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2020년의 경험을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신’일 것이다. 시진핑이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2020년 1월 20일부터 정확히 1년 뒤, 조 바이든이 미국의 4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까지 12개월이란 기간 동안 220만 명의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중태에 빠지면서 질병 하나로 인해 전 세계가 들썩였다. 현재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451만 명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최종적인 사망자의 수는 현재보다 두 배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실상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상 활동에 지장을 일으켰고, 공공 생활의 상당 부분을 중단시켰다. 학교들을 폐쇄했고, 가족들을 분리했으며, 여행을 중지시켰고, 세계 경제를 전복시켰다.
이러한 악영향을 억제하기 위하여 각국 정부들이 각 가정과 기업, 시장에 대해 벌인 지원 활동은 거의 전쟁 시기에나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경험할 수 있었던 가장 급격한 경기 후퇴였으며 질적으로도 독특한 불황이었다. 무계획적이며 들쑥날쑥한 것이었기는 해도, 세계 경제의 대부분을 폐쇄하기로 한 집단적인 결정은 그전까지 절대로 볼 수 없던 장면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표현처럼 그것은 “무엇과도 다른 종류의 위기”였다.
무슨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 알게 되기 이전에도 2020년이 아주 떠들썩한 해가 될 거라 생각될 만한 이유는 많았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는 갈등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냉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2019년 전 세계의 성장세는 심각하게 둔화되었다. IMF는 지정학적인 갈등이 그렇지 않아도 이미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세계 경제에 미칠 수 있는 불안정한 영향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투자를 저해하는 불확실성을 추적하는 새로운 통계지표들을 만들어냈다. 그걸 통해 산출된 데이터는 문제의 원인이 백악관에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미국의 45대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는 전 세계를 해로운 강박관념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11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데 설령 그것이 승리로 결론이 난다고 하더라도 선거 과정 자체에 흠집을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국가 안보 분야의 다보스 포럼이라고 할 수 있는 2020년 뮌헨 안보 콘퍼런스(Munich Security Conference)의 슬로건이 “서방 부재(Westlessness)”였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워싱턴에 대한 우려와는 별개로, 브렉시트 협상은 주어진 시간이 만료되어 가고 있었다. 2020년이 시작되면서 유럽을 더욱 걱정하게 만든 것은 새로운 난민 위기가 닥치리라는 전망이었다. 그 배경에는 시리아 내전의 최종적인 끔찍한 확전의 위협과 저개발로 인한 만성적인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경제적 남반구(global south)의 투자와 성장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의 흐름은 불안정했고 불평등했다. 2019년 말,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 사는 저소득층 대출자들의 절반은 이미 더는 이자를 갚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세계 경제에 만연해 있던 리스크와 불안감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냉전에서 서구가 거둔 명백한 승리, 금융 시장의 부상, 정보기술에서 이룬 기적, 경제성장 궤도의 확대 등을 보면 자본주의 경제는 현대사의 모든 것을 정복한 동력으로써 지위를 굳건히 하는 것으로 보였다. 1990년대에는 대부분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답이 비교적 간단해 보였다. 그것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1]”로 요약할 수 있었다. 경제 성장이 수십억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서 마거릿 대처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즉 민영화, 가벼운 규제, 자본 및 상품 이동의 자유를 기반으로 한 질서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이었다. 보다 최근인 2005년에 영국의 중도파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세계화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에 대해서 언쟁을 벌이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2020년에 이르러 세계화와 (기후변화로 인한) 계절에 대해 상당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해답이었던 경제는 문제 그 자체로 바뀌어 있었다. 90년대 말 아시아에서 시작되고 2008년 대서양 양안의 금융 시스템 붕괴, 2010년의 유로존 위기, 2014년에는 전 세계의 상품 생산을 책임지는 국가들로 옮겨간 일련의 심각한 위기들은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를 뒤흔들었다. 이런 모든 위기가 극복되긴 했지만, 이는 정부의 지출과 중앙은행의 개입에 인한 것이었기에 “작은 정부”와 “독립적인” 중앙은행에 대한 이전의 굳건한 믿음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위기들은 투기로 인해 야기된 것이었으며, 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유례 없는 규모의 개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 세계 엘리트 집단의 자산은 계속해서 팽창했다. 이익은 개인이 챙겼지만, 손실은 사회가 책임져야 했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묻고 있다. “급증하는 불평등이 포퓰리즘적 혼란을 초래한대도 누가 놀라기나 하겠는가?” 한편 중국이 눈부시게 부상하면서 성장의 위대한 신들이 서양의 편이라는 사실도 더이상 확실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2020년 1월, 베이징에서 속보가 날아들었다.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대규모로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환경 운동가들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경고했던 자연스러운 "반격"이었다. 하지만 기후 위기는 우리가 지구적인 규모로 사고하고, 수십 년 단위로 시간표를 짜도록 만든 반면, 바이러스는 미시적이고 전방위로 퍼지며, 며칠 또는 몇 주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빙하나 바다의 조류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에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우리의 숨결에 의해 옮겨 다녔다. 그것은 단지 일개 국가의 경제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코로나, 예견된 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