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왜 그래?
3화

의사들은 왜 불친절할까?

의사들의 싸늘함과 공감 능력 부족 그리고 불친절. 언론에서 다루는 종합 병원 외래 진료실이나 응급실 이야기는 하나같이 불쾌한 경험들이다. 그래서 대개 의사의 인성과 교양 부족을 한탄하며 갈무리된다. 몇몇 기자들은 부모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받은 푸대접을 토로하며 지면에 분노를 쏟아 내기도 한다. 사실 의사들의 불친절은 일종의 보편적인 경험으로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심지어 의사 자신들마저 어느 정도는 말이다.

해마다 높아져 가는 의과 대학 입시 커트라인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두뇌에 인성은 결여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클리셰를 강화했다.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 의대 설립에 반대해 집단 휴진까지 있었던 지난해, 당시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료정책연구소가 낸 홍보물 메시지는 이러한 생각을 더욱 고착시켰다. “전교 1등과 공공 의대 출신 의사 중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입시 성적에 따라 선택된 자만이 의사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저질 엘리트주의를 의사 사회 스스로가 증명해 보인 셈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정말 공감 능력과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그리도 불친절하고 오만한 것일까? 이들을 입시 위주 사회에서 엘리트주의에 찌든 적폐로만 규정해야 할까?

 

우리에게 허락된 3분


“좀 앉으세요.” “바로 나갈 건데 뭣 하러 앉아요. 처방이나 빨리 내줘요.” 3분 진료에 익숙해진 것은 의사뿐만이 아니다. 환자도 자신에게 허락된 이 짧은 시간에 적응을 마쳤다. 가끔 두서없이 자신의 증상을 줄줄 늘어놓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뒤에 기다리는 환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눈치껏 빠르게 진료실을 빠져나간다. 심지어 너무 완벽하게 적응해 이제 잠깐 서 있다가 필요한 것만 챙겨 바로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환자 상태를 파악해 처방을 내리기까지 3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환자의 통증 호소나 특별한 요청이 없는 한 진찰을 안 하거나 간단히 끝낼 수 있는 가슴 청진 정도만 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내가 보는 질병은 소화기 암으로 환자들이 대개 배가 아파서 오는 경우가 많다. 복부 진찰을 하려면 환자를 침상에 눕혀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1~2분이 그냥 지나간다. 행동이 느린 노인 환자는 눕는 데만 족히 3~5분이 소요된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바빠진다. 그렇다고 위험해 보이는 증상이 있는데 무심히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상치 않은 증상을 호소하거나 상담이 오래 걸리는 환자들을 살피느라 10분, 20분을 쓰고 나면 그만큼 다른 환자들의 진료 시간은 2분, 1분으로 줄어든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진료는 왜 이렇게 금방 끝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진료가 하염없이 지연되는 사태를 막으려면, 조금이라도 안 좋아 보이는 환자는 응급실로 보내는 것이 상책이다(의사들은 이것을 보통 ‘응급실로 날린다’고 표현한다).[1]

의사가 3분간 해야 하는 일은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것 이외에도 수십 가지에 이르는 항암제와 보조 약제 처방, 검사 처방, 이에 대한 설명 등이 포함한다. 3분 안에 끝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최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환자가 이전에 하고 온 검사를 미리 확인하고, 향후 치료 계획까지 미리 다 정해 놓는 등 전날 밤 ‘예습’을 다 하고 왔음에도 그렇다. 어느 순간 외래 진료실에서의 목표는 ‘가능한 한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그날의 진료를 정시에 마치는 것’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정시에 진료를 마쳐본 적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의사는 왜 이렇게 속전속결로 진료를 해야 할까. 물론 병원, 의사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겠다. 반나절 정도 진료를 보면 평균 40명가량의 환자를 만난다(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이 중 대체로 35명이 재진, 5명이 초진이다. 현재 상급 종합 병원 기준 외래 진료 수가인 재진 1만 5000원, 초진 1만 9500원으로 계산하면 하루 반나절 매출은 62만 2500원이다(환자는 약제 및 검사비도 내지만 그것은 진료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약사와 검사실 기사의 인건비 등 다양한 비용을 고려해야 하므로 제외했다). 만약 하루 종일 진료를 보면 120만 원 정도의 매출이 될 것이다. 진료비 수익이 이 정도면 상당히 많아 보이지만,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외래 진료는 의사 외에도 보통 간호사 두 명이 보조하고, 원무과 직원의 노동과 전산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손 소독제와 마스크, 알콜 솜, 설압자, 진찰용 일회용 장갑, 드레싱 세트 등 소모품 구비도 필수적이다. 아무리 간소한 내과 진료실일지라도 최소한의 진료 도구 마련과 위생 관리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편의점 업계에서는 일 매출 150만 원 미만인 곳을 저매출 점포로 분류한다는데, 물론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나의 외래 진료는 저매출 편의점만큼이나 기본 매출을 못 올리는 상황이다. 만약 여기서 선진국 수준으로 시간당 서너 명을 진료하면서 하루 여덟 시간을 일한다면 하루 매출은 50~60만 원 수준까지 줄어들 것이다. 다시 말해 일단 현재로서는 진료실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많은 환자를 보는 수밖에 없다.

짧고 빠르게 보는 진료의 질이 좋을 리 없다. 물론, 제한된 시간 안에 많은 것을 파악하고 환자에게 필요한 조치를 해주는 것이 의사들에게 요구되는 이른바 실력이다. 하지만 보편적이어야 할 업무 효율의 기준이 초인의 그것이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일의 대상은 물건이 아닌 사람이며, 그 일의 속성은 상대방과 속도를 맞춰야 하는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료실에서 의사들은 환자의 말을 막고 먼저 달려 나가기 바쁘다. 나는 한때 환자의 말을 끊내지 못하는 것으로 고민했던 적이 있다. 물론 상대방이 두서없이 말할 때 이를 적당히 끊고 정리하면서 대화를 유도해 나가는 기술도 필요하다. 그러나 의사들이 환자의 말을 끊는 목적은 대부분 진료 시간을 줄이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적절한 곳에서 끊는 것이 아니라 황급히 틀어막는 것에 가깝다. “어제 외출한 이후부터 허리가 지끈거리며 아프더니 명치까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며 호소하는 환자의 말을 막고 나는 외친다. “잠깐만, 그래서 제일 아픈 곳이 어디죠?”, “엄청 심하게 아픈 게 10점이면 지금은 몇 점이나 돼요?”

 

커뮤니케이션 과외받는 의사들


의사의 진료는 주의 깊은 경청(Attentive listening)과 임상적인 추론(Clinical reasoning)이 동시에 이뤄지는 복잡한 두뇌 활동으로, 쉽게 계량화하거나 평가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것을 계량하고 평가해 근거(evidence)를 만드는 현대 의학에서는 도리어 이 두 가지가 경시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많은 의사의 두뇌는 경청하는 것보다 필요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얻어 빠르게 처방하는 방향으로 세팅되어 있다. 가령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오면 환자 증상과 관련한 서사를 이해하고 추론하기보다, 내 머릿속 엑셀 차트에 통증의 PQRST(Position, Quality, Relieving or aggravating factor, Severity, Timing・통증 관련 병력의 기본 사항으로 각각 통증의 위치, 양상, 완화 요소, 악화 요소, 시간을 의미한다.)를 입력하고 처방 내리는 과정을 반복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외래 진료의 목표는 환자의 건강이 아닌 ‘실수 안 하기’가 되어버렸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속도전에서 처방을 잘못 내리거나 중요한 증상을 놓치는 의료 과실(Medical error)로부터 환자와 나를 지키기만 해도 반은 성공인 실정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국민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의료 서비스에 대한 기대 역시 높아졌고 병원 간 경쟁은 더욱 심화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패밀리 레스토랑 종업원들이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던 그 무렵부터 병원들도 ‘고객 중심의 서비스’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 중 하나인 의료진의 불친절을 개선하기 위해 각 병원은 의료진들의 의사소통 방식을 점검하고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내놓기 시작한다. 그중 하나가 의료진에 대한 고객 만족도 측정과 피드백,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훈련이다. 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19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환자 경험 평가’ 역시 병원 경영진으로 하여금 의료진의 의사소통 방식을 개선하도록 만들어졌다.

의료진이 환자의 말을 존중하는 태도였는지, 경청하고 지지하는 자세를 보였는지 등을 환자가 직접 평가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기 때문에, 병원으로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많은 병원이 내부 의료진에 대한 추천 의향(NPS・Net Promoter Score)을 정기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추천 의향은 경영학의 고객 관리 이론에서 나온 개념으로 0~10점 척도로 사용자가 매기는 점수에 기반한다. 쉽게 말해 “이 상품(병원에서는 의사 및 의료 서비스)을 다른 이에게도 추천하겠느냐”는 질문에 9점 이상의 긍정적인 답변을 한 충성 고객 비중을 측정하는 것이다. 다행히 의사들은 에어컨 수리 기사들이나 콜센터 직원들처럼 이 점수가 낮다고 해서 인사 고과나 연봉상 불이익을 받지는 않는다(개인적으로 서비스 개선 목적이 아닌 개인의 인사 고과에 NPS를 이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을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저임금 노동자에게는 더욱더 말이다). 저조한 추천 의향 성적표를 근거로 의료진에게 정기적인 ‘과외’를 받도록 하는 병원도 있다. 실제 진료 장면을 녹화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에게 일대일로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말하면 아마 놀라서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데 왜, 아직도 병원에 가면 이렇게 기분이 나쁘죠?”

 

친절과 환자 안전의 상관관계


나의 경험으로는 추천 의향이나 커뮤니케이션 과외 자체가 의사의 행동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처음 과외를 받았을 때 들은 말은 “진료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으니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와 앉을 때까지 5초 정도 쉬었다 말하고, 날씨 등 스몰 토크( small talk)로 이야기를 시작하라”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나에게 주어진 180초 가운데 30초 이상은 날아갈 것 같은데 진료는 그럼 언제 하라는 말인가. 이상적으로 들리는 원활한 대화의 ‘꿀팁’을 나도 활용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한 환자당 적어도 10분 이상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말이다. 여유를 갖고 친절하게, 그렇지만 빠른 속도로 진료하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요구받으며 의사는 지쳐갈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면 추천 의향 점수가 몇 점이 나오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싸가지 없는’ 의사소통 스타일을 다시 고수하게 된다.

물론 이런 의사소통 교육 자체가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외래 진료 장면을 녹화해 한 발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나 역시 약간의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아, 이런 말버릇은 고쳐야겠구나’, ‘표정에 신경을 쓰는 게 좋겠다’, ‘내가 생각보다 환자 얼굴을 안 보네’ 같은 것들이다. 빨리 진료하면서도 약간 더 친절해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특히 병원 주도의 친절 교육보다는 정신과 선생님들이 진행하는 진료 면담 기술 교육이 사실은 의료진에게 더 울림이 크다. 환자의 심리를 바탕으로, 의사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져서 환자의 건강 관련 행동을 바꿀 수 있는지 새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적 시간의 영향은 여전히 부정할 수 없다. 시간이 부족하면 마음이 바빠지고, 마음이 바쁘면 남에게 내어 줄 여유가 사라진다.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바꿔 말해 짧은 진료 시간은 단순히 ‘불친절하다’는 부정 평가를 넘어 환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 의하면 짧은 진료 시간은 오진의 위험을 높이고 불필요한 약제 처방, 항생제 남용, 의사소통 장애, 안전사고 증가와 같은 여러 문제를 낳는다.

최소한의 진료 질을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정답은 없다. 각국 진료 시간을 비교한 논문[2]에 따르면 선진국 진료 시간은 대체로 10분 이상이다. 다소 짧은 일본과 영국이 10분, 호주와 미국은 15~20분 정도다. 5분 미만인 국가에는 인도, 중국,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개발 도상국이 주로 포함된다. 눈여겨볼 것은 진료 시간이 대체로 해당 국가의 의료비 지출과 비례한다는 점이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의료비 지출은 국내 총생산 대비 8.2퍼센트로, 2013년의 6.2퍼센트에 비해서는 상당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나, 아직 OECD 회원국 평균인 8.8퍼센트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3]

이제 경제 규모로는 선진국이지만 국민 건강에 대한 투자는 개발 도상국 수준이니, 어쩌면 지금의 짧은 진료 시간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국민들은 기본적인 의학적 필요를 충족하는 것에서 나아가 좀 더 인간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진료 환경을 원한다. 예산을 투입해서라도 기본 진료 시간을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수십 년째 3분 진료를 한탄하고 의사들의 인성을 탓하는 언론 기사만 양산될 뿐 변화가 없을까?

 

적응의 부작용


짧은 진료 시간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의료계가 저수가(低酬價)에 기반한 시스템에 너무나 잘 적응한 이 현실 자체다. 모든 의사가 너 나 할 것 없이 저수가를 비판하지만, 일부는 저수가를 이용한 박리다매 시스템으로 병원을 운영하며 상당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개원 이후 경제적으로 성공한 일부 의사들을 보면, 흔히 해당 지역 환자들을 ‘싹쓸이’했다는 뒷이야기가 돈다. 하루에 환자를 70명, 100명까지 보면서 병원을 일으켜 세웠다는 개원가 자수성가 사례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심지어 의협은 이를 두고 ‘의사들이 효율적으로 일해 생산성을 높인 것’이라고 표현한다. 박리다매 시스템에 대한 암묵적 지지는 의협이 한때 건강보험공단에서 운영했던 ‘차등수가제’에 지속적으로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등수가제는 의사 한 명당 하루 진료 환자 수가 75명이 넘어가면 진찰료를 적게는 10퍼센트에서 많게는 50퍼센트까지 깎는 제도다.

국민건강보험의 재정 건전성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2001년부터 시행됐는데, 의사들로부터 ‘박리다매 진료 환경을 만들어 놓고 보상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다 결국 지난 2015년 폐지됐다. 그러나 단순히 보험 재정을 아낀다는 차원에서 시작되었던 차등수가제는 의도치 않은 고용 촉진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의사 한 명당 진료 환자 수를 적정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 많은 환자를 보는 병・의원들이 추가로 의사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즉, 봉직의로 취업해야 하는 젊은 의사들에게는 비교적 유리한 제도였지만, 의협은 이미 지역에서 기반을 잡은 개원의들의 입김이 더 강해 이 제도를 반대했다. 캐나다의 일부 주에서는 차등수가제와 비슷한 정책인 ‘Daily cap’을 시행하고 있다. 하루 진료 환자 수를 50~65명으로 제한하고 그 이상의 진료에 대해서는 진찰료를 절반으로 깎거나 아예 지급하지 않는다. 환자의 안전과 의사 본인의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설명을 처음 읽었을 때 한편으로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나라는 이런 정책이 있다가도 사라졌고, 그나마도 큰 병원은 면제해 의원급에만 적용했으며, 하필 제도의 취지가 환자의 안전과 의사의 건강이 아닌 국민건강보험의 재정 건전성, 즉 돈을 아끼기 위함이었는지 말이다.

충분한 진료 시간 확보에 걸림돌이 되는 건 누적된 사회 문화적 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아직 미흡하기는 하지만 내가 과외에서 배웠던 약간의 의사소통 팁을 지금의 젊은 의사들은 좀 더 일찍부터 배워 왔다. 의사 국가시험 실기 영역에 환자 면담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현실은 각박하지만, 환자의 권리가 갈수록 강조되고 의사소통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덕분에 의료 현장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의사가 환자에게 반말을 하거나 한 진료실 안에 환자 여럿을 두고 차례로 불러 진료하며 마치 컨베이어벨트처럼 돌리는 일도 예전엔 흔했으나 이제는 드물다. 하지만 지금부터 당장 10분간 환자를 진료하라고 하면 오히려 막막해할 의사가 아마도 꽤 많을 것이다. 3분 진료에 몸과 마음이 너무 익숙해져 막상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도 환자와 멀뚱멀뚱 앉아만 있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어떻게 말해야 환자가 정확히 이해하는지, 어떻게 물어봐야 자신의 증상을 정확히 표현하는지 나를 포함한 많은 의사들이 의외로 잘 모른다. 특히 현재 40대 이상의 의사들은 의대에서 면담 기술을 익힐 기회가 거의 없었던 터라 더욱 그렇다.

이제는 의사 면담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간혹 진료를 받고 약 처방이 없으면 진료비를 돌려 달라 시비를 거는 이들이 있다. 의사의 면담과 진찰은 오로지 약과 시술, 수술 등의 결과물로 나타나야 하고 면담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3분 진료가 일반적인 행태로 자리잡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가 진료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진료의 질이 올라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우리 사회는 의료 서비스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에는 대체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술 분야 창작자들이 재능 기부라는 허울 아래 공짜 노동을 요구받는 일이 허다한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의사의 일


최근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한 유명 뮤직비디오 감독이 의사들에게 들은 말을 소셜 미디어에 올려 화제가 됐다.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 병은 낫는 병이 아니에요.”, “항암 시작하고 좋아진 적 있어요? 그냥 안 좋아지는 증상을 늦추는 것뿐입니다.” 의사들의 말과 태도를 꼬집으며 그들은 왜 그렇게 싸늘하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그동안 내가 환자들에게 보여준 수차례의 싸늘함을 떠올렸다. 나 역시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다. 환자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느냐고,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겠느냐고.

사실 이 경우뿐만 아니라 말기 암 환자와의 의사소통에서는 종종 이런 결과가 발생한다. 환자의 분노를 일으키고 원망을 듣는다. 제한된 시간 안에 어떻게든 정보를 다 전달하려고 하면, 그리고 그 시간 안에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환자를 설득하려다 보면, 싸늘한 의사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치료의 실패나 사망 가능성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고난도 의사소통에 속한다. 환자에게 상황을 충분히 이해시키면서도 그의 슬픔과 분노를 다독이려면 20~30분 이상은 필요하다. 설령 그렇게 한다 해도 욕먹기에 십상인 일이라 누구나 꺼리는 게 당연하다.

개인적으로 몇몇 의사가 토로하는 ‘설명의 의무가 강조되다 보니 이렇게 냉정한 경고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냉정한 경고는 설명의 의무 때문이 아니라 설명할 여건이 안 되거나, 제대로 된 설명을 못하는 현실을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설명에는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듣는 과정 또한 포함된다. 환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그의 눈높이에 맞춰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과 관계없이 단순한 사실 전달만 중요시함으로써 설명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설명할 시간은 없고, 시간이 없으니 환자의 말을 경청할 수 없으며, 경청하지 않으니 환자의 마음을 헤아릴 방법이 없어 환자에게 전달해야 할 사실만 반복해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완치되지 않고 수개월 내 사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인데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환자가 답답하다. 왜 그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 그가 미처 이루지 못한 인생의 과업이 어떤 것인지 듣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희망과 현실 사이의 깊은 골을 남은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메워갈 것인지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대부분 의사의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의사들도 3분 진료가 비인간적이고 저수가의 폐해라고 주장하지만, 어쩌면 그러는 사이 3분 동안 할 수 있는 것만 의사의 진료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문화를 키워 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전에 말기 암 환자에게 심층 진료[4]를 적용해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심층 진료는 초진 환자에게만 적용되고 한 차례 이상 진료를 본 재진 환자는 대상이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진찰료가 초진과 재진으로만 나뉘어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서는 진료 시간에 따라 10분에서 60분까지 다양한 진찰료를 청구하게 되어 있고, 임종을 앞둔 환자 상담은 30분의 사전 돌봄 계획에 따른 진료비를 청구할 수 있다. 환자의 중증도나 필요에 따라 더욱 다양한 진료비 청구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다소 복잡하기는 하겠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마쳐야 한다는 조급증과 이로 인한 의사소통 실패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처음 꺼내었던 ‘친절’이라는 화두로 돌아와 생각해 본다. ‘의사가 좀 더 친절해져야 한다’는 말에 대다수 의사는 불편감을 느낀다. 물론 환자 입장에서 따뜻한 의사의 한마디가 정말 절실한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론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서비스직에 강요되는 감정 노동을 의사에게까지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니와(왜 의사만 예외냐고 묻는다면 모든 서비스직에 감정 노동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다), 앞서 길게 설명했듯 우선 친절할 수 있는 물리적 여건이 보장되지 않는 실정이다. 또한, 친절함도 중요하지만 의사의 일의 본질은 정확히 진단하고 가장 효과적인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대개 의사들 사이에서는 친절한 의사가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환자에게는 친절하지 않아도 수술 실력이 좋거나 임상적 지식이 풍부한 의사를 서로 닮고자 애쓴다.

환자가 친절한 의사를 원할수록 역설적으로 의사들에게 친절이라는 가치는 평가 절하되고 있다. 그 간극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어쩌면 정말 필요한 것은 친절하려는 ‘노오력’보다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환자들에게 친절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닐까. 환자와 의사 모두가 불만이 가득한 우리 의료 시스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1]
간단한 진찰만 할 수 있는 외래 진료실과 달리 응급실은 각종 검사와 치료를 빠르게 할 수 있는 장비와 인력이 있으므로, 응급실에 보내면 담당 의사는 좀 더 안심할 수 있다. 또한, 응급실 입실 이후로는 환자 담당이 응급실 의료진이 되므로 본인이 직접 책임지고 진료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외래 진료 의사가 환자를 응급실로 보내게 되는 요인이다. 그러나 환자 입장에서는 많은 불편이 따르고, 시간을 다투는 위중한 환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응급실의 의료 자원이 낭비되는 문제가 있다.
[4]
3분 진료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진료 시간을 15분으로 연장하되 기존 진찰료의 3~5배 정도인 약 9만 원의 수가를 지급하는 제도. 2017년부터 건강보험공단의 시범 사업으로 진행돼왔다. 시범 사업 평가 후 본사업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2020년 7월 나왔으나 아직 결정된 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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