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기반의 주거 커뮤니티는 특정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대안 주거의 큰 흐름이다. 가치 기반으로 설립된 최초의 코리빙 스페이스(co-living space)는 프리워커들이 자연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함께 살고 일하면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설립된 스페인의 선앤컴퍼니(Sun and Co.)다. 세르비아 최초의 공유 주택인 모크린 하우스(Mokrin House)는 관광객을 위한 문화 센터를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코리빙 커뮤니티로 바꾼 사례다. 일과 휴식이 조화를 이루는 코워케이션(coworkation)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밖에 평균 연령 25~30세의 기업가들과 학생들이 모여 사는 영국의 컬렉티브 올드 오크(The Collective Old Oak), 덴마크의 혁신적인 기업가들이 모여 사는 비영리 공유 주택 네스트(The NEST)까지, 모두 공간의 하드웨어가 아닌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이웃’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기준으로 형성됐다.
물성이 아닌 가치로 공간성을 재정의하는 움직임은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의 논스(Nonce)는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밀레니얼들이 모여 사는 가치 기반의 주거 커뮤니티다. 2018년 9월 1호점을 연 뒤 2년 만에 4호점까지 확장해 현재 100명이 넘는 입주자들이 살고 있다. 올해는 200명의 입주자를 목표로 확장 중에 있다. 논스는 주거 환경의 퀄리티(quality)나 가격 대신 ‘사람’을 큐레이션한다고 말한다. 정체성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공간의 가치를 높이는 프롭테크(proptech) 스타트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논스의 목표다. 30개 이상의 서비스를 배출한 혁신가들과 함께 일과 삶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 논스의 하시은 CEO를 만났다.
취향을 넘어 정체성으로
논스를 한 문장으로 소개한다면.
혁신가를 위한 ‘라이프 셰어링 커뮤니티’다. 창업이든 예술이든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함께 일하면서 서로에 의해 안정감을 느끼고 함께 꿈을 이루는 공간이다.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정말 외롭고 고독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함께 모아 커뮤니티를 만든다면, 그 공간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인터페이스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공유 오피스나 공유 하우스가 늘고 있다. 논스만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공간을 구성하는 큐레이션, 바로 사람이다. 코리빙 업체는 가격으로 공간을 큐레이션하지만 논스는 가격 대신 사람으로 큐레이션 한다. 꿈에 대한 잠재력과 삶에 대한 향상심을 가진 평균 연령 20대 중반의 사람들을 큐레이션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피스텔이나 주거 커뮤니티 대신 왜 논스에 입주할까?
퀄리티 타임(quality time)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논스에선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낼 확률이 높다. 음악이 너무 많아지면 좋은 음악을 큐레이션해 주는 서비스의 희소성이 커지듯이 정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말하는 퀄리티 타임은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을 지양하고 원하는 방향성의 대화를 더 나눌 수 있어 결국 입주자들의 시간을 절약해 준다는 개념이다. 논스는 가치 있는 대화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좋은 사람’을 주거 공간에 큐레이션한다.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나?
자기만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스타트업 오너부터 폴 댄스 학원 원장,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패션 기업의 대표, 음악 프로듀서, 게임 개발자, 미국 PGA 프로. 이외에도 정치, 뷰티, 인공지능, VC(venture capital), 모빌리티, 환경, 법조 등 다양한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등학생도 있다.
고등학생도 있나?
기숙사에 살기 싫어서 입주한 분이다. 초기 논스에 입주했던 기업 고객들이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아서 퇴실했던 것처럼 기숙사에선 공부와 삶이 분리되지 않았던 게 큰 이유인 것 같다.
입주자들의 관계는 어떤가?
다른 소셜 살롱의 경우 하나의 관심사로 모인 약한 연대가 일반적이다. 논스도 마찬가지로 약한 연대에서 출발하지만 강한 연대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형성된 강한 연대를 통해 함께 사업을 기획하기도 하고 만난 지 9개월밖에 안 된 룸메이트끼리 포르셰를 공동 구매하기도 한다. 함께 사는 사람끼리 신뢰를 기반으로 물건을 공동 구매하는 건 낯선 일이 아니다. 같이 사는 가족,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들도 그래 왔다.
일터 밖의 만남으로 일과 관련된 기획을 만든다는 게 놀랍다.
논스 입주자들은 상호 보완적인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얻기를 원하는 것 같다. 자유롭게 도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지난 시간 동안 논스 내부에서만 30개의 서비스가 탄생했다. 그렇다고 논스가 24시간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
[3]는 아니다.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친해지는 경우는 드물다. 논스는 창업가들이 긴장을 풀고, 몸을 누이고, 대화를 나누는 마을이지 일을 위한 전쟁터는 아니다. 전쟁은 바깥에서 치르고 안에서는 본인들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영감을 받길 바란다.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오래 모여 살 수 있는 동력은 뭘까?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취향이라는 말로 이해하기엔 부족한 개념이다. 내가 성 소수자이거나 장애인일 경우 그건 취향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우리나라 소셜 커뮤니티를 맵핑(mapping) 해보면 대부분이 취향이나 관심사 기반이다. 정체성 기반의 커뮤니티는 찾기 힘들다. 논스는 취향이 아닌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보다 강한 연대감을 나누며 오랜 시간 함께 살 수 있는 것 같다.
성비가 고른 편이다.
논스도 초기에 9 대 1로 성별의 편중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커뮤니티의 정체성이 정립되면서 성비 균형도 이루어졌다. 성별 편중이 심한 주거 커뮤니티의 통계도 이해가 된다. 보통의 코리빙이 인테리어나 치안을 기준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때문에 당연히 거주 환경에 따라 성비 쏠림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논스는 주거 환경보다는 사람이라는 콘텐츠를 누리기 위해 입주하는 분들이 많아 선택의 기준이 다르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