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때까지도, 뼈아픈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산업화 세계에 살았던 대다수 고통 받는 대중은 참으로 가난해지고 외로워지고 소외됐기에 권위주의자들에게 계속 허리를 숙였다.
경제 붕괴, 문명의 쇠락, 사회 분열에 대한 공포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들은 노상 하늘이 무너질 거라며 경고하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전쟁으로 인해 진짜로 하늘이 무너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체주의의 발흥을 고통스럽게 연구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의 사회에 대한 신념은 산산조각 났다. 사학가인 도로시 로스가 최근 연구를 통해 주장한 바와 같이 근대성 자체에 전체주의를 뿌리내린, 대중 사회를 통찰하는 이론이 생겨나서다. 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이 자유 민주주의에 가한 위협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두려움도 명확해졌다. 대중 사회의 원자화된 개인들은 전체주의 운동과 그 운동이 약속한 거짓 연대의 지지자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20세기 중반,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생각한 자들은 ‘사회’와 ‘정부’의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 것인지, 혹은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혁명의 종류를 “사회 조직의 변화를 의도하는 것”과 “정치적 영역의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분류했다. 그녀는 두 번째 종류의 혁명엔 호감을 느꼈으나 첫 번째 종류의 혁명은 두려워했다.
아렌트의 주장에 따르면 혁명이란 결코 ‘사회적 문제’, 이를테면 빈곤 같은 것을 해결할 수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되는데, 과거의 혁명이 남긴 기록들 전체가 의심의 여지 없이 보여 주는 사실은 정치적 수단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는 테러로 이어졌다는 거다. 아렌트는 혁명이 빈자들의 절망에 압도되어 사회의 조직을 변화시키고자 시도될 경우 질서가 적출되고 사유 재산이 파괴되며 지식인들이 대량으로 처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빈곤 문제를 고심하듯 정부가 파멸의 길을 걸으리라 얘기한 건 아니었다. 혁명의 경우만 그렇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사회 조직이 닳아 떨어지고 대중들이 전체주의에 취약해진 이유는 산업 자본주의가 야기한 혼란과 불평등이 아니라 국가의 권력이 강해진 탓이라고 비난했다. 1953년에 발간된 《공동체의 탐색(The Quest for Community)》에서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니스벳은 현대 국가가 인간의 경제, 종교, 친족, 지역에 대한 충성 안으로 속속들이 침투하는 사실을 한탄했다. 그는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세속주의, 국가주의라고 믿었으며 이는 특히 뉴딜 시기의 미국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는 세속주의와 국가주의가 사회적 유대를 약화함으로써 개인 소외와 문화적 붕괴를 야기한다고 봤다. 그는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옛 시절’과 비교했는데, 그가 말하는 옛 시절이란 가족, 교회, 지역 공동체가 각 개인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 내고 유지하던 때이다. 옛 시절에 사람들은 자기 분수를 알았고 서로를 돌봤으며 상황이 어려울 때도 정부에게 도와달라고 손 내밀지 않았다.
공동체를 탐색했던 인물인 니스벳은 인간 혐오자였다. 그는 집에서 흑백 TV로 〈건스모크(Gunsmoke)〉 같은 서부극 보기를 좋아했고, 자녀들과 크로케 게임을 하며 본인 소유의 장미 정원에서 빈둥거렸다. 그는 부인이 끈질기게 권할 때만 교회에 나갔다. 사교도 즐기지 않았다. 니스벳은 “나는 개인들을 정말로 좋아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는 1959년 찰스 슐츠의 연재 만화 〈피너츠(Peanuts)〉 속 등장인물 라이너스 반 펠트가 인용해 인기를 끈 도스토옙스키의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사람들이야!”라는 구절을 뒤집어 말한 것이다. 사회 같은 건 없다고 훗날 대처도 말할 것이었다. 오직 개인들만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따지면 대처리즘은 사실 찰리 브라운에서 나온 셈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신념을 사회가 아니라 자유 시장에 두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사이의 간극은 1950년대에 메워지게 되는데, 자유 민주주의가 붕괴해 전체주의로 바뀔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겁을 먹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사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로스는 이 자유주의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역할이 집회, 상호 관심, 협력적 행동, 평등한 처우 등을 발언함으로써 사회를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들은 개인을, 또한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보호하고자 애썼다. 선택이라는 행위, 그리고 선택이라는 시장 주도적 표현으로 개인이 우매한 대중으로 변하는 걸 막는, 마치 예방 주사 접종처럼 말이다.
1960년대가 되자 자유주의자들은 시민권 운동과 린든 존슨이 내세운 슬로건 ‘위대한 사회’ 등을 통해 사회라는 개념에 대한 자신들의 헌신을 새롭게 부활시킨 듯 보였다. 하지만 로스에 따르면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지난 몇십 년간 사회를 버리는 와중에 일어난 일시적인 변화, 즉 잠깐의 방향 전환에 불과했다. 로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60년대에 일어난 사회 자유주의의 정치적 부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이는 사회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의 정치적이고 지적인 부활을 야기했고, 그로 인해 자유주의적 정치와 사회사상이 파편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학자들은 20세기 초의 진보주의에서 21세기 버전의 진보주의에 이르는 동안 좌파에서 지속적으로 자유주의와 사회 민주주의를 주창했다는 점을, 이 깨어지지 않는 전통의 연속성을 더 많이 주목한다. 하지만 1960년대의 정치적 혁명이 반혁명적이고 보수적인 반격을 일으켰다는 사실에는, 또한 그 반격이 부분적으로는 시민권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통해 힘을 얻었다는 주장에는 그 누구도 반박하지 않는다. 맥기가 지적하듯, 상당수 백인들은 흑인들이 사회가 더 이상 ‘백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선언할 만큼의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바로 그 시점에, 사회의 존재를 믿는 것을 포기해 버린 듯 보였다.
1960년대가 되자 니스벳은 새로운 청중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새로이 등장한 공산주의자들인 신좌파였다. 좌파 진영에서 사회가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는 사회 민주주의를 포기했지만, 신좌파는 ‘사회 정의(social justice)’를 위해 싸울 것을 결심했다. 《공동체의 탐색》은 출간되고 얼마 안 지나 절판되었다가 신좌파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은 덕에 1960년대에 복간되었다. 니스벳은 1962년 판 제목을 ‘공동체의 탐색’에서 ‘공동체와 권력(Community and Power)’이라고 바꿨다. 새로운 제목은 더 좌파처럼 들렸지만 현대 사회의 고독과 소외에 대한 선언이라는 핵심은 똑같았다. 니스벳이 복간된 책에 쓴 서문을 소개한다. 이 서문은 지금의 격리와 ‘집에 머물라’는 캠페인, 고독이라는 전염병, 사회적 거리 두기, 록다운 등이 발생하기 수십 년 전에 쓰였다.
“내가 뜻하는 소외란 사회 질서라는 것이 자신과 동떨어져 있고, 이해할 수 없으며, 마치 사기 같은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의 상태다. 이 마음의 상태는 진정한 희망이나 욕망을 넘어 냉담함, 지루함, 혹은 심지어 증오까지 불러일으킨다. 소외된 개인은 그저 자기가 사회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사회 질서에 참여하려는 관심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이런 사람들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다 보니, 특히나 이런 사람들 중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같은 젊은 사람들이 포함되다 보니(젊은이들 사이에서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엄청난 인기를 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소외의 상태는 행동과 사고 양쪽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단합의 상징, 늘 준비된 인간관계 프로그램, 교외의 파티오 축제, 대선 후보들을 위해 4년마다 벌어지는 십자군 운동 같은 것들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국가, 정치 정당, 사업, 교회, 노동조합, 심지어 가족 등과 같은 제도가 멀리 있는 듯 느껴진다. 여기에 자아의 일부를 내어 주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미처 다 숨기지 못한다.”
니스벳을 읽은 신좌파 사람들이 보수주의에 합류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고자 애썼고, 다른 사상적 전통도 융합하려 했다. 그 다른 사상적 전통에는 가톨릭 사회사상과 미국 프래그머티즘 철학자 존 듀이의 글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2년 민주사회학생회(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가 발표한 〈포트 휴런 선언문〉에서, 신좌파는 현 사회의 고독, 단절, 소외를 애통해하면서 인간의 상호 의존과 형제애를 사회적 관계의 가장 적합한 형태라고 찬양했다(이 선언문에서 ‘사회’라는 단어는 총 38번 등장한다). 이 선언은 “새로운 좌파는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해야 한다. 전자는 우리와의 관련성 때문이며, 후자는 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개혁 의지 때문이다.”라고 확언했다.
20세기 중반의 몇십 년 동안은 모든 진영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문제라는 데 동의했다. 근본 없고 무지한 대중 사회가 정치적 신조나 선동에 취약하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원인과 해결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품었다. 니스벳과 보수주의자들은 국가를 비난하며 자유방임 시장에 신뢰를 보내는 한편 강력했던 ‘옛 시절’의 제도, 이를테면 가족과 교회 같은 제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흑인 민권 운동가들은 흑인 교회와 이슬람 국가의 공동체적 전통에 도움을 요청했다. 학생 운동으로 시작되었던 신좌파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변화보다는 대학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변화에 신뢰를 보였다. 백인 자유주의자들은 선택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들먹였다. 유권자들이 합리적인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하고, 소비자들은 정보에 입각한 구매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심지어 낙태조차도 ‘선택할 권리’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노력하건 간에, 사회적 연대가 점점 약화하고 있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는 듯 보였다.
1957년, 이디엘 드 솔라 풀이라는 MIT의 정치학자가 사회 연결망(social network)이라는 표현을 창안하면서, 자칭 ‘작은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시작했다. 2년 뒤 그는 ‘시뮬매틱스 코퍼레이션(Simulmatics Corporation)’이라는 데이터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의 이름은 여러 뜻을 담고 있었는데, 이곳의 목적은 인간 행동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자동화하여 앞으로의 일을 예측하고, 이 예측을 기업이나 정부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시뮬매틱스 코퍼레이션은 최초의 인공지능 주도 데이터 서비스 기업이었다. 1960년대에 드 솔라 풀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사람들이 무엇을 우려하게 될지 예측했다. “현재 사회의 순응성을 공격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21세기가 되면 원자화된 사회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 예측은 1968년에 나온 것이다. “그들은 현대 기술이 우리의 공통된 문화적 기반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자기만의 작은 세상에 방치한다고 주장하겠죠.”
기술 유토피아주의자였던 드 솔라 풀은 새로이 등장하는 통신 기술이 사람들을 더 가까이 결합하는 대신 세상을 작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실제로 그는 훗날 인터넷이 될 기술의 선두에 서 있었다). 드 솔라 풀은 자유주의자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신보수주의자, 엄밀히 말하면 자유 지상주의자가 되었다. 사후인 1990년에 간행된 책 《경계 없는 테크놀로지: 글로벌 시대의 원거리 통신에 대하여(Technologies Without Boundaries: On Telecommunications in a Global Age)》에서 그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경계 없는 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이라 내다보았다. 이것이야말로 인터넷을 창시한 이들이 품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