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체 감각을 구현한 게임인 스트라이킹 바이퍼스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쉽게 넘나든다. 첫 게임에서 대니는 남성 캐릭터 ‘랜스’를, 칼은 여성 캐릭터 ‘록셰트’를 선택한다. 게임이 진행되는 가운데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엎치락뒤치락하던 중에 대니와 칼이 갑작스레 키스를 하게 된 것이다. 당황한 그들은 게임을 종료하고, 술에 취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이후 게임을 거듭할수록 그들은 격투가 아닌 섹스에 탐닉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니는 이성애자이고, ‘시오’라는 배우자도 있다. 가상 현실에서의 섹스에 중독돼 가는 대니는 점점 시오에게 소원해진다. 결국 그는 이러한 상황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으로 칼에게 게임을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하고 절교한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모르는 배우자 시오는 대니의 생일에 칼을 초대한다. 결국 그들은 다시 스트라이킹 바이퍼스를 통해 섹스를 하게 되고, 결국 칼이 “사랑해”라는 말을 뱉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대니는 칼을 단골 술집으로 부른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현실의 술집 앞에서 키스를 해보지만, 서로 어떤 감정이나 성적 흥분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대니와 칼은 이후에도 스트라이킹 바이퍼스를 통해 섹스에 탐닉하게 된다.
이러한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내용이 흥미로운 이유는 기술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신체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현실의 층위를 벗어나는 새로운 사건을 출현시킬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칼은 현실에서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록셰트라는 여성 캐릭터를 통해 여성의 성적 감각을 완벽하게 체험한다. 그렇다면 칼이 플레이하는 록셰트는 남성인가, 여성인가?
이러한 질문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스트라이킹 바이퍼스〉 속 기술을 통한 감각 체험은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이분법적인 질문 자체를 해체한다. 이항 대립은 수많은 것을 소외시킨다.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선과 악 등 이항 대립의 언어들은 인간의 사유 체계를 점령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러한 구도에 따라 정확히 나눠지지 않는다. 정체성은 유동적이다. 삶과 세계는 끝없이 변화하고, 정체성 또한 이에 맞춰 끝없이 변화할 수 있다.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VR 테크놀로지는 비록 상상적인 것이긴 하나, 기술이 더 발전했을 때 포스트 시네마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보여 준다. 관객에게 다른 존재의 신체를 경험하게 하고, 이를 통해 관습적인 이항 대립의 사고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예상할 수 있듯이, VR 기술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가상에서 일어나고, 가상은 점점 현실을 넘어서는 또 다른 현실이 된다. 가상이 현실을 완전히 넘어서고, 관객이 다양한 기술이 적용된 영화를 통해 다양한 신체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하나의 신체’라는 특권은 사라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만 경험하기 때문에 한정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15] 나는 언제나 나의 관점에서만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한다. ‘나’라는 중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을 바라보고 해석하면 남성이라는 중심을 갖게 된다. 반면 영화는 하나의 중심을 벗어나는 다양한 시공간의 이미지, 사운드를 함께 담아낸다. 수많은 영화들이 프레이밍, 편집 등을 통해 시공간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소환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스크린이라는 평면에서 발생하는 일이었다. 반면 디지털 기술이 적용됐을 때 영화는 관객이 자신의 시각을 벗어난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체험하게 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가 영화를 시지각적 탈중심화에서 감각 체험의 탈중심화로 바꾸는 것이다.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에서 대니와 칼은 현실의 나를 벗어나 타인의 신체를 직접 경험했다. 생물학적 남성이 생물학적 여성의 신체를 고스란히 체험할 수 있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기술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이를 통해 기술이 발전하면 VR 영화의 감각 체험이 단순한 자극의 차원을 넘어설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다른 신체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면 새로운 철학적 질문들이 생겨날 것이다. 가상 현실에서 대니와 칼의 갑작스러운 섹스는 예상할 수 없던 사건이었다. 대니와 칼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고 혼란에 빠져 계속해서 그 사건에 몰두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 자신의 사유로는 지금 눈앞의 사건들을 해명할 수 없는 ‘사유의 무능력’ 상태에 다다른 것이다.[16] 이 상태와 마주해야만 그 무능력을 극복하는 새로운 사유가 탄생할 수 있다.
새로운 사건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만 하는 사유 환경을 만든다.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포스트 시네마 경험이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지와 관계없이, 영화는 달라지고 있으며 관객도 변화하고 있다. 포스트 시네마가 제공하는 감각은 사유의 무능력 상태를 거쳐 새로운 사유를 생산해 낸다. 포스트 시네마는 영화관을 벗어난 곳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게임인가, 영화인가
포스트 시네마는 영화에 대한 여러 가지 미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기존의 영화는 숏, 구도, 편집 등을 통해 이미지 미학을 만들어 냈지만, VR 영화는 이러한 프레이밍을 벗어난다. 관객이 마음대로 세계를 둘러보는, 즉 감독이 제시하는 구도가 무의미해지는 상황[17]에서 VR 영화를 게임, 연극, 뮤지컬 등 다른 예술이나 매체와 구분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터랙티브 영화, VR 영화는 같은 기술을 활용한 게임과 무엇이 다른가?
이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프랑스 영화 이론가 자크 오몽(Jacques Amoun)은 영화가 “이양과 전통의 예술이자, 또한 새로운 예술”[18]로서 모던하다고 말한다. 모호한 정의지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영화는 애초에 홀로 나타난 예술이 아니었다. 사진, 연극, 문학 등의 장르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들 장르로 표현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앞서 언급했던 기술들은 과거와 동시에 첨단의 미래와도 관계하는 영화의 운동성을 증명한다.
‘이것은 게임이고, 이것은 영화다’라는 분류가 필요할까? ‘영화’라는 단일한 뿌리는 없다. 영화는 뉴미디어, 포스트 시네마, 인터랙티브 영화, VR 영화, 고전 영화와 같은 형태로 변화하고 횡단하는 중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영화와 게임의 경계는 흐려졌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정의가 아니라 생성 과정이다. 영화가 등장했다고 해서 사진이나 문학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해 〈스트라이킹 바이퍼스〉 같은 영화가 실제로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진한 멜로드라마가 자아내는 감정에 무감각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자본의 논리에 의해 특정 종류가 시장의 주목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 자체가 서로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테크놀로지는 다양한 계열의 포스트 시네마를 만들어 냈다. 이 영화들은 관객의 신체를 거쳐 새로운 사유를 촉발한다. 물론 테크놀로지와 융합하는 모든 영화들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밴더스내치〉가 설계한 이용자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주어진 답을 원하거나, 능동적인 시스템에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주인공들이 섹스에 집착했던 것처럼 테크놀로지가 선사한 놀라운 신체적 경험을 사유로 연계하는 데에 실패하고 감각적 쾌락에 머물지도 모른다.
〈스트라이킹 바이퍼스〉, 〈레디 플레이어 원〉은 VR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흥미롭게 상상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2018년 부산 국제 영화제는 ‘VR 시어터(theater)’를 운영했다. VR 영화의 스펙터클을 기대한 관객들은 생각보다 소소한 체험을 했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그림 속을 돌아다니거나, 〈기억을 만나다〉(2018, 구범석), 〈베트남의 크리스마스〉(2018, 장범곤) 등의 작품을 통해 헤어지거나 죽은 사람들의 흔적을 좇았다. 이들 영화는 관객을 이색적인 위치로 몰고 가지만, 사실상 심도 있는 신체적 경험까지는 제공하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VR 영화는 아직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수준이다.
영화관이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수용하고, 멀티플렉스로 변모하면서 영화는 킬링 타임(killing time)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롤러코스터를 닮아 가고 있다. 영화관 의자가 흔들리고, 물이 분사되고, 스크린의 풍경이 입체적으로 주변을 둘러싼다. 감각적 쾌락, 혹은 수동적 감상을 비판하는 계몽주의적 발상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다. 그러나 쾌락과 수동성을 온전히 떼어 낸 사유의 영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 감각과 사유는 분리되지 않는다. 포스트 시네마 기술의 잠재성은 감각과 사유가 함께 움직이는 곳에 있다.
포스트 시네마의 테크놀로지는 다양한 감각과 사유 과정을 동원해 관객을 플레이어로 만들고 스스로 영화의 주인이 되도록 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영화가 더 이상 영화관의 전유물이 아님을 절실히 체험하고 있다. 넷플릭스, 왓챠 등 OTT 서비스는 영화의 생존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OTT는 ‘Over The Top’, 즉 셋톱박스(Top)를 넘어서서 사용자가 원하는 때 언제 어디서나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영화가 영화관을 벗어나듯 관객 또한 영화관을 벗어나고 있다.
뉴미디어 이론가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는 영화의 디지털화 현상을 키노 브러시(Kino Brush)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영화가 현장 촬영보다 CG를 통한 후반 작업의 비중을 높여 만들어지는 현상, 즉 영화를 붓질하듯이 그려 내는 과정을 빗댄 말이다. 이를 토대로 포스트 시네마의 미래를 떠올려 보자. 영화는 영화관을 벗어나서 관객의 손안으로 흡수된다. 영화를 그리는 것은 이제 감독과 작가만의 몫이 아니다. 포스트 시네마의 붓은 관객이 함께 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