick Moynihan)과 철학자이자 법학자였던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g)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소수 집단 우대 정책에 대해 고심해 왔다. 그러나 1971년에 쓰인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진보적 자유주의 저작은 인종에 대해 침묵했다. 존 롤스의 《정의론》의 핵심 사상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 이 베일을 쓰고 각자의 재능, 계급, 성, 그리고 인종에 대해 모르는 상태의 사람들이 공평한 사회의 설계에 대해 사고해 보자는 것이다. 자의적인 요소들을 떼어 내면 사람들은 정의의 원칙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비평가들이 논평했듯 실제 세계가 어떻게 불의에 의해 황폐화되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려 내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뉴욕시립대의 찰스 밀스(Charles Mills) 교수는 이론화된 자유주의가 “사회적 억압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의 롤스 안내서(Cambridge Companion to Rawls)》는 2002년에 출간된 약 600쪽의 책으로 인종을 다룬 챕터나 섹션이 전혀 없다. 밀스는 “학계에서 벌어지는 주요 논쟁에서는 인종주의와 반인종주의 간 투쟁의 근대 세계사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제외했다”고 썼다.
시민권 투쟁 시대의 성과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지속적인 진전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이 싹텄다. 이에 가장 먼저 응답한 이들 중 하나가 1970년대의 하버드대 법학자 데릭 벨(Derrick Bell)이었다. 노예제 폐지주의자이자 노예 출신이었던 프레드릭 더글라스, 사회학자 두 보이스(W.E.B. Du Bois)와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통찰과 프랑스 탈근대주의를 융합한 “비판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이 탄생한 것이다.
비판 인종 이론은 먼저 미국 흑인들의 물질적인 조건들, 그리고 그들이 법정에서 공평한 재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를 개발하는데 집중했다. 그중 하나는 법학자이자 시민권 운동가인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1991년 출간한 중요한 논문에서 정립된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이다. 크렌쇼는 고용 차별 재판에서 흑인 여성이 고용주가 흑인 남성이나 백인 여성에 대해서는 차별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입증하는 것으로는 패소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되어 왔던 자유주의 법 체계가 여성이며 흑인이라는 특수한 교차 지점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크렌쇼의 논문이 발표된 후 30년간, 비판 인종 이론은 교육학, 정치학, 젠더 연구, 역사 등 다양한 학계로 퍼지며 융성했다. 기업의 인사과에서는 이 이론에 등장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백인 특권(white privilege)”이나 “무의식적 편향(unconscious bias)”에 대한 암시는 일반적이다. JP모건체이스, 화이자, 월마트 등 1000개가 넘는 기업의 CEO들은 반인종주의 연대에 동참해 직원을 대상으로 한 무의식적 편향 개선 교육을 약속했다(이러한 프로그램의 효과를 보여 주는 증거는 제한적이다). 저널리즘의 목적이 “객관성”이 아니라 “도덕적 명확성”이라는 주장도 비판 인종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비판 인종 이론이 성장함에 따라, 담론과 권력에 대한 집중이 현실적인 고려를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이론은 비자유주의적으로, 심지어 혁명적으로 변했다.
비판 인종 이론을 하나의 이론으로 결합시키는 철학적인 구조는 불명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이브람 X. 켄디(Ibram X. Kendi)의 《반인종주의자 되기(How To Be An Antiracist)》나 로빈 디안젤로(Robin DiAngelo)의 《백인성의 유약함(White Fragility)》등의 베스트셀러 도서로 간결하게 정리되고 있다.
이런 대중서 성격의 정리 작업에는 자유주의의 사회적, 도덕적 진보 방법에 대한 경멸이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단어들이 어떻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인종주의”는 상대의 피부색을 바탕으로 한 편견이 아니다. 켄디에 따르면 인종은 “근본적으로 권력 정체성”이며 인종주의는 백인을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유지시키는 사회적, 제도적 체계다. 디안젤로가 설명하듯, 그래서 “백인 우월주의”는 스킨헤드족이나 KKK(Ku Klux Klan) 등과 결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 백인의 중심성, 우월성과 연결된다.
어떤 행위에는 생소한 종류의 중요성이 있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일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발언은 중립적일 수 없기 때문에 발화자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발언은 나쁘거나(백인 우월주의를 주창하여 오늘날의 인종 차별적 제도를 옹호하게 되는 것), 좋거나(억압의 피해자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거나 백인 권력을 전복하는 것) 둘 중 하나다. 비판이라고 불리는 전복의 기술은 발언의 의미를 분석하여 그것이 어떻게 “문제적”인지, 인종 차별적인지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발언은 또 다른 의미에서도 생소하게 이해된다. 화자가 무엇을 말할 때, 중요한 것은 화자의 의도가 아니라 청자가 파악하는 의미다. 특권을 가진 인간은 그 시각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백인은 그들이 미치는 해악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반면, 억압당한 이들은 그들 자신의 곤경과 압제자의 세계관에 대한 통찰을 모두 가질 수 있다. 디안젤로는 “백인성이 하나의 입장이라는 말은 백인 정체성의 중요한 점 하나가 자신을 인종 바깥에 있는, 인종과 무관한 ‘단지 인간’인 하나의 개인으로 본다는 의미”라고 썼다.
흑인들도 인종 차별에 관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만약 두 명의 흑인이 한 백인의 발언을 다르게 듣고 그가 인종 차별주의자인지에 대해 다른 의견을 보인다면 어떨까? 비판 인종 이론가들은 사회에 다양한 억압의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법학자인 안젤라 해리스(Angela Harris)는 1990년에 당시의 페미니즘이 마치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의 경험이 같은 것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이성애자 남성인 청자는 인종을 제외한 구조 내에서 지배적인 집단에 속한다. 억압에서 벗어나는 길은 집단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고 힘을 실어 주는 것에 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사회 내에서 인종 차별이 지속되는 진정한 원인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육받아야 한다. 켄디는 “인종주의의 생명은 부인으로 유지되며, 반인종주의는 고백으로 지속된다”고 썼다.
이런 생각들에는 혁명적인 함의가 있다. 우선 인종주의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진보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데릭 벨은 개혁이 백인의 기득권과 부합할 때만 일어난다고 결론 내렸다. 1991년에 그는 “우리가 성공적이라고 칭송하는 엄청난 노력들조차도 일시적인 ‘진보의 봉우리’에 불과할 것이다. 이 짧은 승리는 사회가 백인의 지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적응하게 되면서 무의미해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함의는 좋은 의도를 가진 백인들도 흔히 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색맹’인 백인들은 사회의 구조적인 인종 차별을 부정한다. 디안젤로는 “인종 차별에 대한 백인의 도덕적 반감은 그들 자신이 차별에 공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순응주의자(Integrationist, 흑인 문화와 사회가 백인 사회와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를 일컫는 켄디의 용어)들은 인종주의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흑인의 정체성을 앗아가 버린다. 켄디는 순응주의가 “흑인 문화를 린치”한다고 비난한다.
이것이 자유주의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헬렌 플럭로즈(Helen Pluckrose)와 제임스 린제이(James Lindsay)가 공동 집필한 책 《냉소적인 사상들》은 두 사상 체계(비판 인종 이론과 자유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이유는 저자들이 하나의 “사상”으로 명명하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장애에 대한 탈근대주의 사고는 집단 정체성을 강조하고 개인을 무력화한다는 점이다. 억압을 끝내기 위해서는 정체성 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다른 이유는 고착화한 기득권을 밀어낼 수 있는 것은 권력이라는 사상가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강조는 약자가 승리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승리하더라도 지배적인 집단의 대체에 그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증거, 논쟁, 그리고 법의 지배를 통해 강자에 대항하는 약자를 무장시킨다. 세 번째 논리는 이 사상이 자유주의적 진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토론을 통한 개인의 평등 보장이라는 메커니즘이 없다면, 진보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쉬운 답은 없다
대안은 무엇인가? 비판 인종 이론(또는 적어도 대중서에서 정리한 사상)의 매력은 부분적으로는 이 이론이 불의와 싸우기 위한 방안들을 자신 있게 제안한다는 것이다. 조력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론은 어느 정도 면죄부를 부여한다. 백인이 결코 인종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반인종주의의 대의에 몸과 마음을 바칠 수는 있다.
자유주의에는 이와 같이 단순한 해답이 없다. 옥스퍼드 대학의 마이클 프리든(Michael Freeden)은 자유주의자들이 항상 권력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접근 방식에 문제를 느껴 왔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 정당한 정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판 인종 이론에 대한 자유주의의 응답은 보수적인 무관심, 또는 완전한 부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자신을 비판 인종 이론가이며 자유주의자로 여기는 하버드대 토미 셸비(Tommie Shelby)는 인종 불평등을 시정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역량에 대한 회의론은 “자유주의가 경제 정의에 대한 평등주의적 헌신과 양립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셸비는 롤스의 정의론의 “공정한 기회 균등(fair equality of opportunity)” 원칙은 인종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로의 큰 진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고용 관행과 같은 공적 절차에서 차별을 배제하도록 보장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일한 재능을 갖추고 유사한 노력을 하는 이들이 비슷한 삶의 전망을 갖고 궁극적으로는 과거 인종 차별의 유산을 근절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거대한 프로그램은 주거 분리를 억제하고 학교를 더 평등하게 만들며 세금을 공제해 주는 정책과 관련된다. 또 다른 자유주의자이자 비판 인종 이론가인 밀스에게는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 밀스는 자유주의자들이 “교정적 정의”를 정립하기를 바란다. 이는 인종적 위계의 유산과 차별적 구조를 인식할 수 있는 또 다른 버전의 ‘무지의 베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유주의자들은 과거의 잘못들에 대한 보상을 용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실패에 대한 계산을 요구하게 될 수도 있다.
의도와는 관계없이 평등주의의 분배적 구상에 비관적인 자유 지상주의자들에게 이 문제는 더욱 곤란하다. 그러나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을 비롯한 가장 열성적인 자유 지상주의자들도 재산이 취득된 초기의 조건이 정당할 때만 사적 재산권의 옹호에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한다. 인종적 억압의 유산이 부의 분배에도 나타나는 국가들에서는 명백히 이 원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밀스는 이러한 실패를 교정하는 일이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친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많은 이론가들이 상세한 논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만만치 않다. 지금까지 인종 문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자유주의자들은 실질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의제를 제시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해 있다. 문제는 그들이 해답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