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모테나시, 접객의 비밀
1화

프롤로그; 일본 접객의 비밀

2006년 섣달그믐, 필요한 옷가지 몇 벌만 싸들고 빈손으로 도쿄에 첫발을 내디뎠다. 대학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만 가능했던 이방인에게 도쿄는 낯선 땅이었다. 관성에 찌든 회사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 일본 근무를 자원했지만, 낯선 곳에서의 생활도 새로운 방향성을 고민하던 나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직서를 제출한 후 3개월가량 방황하다 자그마한 회사를 차렸다. 한국에서 리테일(소매 유통)과 인터넷 업무를 쭉 했었기에 일본에서도 업계 사정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패션 업계의 EC화율(전체 상품 거래에서 전자상거래가 차지하는 비율)이 1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한국의 EC화율은 10퍼센트에 근접했고, 미국은 15퍼센트를 넘어 포화 시장이라는 얘기까지 나오던 시점이었다. 일본 같은 선진국의 EC화율이 1퍼센트도 안 된다는 사실은 철부지 야심가에게 무모한 창업을 강요할 충분한 이유가 됐다. 시장 성장률만 좇아가도 최소 10배는 성장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장. 30대 중반의 나는 꾸역꾸역 사람과 자금을 모아 일을 시작했다.

동대문에서 물건을 구입해 서양 모델에게 입힌 후 근사한 사진을 찍었다. 혹시 한국 패션이라는 인식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셀럽 패션(celeb fashion·할리우드 스타나 셀럽들이 즐겨 입는 패션을 말하는 신조어)이라는 용어를 앞세우며 일본 통판업체들과 다른 감성을 내세웠다. 그러나 고객은 전혀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한국의 시장 상황과 패션 이커머스에 대한 인식만이 유일한 경험이었던 내게 초반의 실패들은 너무 낯설었다. 여기서부터 앞서 얘기했던 ‘일본 패션 시장의 EC화율이 왜 겨우 1퍼센트에 머무를까?’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혹시 결제 수단이 제한적이지 않을까?’라든지 ‘배송 시스템이 이커머스에 적합하지 않은 것일까?’라는 일반적인 의심부터 했지만, 일찍부터 신용카드는 물론 택배 회사가 물건을 배달하면서 결제를 받는 COD(cash on delivery) 시스템도 있었고, 물건 배달 시간 지정까지 다 되는 섬세한 택배 서비스를 가지고 있던 일본은 그 어떤 것도 당시의 한국에 비교할 바 아니었다. 의문은 계속되었다. 반드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른 이유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다이칸야마(代官山)의 작은 옷 가게에서 얇은 니트를 하나 구입했다. 계산을 하고 점원이 종이 가방에 옷을 넣는데,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종이 가방에 비닐 커버를 씌우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나를 가게 문 앞까지 정중하게 안내한 뒤 입구에서 상냥하게 인사를 하면서 종이 가방을 들려줬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비 오는 데 조심히 가세요.”

한국에서는 받아 볼 수 없었던 종류의 친절이었다. 내가 갔던 곳이 비싼 옷을 파는 부티크도 아니었고 구입한 옷도 몇만 원짜리 평범한 니트 한 장이었다. 낯설기만 한 감동을 한 방 먹고, 우산을 편 후 역까지 걷다 보니 방금 전 가게에서 점원이 내게 한 행동들이 하나둘 생각나기 시작했다.

손님이 자연스럽게 매장 안쪽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입구 쪽에 서 있지 않고 매장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것, 내가 물건을 보는 동안 손님이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도록 가만히 서서 쳐다보지 않고 계속 움직이던 것, 내가 관심 있게 보던 트렌치코트를 옷걸이째로 몸에 대보자 그제야 슬쩍 뒤로 와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라고 한 것. 그러면서 이 트렌치코트는 군복의 원형을 그대로 채용해서 수류탄과 탄띠를 걸던 고리가 장식 요소로 남아 있고, 단추는 플라스틱이 아니라 물소 뿔을 사용해 더욱 가치가 높다고 눈을 반짝이며 상냥하게 얘기해 주던 것. 그 코트에는 이 니트가 잘 어울리고 이음매가 없이 한 번에 짜낸 특별한 공정의 제품인데 너무 좋은 가격에 나왔다며 슬쩍 광고하던 것까지 머릿속에 떠올랐다.

뭐랄까. 패션 센스가 뛰어난 친한 후배가 옷을 골라 주고 있는 느낌이랄까. 매장 전체가 따뜻함과 친근감으로 넘치고 있었다. 게다가 손님에게 해주는 설명은 너무나 적확해 구매 결정에 유용했고, 문밖으로 나서기까지 마음을 담은 듯한 친절은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심지어 그녀는 우리가 흔히 아는 패션모델과 거리가 조금 있는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이었지만 다이칸야마에 어울릴 만한 세련되고 품격 있는 코디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그녀의 조언은 설득력이 넘쳤다.

그 순간 머릿속에 혹시 내가 풀지 못했던 앞선 ‘1퍼센트 수수께끼’의 답이 이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접객”

일반적인 가게의 접객이 이토록 훌륭하다면 인터넷의 건조할 수밖에 없는 친절은 일본인의 감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본인이 필요로 하는 적확한 조언을 맞춤으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라도 가게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게다가 일본은 전국 어디나 전철역을 중심으로 한 생활권을 가지고 있어서 하루에 두 번은 반드시 역을 지나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점포에 대한 접근성도 좋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업계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운영하던 회사의 쇼핑몰도 멋진 사진만을 길게 나열하는 것을 자제하고 히토케(ひとけ·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등신대(等身大)로 친근한 스텝들의 착용 컷과 후기를 올리고, 원단의 특징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는 등의 작업을 추가하자 매출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역 주위 옷 가게 점원들 중 패션을 전공한 전문가들도 많다는 얘기와 함께 일본에서는 패션 전공자가 브랜드에 취직하면 반드시 판매부터 일을 시작하게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패션 전공자는 고객들과 소통하면서 취향도 파악할 수 있고, 고객들을 단골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을 잘 알기에 기꺼이 매장에서 판매 일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경험했던 다른 나라의 몇몇 옷 가게들은 점원들이 필요한 사이즈를 가져다주는 정도의 서비스만 갖추고 있었는데, 일본은 차원이 다른 접객을 통해 고객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비단 패션 업계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차별화된 접객을 통한 일본만의 독특한 리테일 비즈니스 모델들이 생겨났으며 인터넷과 스마트폰, 그리고 인공지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2015년 일본의 한 호텔이 점원의 상당수를 로봇으로 바꾼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호텔의 목표는 사람이 하던 일의 70퍼센트를 자동화해 인건비 30퍼센트를 절약, 궁극의 생산성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실제 프런트나 도어맨, 포터 등의 역할이 로봇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호텔 내부에서는 직원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고 비상시를 대비해 24시간 감시 카메라가 작동된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방금 설명한 호텔과 같은 경우가 일상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매뉴얼화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을 인공지능이 대체하고, 인간들은 기계에 밀려 일자리를 잃어 가고, 국가가 제공하는 기본소득(basic income)으로 연명하게 될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예언이 적중하게 될까. 내가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일본에서 사업을 하며 10여 년간 느낀 것을 생각해 보면 감히 그렇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다.

사업체를 경영하는 사람부터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까지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 따라서 앞으로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많은 분들을 만난다. ‘사람에게 기대하는 접객은 뭘까?’, ‘사람밖에 할 수 없는 접객은 뭘까?’, ‘비효율 덩어리인 인간을 기계 대신 채용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사람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얻는 재미있는 것은 없을까?’, ‘결국 인간은 계속 소외되고 외로워지는데 그걸 사람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을까?’ 같은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당장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차별화된 요소가 무엇일까?’,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지지부진해서 고민인데 참신한 아이디어가 없을까?’, ‘일본은 아직까지 배울 점이 많은 나라인데 뭔가 참고할 만한 내용이 없을까?’ 같은 일반적인 궁금증까지 그들의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필사적이다.

그런 궁금증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 되겠다고 생각해 부족한 경험으로나마 책을 쓰게 되었다. 여러분의 궁금증에 작은 힌트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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