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진’이라고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묘사되는 풍경은 이렇다. 권위적인 교수, 구름 떼처럼 그 뒤를 쫓는 전공의와 간호사, 이들 앞에서 구경거리라도 된 듯 어색해하는 환자 그리고 짧은 대화 후 바람같이 사라지는 회진 행렬.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나의 경우를 포함한 현실 속 대부분의 회진은 그렇게 많은 인원이 참여하지 않는다(그렇게 다들 교수의 말을 경청하고 있기엔 모두 너무 바쁘다). 다만 의사가 몇 마디 건네고 이내 병실을 떠나는 모습이 환자 입장에서는 꽤나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병동 회진은 의대 교수의 일정 중 우선순위가 가장 뒤로 밀리는 업무다. 보통 하루 중 한나절은 외래 진료를 봐야 하고 남는 시간에는 회의에 참석하거나 다른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내일 볼 외래 환자들의 의료 기록을 확인하고 예습도 해야 한다. 그나마 이것도 수술이나 시술 일정까지 더해지는 외과 계열에 비해 사정이 나은 편인 내과 계열 이야기다. 병동 환자들은 나 말고도 전공의나 전임의가 챙기고 있으니까 짬이 날 때 들르는 게 일반적이다. 외래 진료 시작 전에 후딱 돌거나, 진료를 마치고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얼굴만 겨우 보고 가는 때도 있다. 최근 몇 년간 환자 경험 평가에서 드러나듯, 환자들이 의사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그 의사가 전문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값싼 노동의 이면
회진은 보통 카카오톡으로 시작한다. 우선 전공의와 전임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회진 가능?” 어느 병동에서 만나자 약속을 잡고 해당 인원이 모두 모이면 회진을 돈다. 그러나 “회진 가능?”이라는 글자 앞 숫자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면 생각한다. ‘아, 다른 교수님 회진 돌고 있구나.’ 간신히 만나 회진하는 도중에도 다른 병동이나 부서에서 걸려 오는 연락에 전공의들의 전화는 끊임없이 울린다. 회진 돌던 전공의는 교수 눈치를 본 후 고개를 수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지금 회진 중이라서요, 이따가 다시 연락해 주세요”하고 끊는다. 익숙한 회진 풍경이다.
외래 진료 때보다 그래도 약간의 여유가 있는 나와 달리 전공의들의 입원 환자 진료는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여러 교수의 회진을 챙기는 와중에 종종 터지는 응급 상황에도 대처해야 한다. 또 병동에서 하는 간단한 시술을 하고 오더 입력을 해야 하며, 의무 기록도 작성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검사를 예약하고 회진을 챙기면서 응급 상황에 대처하고…. 이처럼 그들이 대신 치열하게 전쟁을 치러주는 덕분에 마음 놓고 외래 진료를 보며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다. 사실상 온종일 병동에 머물면서 입원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는 전공의들이다.
2020년 8월 전공의 파업 당시, 실로 오랜만에 병동 진료를 맡고 당직까지 서게 됐다. 이미 입원 환자 수는 상당히 줄인 상태였기 때문에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난감했다. 교수들은 전산 오더 입력하는 법부터 새로 배워야 했다. 아무리 간단한 시술일지라도 10~20년간 손을 뗐던 일을 다시 하려니 낯설고 긴장되는 게 사실이었다. 메신저에 쉴새 없이 올라오는 간호사 노티[1]를 확인하고는 이 병동 저 병동으로 뛰어다니며 심폐소생술을 하고 또 사망선고를 내리기도 했다. 내가 전공의였을 때 서던 당직에 비해서는 환자 수가 훨씬 적어 그나마 견딜만한 강도였지만, 언제 콜이 올지 몰라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당직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나이가 드니 예전보다 견디기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십수 년 전 나의 전공의 시절을 까맣게 잊은 가족들은 야간 근무를 마치면 아침에 집에 오는 것인 줄 알고 있다가 낮에 외래 진료까지 마치고 저녁이 돼야 귀가할 수 있다는 소식에 기함했다. 파업 기간이 많이 길어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는데 그때 새삼 느꼈다. 전공의 업무는 ‘1, 2년만 버티면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없으면 정말 버티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전문의 면허 취득이라는 미래를 담보로, 배움을 빙자해 이뤄지는 값싼 노동. 이것이 전공의가 하는 입원 진료다.
전공의 특별법과 PA 간호사
현재 입원 진료 시스템의 문제는 그저 ‘의사가 바쁘게 일해도 늘 환자 대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환자와 의료인 모두의 위험을 초래한다. 24시간 넘게 장시간 연속 근무한 전공의들이 더 많은 의료 사고를 일으켰다는 미국 연구 결과[2]는 환자 안전 문제에 경종을 울렸다. 이에 2016년 국내에서도 전공의 근무 시간을 최대 주 88시간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이른바 ‘전공의 특별법’이 제정,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법 시행 5년이 다 되어가는 현시점에서도 이전 관행은 개선되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 있다. 근무 시간표는 합법이지만 실제 근무 시간은 불법인 실태가 지속되고 있다. 2019년에는 한 전공의가 사실상 주당 100시간 이상 근무하다 과로사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실제로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도 현행법상 근무 요건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 법적으로 주 1회 24시간 휴무를 보장해야 하는데, 휴무인 전공의를 대신해 당직의 한 명이 100명 넘는 입원 환자를 하루 종일 커버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상황이 이러니 휴무여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다. 불안한 마음에 휴일에도 각자 출근해서 일단 본인 담당 환자는 직접 보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인력 보강 없이 법정 근무 시간에만 끼워 맞추다 보니 벌어지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일이 많으면 더 많은 사람이 나눠서 해야 하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그러나 전공의처럼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입원 진료를 담당할 전문의는 없다. 그래서 병원들은 PA(Physician Assistant・진료 보조 인력)라는 직군을 신설해 입원 진료 인력의 공백을 메꾸기 시작했다. PA는 과거 전공의가 하던 일 중 수술 보조, 오더 입력, 의무 기록 관리 등 일부를 맡아서 하는 간호사 직군을 일컫는 말이다. 다만 이들의 업무 범위와 권한에는 법적 근거가 뚜렷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다. 간호사는 법적으로 의사의 지도하에 진료를 보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전문의 지도하에 업무를 수행하는 전공의 일까지 ‘진료 보조’라는 이름으로 대신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전공의 정원 감축과 전공의 특별법 시행으로 값싼 전공의 노동력 이용이 이전만큼 쉽지 않아지자 각 병원은 PA를 늘려서 이에 대응하고 있다.
마치 이가 없으니 잇몸으로 버티는 꼴이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PA 간호사들의 입장에서는 합법과 위법의 경계에서 일하는 불안을 호소하고 있고, 보건의료노조는 의사의 일을 대신하면서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PA 간호사들의 노동 조건 개선과 의사 인력 충원을 요구하고 있다. 잇몸도 염증으로 녹아 무너져 내리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핵심은 PA이건 전공의이건, 값싼 노동에 의존해 유지하는 입원 진료는 이제 더이상 지속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진료 질과 안전에 대한 환자들의 눈높이, 노동 조건에 대한 전공의들의 눈높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에 대한 PA들과 노동조합의 위기의식은 모두 높아졌다. 무엇보다 이 모두는 각자가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권리이기도 하다.
입원 권하는 사회
결국 PA 문제의 원인도 박리다매식 입원 진료의 팽창이다. 우리나라 입원 진료 문제의 시작은 그 양이 너무 많다는 것에 있다.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는 12.4개로 OECD 평균인 4.4개의 약 세 배에 달한다. 평균 재원 일수[3]는 18일로 OECD 평균 8일의 두 배가 넘는다. 인구 고령화로 인해 장기 요양 병상이 늘어난 추세를 고려하더라도 입원 진료량이 과도하게 많다. 병상 수와 평균 재원 일수는 보건 의료 시스템의 효율을 측정하는 지표가 되는데, 입원 의료는 보건 의료 자원이 집중적으로 투입되므로 이를 줄일수록 효율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국민의 건강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는 선에서 입원은 최소화하는 것이 비용 효과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보건 의료비 지출은 OECD 평균보다 낮은 나라에서 입원 병상과 입원 기간은 최상위권이다.
사실 진료를 하다 보면 입원이 왜 많은지 대략 짐작이 가기도 한다. 외래 진료실과 응급실에서 입원 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이들, 병실에서 퇴원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이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은 집에 돌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거나 집에서 상태가 나빠질까 봐 불안하다는 것이 가장 흔한 경우다. 가족이 아파도 간병 휴직을 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한, 비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혹시 가족이 아프더라도 바쁜 경쟁 사회에서 간병에 발목 잡혀 시간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집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잘못될까 싶은 불안감도 크다. 가정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은 구하기도 어렵고 고가이며, 간병인 시장은 주로 병원 위주로 형성되어 있다. 병원은 국가와 지역 사회에서 담당해야 할 복지와 돌봄의 외주 공간이 되어버렸다.
입원해야만 더 큰 보상을 제공하는 실손 보험 구조도 입원을 선호하는 요인이 된다. 특히 고가의 항암제를 투여받는 이들은 1~2시간이면 주사실에서 맞을 수 있는 약이거나 심지어 먹는 약인데도 실손 보험 때문에 입원하기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다. 왜곡된 보험 구조가 낳은 도덕적 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본인이 환자임에도 집에 있으면 가사와 돌봄 노동을 짊어져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입원을 선호하는 여성들도 있다.
결국 한국 사회의 노동, 복지, 성평등과 관련된 여러 구조적인 문제는 입원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이로 인해 병상도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낮은 수가 때문에 적고 값싼 인력으로 많은 병상의 환자를 진료하다 보니 환자들의 불만은 늘어났으며, 전공의 과로와 PA의 불법 노동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입원 전담 전문의 제도가 입원 진료의 질을 높이는 것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입원 진료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의료 서비스 재편이 필요하다. 즉, 병상 수와 재원 일수를 줄이고 입원해서 받아 왔던 의료 서비스를 지역 사회로 옮겨야 한다.
이 방향성에 저항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수술했는데 실밥도 뽑기 전에 퇴원시킨다”, “제대로 밥도 못 먹는데 병원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불만은 낯설지 않다. 병원과 의사가 환자의 건강보다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다며 비난하는 것도 일견 타당해 보인다. 빨리 퇴원시키고 새로운 환자를 받으면 병원 수익이 더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메르스에 이어 코로나19 판데믹을 거치며 우리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개념을 너무나 절실히 학습한 바 있다. 판데믹이 아닌 상황에서도 병원은 기본적으로 감염의 위험이 큰 곳이다. 슈퍼 박테리아로 불리는 내성균[4]의 전파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100퍼센트 막기 어렵다. 또한 의료인 수에 비해 환자 수가 많으면 안전사고 및 의료 과오가 생길 위험도 커진다. 병 고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오는 상황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위험들을 제대로 통제하려면 지금보다 입원 의료에 훨씬 더 많은 돈이 든다.
입원 전담 전문의
입원 진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등장한 대안 중 하나가 입원 전담 전문의 제도다. 이는 종합 병원에서 전공의가 담당하던 입원 진료 즉, 진찰・처방・병동 내 시술・면담 등을 전문의가 담당하는 것으로, 2016년부터 시범적으로 운영해 오다가 2021년부터 건강 보험의 정식 제도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전공의가 아닌 전문의가 입원 진료를 담당하는 것은 여러 장점이 있다. 전공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험이 풍부하기도 하거니와, 전공의처럼 매달 근무지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간호사들과 팀워크를 이뤄 좀 더 안정적으로 병동 진료를 할 수 있다. 특히 전공의가 수술장에서 일하고 있어 무의촌(無醫村)이 되다시피 하는 낮 시간대의 외과 병동에서는 진료 질이 상당 부분 향상될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부터 입원 전담 전문의 제도를 도입한 미국에서는 환자의 입원 기간 및 입원 비용이 감소했고,[5] 우리나라에서도 입원 전담 전문의가 근무하는 외과 병동 내 합병증 발생률과 재입원율이 감소했다고 보고된 바 있다.[6]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도 입원 전담 전문의 제도에 대한 환자와 동료 의료인들의 반응이 대체로 긍정적이다.
병동에서 의사의 설명을 잘 들을 수 있어서 좋다는 환자들의 이야기 외에 가장 먼저 피부로 와닿는 변화는 병동 간호사들의 식사 시간이다. 의사의 오더를 수행하는 간호사는 갑자기 추가 처방이 나거나 퇴원 준비가 늦어지면 이를 처리하느라 제대로 끼니를 때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병동 근무 경험이 많은 전문의가 간호사들의 업무 흐름에 맞춰 제때 일을 처리해 주니 병동 업무가 안정적으로 흘러가고, 덕분에 간호사들이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된다. 환자가 체감하는 실질적인 변화는 물론 전공의들의 당직 부담이 줄고 간호사의 노동 환경이 개선되는 것 역시 입원 전담 전문의 제도가 가지는 큰 장점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원 전담 전문의 제도가 안착하는 데는 여러 걸림돌이 있다. 가장 먼저 직업 전망이다. 지금까지 입원 진료는 전공의 때 1, 2년만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고, 전문의 면허를 따면 외래 환자를 진료하거나 수술이나 시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진로 모델이었다. 최근 들어 입원 전담 전문의도 의대 교수로 채용하겠다는 병원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향후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일이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위험 부담이 있다. 그래서 아직은 이 일을 하겠다고 하는 의사가 많지 않아 구인에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적인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입원 전담 전문의 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재정적 뒷받침이 필수다. 다시 말해 건강 보험으로부터 별도의 수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긴 논의 끝에 결국 2021년부터 하루당 1만 5000원에서 4만 4000원 정도가 수가로 책정됐다. 보통 환자 부담금은 수가의 20퍼센트인 점을 고려했을 때 입원 전담 전문의 제도가 도입되면 환자당 하루에 적게는 3000원에서 많게는 9000원 정도가 추가 부담되는 셈이다. 종래의 입원료에는 의사와 간호사 업무, 병동 관리에 대한 비용이 포함돼 있다. 환자는 6인실 기준 하루 1만 원 전후, 2인실 기준 6만 원에서 9만 원 가량 본인 부담금을 지불하는데, 입원 전담 전문의가 도입되면 여기에 몇천 원이 추가로 발생하는 것이다. 돈을 내야 하는 환자 입장에서는 이 제도의 확실한 이익이 없는 한 반길만한 일은 아닌 셈이다. 입원 전담 전문의 수가를 신설하는 것에 근로자, 자영업자, 기업 등 건강 보험 가입자 단체 등이 처음에 반대했던 것도 놀랍지 않은 이유다. 최근 비정상적인 택배 요금을 올리기 위해 수많은 택배 노동자들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처럼, 한번 낮게 형성된 가격은 올리기가 쉽지 않다. 입원 진료의 가격을 올리도록 건강 보험 가입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앞으로도 풀기 어려운 과제다.
돌봄의 위기
입원 진료 시스템 문제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돌봄의 부재라는 종착역에 다다른다. 환자를 돌볼 여유가 없고 간병인도 구하기 어려운 가족들은 병원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나마 24시간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인 입원 병실도 전공의, 간호사, PA들이 고된 노동의 부담을 떠맡아 ‘지속되기 어려운 노동 환경’이라는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언젠가 늙거나 병들어 취약하게 될 우리 모두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입원했는데 왜 의사 코빼기도 볼 수 없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했지만, 우리나라 입원 진료의 문제는 생각보다 그 뿌리가 깊다. 결국 돌봄의 위기라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인류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아서 클라인먼(Arthur Michael Kleinman)은 “돌봄은 우리를 사회적 존재가 되게 하고 우리의 집단적 존재감을 유지시켜 주고 강하게 하는” 것임에도 “정치적 힘, 경제적 힘, 관료주의의 기습, 기술의 침범이 병원과 지역 사회에서 돌봄을 몰아내고 있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간병인, 간호사, 교사 등의 돌봄 노동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는 말이다. 그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돌봄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름 아닌 “환자와의 신뢰, 환자와 친밀한 관계, 환자가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환자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관심 갖는 일”로, 진료 행위에서의 핵심인 돌봄이다. 회진 때 의사를 보기 힘들다는 불만 역시 진료에서 돌봄이 빠졌다는 것을 알려 주는 신호가 아닌가. 물론 의사들 스스로 바뀌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다. 보다 환자 중심적으로, 의사소통을 중요시하는 진료 패턴으로 옮겨가야 한다. 다만 진료에서의 돌봄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의 돌봄 역시 복원될 필요가 있다. 병원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돌봄의 짐을 사회가 함께 나누어 가 주면 좋겠다. 아무리 먼 길일지라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