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중국은 대만을 침범하려 한다. 이란은 핵 협상에서 여전히 과격하다. 미국은 어디까지 나서야 할까?
80년 전 일본의 진주만 폭격은 엄청난 실수였다. 세계 초강대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 일본 제국을 파멸로 이끌었다. 일본의 통찰력 있는 해군 장성이라면 이렇게 한탄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잠자는 거인을 깨워 끔찍한 결심을 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오늘날 일본은 평화적이고 부유하며 혁신적인 나라다. 전후 일본 부흥의 주역은 일본인이지만, 그 부흥은 그들을 굴복시켰던 강대국, 바로 미국 덕분에 더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산파역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이 자유롭게 무역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세계 질서의 창조자이기도 했다. 그 질서는 완벽하지 않고 모든 곳에서 적용되지도 않았지만, 이전의 어떤 질서보다도 나은 것이었다. 이전의 강대국들과 달리 미국은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약소 우방국을 제물로 삼아 이익을 꾀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공동의 규칙을 준수했다. 규칙 기반의 시스템이 작동했기에 세계는 전쟁을 피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지금 미국은 자유주의 질서의 보증인 역할에 지쳐가고 있다. 거인이 다시 잠에 빠진 것은 딱히 아니지만, 세계 질서 창조자로서의 결심이 흔들리고 있으며 적들은 그 결심을 시험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병력을 집결시켰고 곧 침공할 수도 있다. 중국은 전투기로 대만 영공을 침범하고 미국 항공모함 모형을 제작해 미사일 타격 연습을 하며 극초음속 무기를 시험하고 있다. 또 이란은 핵 협상에서 과격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어 협상이 결렬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이처럼, 두 독재 국가가 현재 민주적인 통제하에 있는 영토를 점령하려고 위협하고 있으며, 세 번째 국가는 핵폭탄을 제조함으로써 핵 확산 금지 조약을 위반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무모한 행위들을 막기 위해 미국은 어디까지 나서야 할까?
조 바이든은 때때로 단호한 목소리를 낸다. 12월 7일 바이든은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또다시 공격한다면 심각한 결과를 맞을 수 있다고 푸틴에게 경고했다. 이란에 대한 제재도 거두지 않고 유지했다. 미국은 대만이 중국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그동안 중국의 대만 침공 시 군대를 파견할 것인지에 대해 답변을 거부해 왔는데, 지난 10월 바이든은 미국은 대만을 수호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보좌진이 정책상 변화는 없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중국은 바이든 대통령이 말을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보다 확고한 입장을 교묘하게 내비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12월 7일 미국 하원은 방위 예산에 대한 대대적인 증액안을 통과시켰다. 또 12월 9~10일에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주의 정상회의(Summit for Democracy)’를 개최했는데, 규칙을 존중하는 국가들이 하나로 뭉쳐 협력하자는 취지였다.
2화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미국은 하드 파워를 대외 정책으로 사용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워싱턴의 매파와 비둘기파 연합은 미국의 ‘자제’를 요구한다. 미국이 세계 경찰이 되려 하면 필연적으로 국외의 불필요한 갈등에 휘말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게 된다고 비둘기파는 말한다. 매파는 미국에게 중요한 유일한 과제는 중국에 맞서는 것이며, 그것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쪽이든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는 부분적 후퇴가 필요하고, 그렇게 되면 세계는 더욱 위험하고 불확실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라는 바이든 대통령의 크나큰 실패로 인해 일부는 미국이 우방을 보호하고 적을 막아주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은 미국의 계획이 적절한지 의심한다. 미국의 핵우산에 대해 대통령이 부정확한 표현을 함으로써 미국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우방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다. 바이든은 도널드 트럼프처럼 우방국을 모욕하지는 않지만, 의견 조율 과정을 생략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미국의 힘을 지탱해 온 신뢰 관계를 약화시키고 있다.
대통령 한 사람의 성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를 선택한 국가의 분위기이다. 미국은 더 이상 1990년대의 자신감 넘치던 패권국이 아니다. 여전히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긴 하지만, 미국의 힘은 비교적 약해졌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겪고 난 후 유권자들은 외국에서 벌이는 모험에 지쳐 버렸다. 과거에는 국내 문제에 머무르던 파벌 정치가 이제 정치 전반을 마비시키고 있다. 90개 이상의 대사직은 의회에 막혀 공석으로 남아 있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의 군사적 관계를 경제적 관계로 보완할 수 있는 무역 협정 가입을 거부했다. 논란을 만드는 선거와 마스크 착용을 둘러싼 정치판의 드라마가 수그러들 기미가 없으니 내분이 극심한 나라로 인식되고, 국제 무대에서 일관된 목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겨진다.
바쁘게 움직이는 과거의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상은 잘못된 판단일 수 있다. 2024년에는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 수도 있다. 자유주의 질서를 유지하려면, 다른 강대국들도 제 몫을 해야 할 것이다. 도움의 손길이 줄어든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미국이 발을 빼지 못하게 묶어두기 위해서도 이는 필요한 일이다. 몇 가지 징조는 보인다. 일본과 호주가 대만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시사했다. 미국이 핵 잠수함 추진 기술을 호주에 제공하기로 했는데 여기에 영국도 동참하기로 했다. 독일의 새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앞으로는 미국의 역할이 줄어든 세계에 적응하는 일이 더욱 필요해질 것이다. 민주주의, 특히나 유럽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방위에 더 큰 비용을 들여야 한다. 대만이나 우크라이나처럼 공격 위험에 노출된 국가들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 가령 비대칭적 전투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준비가 잘 되어 있을수록 적으로부터 공격당할 위험도 줄어들 것이다.
규칙 기반의 질서를 지지하는 이들은 서로서로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해야 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주고받는 무의미한 입씨름 같은 해묵은 원한은 이제 묻어야 한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더 깊고 넓은 동맹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인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비동맹주의의 잔재를 지우고 호주, 일본, 미국과 함께하는 4자 간 협의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나토(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우크라이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나토 조약상 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곧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되는데, 이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받아들이는 순간,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나토 회원국들은 우크라이나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더 많은 무기와 자금, 훈련을 제공할 수 있다.
자유주의 질서가 깨진다면 미국의 우방은 극심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 질서가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얼마나 그 질서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는지 깨닫고 놀랄 것이다. 아직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진영이 확고하면서도 단합된 노력을 보여 준다면 최소한 규칙 기반 시스템의 일부는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던 음울한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중요한 과제는 없으며, 어쩌면 이보다 어려운 과제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