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기가 유럽 정치권에서 가장 어려운 업무를 맡았다
지난 2월 13일로 75년 역사의 이탈리아 공화국 68대 정부를 이끌게 된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 총리를 시장은 환영하고 있다. 그가 총리 후보 물망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진 순간, 이탈리아 주가는 급등했다. 취임 사흘 후에는 투자자들이 채권(이탈리아 국채) 경매에 몰려들면서 이탈리아의 차입 비용은 대폭 감소했다. 유럽중앙은행(ECB)) 전 총재였던 드라기가 궁지에 몰린 유로화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약속했던 2012년 7월의 무더운 날들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당시 드라기가 한 약속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ECB가 수립했던 채권 매입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자본 시장에 일었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에는 말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판데믹으로 황폐해진 이탈리아는 위기 이전의 국내 총생산(GDP)을 2023년까지도 회복하지 못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코로나19 문제는 수많은 정부들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었던 느린 성장, 낮은 생산성, 그리고 높은 부채 비율이라는 뿌리 깊은 문제들의 정점에 있다. 이탈리아 은행 우니크레딧(UniCredit)의 경제학자 마르코 발리(Marco Valli)는 “모두가 개혁의 우선순위를 알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드라기가 절실한 과제들을 빠르게 해결해 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상황은 드라기에게 불리해 보이기도 한다. 지난 10여 년간 이탈리아에는 6명의 총리가 있었다. 2008년 이후로는 유권자들이 직접 총리를 선출한 적이 없다. 유럽인들이 큰 희망을 품었던 또 다른 비정치인 출신 총리로부터 얻은 명백한 교훈도 있다. 2011년 채권 금리 급등으로 실각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의 후임 총리였던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전 EU 경쟁 담당 집행 위원의 이야기다. 마리오 몬티의 집권은 18개월 만에 끝났고, 그가 추진한 연금 개혁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드라기에게 희망적인 상황도 있다. ECB의 드라기 후임자인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 총재의 채권 매입 활동은 드라기가 이탈리아에서 힘든 개혁을 도모하는 동안 시장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의 유권자들은 과거보다는 덜 예민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기는 매우 높은 지지율로 취임했다. 마리오 몬티는 지출 삭감을 요구하는 강력한 주장에 직면했던 반면, 드라기 정부는 지난여름 EU가 합의한 7500억 유로(1014조 원) 규모의 코로나19 회복 기금 가운데 이탈리아가 쓸 수 있는 지분의 집행을 맡게 되었다. 이는 6년간 2000억 유로(270조 원) 이상의 보조금과 대출액으로 풀려나갈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려면, 2월 12일 드라기가 발표한 구국 정부 내각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드라기 내각은 극좌 정당부터 극우 북부동맹까지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부동맹의 포퓰리스트 리더인 마테오 살비니(Matteo Salvini)는 드라기 내각의 의석을 얻기 위해 그동안 주장해 온 ‘유럽 연합 회의론’을 기꺼이 버렸다. 이는 유로를 구한 ‘슈퍼 마리오’의 흡인력을 드러낸 사례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앞에 놓인 보조금이 가진 힘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드라기가 보조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향후 정국을 좌우하는 핵심이 될 것이다.
드라기는 2월 17일 이탈리아 국정 연설에서 첫 번째 힌트를 주었다. 그는 전임자인 주세페 콘테(Giuseppe Conte) 정부가 입안한 복구 계획을 수정하겠다고 했다. 특히 환경 부문에 회복 기금의 37퍼센트를 반드시 할당하는 방향으로 수정할 것을 약속했다. 최종 계획은 4월 말까지 EU 집행 위원회에 제출되어야 한다. 드라기는 이탈리아가 제안한 투자 프로젝트가 회복 자금이 최종적으로 지출되는 2026년까지 완성될 수 있는지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EU의 순 탄소 배출량이 제로(0)가 되는 2050년을 목표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드라기 내각의 24개 장관직 중 15개는 연정을 구성한 여러 정당의 정치인들에게 돌아가겠지만, 이탈리아의 복구 계획을 실행할 부처는 주로 전문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과학적 지식이나 전문적 기술을 갖춘 관료)들이 이끌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세 사람이 부각되고 있다. 로봇공학과 나노공학을 전공한 물리학자 로베르토 친골라니(Roberto Cingolani)가 생태 전환을 전담하는 수퍼 부처를 담당할 것이다. 전 보다폰(Vodafone) 사장인 비토리오 콜라오(Vittorio Colao)가 디지털, 기술 부문을 총괄하게 된다. 다니엘레 프랑코(Daniele Franco) 신임 재무장관은 이탈리아 중앙은행 출신이다. 이 세 사람 모두 관리자로서의 전문성과 더불어 기술 전문 지식을 갖추고 있다. 마르코 발리는 이와 같은 내각 구성이 “드라기가 측근들에게 복구 기금을 맡기려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평가한다. ECB에서 드라기는 종종 비판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좋은 정책을 실행하는 데 집중하곤 했다.
드라기는 또 국정 연설에서 백신 접종을 가속화하고 소득 세제의 종합적인 정비를 시작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여성 고용을 촉진하고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평가를 받는 남녀 임금 격차를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다른 개혁 분야로는 사법 제도와 공공 행정 부문이 있다. 상당수는 브뤼셀의 EU 위원들을 기쁘게 할 개혁안들이다. 하지만 EU 위원들은 더 긴급한 이탈리아의 대규모 부채 해결 방안보다는 지출 계획에 초점을 맞춘 콘테 총리의 개혁안 초안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회복 기금 계획을 총괄하고 있는 파올로 젠틸로니(Paolo Gentiloni) 유럽 집행 위원은 이탈리아의 총리 출신으로 이탈리아 개혁의 걸림돌을 잘 알고 있다.
수십 년간의 공직 생활(과 골드만삭스에서의 근무) 후, 73세 드라기의 새로운 직업은 민주 정치로의 첫 진출이다. 하지만 ‘테크노크라트’라는 이름표는 시사하는 것만큼 많은 부분을 감추고 있다. 그는 유로화 위기 때 날카로운 정치적 본능을 발휘해 양적 완화의 시작을 비롯한 정책 전환의 토대를 마련했고, 독일연방은행(Bundesbank)의 옌스 바이트만(Jens Weidmann)과 같은 강경파 비판 세력을 압도했다. 독일 보수주의자들은 드라기의 온건성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그가 추진하려는 정책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2019년 드라기는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의 극찬 속에 퇴임하고 독일에서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공로 훈장(Germany’s Order of Merit)을 받았다. 그가 2월 25일 정상 회담에서 (원격으로) 만나게 될 유럽 정상들의 대부분은 그를 알고 있고, 또 존경한다. 한 독일 관료는 “드라기 같은 사람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고 말했다.
이 모든 요소들은 아마도 짧게 끝날 가능성이 높은 드라기 정권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2023년 6월에 선거가 예정되어 있어서다).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는 이탈리아 정치에는 새로운 테스트가 될 것이다. 드라기 내각은 북부연맹과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자 이탈리아(Forza Italia)를 제외한 5성운동, 좌파 정당 세 곳의 대표들을 포함하는 통합 내각이다. 이번 주 의회에서 드라기는 “통합은 선택이 아닌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5성운동 소속 의원들의 4분의 1은 첫 상원 신임 투표에서 드라기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차관 임명과 스키장 폐쇄 문제[1]를 놓고 벌써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갈등은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