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들에게 고래 개체 수의 회복은 절실히 바라던 성과다. 국제적 협력에 효과가 있고, 보호 조치가 작동하며, 인류가 자연계에 가했던 피해를 스스로 되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현실에 안주하지는 않는다. 소셜 미디어 팔로워들에게 자연 보호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이번 여정에 합류했던 배우 구스타프 스카르스고르드(Gustaf Skarsgård)는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압축해서 표현했다. “남극은 회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저도 한두 가지 정도 알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태는 모면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취약합니다.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마침내 폭풍이 잔잔해졌고, 악틱 선라이즈는 다시 킹조지섬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거기서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공항
[4]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많은 크루즈와 과학 탐사선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떠난 이후로 열흘 동안 남극의 여름은 눈에 띌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눈에 덮여 있던 산비탈은 이제 까만 바위의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벌거벗은 남극은 결코 관광객들을 끌어모을 수 없겠지만, 물과 얼음과 토양과 식생으로 뒤덮인 지구의 연약한 표층 아래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지구는 우주를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거대한 암석일 뿐이다.
킹조지섬 ; 희망과의 조우
이번 여정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순간은 파라다이스 하버에서의 조우였다. 지금의 인류세(Anthropocene)에는 좀처럼 품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순수한 기쁨과 막 시작되는 희망이었다.
혹등고래는 눈에 보이기 전에 소리로 먼저 들렸다. 등 뒤에서 잔물결이 이는 소리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다음에는 부드러운 물장구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몸을 돌리자 활 모양의 등지느러미가 느릿하게 물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커다란 바다뱀의 삽화 같았다. 고래는 3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꼼짝할 수 없었다. 수중 청음기로 조용히 녹음하기 위해 이미 몇 분 전에 조종사가 보트의 엔진을 껐던 것이다.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고래는 이제 15미터 떨어진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고래는 머리의 구멍에서 다시 한번 물을 내뿜은 다음, 수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슬그머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헤엄쳐 가는 길목에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고래가 깨달았던 걸까? 그 정도 크기의 생명체와 부딪혔다면, 우리의 작은 보트는 분명 전복됐을 것이다.
고래는 뭔가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앞쪽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수면 아래로 지나가면서 우리 배와 나란한 방향으로 몸을 돌렸는데, 거리가 어찌나 가까운지 팔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더니 고래가 거대한 머리를 물 밖으로 드러내면서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침대만 한 크기의 혀와 빳빳한 수염판이 드러났다. 몇 초 뒤, 돌기가 있는 가슴지느러미를 첨벙이면서 고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