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의 세계
완결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위기와 재난은 변화의 발판이었다. 그것도 더 나은 변화를 위한 발판인 경우가 많았다.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고, 압도적이다. 마치 오래전부터 반복되고 있는 꿈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어떤 면에서는 정말 그렇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퍼지는 지금의 모습은 이미 TV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봤던 장면들이다. 어떤 세계인지 대충은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이러한 조우가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다.

지난 2월까지만 하더라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을 새로운 소식들이 연일 쏟아진다. 며칠이 아니라, 몇 년은 걸려야 일어날 법한 사건들이다. 사람들이 지금 끊임없이 새로운 뉴스를 확인하는 이유는 언론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는 시민 의식 때문이 아니다. 너무나도 많은 뉴스들이 시시각각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건들이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있는 탓에, 얼마나 급격했는지 기억조차 하기 힘들 지경이다.

시간을 몇 주만 뒤로 돌려서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한 달 안에 모든 학교가 문을 닫고, 공개적인 모임은 거의 전부 취소된다. 전 세계 수억 명이 일자리를 잃고, 각국 정부들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서둘러 준비할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부동산 소유주들이 임대료를 받지 못하고, 은행들은 대출금을 상환 받지 못한다. 노숙인들은 호텔에서 무료로 지내고, 정부가 직접 지급하는 기본 소득 실험이 진행될 것이다. 또 대다수 세계인이 강제적 명령이나 권고 사항을 통해 가능한 한 언제나 최소 2미터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에 협조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런 이야기들을 믿었을까?

혼란의 원인은 벌어지는 상황의 규모나 속도만이 아니다. 사실 그동안 민주주의 국가는 빠르게 큰 폭으로 변화할 수 없다는 얘기에 점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많은 국가들이 변하고 있다. 역사를 잠깐 돌이켜 보자. 위기와 재난은 변화의 발판이었다. 그것도 더 나은 변화를 위한 발판인 경우가 많았다. 1918년에 전 세계에서 유행했던 독감은 유럽의 많은 나라가 정부 차원의 의료 서비스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대공황과 2차 세계 대전이 함께 맞물린 위기를 겪으면서, 근대적인 복지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는 사회를 어두운 길로 이끌 수도 있다. 9.11 테러 이후로 시민을 대상으로 한 감시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기한이 없는 새로운 전쟁들을 벌였다. 19년 전에 침공한 아프가니스탄의 주둔 병력을 줄이려는 미국의 시도는 이 글을 쓰는 현재 코로나와 연관된 복잡한 사안들로 답보 상태에 빠졌다. 최근 또 하나의 위기였던 2008년 금융 붕괴 이후, 전 세계의 많은 은행과 금융 기관은 막대한 공공 비용 덕분에 위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반면, 공공 서비스 부문에 대한 정부 지출은 삭감돼야 했다.

위기는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수백 명의 사상가들이 평생 동안 위기의 전개 방식을 연구해 온 이유다. 위기 연구(crisis studies)라고 불리는 이 분야는 위기가 닥칠 때 공동체의 근본적인 현실이 어떻게 발가벗겨지는지를 기록한다.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누가 더 적게 가지고 있는가? 권력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기의 시기가 오면, 무엇이든 이 사회에서 무너진 것은 최소한 무너진 이유가 드러나게 된다. 그 방식은 대체로 뇌리를 떠나지 않는 강력한 이미지나 이야기의 형태인 경우가 많다. 최근 몇 주 동안 쏟아진 코로나 관련 뉴스들은 수많은 사례를 만들었다. 항공사들은 오직 주요 항로 운항 횟수를 지켜 내기 위해 좌석이 텅텅 빈 항공편을 운항하고 있다. 프랑스 경찰이 봉쇄 기간 동안 야외에서 잠을 자는 노숙인들에게 벌금을 부과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뉴욕주의 죄수들은 교도소에서는 쓰지도 못할 손 세정제를 병에 담는 노동의 대가로 1달러도 안 되는 시급을 받고 있다. 손 세정제는 알코올 성분 함유로 교도소 내에서는 사용이 금지돼 있다. 교도소는 비누조차 무료로 제공하지 않는 곳이다. 죄수들은 구내매점에서 직접 비누를 구입해야 한다.

재난과 비상사태가 그저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기만 하지는 않는다. 위기는 정상적인 상태의 구조를 뜯어 내부를 보여 준다. 재난이 열어젖힌 구멍을 통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재난을 연구하는 일부 사상가들은 모든 게 잘못될 가능성에 집중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재난으로 잃어버린 것뿐 아니라 얻을 수 있는 것을 분석하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물론 위기는 모두 다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손실과 이익은 언제나 공존한다. 위기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진입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시민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정부와 감시로 이윤을 얻으려는 기업들에게 판데믹은 활용하기 좋은 위기다.  



비관적인 견해는 위기가 좋지 않았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본다. 재난을 연구하는 사람들, 특히 판데믹을 연구하는 이들은 이번 위기가 제노포비아(이방인 혐오)와 인종 공격을 조장한는 경향이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4세기 유럽에 흑사병이 닥쳤을 때, 수많은 마을과 도시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인을 차단했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폭행하고, 추방하고,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다. 1858년 폭도 집단이 뉴욕 스태튼 섬(Staten Island)의 이민자 격리 병원에 침입해 섬을 떠나라고 요구하면서 병원을 불태웠다. 이들은 병원 인근 주민들이 황열병에 걸릴까 봐 두려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위키피디아(Wikipedia)에는 현재 35개 이상의 국가에서 벌어진 “2019~2020년의 코로나바이러스 판데믹과 관련한 제노포비아 및 인종 차별주의” 관련 사례를 모은 별도의 페이지가 있다. 사례들은 조롱부터 노골적인 폭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완전히 합리적인 세상이라면, 판데믹이 민족·국가 간 협조와 연대가 이어지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의 확대로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화에 뿌리를 둔 재난의 연대기로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의 말이다. 2005년 조류 독감의 위협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던 데이비스의 견해에 따르면, 판데믹은 사람과 물자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큰 타격을 주고, 이윤 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의 완벽한 유형이다. “합리적인 세상이라면, 검사 키트, 마스크, 산소 호흡기와 같은 기본적인 필수 물품에 대한 생산량을 늘렸을 겁니다. 우리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에도 나눠 주기 위해서요. 왜냐하면 세계가 하나가 돼 싸워야 하는 전투잖아요. 하지만 이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녀사냥, 고립주의가 나타납니다. 결국 전 세계에서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오고 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지가 “중국”이라고 낙인찍고, 판데믹을 국경 봉쇄 강화, 망명 신청자 축소의 빌미로 삼으려 했다. 공화당 관계자들을 포함해 여러 연구 조직과 일부 언론까지도 코로나가 중국이 만든 인공적인 생물학 무기(bioweapon)일 가능성을 시사하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중국 관계자들은 코로나 발병이 미군 병사들을 거쳐 중국으로 왔다는 음모론을 밀어붙이고 있다. 유럽에서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 총리가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민이고, 또 하나는 코로나바이러스입니다. 이민과 코로나는 모두 이동에 의해서 퍼지기 때문에, 두 개의 전선 사이에는 논리적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전쟁을 할 때, 우리는 적군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알고 싶어 한다. 위기가 밀려드는 상황에서는 장기적인 피해를 고려하지 못한 채 감시라는 수단을 꺼내들기 쉽다. 《감시 자본주의의 시대(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를 쓴 학자 쇼샤나 주보프(Shoshana Zuboff)는 9.11 테러 이전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개인 정보가 어떻게 사용돼야 하고, 또 어떻게 사용돼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선택권을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주는 방안을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었다. 주보프는 “미국 정부의 관심사는 원래 ‘프라이버시 규정과 권리를 침해하는 기업에 대한 규제 방안’이었다. 하지만 9.11 이후 불과 며칠 사이에 ‘어떻게 하면 기업들을 육성하고 보호해서 정부를 위해 개인 정보를 수집하게 만들 수 있는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시민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정부와 감시로 이윤을 얻으려는 기업들에게 판데믹은 활용하기 좋은 위기다. 더 이상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완벽하다. 현재 중국은 드론을 이용해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색출하고 있다. 그런 사람을 발견하면 드론에 내장된 스피커에서 경찰의 호통이 울려 퍼진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는 모두 사람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주요 통신 기업들로부터 확보한 데이터를 이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정부 첩보 기관이 확진자의 개인 휴대 전화 기록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감염 가능성이 있는 개인을 찾아내고, 머물렀던 장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다수의 대중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Nathalie Lees/The Guardian
모든 감시가 본질적으로 나쁘지는 않다. 새로운 기술은 바이러스에 맞서 싸우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보프는 긴급 조치가 영구적인 제도가 돼 본래의 목적은 상실한 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얽혀 들어오는 상황을 우려한다. 봉쇄 조치가 내려지면서 상당수는 집에서 컴퓨터와 휴대 전화에 들러붙어 있게 됐다. 그 어느 때보다 거대 테크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커진 상태다. 이 기업들의 상당수가 정부가 주도하는 문제 해결의 핵심적인 역할을 자처하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러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판데믹 같은 문제를 처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에는 개인 정보에 대한 권리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채텀하우스(Chatham House)에서 기술과 민주주의의 상호 작용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바수키 샤스트리(Vasuki Shastry) 연구원의 말이다. “일단 시스템의 규모가 커지면, 다시 축소하는 일은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위기) 이후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도 있죠.”

불과 몇 주라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과 헝가리 양국의 총리들은 모두 법원이나 국회의 간섭 없이 사실상 행정 명령으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영국에서는 경찰과 출입국 관리 직원들에게 바이러스 보유가 의심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금해서 검사할 수 있는 권한을 향후 2년 동안 주는 법안이 제출됐다. 코로나가 발병한 이후 미국 법무부는 긴급 상황에서 판사들이 법정 절차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청원을 의회에 제출했다. 사람들이 공식적인 이의 제기 절차 없이 수감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경찰을 지켜봐 왔다면 이 문제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저항의 권리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영국의 시민 단체인 넷폴(Netpol)의 케빈 블로우(Kevin Blowe)의 말이다. “이런 권한은 일단 시행될 당시에는 충분히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고 공공의 안전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목적에도 매우 빠르게 적용될 겁니다.”

2008년 독감이 급격하게 대유행하던 당시 작성된 판데믹에 대한 법률적 대응 보고서를 보면, 미국 시민 자유 연맹(ACLU)의 역사학자 및 의료 윤리학자들로 구성된 팀은 정부가 여전히 범죄자 추적에나 어울리는 사고방식으로 공공 의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한다는 사실을 개탄하고 있었다. 특히 9.11 이후 이런 경향이 다시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팀은 정부의 이런 의심스러운 사고방식이 결국엔 소수 인종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정부와 시민 사이에 불신이라는 쐐기가 박히면 질병과의 싸움은 더 어려워진다. 보고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질병이 아닌 사람들이 적이 되고 만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의 과제는 평상시로 돌아가기 위해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평상시가 이미 재앙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바이러스와 싸워 평상시의 상황을 이전보다 인간적이고 안전하게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위기를 다르게 바라보면서 한 가닥의 희망을 떠올리는 진영도 있다. 이 진영의 사상가들에게는 2008년 금융 위기 당시의 경험이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2008년 위기는 소수가 이득을 챙기고 광범위한 대중이 엄청난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던 패배로 귀결됐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코로나가 정치적 진전을 위한 문을 열 수도 있다고 본다.

“2008년 붕괴의 여파를 입기 전 상태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작가 레베카 솔닛의 얘기다. 솔닛은 다양한 위기와 그 시사점에 대해서 현재 가장 설득력 있는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좌파적 사상으로 여겨지곤 했던 생각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합리적으로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없었던 변화의 여지가 생기고 있어요. 그게 시작입니다.”

솔닛의 주장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코로나가 붕괴 위기를 맞은 현재 정치의 현실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병명을 들어 보기 한참 전에는 예방할 수 있고 치료법을 아는 질병에 걸려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풍요로 넘치는 사회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전문가들은 판데믹을 포함해서 다가올 수 있는 재앙들을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최근 몇 주 동안 각국 정부들이 취했던 극단적인 조치들로, 국가가 얼마나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가 근본적으로는 불법적인 행태로 보일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과감하게 움직일 때, 얼마나 광범위한 영역에서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 드러났다. 칼럼니스트 판카지 미슈라(Pankaj Mishra)가 최근에 이렇게 쓴 글처럼 말이다. “국가는 국가의 근본적 책임이 시민을 보호하는 데 있다는 일반적인 믿음을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보건 의료부터 주거비, 기초 생활비에 이르는 모든 사안에서 주류 정치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랬다. 이 세상에 수많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개입을 확대하는 방향은 현실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가장 많이 언급된 효과적인 해결책은 ‘시장’이었다. 시장은 공공재 같은 구시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윤 창출이라는 욕구로 동기 부여가 된 기업들에게 커다란 역할을 맡긴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각국 정부는 불과 며칠 만에 수조 달러를 썼다. 심지어는 시민들에게 직접 수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제는 실현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 자체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과제는 평상시로 돌아가기 위해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평상시가 이미 재앙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바이러스와 싸워 평상시의 상황을 이전보다 인간적이고 안전하게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레베카 솔닛은 2009년에 펴낸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A Paradise Built in Hell)》에서 비상사태는 단순히 나쁜 상황이 더 악화되는 순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두려움에 떨고, 주변을 의심하며, 자기중심적으로 변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1985년 멕시코시티의 지진부터 2001년의 9.11 테러, 2005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까지 포함하는 여러 재난 사례를 연구한 결과였다. 솔닛은 상실과 고통 속에서 재난이 사람들의 즉흥성, 연대 의식과 결단력, 목적의식과 기쁨의 주머니를 열어젖히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은 재난을 축복하기 위한 내용이 아니다. 재난에 포함된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성이 어떻게 낡은 방식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솔닛에 따르면 오히려 “공식적인” 재난 대응책들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사람들을 재난 해결과 관련한 중요한 부분이 아닌, 관리해야 할 문제의 일부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관리 정책은 단순히 무능의 결과일 수도 있고, 사악한 의도의 결과일 수도 있다. 캐나다 작가인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2007년 펴낸 책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에서 위기의 정치와 관련한 어두운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클라인의 견해에 따르면 재난에는 제1 유형과 제2 유형이 있다. 제1 유형은 지진, 폭풍, 군사적 충돌, 경기 침체 등이다. 제2 유형은 재난과 특정 세력이 권력을 갖게 된 이후에 일어나는 부정적 상황들이다. 가령 특정 세력이 극단적인 경제 개혁을 강행한다거나, 부를 축적하려고 위기 이후의 기회를 모조리 집어삼키는데도, 위기로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클라인은 권력층이 때로는 제2 유형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제1 유형의 재난을 조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했다.

솔닛의 책과는 달리 《쇼크 독트린》은 모든 일들이 끔찍하게 잘못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일상에서 보이는 회복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다. 솔닛은 이런 사실을 빠뜨린 《쇼크 독트린》을 두고 클라인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폐허를 응시하라》와 《쇼크 독트린》은 마치 퍼즐 조각처럼 서로 잘 들어맞는다. 두 책 모두 위기를 필연적 또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라, 위기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두 책 모두 금융 붕괴의 폐허 속에서 정치적인 대화가 형태를 갖춰 나가는 과정에 시의적절하게 기여했다.

2008년 버락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고 며칠 뒤, 그의 수석 참모였던 람 이매뉴얼(Rahm Emanuel)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심각한 위기가 헛되이 버려져서는 안 된다(You never want a serious crisis to go to waste).” 오바마에게 주로 실망을 표했던 현재의 좌파들은 이 말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들은 최근의 위기를 지나오면서 패배했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런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판데믹에 직면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이 정도의 변화가 가능하다면, 1년 뒤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2008년과 현재의 차이는 엄청나다. 지금은 신용 부도 스와프(credit default swap·CDS)나 부채 담보부 증권(collateralised debt obligation·CDO)과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했던 금융 위기 때와 다르다. 코로나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다수의 위기들이 하나로 뒤엉켜서, 절대 지나칠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일들이 즉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인과 부유한 유명인도 감염되고 있다. 바로 우리 친구들과 친인척이 감염되고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타격이 가장 크다. 우리 모두가 정말로 ‘함께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2008년 위기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모두가 함께한다는 것을 피부로 지금은 느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낙관주의자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현재의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여기고, 부와 지위를 위해 서로 경쟁하는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체 이상으로 사회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시장의 논리가 인간 존재의 많은 영역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클라인은 이렇게 말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점들을 연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연결은 각자의 경험을 통해 이뤄진다. 특정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는 살면서 겪어 본 유일한 사상이 자본주의라는 점이 위기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일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위기 관련 논의의 뒤편에서는 기후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클라인과 좌파 성향의 사상가들에게 2008년의 위기가 반복하고 싶지 않은 재난이라면, 기후 변화는 지금도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는, 어쩌면 이미 눈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로 훨씬 커다란 재앙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후 위기 문제와 싸워 이기기를 바라고 있다. 실제로 《쇼크 독트린》을 출간한 지 몇 년 뒤, 클라인의 주된 관심사는 기후 변화가 되었다. 그는 기후 위기를 화석 연료로 폭리를 취하는 이들과 정부 내에서 화석 연료 사용을 조장하는 무리들에 맞서야 하는 복합적인 비상사태로 규정했다.

코로나가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가 직면한 가장 거대한 위기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그러나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기후 변화에 비해 여전히 작은 문제다. 하지만 두 가지의 사안에는 서로 연관된 유사성이 보인다. 두 사안 모두 이례적인 차원의 전 세계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내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오늘 변화를 취해야 할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과학자들이 예측해 온 문제다. 다음 회계 분기의 경제 성장 통계 이외의 지표들을 보지 못하는 정부는 과학자들의 경고를 줄곧 무시했다. 그 결과, 정부는 과감하게 인간 활동의 특정한 영역에서 시장의 논리를 제거하고 공공 부문에 투자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국가적 개입을 일시적인 필요성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기후 재앙으로 가는 여정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람들을 정상 모드에서 비상 모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몇 년 동안 노력해 왔습니다.” 전직 심리학자이며 현재 ‘기후 동원(Climate Mobilization)’이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는 마거릿 클라인 살라몬(Margaret Klein Salamon)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상 모드로 전환한다면, 그리고 자신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안전하기를 원한다면, 정치적으로 가능한 일의 범위는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론이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 입증되는 상황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습니다. 이제 도전 과제는 코로나보다 위험의 차원이 훨씬 더 큰 기후 문제에 대한 비상 모드를 켜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일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두 위기 사이의 비교는 여기까지가 전부다. 기후 변화의 영향이 코로나에 비해 점진적이라는 것은 반박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들이 기후 변화 탓에 이번 달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비상 모드를 활성화하고 유지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 살라몬의 지적처럼 사람들이 기후 비상사태에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매일 나오는 뉴스는 세계의 어떤 나라들이 가장 빠른 속도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정부 지도자들에게 효과적인 정책 입안을 촉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코로나의 경험이 기후 변화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바이러스가 산업 활동과 도로 교통량을 줄이면서 대기 오염은 크게 줄었다. 지난 3월 초 스탠퍼드대의 과학자 마셜 버크(Marshall Burke)는 중국 4개 도시의 대기 오염 데이터를 바탕으로 초미세 먼지(PM2.5)의 농도 변화를 측정했다. PM2.5는 심장과 폐를 공격하는 해로운 오염 물질이다. 버크는 판데믹이 시작된 이후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감소하면서 중국 한 곳에서만 5세 이하의 어린이 최소 1400명과 70세 이상의 장년층 5만 1700명의 생명을 구하는 효과가 나타났다고 추정하고 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은 신선하게 부는 바람과 넓어진 자전거 전용 도로,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돌아온 동네의 경험담을 온라인에서 공유하고 있다. 마치 솔닛의 프로젝트가 디지털로 구현되어 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어려운 재난 속에서도 사람들은 원하면서도 필요하다고 느끼는 미래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들여다보고 있다.

이러한 희망적인 징후와 함께 별로 희망적이지 않은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클라인 《쇼크 독트린》에서 규정한 재난의 유형과 잘 맞는 사례들이다. 제1 유형의 재난이 코로나라면, 제2 유형의 재난은 환경을 지키기에는 미약한 기존의 규정마저도 해체되고 있는 현실이다. 지난 3월 26일 에너지 산업계의 로비로 미국 환경 보호국(EPA)은 판데믹이 노동력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고, “기업들이 판데믹 상황과의 연관성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오염 규제 위반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환경부는 산업 시설에 대한 환경 영향 평가를 보류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산업계의 후원을 받는 단체들은 일회용 비닐 봉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재사용이 가능한 천 소재보다 비닐에 덜 달라붙는다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퍼트리고 있다. 2008년의 위기를 되돌아보면, 당시에도 오염 물질 배출량은 감소했었다. 2010년과 2011년에 급격하게 늘어났지만 말이다.

살라몬은 코로나 위기에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공유된 정서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유된 정서가 판데믹을 늦추는 급격한 조치를 단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서로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주고받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어떻게 지내? 무서워? 나는 무서워. 네가 무사했으면 좋겠고, 우리가 무사했으면 좋겠어.’ 기후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고, 무엇이 두려운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정부가 행동에 나서게 만들 수 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우리가 판데믹 비상 모드로 들어간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기후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살라몬은 말끝을 흐렸다.

 

지금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난 몇 주의 기간 동안 아무리 거대한 무언가도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들의 희망이 실현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 《심각한 위기를 헛되이 버리지 말라(Never Let a Serious Crisis Go to Waste》의 저자인 역사학자 필립 미로우스키(Philip Mirowski)는 현실 안주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좌파들은 금융 위기 이후 경제를 바라보는 특정한 방식이 완전히 무너졌고, 이러한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좌파는 그래서 패한 겁니다.” 그렇다면 코로나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계, 그러니까 바이러스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다른 재앙들은 모두 그대로 진행되는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데이비스는 이런 해법을 내놨다. “전염병의 정치적인 결과는 다른 모든 정치적인 결과들과 마찬가지로 투쟁으로 결정될 겁니다. 무엇이 문제를 일으켰으며 무엇이 문제를 해결했는지 해석을 둘러싼 싸움을 벌여야 결론이 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위기에 대한 분석 결과를 내놓아야 합니다.” 물론 한 가지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 바로 사회적 거리 두기다. 정치 선전이나 거리 시위처럼 오랜 세월에 의해 검증된 많은 전투 방식들을 행하는 데에는 확실히 방해가 되는 조치다. 클라인은 “모두에게 가장 커다란 위험은 집안에 틀어박혀서 소셜 미디어의 피드나 확인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행동”이라며 “그렇게 한다면 할 수 있는 정치 행위들은 극단적으로 제약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데이비스는 시위대가 거리로 나올 방법을 찾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3~4미터씩 떨어져서 거리 행동을 벌인다면 드라마틱한 미디어 이미지가 만들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는 데이비스는 대화를 마무리하며 “오후에 시간을 내서 길거리 모퉁이에 피켓을 들고 서서 내가 가진 책임을 다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피켓에 무엇을 쓸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지만, 이런 문구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간호사 노조를 지지합니다.” 또는 “유급 병가를 요구합니다.”

솔닛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상대를 도울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서 커다란 용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동네 식료품 배달망 구축이나 고령의 이웃을 위해 현관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아이들 같은 상징적인 동참 행위들이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인 알레산드로 델판티(Alessandro Delfanti)는 바이러스 출현 이후에 미국과 유럽의 아마존 물류 창고에서 연달아 벌어지는 파업의 물결과 이탈리아의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안전 유지에 필요한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서로 돕는 행동에서 희망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다음에 일어날 일은 낙관주의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연대의 순간들을 보다 넓은 정치의 영역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문제들을 고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코로나 문제를 다루려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이 공유한 자원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더 많이 쓰이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힘 말이다. “우리는 끔찍함 속에 감춰진 채 다가온 놀라움, 슬픔에 싸인 기쁨, 두려움에 싸인 용기와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언어조차 갖고 있지 않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솔닛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재앙을 환영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이고 심리적인 대응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있다.”

지금 당장의 세계는 끔찍할 정도로 낯설게 느껴진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누군가가 언제든 병에 걸릴 수 있다거나, 이미 바이러스를 갖고 있지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는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난 몇 주의 기간 동안 아무리 거대한 무언가도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불안하면서도 해방감을 주는 이 단순한 진실은 쉽게 잊힐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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