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역사는 언어의 역사다. 인간이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인 한, 언어와 사건은 서로를 빚어낸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나 자신을 표현했고, 타인을 이해했다. 타인과 나 사이의 관계 역시 언어를 통해 형체를 얻었다. 그럼에도 때때로 언어는 무력해진다. 국가적 장벽, 민족적 차이, 정치적 셈법, 이해적 관계 등 다양한 장벽은 언어에게서 소통이라는 본질을 빼앗는다. 본질을 잃은 언어는 공허한 외침이 되어 허공을 떠돈다. 공허한 언어는 파편적인 기능으로 전락해 강압, 핑계, 자랑, 편견으로만 남는다. 지금 MBTI는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언어다. 어색한 자리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MBTI를 묻는다. MBTI를 통해 나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MBTI는 우리에게 어떤 소통을 가능케 하는 언어일까?
MBTI를 둘러싸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MBTI는 과학일까, 혹은 근거 없는 허상일까? MBTI는 10여 년 전 유행했던 혈액형별 성격 특징의 재림에 지나지 않는 걸까? A형이 소심한 사람이 된 것처럼 MBTI도 타인의 성격을 정의하는 손쉬운 방법인 걸까? 최근 한 카페에서 직원을 뽑을 때 MBTI 성격 유형을 요구해 논란이 됐다. 해당 카페의 지원 자격에는 “ENTJ는 지원 불가입니다”가 명시돼 있었다. 비판의 목소리는 거셌지만 다른 의견도 있었다. 몇몇은 MBTI 이전에도 특정 성격을 요구하고, 우대하는 건 자연스러웠다고 말했다. 세상은 MBTI 이전에도 타인의 성격을 도구화하고 나 자신의 성격을 파편화했다. MBTI 현상은 그 파편의 조각을 드러내는 매개체일 뿐이었다. 타인을 배제하고, 편견 속에 가두는 것을 혈액형과 MBTI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MBTI 유형을 구성하는 네 개의 알파벳은 분명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MBTI는 열여섯 가지로 성격을 패턴화한다. 패턴은 모든 예외를 고려하지 못하지만 개인의 독특성이라는 예외는 새로운 가능성이 되기도 한다. 행간이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 언어와 같다. “나는 누구인가?”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질문을 하는 ‘나’라는 주체와 답하는 ‘나’라는 객체 사이의 거리가 좁기 때문이다. MBTI의 네 가지 알파벳은 나와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 준다. 한편으로는 이 알파벳이 타인과 나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좁히기도 한다. 나는 행간에서 나만이 가진 독특한 역사를 보고, 타인과 소통할 힘을 얻는다. MBTI라는 언어가 만드는 긍정적 공백이다.
이곳저곳에서 불려 나오는 MBTI는 자신과 타인의 성격을 구분하고 구별 짓는 뿌리 깊은 구조의 현신일 수도, 동시에 소통을 본질로 삼은 긍정적 행간을 만들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언어라는 역사를 조각하는 인간이다. MBTI는 구시대적 언어에 머물 수도, 소통 장벽에 마주한 시대의 새로운 언어가 될 수도 있다. 언제나 세상은 새로운 언어를 고안했고, 고민했고, 사용했다. MBTI는 소통의 가능성을 고민하던 전후에 탄생했다.
MBTI를 만든 두 모녀는 기존 구조의 변두리에서 더 나은 사회를 꿈꿨다. 이들은 심리학 전공자도 아니고, 막강한 힘을 가진 기득권 남성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언어와 소통의 힘을 믿었고, 더 나은 구조를 위해 고민하는 현재와 장벽을 넘어 소통하는 미래를 바라봤다. 전후로부터 70여 년이 흘렀지만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시리아의 내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폭발음이 들리지 않는 전쟁과 혐오가 지속된다. 인간 역사는 언어의 역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견과 핑계로서의 MBTI가 아닌 소통을 위한 언어적 도구로서의 MBTI다. MBTI가 전쟁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전쟁과 혐오를 성찰하고 더 나은 구조를 고민할 수 있다. 현상이자 언어가 된 MBTI를 더 깊이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당신이 몰랐던 MBTI》는 그 고민의 여정을 함께하는 책이다. 저자는 MBTI 유형 각각에 대한 설명보다는 MBTI라는 검사 도구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았다. 한국 사회에서 심리검사도구는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MBTI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지, 올바른 활용은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는지 등이다. 어떠한 도구든 완벽히 옳거나 그르지 않다. 현명한 사용 방법을 익히는 게 중요할 뿐이다. 다르다고 틀리지 않다. MBTI가 그리는 세상은 ‘A World of Differences’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