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의 시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 판데믹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1년 만에 218개 국가에서 환자가 발생했고, 전 세계 확진자 수는 8100만 명, 사망자 수는 177만 명을 넘어섰다. 급격한 확산세로 국가 간 이동이 제한되고, 기업 활동이 멈추고, 학교도 문을 닫았다. 21세기에 이런 경험을 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염병(에피데믹, epidemic)[1]이나 대유행병(판데믹, pandemic)[2]을 겪어 왔다. 그러나 지금처럼 세계가 거의 동시에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은 처음일 것이다. 모든 판데믹이 당시로서는 힘든 상황이었겠지만, 이번 코로나 판데믹이 이전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최근 있었던 에볼라나 사스 등 전염병은 일부 대륙에서만 영향을 미쳤지만 코로나 판데믹은 모든 대륙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고 파장 또한 세계에 미치고 있다. 2020년 1~2분기에는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국가의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1920년대 말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기 침체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2020년 6월 발표한 전망에서 2020년 세계 경제 성장률을 –5.2퍼센트로 예측했다. 특히 거의 모든 국가가 최악의 실업률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분기 이후 산업 활동이나 고용이 악화되는 추세가 조금 둔화되고 있고 일부 국가들이 국경 봉쇄를 풀고 경제 활동을 재개했지만, 겨울 들어 세계적으로 3차 대유행이 시작되고 더욱 강한 전염력을 가진 변이 바이러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이 부분 봉쇄에 들어갔고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스, 네덜란드, 덴마크 등도 다시 봉쇄 조치를 내리고 있다. 판데믹이 한 번 혹은 두 번 유행할 것을 전제로 2021년 후반기에는 본격적인 회복 국면이 시작되고 2022년 말에는 2019년 말 수준으로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OECD의 전망[3]은 3차 대유행이 현실이 되면서 상당 부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행히 백신이 개발되어 일부 국가에서 사용 승인을 받고 접종을 시작했지만, 언제쯤 정상적인 경제 활동이 가능하게 될지 예측하기는 힘들다. 백신 접종 효과, 치료제 개발 시기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판데믹 이후의 상황에 대해 경제 전문가와 분석 기관들은 다양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전망은 향후 2~3년에 대한 단기 전망과 2020년대 후반 이후에 대한 중장기 전망으로 나뉜다. 단기 전망은 주로 당장의 위기 대응과 관련돼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진 개인이나 기업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실업 급여 확대, 가계 자금 혹은 운영 자금 지원, 부채 상환 연기, 금리 인하, 세금 감면 혹은 납부 연기, 국채 발행 등이다. 단기적인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 전망은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한 침체를 벗어나 경기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코로나 이전부터 진행돼 오던 4차 산업혁명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판데믹과 같은 대형 사건 이후 나타나는 뉴 노멀(new normal)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에 관련돼 있다.
경기 침체의 정도가 심각하기 때문에 이를 단기적으로 극복하는 단계와 그 이후 경제를 재건하는 단계에서 해결해야 하는 목표와 그에 대한 접근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단기적으로 해야 할 일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만, 세계 경제가 받은 충격이 극심한 탓에 중장기적으로 글로벌 경제가 전개될 방향을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기도 하다. 그러나 단기적인 처방으로 시행한 정책은 중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므로 정부나 기업은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는 단기 대응에 있어서도 중장기적으로 나타날 결과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코로나 판데믹은 단번에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지만, 그 이전부터 세계를 격랑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몇 가지 거대한 흐름은 이미 본격화되고 있었다. 글로벌 세력의 판도를 지배해 온 국가들의 경쟁력 약화, 중국의 부상, 문화 충돌, 세대․계층․지역 간 소득․교육․기회의 불평등 심화에 따른 마찰 증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한 기후 변화의 책임을 둘러싼 갈등 등이다. 전 세계에 파장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이슈들이 각각, 혹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긴장을 높여 왔다. 코로나19는 이런 이슈들로 커지고 있던 불안을 폭발적으로 키우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코로나 판데믹이 시작되면서 기존에 진행되던 문제들이 상대적으로 잠잠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 일시적으로 묻혀 버렸을 뿐 기존의 불확실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판데믹 와중에도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여전히 격화되고 있다. 판데믹이 종식되거나 전파 속도가 느려져 경제 활동이 본격적으로 재개되는 단계에서는 지금 관심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긴장 요소들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해 당사자 간 충돌은 더 잦아지고 심해질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코로나19가 종식된다고 해도 세계는 판데믹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보다 새로운 ‘뉴 노멀’을 향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발전 속도가 둔화된 적은 있었지만 중단된 적은 한 번도 없었음을 상기하면, 어떤 형태로든 발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위기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는 기회가 되곤 했다. 진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빙하기, 운석 충돌 등 급격한 환경 변화가 생기면 짧은 기간 동안 급속한 종 분화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계기가 있을 때 진화가 급속히 일어난다는 단속평형이론이다. 코로나 판데믹은 이런 급격한 환경 변화에 비견될 수 있다. 판데믹으로 발생한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 상황이 매우 유동적임에도 불구하고, 전개 방향을 예측하고 효과적인 대응 전략을 짜야 하는 이유다. 중장기적인 전망에 대한 고려 없이 단기적인 대응에만 치중할 경우 코로나 판데믹 상황이 종료되고 회복기에 들어섰을 때 체계적으로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장기 전망을 기반으로 실행 가능한 전략을 짜야 한다.
뉴 노멀을 만드는 세 가지 흐름
판데믹 극복 과정은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뉴 노멀을 만드는 과정이 될 것이다.[4] 뉴 노멀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2020년대 후반에서 2030년대 초반이 될 전망이다.[5]
향후 전개될 상황을 예측하고 대응 전략을 짜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 상황을 진단할 필요가 있다. 한두 가지 요인에 의해 변화의 방향이 결정된다기보다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들을 반영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빠른 진전,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국과 중국의 마찰, 코로나로 드러난 세계화의 한계 세 가지가 최근의 주요 글로벌 이슈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흐름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 간 상호 작용의 결과에 따라 새로운 세계 질서의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새로운 질서에서 승자 혹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할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빠르게 진전되는 4차 산업혁명
지금껏 세계화가 진행돼 온 결과 첨단 기술의 확산 속도가 빨라지고, 신기술의 산업화도 가속됐다. 세계인들은 쏟아져 나오는 최고 품질의 혁신 제품들을 저렴한 비용으로 구매하고 이용하는 혜택을 누리게 됐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첨단 기술에 손쉽게 접근하고 최신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세계 어느 곳이든 하루 내에 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사람이나 상품이 거의 제한 없이 활발하게 국경을 넘나들게 되어 이른바 지구촌이 형성되었다. 이런 세계화를 선도해 온 것은 선진국들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세계화는 선진국들이 누려 온 경쟁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화 진행 과정에서 인건비가 낮은 개발 도상국은 선진국의 생산 기지 역할을 해왔다.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 사이 인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선진국의 첨단 기술은 개발 도상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개발 도상국들의 생산 기술 수준이 빠르게 고도화된 결과, 기술 격차는 급격히 좁혀졌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경쟁력을 강화해 글로벌 영향력을 회복해야만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됐다. 생산성을 더 이상 향상시키기 어려워진 3차 산업혁명 체계를 대체할 새로운 생산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전통적인 선진국들은 이른바 인더스트리 4.0 혹은 4차 산업혁명의 이름으로 생산성을 추가로 향상시키고, 혁신적인 생산 체계를 구축한 뒤 운영 체계를 독점하거나 몇몇 국가들과만 공유하고 배타적으로 보호함으로써 경쟁국을 따돌리고 우위를 확보하려 한다.
4차 산업혁명은 코로나 판데믹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급박한 환경 변화로 산업 활동이 둔화 혹은 침체되면서 대부분의 국가는 당분간 기존 체제 내에서 경제 활동을 정상화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4차 산업혁명이 주춤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드러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코로나 판데믹이 4차 산업혁명 추진의 필요성을 각인시켜 주는 기회가 되었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은 실제로 판데믹 대응에 기여했다. 나노 크기 패턴에 구현한 항원․항체 반응 기술을 활용한 신속 진단 검사, 3D 프린팅을 이용한 안면 보호 장구 및 검체 채취 면봉 제작, 인공지능(AI)과 클라우드 컴퓨팅을 이용한 코로나바이러스 유전자 구조 분석, 스마트폰이나 GPS 등 초연결을 이용한 감염 경로 분석 등을 통해서다. 산업 부문에서는 무인 자동화 공장과 같은 비대면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디지털 체계로의 전환이 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자동화는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우려로 생산 현장의 반발이 심해 빠르게 진행하기 어려웠던 분야였다. 그동안 4차 산업혁명의 진행을 암묵적으로 더디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코로나19로 긴박한 상황이 조성됐다. 감염자가 발생할 경우 감염이 확산되고 작업장이 폐쇄될 리스크가 생겼다. 자동화에 대한 반대, 디지털화 추진에 대한 기업 내부의 거부감 등도 많이 줄어들었다.
미국과 중국의 마찰
중국은 2007년 제조업 경쟁력[6] 세계 1위로 부상하면서 100년 이상 세계 1위를 지켜 온 미국을 제치고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중국이 세계 각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온 미국 중심의 교역 환경은 급변했고, 미국이 주도해 온 세계 질서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1960년대 이후 제조업 경쟁력 향상을 등한시해 독일과 일본의 추격으로 경쟁력을 잃게 되면서 제조업 기반을 임금이 싼 해외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이후 제조업의 해외 이전은 더욱 빠르게 진행됐다. 대부분의 생산 기지를 해외에 둠으로써 자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약화된 미국으로서는 값싼 임금을 무기로 제조업을 급속하게 성장시켜 온 중국을 견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국은 파장을 인식하고 2000년 이후부터는 기존의 서비스업 중심 정책을 전환해 제조업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키워 왔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오바마 정부는 2009년부터 수출 확대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제조업 진흥 정책을 추진했다. 첨단 제조업을 집중 지원하고 국내로 회귀하는 기업에 조세 감면 혜택을 부여했다. 정부, 산업계, 대학이 참여하는 제조 혁신을 위한 국가 네트워크(NNMI·National Network for Manufacturing Innovation)를 구축해 첨단 기술 사업화를 촉진하고 고부가 가치 제조업을 육성했다.
지속적인 투자를 한 데다 셰일가스 생산 확대에 따른 에너지 비용 절감, 경쟁국의 임금 상승, 국제 운송비 상승, 지식 재산권 보호 등의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회복되고 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 추진으로 제조업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는 지금이 미국으로서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특히 셰일가스 혁명으로 대외 정책에서 목에 걸린 가시 같았던 에너지 산업 영역에서 큰 짐을 덜게 되었고 중국의 생산성 향상이 둔화되면서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는 이 시점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다.[7] 2021년 트럼프 행정부에서 바이든 행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뒤에도 중국에 대한 견제는 계속해서 강화될 전망이다.
중국의 상황도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빠르게 성장해 온 경제의 성장세는 둔화되고 있다. 임금이 빠르게 상승하고,[8] 외국 자본의 이탈 속도가 빨라지며,[9] 글로벌 미디어 기업인 바이어컴을 비롯해 맥도날드, 휴렛팩커드, 우버, 카디널헬스, 하이네켄 등 외국 기업이 철수헀거나 철수를 추진하는 등 성장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견제도 중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대외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생기는 여러 나라와의 마찰 역시 중국에게는 부담이다. 중국으로서는 4차 산업혁명으로 선진국들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가 구축되기 전에 이런 장애물들을 하루라도 빨리 돌파해야 명실상부한 세계 1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추락하게 될지도 모르는 환경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는 상황에서 2018년 미국이 대중국 관세 등 무역 장벽을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양국 간 통상 마찰은 통상 영역은 물론 지식 재산권 침해를 둘러싼 분쟁, 불법 기술 취득 등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세계 무역 질서를 재편하는 것을 넘어 판도를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일련의 과정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문제다. 특히 지정학적으로 이들과 더 긴밀히 얽힐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직까지 미국과 중국의 각축전을 바라보는 여러 국가들의 전략이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양국 간 갈등이 격화되고 그 영향이 세계로 확산하는 시점이 되면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각축전에 관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고조될수록 선택을 강요받는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다.
세계화의 약점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된 결과, 국가 간 인적, 물적 교류가 확대되고 광범위한 영역에서 상호 의존이 일반화되면서 기술 혁신의 효과를 세계 전체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국지적인 충격이 순식간에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취약한 환경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미 세계는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원인이 된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세계 금융 위기를 통해 세계화의 취약성을 경험한 바 있다.
세계화의 기반 위에 4차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해 가던 와중에 코로나 판데믹이 터져 세계 경제가 순식간에 거의 붕괴되는 혼란에 빠짐으로써 또 한 번 세계화의 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세계화는 종말을 고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세계 도처에 산재되어 있는 지식과 생산 플랫폼을 연결해 최고 성능을 가진 양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던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제조업이 셧다운되면서 글로벌 가치 사슬(GVC·global value chain)은 거의 동시에 붕괴되었다. 국내 자동차 산업도 2020년 1월 중국에서 들여오던 부품 와이어링 하네스[10] 공급이 중단되면서 3만 7000대의 완성차를 생산하지 못해 1조 원 이상의 매출 손실을 경험한 바 있다. 국내에서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한 2월 말에는 마스크 원자재인 멜트블론(Melt Blown) 필터(부직포)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지 않아 ‘마스크 대란’을 겪었다. 중국이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필터 원소재의 수출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멜트블론 필터의 70퍼센트는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수입하던 30퍼센트의 저가 제품이 차단되는 것만으로도 대란이 발생했다. 두 사례는 각각 부품, 소재 차원의 GVC 붕괴다. 첨단 제품 생산과 관련한 GVC의 취약점은 코로나 판데믹 훨씬 전부터 지적되어 왔지만, 마스크와 같은 일반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가치 사슬의 붕괴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와 같은 GVC의 붕괴로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판을 짜고자 했던 선진국마저도 여지없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모든 것을 재설정(reset)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됐다.
각국 산업의 생산을 동시에 중단시킨 GVC의 붕괴는 단순한 가치 사슬의 마비가 아니다. 1차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유지돼 온 원가(가격) 절감 중심의 산업 체계가 붕괴되고 외부 환경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회복력이 강한 새로운 체계의 전환을 시사한다. 가격 대비 성능 극대화에 초점이 맞춰졌던 경제 활동의 방향이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고 추세 자체는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다수지만, 지금까지 누려 온 세계화의 혜택이나 형태는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소프트랜딩에서 하드랜딩으로
선진국들은 21세기 초반 생산성 향상의 한계에 다다른 현재의 첨단 산업을 혁신할 방안을 모색해 왔다. 2011년 독일은 인더스트리 4.0, 2012년 미국은 산업 인터넷IIoT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4차 산업혁명이 완성되면 생산성이 이전보다 30퍼센트 이상 향상될 것으로 기대됨에도 불구하고, 진행 속도는 예상만큼 빠르지 않았다. 디지털 전환에 대한 거부감, 디지털화로 인한 일자리 축소 등을 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는 데다 디지털화에 필요한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참여가 저조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코로나 판데믹은 4차 산업혁명의 환경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전까지는 4차 산업혁명을 선택의 문제로 인식했다면, 판데믹 이후에는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게 됐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경험을 축적해 온 지금까지의 4차 산업혁명 과정을 연착륙(soft landing)이라고 한다면, 디지털 전환이나 자율 운전 기반의 무인 공장 등 지금까지는 빠르게 추진하기 어려웠던 4차 산업혁명의 주요 과제를 단기간에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 코로나 이후의 환경은 경착륙(hard landing)이라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에서 사회적 변화 등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의 해결을 유보한 채 빠르게 진행하게 된다. 판데믹으로 부상한 비대면 경제를 뒷받침하고 침체된 경기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단, 즉 기술이 긴급히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변화가 필요했지만 그동안 사회적, 산업적 여건상 추진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빠르게 진전을 보이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4차 산업혁명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유다. 4차 산업혁명은 코로나 판데믹 이후 GVC가 재편되는 과정, 미국과 중국의 통상 마찰, 경제 블록화, 기후 변화에 대한 글로벌 움직임 등과 맞물리면서 더욱 복잡한 형태로 진행될 전망이다. 첨단 기술을 조기에 산업에 투입하여 경제적 성과를 창출하려는 경향이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하드랜딩’ 과정에서 예기치 못했던 부정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