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아베 신조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가문의 내력은 그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그는 전직 총리의 외손자이자, 전직 외무 장관의 아들이다). 한 명의 정치인으로서, 그는 일본이 직접 써내려 가는 일본의 이야기를 바꿔 보려고 노력했다. “일본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감입니다. 해바라기가 한 여름에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의 얼굴을 들어서 태양을 바라보는 능력 말입니다.” 2012년, 아베가 두 번째로 총리가 되었을 때 한 말이다.
퇴장은 각본대로 되지 않았다. 아베는 만성 내장 질환인 궤양성 대장염을 이유로 지난 8월 28일에 사의를 표명했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가 아닌, 판데믹 와중의 사임이었다. 후임자는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뿐 아니라 다른 문제들도 이어받게 될 것이다.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경제, 인구 감소, 중국의 커져 가는 권리 주장, 그리고 미국의 예측할 수 없는 협력자 등이 대표적인 문제다. 그럼에도 아베는 변화를 일으킨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단지 “잃어버린 수십 년”의 부진을 겪은 경기 침체 시기 이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줬기 때문만은 아니다. 싱크 탱크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미레야 솔리스(Mireya Solís)는 “아베가 이야기의 전개를 바꿨다”고 말한다. 비록 아베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그간 형편없었지만, 사임 이후의 여론 조사에서는 74퍼센트의 일본인들이 아베 정권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아베의 첫 번째 총리 임기는 2006년에 시작되었으나, 1년 남짓의 재임 기간은 건강 문제로 끝이 났었다. 이후 5년간 다섯 명이 일본의 총리 자리를 거쳐 갔다. 아베의 자민당은 그의 외조부가 창당을 도왔던 1955년 이후 두 번째로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아베가 다시 권력에 복귀할 무렵, 그는 자신이 외교 및 안보 정책의 우선 과제들을 추가하는 데 필요한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경제적 아젠다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아베는 우선 국가의 시스템을 중앙 집권화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정치인들에게 관료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내각 인사국을 창설했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설립했다. 그는 총리를 직접 보좌하는 내각 관방(内閣官房)의 규모를 절반 이상 키웠다. 일본에는 1989년부터 2012년까지 16명의 총리가 있었다. 평균 재임 기간은 538일이었다. 아베의 두 번째 총리 재임 기간은 2800일 이상 계속됐다. 당내 세력 균형을 맞추고 공무원 조직을 지휘하는 그의 능력은 국내외에서의 신뢰를 키웠고 장기 집권의 동력이 됐다.
아베가 외국의 지도자들에게 얻은 신임은 일본이 세계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동시에 전후 일본의 번영을 뒷받침해 준 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었다. 그는 농민 단체의 강력한 로비를 제압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거대 무역 기구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가입했다. 미국이 탈퇴한 뒤에도 계속해서 TPP를 장려했다. 유럽 연합(EU)과의 경제 동반자 협정(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에 서명했으며, 미국과는 양자 협정을 체결했다. 아베는 양자 협정과 함께 수많은 골프 회동과 아첨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호감을 얻었다. “아베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문재인이나 메르켈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아베의 전직 자문 위원의 말이다.
아베는 중국도 교묘하게 상대했다. 그가 취임했을 때, 두 나라는 영토 분쟁이 일고 있는 섬들을 놓고 거의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아베는 올해 시진핑 주석의 방일을 희망했으나, 코로나19로 무산됐다. 동시에 그는 주변국들에게 중국에 맞설 것을 독려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이라는 기치 아래, 일본은 아시아에서 항행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주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는 호주와 인도 및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안보 관계를 구축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에 대한 대안으로 일본의 “고품질 인프라”를 조용히 홍보하면서, 일본의 산발적인 원조 프로젝트들을 연계시키는 전략을 만들어 냈다. “외교 정책에서 그런 육감(sixth sense)을 갖고 있는 정치인은 없습니다.” 전직 외교관인 미야케 구니히코(宮家邦彦)의 말이다.
아베는 미국이 전후 일본에게 강제했던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헌법을 재해석했고, 국가 안보 및 기밀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켜 군대의 힘을 강화했다. 이 법률은 일본 “자위대(self defense forces)”의 해외 파병을 가능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전직 아시아 담당 국장이었던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만약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미일 공동 전선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논란이 됐지만, 아베노믹스는 계속해서 유권자들을 기쁘게 했다. 아베는 일본은행의 신임 총재로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를 임명했는데, 그는 금융 완화라는 “바주카포”를 터뜨렸다. 이 조치는 2퍼센트의 물가 상승이라는 목표치를 달성한 적은 없지만, 수년간의 디플레이션을 역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실업률은 수십 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법인세 인하와 엔화 약세는 기업들의 이익을 키웠다. 닛케이 주가 지수는 1990년대 초반에 마지막으로 달성했던 수준을 다시 회복했다.
아베 정부는 기업 지배 구조 규정을 도입했고, 기업 이사회에는 더 많은 사외 이사들이 참여하게 됐다. 초안 작성을 도왔던 니콜라스 베네스(Nicholas Benes)는 이런 변화를 “막을 수 없는 것”이라고 불렀다. 세계 최대 규모인 일본의 후생 연금은 국채보다는 주식에 투자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JPX400이라는 새로운 지수는 좋은 지배 구조와 높은 자기 자본 수익률(RO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기업들이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데 일조했다. “블루칩들 중에서도 가장 블루칩인 기업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투자 은행 골드만삭스(Goldman Sachs)의 캐시 마쓰이(Kathy Matsui)의 말이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또 다른 투자 은행인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는 한 연구 문서에서, 아베의 유산을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의 업적에 비교했다.
아베는 일본의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아베 정부는 육아 휴가와 육아 서비스를 확대했다. 여성의 노동 인구 참여율이 63퍼센트에서 71퍼센트로 상승하면서, 미국보다 높아졌다. 마쓰이는 “아베는 젠더 다양성이라는 개념 전체를 주류로 편입시키면서, (젠더라는 이슈를) 인권이라는 맥락에서 경제 성장의 맥락으로 전환했다”고 말한다. 아베는 또한 더욱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일본 내 이주 노동자들의 숫자는 아베 재임 기간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비평가들은 아베의 경제 정책에 많은 단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전까지, 그의 재임 기간은 외부의 충격에서 대부분 자유로웠다. 가장 큰 위기는 자초한 것이었다. 재정 건전성을 명분으로 삼았던 두 차례의 소비세 인상은 시기가 좋지 않았고, 두 번 모두 경제를 침체로 밀어 넣었다. 그 결과, 아베 정부는 8년이라는 재임 기간 동안 1.1퍼센트라는 미미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약속했던 2퍼센트보다 낮은 수치였다. 많은 기업들은 증가한 수익을 그냥 깔고 앉아 있었다. 여성들은 더 많은 일자리를 얻었지만, 충분히 많은 여성이 승진하지는 못했다.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평균 임금은 하락했다.
소비세 인상에도 불구하고, 공공 부채는 막대한 수준이다. 현재 GDP의 238퍼센트에 달한다. 국채 수익률은 마이너스지만, 시장은 걱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더미는 미래 세대에게는 부담을 줄 수 있다. “사람들은 이게 공짜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보다 많은 세금 또는 더욱 적은 (공공)서비스라는 형태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전직 일본은행 관료의 말이다.
일본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의 수는 인구 대비 적은 편이다. 그러나 국민은 아베의 대처에 불만을 갖고 있다. 중앙 정부는 확산을 억제하는 조치들을 빠르게 취하지 못했고, 도쿄 도지사인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등 지역의 지도자들이 상황을 주도하게 됐다. 일련의 부패 스캔들도 그의 입지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사임 발표 직전 아베 정부 지지율은 34퍼센트로, 재취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사임 발표 연설에서 아베는 헌법을 개정하지도 못 했고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지도 못 했다며 한탄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그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노력보다는 2차 세계 대전이 남긴 유산을 뒤집어 놓으려는 자신의 야망에 더욱 많은 에너지를 투입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후임자는 아마도 오랜 전투를 이어서 치르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영향을 관리하는 것이 첫 번째가 과제가 될 것이다. 올해 2분기 일본 경제는 7.8퍼센트라는 기록적인 수준으로 움츠러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베가 총리에 취임했던 2012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는 기업들의 뒤를 받쳐 주고 소비자들에게 현금을 줬다. 기업 파산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불황이 지속되면서, 고통스러운 구조 조정이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도쿄대의 호시 다케오(星岳雄)는 말한다.
캐시 마쓰이는 일본에 “생산성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행 세법과 노동 시장은 스타트업 창업과 혁신을 억누르고 있다. 정부는 구식 컴퓨터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코로나19 검사 결과를 집계하기 위해 팩스를 사용한다고 해도 일본인들은 놀라지 않았다. “우리는 비효율성과 중복성을 모두 없애야 합니다.” 한 정부 경제 자문 위원의 말이다.
하지만 차기 총리는 외교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은 해양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 서로 대립하고 있다. 아베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여 주었던 인내심을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결코 발휘할 수 없었다. 일본은 2011년의 참사 이후 원자로를 폐쇄하고 석탄 친화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기후 위기 문제에서 뒤처졌다.
자민당은 오는 9월 14일에 당 소속 국회의원과 일부 지역 대표 투표로 차기 총재를 선출한다. 국정 운영의 연속성을 위해 주요 파벌들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 장관을 지지해 왔다. 만약 그가 승리한다면, 내년 9월까지로 예정된 아베의 잔여 임기를 채우게 될 것이다. 그다음에는 전당 대회가 개최될 것이고, 더 많은 후보가 선거에 나설 것이다.
일본 북부 아키타현 시골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가는 (과로로 유명한 이 나라에서도) 근면하다는 명성과 함께 관료들에 대한 장악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향은 아베보다는 덜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더 많은 이민과 보다 자유로운 무역을 지지해 왔다. 2013년에는 아베 총리에게 논란이 많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지 말고 경제에 더욱 집중하라고 충고했다.
스가는 세계 무대 경험이 거의 없다. 그는 일본의 국민이나 자민당의 일반 당원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당내에는 많은 경쟁자들이 있다. 미국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쉴라 스미스(Sheila Smith)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초조해하고 있습니다.” 불길한 것은 장기 집권 총리의 뒤를 이은 총리들은 대체로 재임 기간이 짧고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