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완결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비극적인 전쟁을 이해하려면 지난 몇 달의 시간은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의 시간도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코샤크의 17세기 지도자인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동상 ©Photograph: Efrem Lukatsky/AP

지난 3개월 동안 전 세계는 전쟁이 정말 일어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허세를 부리는지 아니면 진심인지 말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오랫동안 말했던 일부 러시아 전문가들은 이제는 걱정해야 할 때라고 말을 바꿨다. 푸틴을 오랫동안 비판해 온 이들은 푸틴이 단지 관심을 끌고자 할 뿐이며 이 모든 것이 쇼일 뿐이라고 하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군사 움직임을 주시했던 이들과 방송을 지켜봤던 이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군대에 주목했던 전문가들은 러시아군이 국경 지역과 크림반도에 대규모로 집결하는 것을 보고 침공을 경고했다. 반면, 방송으로 정보를 얻었던 전문가들은 러시아 방송이 러시아 침공 이전처럼 전쟁 히스테리를 조장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고 봤다.

이런 논쟁들은 지난 2022년 2월 24일 밤에 종료되었다. 러시아 미사일은 우크라이나 내 군사 시설과 민간 목표물을 타격하고, 러시아 기갑 호송대는 국경을 넘었다. 이제 쟁점은 그 이유로 옮겨갔다. 푸틴이 미쳤나? 그는 진정으로 나토 확장을 우려한 걸까? 오랫동안 푸틴을 연구해 온 피오나 힐이 제시한 것처럼, 도덕관념은 제쳐둔 채 역사적, 시간적인 범주에서만 생각한 걸까? 그것이 전쟁 앞에서 필사적인 일반인들에게는 말도 안 될지라도 말이다. 아니면 그는 러시아 제국을 조금씩 재건하려 했던 걸까? 다음은 에스토니아일까?

지난 1월,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모스크바를 여행했다. 도시는 아름다웠다. 눈이 덮여 있었고 모두들 아주 평온했다. 물론, 억압이 강화되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었으며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은 공식 통계치보다 많았다. 코로나19로 말할 것 같으면, 푸틴은 코로나19에 편집증이 있어서 그를 직접 만나려는 사람은 러시아 정부 소유 호텔에서 일주일의 격리기간을 거쳐야 했다.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침공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눈 사람 중 일부는 꽤나 핵심 관계자였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푸틴이 강압적인 외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미국 정보기관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인들을 찾아가 의견을 구하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려봤다. 침공이 크게 일어난다 해도 빨리 끝날 것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했다. 치밀한 작전을 짜고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점했던 크림 전쟁 때와 비슷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푸틴은 항상 신중했으며 이길 자신이 없는 싸움은 절대 시작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러니 끔찍하겠지만, 상대적으로는 덜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그러나 틀렸다. 우리 모두 빗나갔다.

그러나 모두들 곧바로 자기들이 옳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푸틴이 유혈 폭군이라고 수년 동안 주장해 온 러시아 전문가들은 그가 자기들이 말한 대로 움직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푸틴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해 온 전문가들도 비교적 조용한 톤이지만 어쨌든 자기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푸틴이 그들의 경고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같이, 옛 미국 대통령 행정부 관료들은 TV에 나와 떠들어대고 지혜를 뽐내며 마치 자신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 재앙에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듯이 떠들었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서방,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수년 전부터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의 2014년 침공을 자주 상기시켰듯, 전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뿌리를 찾으려면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소련이라는 제국의 최후의 발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옛 소련 지역에서 실시한 정책들의 실패는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이 전쟁은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한 사람, 오직 한 사람의 결정이었다. 그는 코로나19 감염으로 격리되어 있던 중에 전쟁 명령을 내렸다.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어떤 종류의 캠페인도 하지 못했고 최측근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공이 일어나기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모스크바에 있는 어느 누구도 전쟁을 예측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는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상황의 본질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그가 직면하게 될 저항이 얼마나 격렬할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비극을 이해하려면, 또 이 전쟁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려면, 지난 몇 달의 시간은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의 시간도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승리한 빅토르 유셴코 ©Photograph: Anatoly Medzyk/Reuters


1. 결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30년 전 옛 소련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제국이 얌전히 사라져 줬다는 사실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의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끔찍한 분리 독립 분쟁을 제외하면 폭력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점진적으로 옛 소련의 변방 지역에서부터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몰도바에서 러시아군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소규모 분리주의 운동을 지원하여, 결국 트란스니스트리아라는 작은 분리 공화국을 형성했다. 그루지야에서는 역시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은 압하지야 자치구가 남오세티야와 마찬가지로 트빌리시의 중앙 정부와 짧은 전쟁을 벌였다. 19세기 내내 제국의 침략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소련의 지배 아래 극심한 고통을 받았던 러시아 공화국 체첸은 독립에 대한 염원을 천명했으나, 결국 한 차례도 아닌 두 차례의 잔혹한 전쟁에서 패배했다. 타지키스탄은 국경을 공유한 아프가니스탄이 내전에 휩쓸리자 그 여파로 여지없이 내전을 겪었다. 러시아는 2007년 에스토니아에 사이버 공격을 가했고, 2008년에는 그루지야의 남오세티야 탈환 시도에 대규모 반격으로 대응했다. 이 모든 분쟁에도 불구하고 모두 소련의 해체가 기적적이게도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고들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등장했다.

옛 제국 소련은 건국의 실험실이 되었고, 이 실험실에서 우크라이나는 특히 두드러진다. 옛 소련 공화국 중 일부는 오랜 정치적 전통과 고유의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관행이 있었으나, 다른 공화국들은 덜했다. 발트해 연안 국가들은 두 세계 대전 사이 20년 동안 각자 독립했다. 대부분의 다른 공화국들은 기껏해야 1917년 차르 체제가 붕괴한 직후 짧은 독립 실험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건국한 많은 국가에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상당히 많았는데, 이들은 새로운 국가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거나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면에서 우크라이나는 달랐다. 이 나라 역시 현대에 짧은 기간 동안만 독립 국가로 존재했을 뿐이지만 강력한 민족주의 운동과 활기찬 문학적 규범, 그리고 표트르 대제 이전의 유럽사에서 독립된 지위를 지녔던 강렬한 기억이 있었다. 또한 매우 큰 나라였다.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크다. 산업화도 진행되어 석탄, 철강, 헬리콥터 엔진과 더불어 곡물과 해바라기 씨의 주요 생산국이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인구도 보유하고 있었다. 1991년 독립 당시 인구는 5,200만 명으로 구소련 국가 중 러시아에 이어 2위였다. 지정학적으로도 흑해와 면해있으며, 수많은 동유럽 국가 및 미래의 나토 회원국들과 국경을 맞댄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한때 소련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혀 러시아 황제들이 여름을 보냈던 크림반도와 더불어 소련 최대의 부동항인 해군 항구 세바스토폴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1941년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소련으로 진격했을 때, 가장 치열한 전투를 겪고 가장 강력한 저항을 일으켰던 지역인 소련의 13개 “영웅 도시” 중 4개(키이우, 오데사, 케르치, 세바스토폴)도 우크라이나에 있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제도 깊이 얽혀 있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現 드니프로)에 있던 공장은 소련 방위 산업 능력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러시아의 최대 가스 수출 파이프라인이 우크라이나를 통과했다. 역사학자 도미니크 리븐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크라이나의 인구, 산업, 농업이 없었다면 20세기 초 러시아는 강대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91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으로도 중요했다.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는 13세기에 갈라졌고 우크라이나에는 고유의 주목할 만한 문학이 있었지만, 두 언어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만큼 밀접하다. 인구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민족이지만, 동부 지방에는 러시아 소수 민족이 많았다. 무엇보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지만 대부분 대도시에서 통용되는 공통어(lingua franca)는 러시아어였다. 게다가 인구 대부분이 두 가지 언어를 모두 쓸 줄 안다. 예를 들어, TV에서 한 기자가 러시아어로 질문을 하고 우크라이나어로 답변을 받는 것을 보거나, 탤런트 쇼에 러시아어를 쓰는 심사위원 두 명과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심사위원 두 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등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2개 국어를 구사하는 흔치 않은 나라였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문제였다. 한 가지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데 왜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가? 특히 골칫거리인 크림반도의 경우 인구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으로 확인되었다. 또, 일단 크림반도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크라이나 동부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곳에는 러시아인이 많았다. 물론, 카자흐스탄 북부와 에스토니아 동부와 같은 다른 지역에도 러시아인은 있었다. 이 지역에도 분리독립 주장이 있었고, 이런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작가에서 정치적 선동가로 변신한 에두아르트 리모노프는 2001년 카자흐스탄 북부를 침공하여 독립 러시아 공화국을 선포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모스크바에서 체포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만큼 러시아의 역사적 상상력의 중심이 되는 곳은 없었다.

러시아는 구소련 붕괴 후 20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발전을 예의주시하며 여러 방면으로 간섭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거기까지가 필요한 전부였다. 우크라이나에는 수많은 러시아어 화자가 있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는 듯했다.

1932-33년 홀로도모르 기근의 희생자들을 위한 키이우 기념비에 촛불을 켜는 사람들 ©Photograph: Genya Savilov/AFP/Getty


2. 조국의 시작: 우크라이나의 시선

우크라이나라는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는 러시아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여러 고난이 있었다. 새롭게 탄생한 많은 수의 옛 소련 국가들은 부패한 엘리트, 저항적인 소수 민족,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 등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는데,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는 이 모든 문제와 동시에 또 다른 문제까지 있었다. 땅이 넓고 산업화되었기 때문에 훔칠 만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오데사라는 도시에는 흑해의 주요 항구가 있었기 때문에, 약탈을 위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2014년에 밝혀진 바와 같이 옛 우크라이나 군대의 많은 장비가 오데사의 항구를 통해 국외로 밀반출되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분단까지는 아니더라도 통일국가로서의 인식이 바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 정복당하고 분할되어 온 탓에 국가의 역사적 기억 자체가 조각나 버렸다. 한 역사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각각의 조각들이 서로 다른 과거들을 가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우크라이나 정치 문화의 가장 값진 부분 중 하나인 17세기 코사크 헤트만국의 유산은 역사적으로 무정부주의였다. 원래 코사크는 농노에서 탈출한 전사였다. 그의 정치 체제는 급진적 민주주의였는데, 어딘가 아름다운 측면도 있었지만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는 결점이 있었다. 지금은 크게 비판 받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독립 직후에 작성된 CIA의 분석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붕괴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예측되었다.

하지만 20년이 지나도록 우크라이나는 붕괴하지 않았다. 좋든 나쁘든 민주주의는 우크라이나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러시아와 달리 우크라이나에서는 정권 교체가 계속 반복됐다. 1994년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브추크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과 함께 러시아어에 우크라이나어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한 레오니드 쿠치마에게 선거에서 패하여 물러났다. 2004년, 그가 택한 후계자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부정 선거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고 난 뒤, 보다 민족주의적이고 친유럽 성향의 후보인 빅토르 유셴코에게 패하여 물러났다. 2010년 유셴코는 부활한 야누코비치에게 패했다. 그러나 야누코비치는 2014년 마이단 혁명으로 축출되었다. 2019년 민족주의자 후보이자 '초콜릿 억만장자'인 페트로 포로셴코가 차기 대통령이 되었지만,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친 평화 후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그를 대신했다.

우크라이나 정치는 갈등으로 가득했다. 의회에서 주먹다짐은 흔한 일이었고 시위는 사실상 일상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예를 들어 2000년 쿠치마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는데, 당시 쿠치마가 키이우 외곽의 숲에서 머리 없는 시신으로 발견된 언론인 게오르기 곤가제를 살해하도록 지시한 정황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된 바 있다. (쿠치마는 테이프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11년에 기소되었지만, 법원이 테이프를 허용할 수 없다는 판결을 하면서 기소는 기각되었다) 2004년 야당 후보였던 유셴코는 다이옥신 중독으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는데, 러시아 특수 공작이 분명했다. 2004년의 1차 투표는 심각한 부조리와 명백한 부정투표로 얼룩졌다. 러시아에서조차 아직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오렌지 혁명으로 알려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시민들은 2차 투표를 얻어냈고, 여기에서 유셴코가 승리했다. 유셴코는 이후 2010년 공정한 선거를 시행했으나 패배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권 교체는 소란스럽기도 하고 따분하기도 했지만,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중의 진정한 의견들을 반영했다. 어떤 이들은 우크라이나가 유럽과 더욱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이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크라이나 여러 지역 간의 문화적, 역사적 차이는 위기 상황에서 수면 위로 드러났던 것이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에게, 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의 침략과 점령에 저항한 기억은 중요한 시금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사건들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들 국가의 점령은 1921년(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을 때) 또는 1939년(스탈린이 폴란드를 분할하기 위해 독일과 소련 사이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 서부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했을 때)에 시작되었다. 코사크 헤트만국이 러시아 황제의 보호를 요청했던 165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우크라이나 반군으로 알려진 유명한 전쟁 저항 전사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소련과 독일의 점령에 저항하고 소련에 의해 파시스트 악당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민족주의 서사에서는 우크라이나 역사에 있어 건국의 아버지였다. 민족주의자들에게 20세기의 비극의 신호는 나치의 침공이 아니라 수백만의 우크라이나인이 사망한 1932~1933년의 대기근이었다. 그것은 홀로도모르, 즉 ‘굶주림에 의한 살인’으로 알려졌으며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국가를 파괴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으로 이를 계속 언급했다.

이 모든 주장은 경제 침체를 배경으로 제기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언제나 구소련 지역 중에서 경제가 가장 취약한 국가 중 하나였다. 부패가 만연했고 생활 수준은 낮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산 값싼 가스와 더불어, 유럽행 러시아산 가스에 부과되는 ‘통행 수수료’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소게임 같은 정치 지형은, 우크라이나 국민에게는 엘리트들끼리 대통령직을 주고받는 거래처럼 보였다. 희망과 실망이 교차했으며 삶은 그들을 지나쳐 갈 뿐이었다. 2010년 키이우에서 만났던 한 언론인은 오렌지 혁명 시위에 참여했다가 유셴코 대통령 때문에 낙담하고 기회를 놓쳤다며 한탄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2005년 이후, 그리고 1991년 이후로 거의 진전이 없다는 사실을 기막혀 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는 다른 측면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크라이나의 취약했던 애국심은 점차 공고해졌다. 한 국가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유명한 구소련의 노랫말을 빌리자면, 조국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이 노래에 따르면, 그것은 어머니가 읽어주는 첫 번째 책에 있는 그림들로 시작한다. 그리고 옆집 뜰에서 온 당신의 선량하고 진실한 친구들로부터 시작된다. 소련이 아닌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사람이 많을수록 모스크바 대신 키이우를 수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역사를 더 많이 배울수록 우크라이나는 더 강해졌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그를 유명하게 만들고 결국 대통령 자리에 앉히게 했던 TV 드라마에서, 갑자기 대통령이 된,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고등학교 역사 교사를 연기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짧은 장면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의 위대한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인 미케일로 흐루셰프스키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1995년 당시 빌 클린던 미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러 대통령 ©Photograph: Don Emmert/AFP/Getty Images


3. 나토: 러시아에게 그저 욕일 뿐

2013년 후반에 마이단 혁명을 촉발한 것은 우크라이나가 EU에 가입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러시아의 폭력적인 반대였다. 그리고 이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 침공을 촉발했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우크라이나의 입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나토의 확장이었다.

나토의 확장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다. 소련 붕괴 직후, 나토가 더 커지리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는 않았다. 사실 대부분의 미국 정책 입안자들과 미군은 동맹 확대에 반대했다. 한동안 나토 해체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나토는 소련 견제라는 목적을 달성했으며, 모두가 이제는 각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클린턴 행정부 초기에 상황이 바뀌었다. 변화의 원천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클린턴 국가안보회의 내부의 이상주의적 외교 정책 그룹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유럽 국가들이었다.

1991년 이후, 공산주의 이후의 동유럽 국가들, 특히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은 불확실한 안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인근 유고슬라비아는 붕괴하고 있었고, 잠재적인 국경 분쟁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있었다. 러시아가 영원히 약한 상태로 남아있지는 않을 거라 믿었고, 그들이 할 수 있을 때 나토와 협력하기를 원했다. 폴란드 관리들은 1993년 싱크탱크 연구원들에게 “우리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을 막는다면 우리는 핵무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이들 사례를 볼 때, 동유럽 국가 정상들이 도덕적으로 상당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나쁘지 않았다. 빌 클린턴은 1994년 1월 프라하에서 바츨라프 하벨과 레흐 바웬사를 만난 후 “문제는 나토가 더 이상 신규 회원국을 받아들일지가 아니라 언제 받아들일 것인가”라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의 공식적인 정책이 되었다. 5년 후 체코(슬로바키아와 평화적으로 분리되었다), 헝가리, 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했다. 향후 수년간 11개국이 추가로 가입하면 동맹국의 총 숫자가 30개국이 되는 것이었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일부 미국 전문가와 정책 입안자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구실을 찾고 있던 아주 최근까지도 나토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정말 터무니없다. 러시아는 처음부터 나토 확장에 반대해 왔다. 러시아 외무 차관은 1993년 클린턴의 러시아 담당 수석 보좌관 스트로브 탤벗에게 “나토는 네 글자로 된 단어”(특정 욕설을 가리키는 미국의 은어)라고 말했다. 1994년 클린턴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클린턴의 매우 충실한 동맹이었던 보리스 옐친은 나토가 동유럽 국가들을 포함하려는 계획을 실제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격노했다. 그는 그 계획의 결과가 유럽의 “냉전 시대 같은 평화”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는 너무 약했고 여전히 서방으로부터의 차관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토의 세력이 커져가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도 불평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방법이 없었다. 특히 1999년 코소보에 대한 동맹의 개입은 러시아 지도부를 불안하게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러시아가 내부 갈등으로 간주했던 상황에 대한 개입이었다. 당시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일부였지만, 나토의 개입 이후에는 사실상 세르비아의 일부가 아니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체첸에서 코소보 같은 상황을 겪었고, 갑자기 나토가 그 상황에 개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러시아군을 연구한 한 미국 분석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러시아 재래식 병력의 상태를 알았기 때문에 겁을 먹었다. 또, 미국의 재래식 병력의 실제 상태를 직접 보았다. 체첸에서 무슬림 소수 민족과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미국이 기본적으로 코소보를 세르비아에서 분리시키기 위해 개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듬해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군사 원칙을 변경하여 만일 위협을 받게 되면 전술 핵무기 사용에 의존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 정책의 설계자 중 한 사람은 러시아 군사 신문 《크라스나야 즈베즈다》에 나토의 동쪽 확장이 러시아에 위협이 되며 이것이 바로 핵무기 사용의 문턱을 낮춘 이유라고 말했다. 22년 전의 일이다.

소련의 붕괴 이후 나토의 2차 확장은 가장 큰 규모였다. 2002년에 합의하고 2004년에 공식화된 대로,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을 동맹에 가입시켰다. 이들 국가 대부분은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 발트해 연안 국가 - 는 한때 소련의 일부였다. 이제 그들은 서방에 합류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일련의 사건이 러시아 주변을 뒤흔들었다. 2003년 그루지야(장미 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오렌지 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튤립 혁명)에서 잇따라 발생한 ‘색깔 혁명’은 모두 부패한 친러시아 현직 의원들을 몰아내기 위한 대규모 시위였다. 서방에서는 이를 민주주의의 부활로 보고 열광적으로 환영했지만, 러시아는 자국의 영향력을 침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회의와 공포로 반응했다. 미국에서 정책 입안자들은 자유가 행진하고 있다며 축하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색깔 혁명이 서방 비밀 기관의 소행이고 러시아가 다음 차례라는, 약간의 편집증적인 우려가 있었다.

러시아 정부가 생각한 장기간에 걸친 서방세계 음모론은 잘못된 것일지 몰라도, 서방이 러시아를 친구로서 동등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모든 고비마다, 모든 교착상태, 모든 상황에서 서방, 특히 미국이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는 이런 상황에 대해 때로는 매우 민감했고, 때로는 무감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항상 그냥 밀어붙였다. 그리고 결국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양측의 관계는 악화했고 입장은 단호해졌다. 2006년 딕 체니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서 공격적인 연설을 하며 발트해 국가들의 업적을 치하했다. 그는 “발트해 연안에 그렇게 큰 희망을 가져다준 시스템은 흑해의 먼 해안과 그 너머에도 같은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빌니우스에서도 사실인 것은 트빌리시와 키이우에서도 사실이고, 민스크에서도 사실이며, 모스크바에서도 사실이다.” 사무엘 차랍과 티모시 콜튼이 2014년 우크라이나 분쟁에 관한 훌륭한 짧은 역사서에서 언급했듯이, 누구나 패배하며, “그러한 성명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반응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1년 후인 2007년 뮌헨 안보 회의에서 푸틴은 러시아와 서방 간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으로 널리 여겨지는 상황에서 미국과 그 일극 체제의 오만함, 국제법 무시, 위선을 맹렬히 비난하며 자신의 대응을 발표했다. 그는 "러시아는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다”고 말하며,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를 가르치는 나라들은 스스로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경고가 있었지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2008년 4월 부쿠레슈티에서 나토 국가들은 만나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발표했다. 그 후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그것은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는 결정이었다. 가입이 안보상의 어떠한 혜택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국경 밖에서 중요한 군사 작전을 하던 러시아는 5일간의 결정적인 전쟁에서 그루지야를 물리쳤다.

돌이켜보건대, 나토가 더 빨리 움직여서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를 훨씬 더 일찍 받아들였더라면, 전쟁과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발트해 국가들은 나토에 가입한 뒤 옛 소련의 공화국이었음에도 러시아의 괴롭힘을 상대적으로 적게 경험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보가 고조되고 나토에 대한 ‘허용 한계선’에 대한 거듭된 경고에 직면했을 때 미국과 동맹국들은 각별히 신중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들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던 지역, 특히 우크라이나의 특수성을 고려했어야 했다. 레오니드 쿠치마의 유명한 말처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아니었지만, 폴란드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서방에 우호적인 유셴코 행정부가 추진한 2008년 우크라이나 나토가입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는 나토가입이 우크라이나 안에서 크게 지지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이 러시아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으며, 당연히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토와 EU가 모두 동쪽으로 더욱 확장함에 따라, 서방 세력은 그들과 우크라이나를 괴롭히려는 것으로 보이는 정권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옳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푸틴은 15년 동안 이번 침략에 대해 이런저런 형태로 경고해 왔다. 우리가 푸틴에게 훨씬 더 일찍, 더 강하게 대응해야 했다고, 즉 지금 러시아에 대해 행해지고 있는 제재가 2008년 그루지야 전쟁 이후 또는 2006년 알렉산더 리트비넨코의 런던 폴로늄 중독사건 이후보다 훨씬 더 일찍 시행되었어야 했다고 많은 사람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그런 운명적인 선택에 직면하지 않도록 안보와 경제 협정을 어떻게 마련할지 더 숙고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2008년 당시 그루지야 남오세티아로 진군하는 러시아 탱크 ©Photograph: Dmitry Kostyukov/AFP/Getty


4. 결단: 푸틴학개론

여전히 이 비극의 중심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유럽의 통합, 나토의 활성화, 자국의 경제 붕괴와 국가 고립 등 엄청난 전략적 실책으로 판단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살인적인 전쟁 범죄에 착수했다. 무슨 일일까?

푸틴의 능력, 지능, 도덕성에 대해 서로 다른 축을 따라 여러 대립적인 견해가 항상 있어왔다. 즉, 그를 악당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가 또한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그가 단지 러시아의 이익을 옹호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가 또한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5년 전 도널드 트럼프 당선 이후 푸틴에 관한 연구가 붐을 일으켰을 때, 나는 《가디언》에 푸틴이 기본적으로 러시아 맥락에서 “정상적인” 정치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존경받을 만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며 체첸에서 전쟁을 일으킨 방식은 그의 악의를 충분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나는 또한 그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역사, 소련 이후 과도기에 대한 러시아의 충격적인 경험, 옐친 정권의 내부 역학관계, 그리고 더 넓은 지정학적 맥락을 고려할 때 옐친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사람은 그의 이름이 블라디미르 푸틴이든 아니든 민족주의 권위주의자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문제는 푸틴이 아니었다면, 가상의 민족주의 권위주의자 리더가 과연 다르게 행동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보리스 옐친(체첸 1차 전쟁의 주인공)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그루지야 전쟁의 주인공)라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제한된 범주긴 하지만, 푸틴이 아니었다면 달랐을 것이라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푸틴이 이러한 질문을 무의미하게 만든 순간은 야당 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에 대한 신경작용제 암살 시도였다. 푸틴의 승인 없이 이런 살인 미수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다른 정치적 살인들은 내게는 덜 명확해 보였다. 예를 들어, 언론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와 정치인 보리스 넴초프가 체첸 군벌 람잔 카디로프의 명령에 따라 살해되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카디로프가 푸틴의 충실한 동맹이었던 동안에 그들은 한 몸 같은 사이였다. 아마도 이것은 의미 없는 구분일지 모르지만, 러시아에도 정치적인 삶과 사상의 자유가 적게나마 허용되고 있다. 물론 해를 거듭할수록 상황은 악화하고 있지만 말이다. 러시아의 독재 정권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사실을 종종 잊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러시아의 독재 정권의 실체를 보고 있다. 남아 있는 야권 언론이 모두 문을 닫았고, 언론인들은 15년의 징역형과 통제 불능인 경찰의 공격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푸틴이 단순히 구소련 이후 전형적인 러시아 정치인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푸틴은 어떻게 전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까? 여기에는 객관적인 요소와 주관적인 요소가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가 점점 더 서방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2013년 푸틴이 맹렬하게 반대했던 EU-우크라이나 연합 협정은 2014년 체결되어 2017년 발효되었다. 나토 가입 협의도 진행 중이었다. 이제 우크라이나에는 나토 무기와 나토 요원이 있다. 푸틴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 분리 독립 공화국을 만들어 우크라이나 정치를 장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역풍까지 불었다. 나토에 대해 미온적이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가입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친러 성향을 보였던 많은 사람은 러시아의 꼭두각시들이 분리 공화국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보았다. 불완전한 민주주의 국가인 우크라이나는 2021년 프리덤 하우스 척도에서 61점을 받았고,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인민 공화국(‘동부 돈바스’라는 포괄적 용어로 경쟁하고 있음)은 4점을 받았다.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푸틴은 크림 반도와 동쪽 일부 영토를 차지했지만 우크라이나를 잃었다. 유럽과 나토, 특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공약을 보여준 조 바이든의 당선 이후 상황은 푸틴에게 점점 더 불리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푸틴에게는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2015년 그는 무력을 통해 어느 쪽도 실제로 이행한 적이 없는, 힘겨운 평화 협정인 민스크-2 협정을 이끌어냈고, 우크라이나에 압박을 가해 도네츠크 공화국과 루한스크 공화국을 연방 우크라이나로 재통합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외교 정책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 2022년 그는 민스크-3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이전에 민스크 협정의 이행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우크라이나 정부에 맡겼다고 한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를 키이우에 세울 수도 있다. 침공 한 달 전, 영국 정부는 푸틴이 정확히 그렇게 할 계획임을 보여주는 첩보를 보유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다만, 여기서 주관적인 요인도 살펴보자. 돌이켜보면 푸틴은 왜 우크라이나와 같은 거대한 나라에서 이런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그는 체첸, 그루지야, 크림, 시리아에서의 이루어 낸 일련의 군사적 승리에 고무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서방의 설계에 대한 일종의 국제적인 스포일러가 됨으로써,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종종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또한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일로 용기를 얻었음이 틀림없다. 크림반도는 총성도 없이 러시아에 항복했다. 몇 주 후, 소수의 중년 용병 집단이 우크라이나로 100마일을 진군하여 슬로비얀스크라는 작은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고, 이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치열한 전쟁 국면에 불을 지폈다. 오합지졸 같은 병력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실제 군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보라.

푸틴이 우크라이나가 진정한 국가라고 믿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다. 이는 푸틴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가 왜 독립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푸틴의 경우 이런 생각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일종의 집착이 되었다. 푸틴이 아니었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지도자의 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독립된 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푸틴에게 이 과정은 우크라이나가 단지 러시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통제를 받게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는 푸틴이 정복한 우크라이나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동부에 자칭 인민 공화국을 운영하기 위해 괴뢰 정부를 세웠다. 젤렌스키를 문제가 생길 조짐이 보이면 달려갈 서구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한 것은, 그런 푸틴에게 아마도 당연했을 것이다.

2007년 뮌헨 안보회의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Photograph: Kai Pfaffenbach/Reuters


5. 종전: 끝은 어디에

거의 모든 사람이 우크라이나의 맹렬한 저항에 놀랐다. 푸틴은 물론이고 침공을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전쟁이 매우 빨리 끝날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던 서방 군사 분석가들, 그리고 어쩌면 우크라이나 국민 자신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전에 우크라이나를 연구한 사회학자들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국가를 위해 싸우겠다는 의지가 매우 높다고 지적했지만, 사회학자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실제로 나가서 싸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크라이나인들은 싸우기로 결심했다.

푸틴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윈스턴 처칠로 변신할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젤렌스키는 2019년 평화주의자 후보로서 선출되었다. 이 나라의 남동부 산업 지역 출신의 정치 초보자였던 그는 페트로 포로셴코와의 결선 투표에서 73%의 인상적인 득표율을 기록했다. 포로셴코의 선거 슬로건은 “군대! 언어! 믿음!”이었다. 반면 젤렌스키는 사이다처럼 일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사람,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푸틴과 협상할 의지를 보이는 사람으로서 선출되었다. 포로셴코의 선거 캠프는 젤렌스키가 나라를 팔아넘길 크렘린의 앞잡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젤렌스키에게 투표했다.

전쟁이 일어날 무렵,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는 더 이상 인기가 없었다. 그의 지지율은 20%대였다. 그는 돈바스 지역의 곪아가는 갈등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찾지 못했고, 반대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에서 푸틴의 핵심 인물로 여겨졌던 측근인 빅토르 메드베드추크는 가택 연금을 당했고, 여전히 젤렌스키의 주요 정치적 라이벌인 포로셴코는 2014년 메드베드추크와 분리주의 지역과 거래한 일부 사업 때문에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다가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젤렌스키는 위협이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의 경고성 발언을 비판했다. 침공 전날 밤, 그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그날 밤 푹 잘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첫 번째 미사일은 동트기 전에 목표물을 타격했다.

전날 젤렌스키는 러시아 국민에 대한 고뇌에 찬 마지막 호소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타협의 여지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평화로 가는 유일하며 확실한 길이었던 협정의 이행은 시간이 흐르면서 체결 당시보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훨씬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결국, 덩치 크고 화를 내는 이웃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마치 타협이라도 한 듯 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문가는 러시아의 침공이 위협적인 만큼, 젤렌스키가 러시아에 너무 많은 양보를 하며 타협하는 것도 위협적이라고 봤다. 아마도 정부 전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비겁한 항복을 통해서라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는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싸워왔다.

이제 러시아군이 재집결하여 우크라이나 도시들을 폭격하고 포격을 시작함에 따라, 나토 가입국들의정부들은 무고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살해되는 것을 공포에 떨며 지켜보거나, 아니면 더 깊이 개입하여 더 큰 분쟁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에 직면해 있다. 이것이 어디에서 멈출지 말하기 어렵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러시아 지도부가 계속 극단적 요구를 내세우는 가운데 타결은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만약 러시아가 온건한 요구를 한다면 젤렌스키가 그의 국민이 흘린 모든 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리고 실제로 국민이 이를 수용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언젠가는 전쟁이 끝날 것이고, 그 후 언젠가는, 아마도 희망하는 만큼 빠르지는 않겠지만, 러시아의 정권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러시아를 국제무대에서 맞이할 기회가 또 있을 것이다. 그때엔 우리의 대응이 구소련의 붕괴 이후와는 달라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지금은 고통과 동정 속에서 지켜보고, 기다릴 뿐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