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ctor〉는 1891년 영국 화가 루크 필데스(Samuel Luke Fildes)가 그린 유화로, 런던 대표 갤러리 중 하나인 테이트 모던(Tate Modern Museum)에 전시될 만큼 유명 작품이다. 그림 한가운데는 위독한 상태의 아이가 누워있고, 그 왼쪽에 의사가 턱을 괴고 앉아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오른쪽 뒤편으로 초조해하는 아버지와 절망에 엎드려 울먹이는 어머니가 있으며, 그들 옆으로 난 창문으로 미약한 새벽빛이 드리워져 이들이 밤샌 상태임을 짐작게 한다.
필데스는 장티푸스로 죽어가던 자신의 어린 아들을 왕진한 의사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이 작품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다. 환자와 가족이 느끼는 고통, 슬픔을 직면하면서도 묵묵히 그 곁을 지키는 의사의 책임감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환자들이 진료받기를 원하는, 그리고 많은 의사가 닮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 이 그림 안에 있다.
1949년, 미국 의사협회는 트루먼 대통령이 추진하던 전 국민 의료 보험 도입에 반대하며 캠페인을 펼쳤는데, 그때 이 그림을 “Keep politics out of this picture(이 그림에서 정치를 몰아냅시다)”라는 구호와 함께 사용했다. 결국 전 국민에게 공적 의료 보험을 제공하겠다는 트루먼의 정책에는 공산주의 딱지가 붙게 됐다. 매카시즘(McCarthyism)[1]이 기승부리던 시대상을 고려하면, 전 국민 의료 보험 도입이 입법에 실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념 논쟁을 차치하더라도 국가가 의료 시스템에 개입하려는 시도를 당시에 얼마나 불온한 일로 여겼는지 미국 의사협회가 꺼내든 이 그림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삶의 비극과 고통을 나누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사와 환자 관계에 정책이나 보험, 세금 같은 말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저런 의사가 어딨어?”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먼저이지 않을까. 국내에서는 왕진이 일반적이지 않을뿐더러, 환자의 마지막 순간을 바로 옆에서 지키는 의사의 모습은 병원에서도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환자의 임종을 확인한 간호사가 연락하면 의사는 한참이 지나서야 헐레벌떡 달려와 울부짖는 가족들 사이에서 사망 선고를 하고 이내 어디론가 바삐 떠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민들은 의료 행위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더 쉽게 용인했을지 모른다. 의사와 맺는 유대감은 낮고 불만은 높기 때문이다. 국가가 나서 개입해야 저 오만하고 냉담한 의사들의 태도가 바뀌리라 여기는 이들이 많았을 테니까.
이제까지의 글을 통해 나는 우리나라 의사들 역시 필데스의 그림에 나온 의사를 동경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설령 매 순간은 아닐지라도 환자와 맺는 진실한 관계에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대부분 경우에 그러지 못하는 건 오만하거나 엘리트 의식에 젖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의료 제도의 모순과 불합리가 환자와 의사 사이의 관계를 왜곡하기 때문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한편으로는 이것이 의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의 모순과 연결된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일단 ‘사람을 갈아 넣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기업과 공공 기관을 포함한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어서, 의료인들이 번아웃되어 있고 그 여파가 환자에게 간다는 외침은 그다지 울림이 없다. 일하며 겪는 번아웃은 기본값이며, 너희는 그나마도 전문직이고 안정된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데 무슨 불만이 많냐는 것이다. 의사 파업에 대한 대중의 시각은 차가웠고, 최근 예고된 보건의료노조의 파업은 별다른 관심도 얻지 못하는 현실이 이를 반영한다.
번아웃의 결과는 재생산의 포기다. 아이 울음소리가 좀처럼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내과, 외과 등의 필수 진료과에는 젊은 의사들의 씨가 말라 가고 있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 어려운 환경에서 왜 출산을 기피하느냐고 여성들만 닦달할 수 없는 것처럼, 필수 진료과 의사로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왜 생명을 살리는 전공을 선택하지 않느냐며 의사들을 닦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가 개입해 공공 서비스의 가격을 낮추지만 소비자의 실질적인 부담이 좀처럼 줄지 않는 것도 의료뿐만 아니라 교육 및 여러 복지 서비스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효과적인 개입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공교육을 지원함에도 각종 학원비와 과외비로 부모들의 허리가 휘는 것처럼, 건강 보험 보장률이 늘어나 의료비 부담이 줄어도 비급여 진료비와 간병비로 환자들은 여전히 많은 지출을 하고 있다. 지출이 늘어나는 구조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의료와 교육은 돈 먹는 하마가 될 수밖에 없다.
수도권과 지역의 격차로 인한 문제 역시 의료 분야만의 해당 사항은 아니다. 의사들이 지역 근무를 기피해 의료 취약지 주민들이 위험에 처하고 지역 의료가 고사 위기라고는 하지만, 교육・문화・경제 모두 취약한 지역에서 의료만 제 역할을 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의사만 지역에 가지 않는 게 아니다. 청년 세대 대부분이 교육 및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비수도권을 기피하며 수많은 지역 기업들이 사람을 못 구해 아우성친다.
한편, 일각에서는 의사를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과 고통에서 자유롭고 그것을 온전히 외면할 수 있는 특권 계층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의료 문제는 우리 사회 문제의 한 단면이다. 사람을 함부로 쥐어짜도 되는 노동 경시 사회, 혹은 갑질 사회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병원은 의료인을 쥐어짜고 정부는 병원을 쥐어짜며, 건강 보험료와 세금을 더 낼 여력도, 의지도 없는 국민은 정부를 쥐어짠다. 갑질의 사슬이 맞물려 마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상황,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미국 의사협회가 〈The Doctor〉에 덧붙인 “이 그림에서 정치를 몰아냅시다”라는 구호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틀렸다. 의사가 죽어 가는 환자 곁을 지키려면 그가 담당하는 환자들을 다른 의사가 봐줄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병원이 중증 질환을 진료하는 의사를 충분히 고용해야 하는데, 이는 정치 없이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의료계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얼마나 많은 자원을 투입할지 논의하는 것이 곧 정치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제대로 된 정치의 과정이란 의사들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는 것도, 반대로 의사 단체의 로비나 압박에 정책을 쉽게 뒤집는 것도 아니라고 믿는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재임 당시 전 국민 의료 보험 법안이 재논의되면서 〈The Doctor〉는 60년 만에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 의사협회는 이번에도 공적 의료 보험 도입에 반대를 표명했다. 그런데 이때 스탠포드 의대의 저명한 교수인 아브라함 베르기즈(Abraham Verghese)가 유명 시사 매거진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에 〈To AMA: It’s not about you(미국 의사협회에게: 그거 당신 아니오)〉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기고했다. 그는 필데스 그림의 주인공을 의사가 아닌 어린 환자로 보고, 이 그림엔 본인 또는 가족이 아플 때 정성 어린 돌봄을 받길 원하는 마음이 투영됐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의사들이 의료 소외 계층을 보호하는 공적 의료 보험 도입 저지에 이 그림을 사용하는 건 비겁한 처사라고 일갈했다. 대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미국 의사협회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선회했고, 결국엔 ‘오바마 케어’라 불리는 환자 보호 및 부담 적정 보험법(PPACA·Pati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2]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어떠한가. 2020년을 달구었던 적정 의사 수를 둘러싼 논쟁은 물론, 앞서 지적했던 의료의 여러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원 마련과 부담 방식, 인력 운용 방법 등이 향후 미국의 의료 개혁 법안처럼 다시 링 위에 오르게 될 수도 있다. 시민, 정부, 의사 단체 간의 의사소통은 좀 더 나은 수준의 합의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이전처럼 비난과 오해로 점철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필데스의 그림에서 창문에 드리워진 미약한 여명처럼,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조금 더 기대를 걸어 보고 싶다. 시민들은 밥그릇 싸움, 특권 의식으로 호명당하는 의사들의 행동 배경에 번아웃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고, 의사들 역시 정부와 시민 사회의 개입을 ‘의료 사회주의’라 부르며 날을 세우기 보다 이들을 의료계의 모순을 함께 해결하는 파트너로 받아들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