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크 블랑큰(Henk Blanken)은 파킨슨병이 삶을 유지하고 싶은 시점을 넘어서까지 진행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그 순간이 찾아오면 의사가 죽음을 도와주는 것이 합법이지만,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반쪽짜리 인간이 되었다. 내 몸의 절반에선 경련이 일어난다. 소변을 볼 때 침을 흘리고, 눈이 내려 자작나무의 작은 가지 하나가 부러진 것만 봐도 눈물이 난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내 왼손이 어깨 위로 물을 엎지르기도 한다. 2011년 나는 51세의 나이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의사는 10년이나 15년 후에는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파킨슨병과 함께 늙어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의사는 “이 문제로 죽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했다.
그러나 형편없이 끝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파킨슨병의 전형적인 환자는 발병 8~10년 뒤에 장애가 온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전형적인 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환자가 다르다. 나는 진단을 받고 6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테니스 코트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나는 파도에 흔들리는 난파선이 되어 버렸다. 걸음은 비틀거렸고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 발을 질질 끌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과 의사는 뇌 수술을 할 시기가 왔다고 했다. 나는 ‘관찰’을 위해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른 환자들에게 익숙해지기까지 여러 날이 걸렸다. 남자 환자 세 명, 여자 환자 네 명, 총 일곱 명의 환자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터무니없는 떨림과 움직임을 보았다. 보행 보조기의 바퀴를 오른쪽으로 돌리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며 걷는 한 걸음 한 걸음. 한 환자는 시골에서 온 심술궂은 농부였는데, 낡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소변을 보고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에는 내 맞은편에 건장한 머리와 풍파에 시달린 눈빛을 가진 70대 남자 환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놀란 새처럼 웅크린 채 접시에 입을 가까이 대고 침을 흘리면서 양배추 절임을 먹었다. 때때로 음식이 그의 포크에서 떨어지거나, 벌겋게 부어오른 아랫입술에서 떨어졌다. 접시를 반쯤 비웠을 때 간호사가 상냥하게 음식을 조금씩 먹여 줬다. 그의 턱이 접시에 닿아서 회색 수염이 차가운 양배추 절임에 적셔졌다.
맙소사. 나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파킨슨병 환자는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언젠가 아내가 내 음식을 잘라 주고 신발 끈을 묶어 줘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가격이 적당한 노인 전용 스쿠터를 찾기 위해 이베이를 뒤졌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병원에서 지내고 난 뒤 “이런 문제로 죽지는 않을 겁니다”라는 신경과 전문의의 말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만약 모든 일이 잘못되면, 이것이 내 앞에 놓인 현실이고 심지어 나를 죽이지도 않을 것이었다.
무엇이 더 나쁠까? 파킨슨병에 동반되는 치매의 망각 증상일까, 아니면 고통스러운 신체적 장애일까? 혼란스러운 정신에 갇혀 있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말을 듣지 않는 몸에 갇혀서 맑은 정신을 가지는 것이 나은가?
최근 몇 년간 나는 친구 욥과 이런 종류의 물음에 대해 논의했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마치 장기 일기 예보를 하는 것처럼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욥은 알츠하이머병을 앓았고 기본적인 일상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버지처럼 요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간호사에게 쫓기면서 생을 끝내고 싶지는 않아.”
낡은 고관절이나 무릎 관절, 혹은 장기를 새것으로 바꾸고 평균 기대 수명이 계속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 뇌는 계속 노화하고 있다. 신경 퇴행성은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인간의 강한 욕망에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머지않아 우리 뇌는 불안정해지기 시작할 것이고, 신경 세포가 파괴되고 요양원에서 간호사와 환영과 우리 자신을 쫓으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나는 욥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장인 니코는 91세 때 한밤중에 장모를 침입자로 오인하고 부엌칼로 공격했다. 그는 그 사건 직후 노인 보호 기관의 폐쇄 병동에 들어갔다. 그 장면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유리문이 잠겼을 때 뒤에 두고 나온 치매 걸린 노인의 무력함,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그의 어리둥절한 눈. 몇 주 후 니코를 찾았을 때 그는 장모가 자신을 무시했다며 비난했다. 아내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는데, 장모가 눈물을 글썽이며 빵을 먹여 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저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나는 내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자발적 안락사
[1] 제도가 가장 잘 갖춰진 나라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안락사법에 찬성하는 측의 핵심 논리는 자기 결정권이었다. 즉 ‘내 죽음은 나의 것’이라는 뜻이다.
역사가 제임스 케네디(James Kennedy)는 네덜란드가 195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보다 더 보수적이고 더 종교적이며 덜 번영한 국가였다고 주장했다. 그 후 모든 것이 변했고, 이 무서운 나라는 선구자가 되었다. 윤리적 쟁점을 이끄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 마약을 용인하고, 낙태를 합법화하고, 매춘부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독실한 칼뱅주의자였던 우리는 1960년대에 대혼란 시대로 들어섰다. 교회들이 상점과 아파트로 바뀌었다. 20세기 말에는 기독교 정당들이 권력을 잃었고, 그들의 도그마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했다. 특정한 경우에 죽음을 돕는 것을 합법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국가 차원의 논의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2001년 네덜란드 의회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새 법에 찬성하는 측의 핵심 논리는 자기 결정권이었다. 즉 ‘내 죽음은 나의 것’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네덜란드 시민 열 명 중 아홉 명은 2002년 4월부터 시행된 안락사법을 지지한다. 이 법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참을 수 없고 절망적인 고통’이 있을 때, 자신의 생을 끝내기를 원하는 환자를 의사가 도울 수 있도록 허용한다. 예를 들어 폐암 환자가 각혈로 자기 피에 숨이 막혀 죽어 가는 것을 의사가 막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됐다. 새로운 환자 집단은 이 법을 보다 자유롭게 해석하려고 했다. 안락사의 범위를 확대하는 판결이 나올 때마다 또 다른 시민 집단이 더 진보적인 입법 운동을 벌였다. 새로운 요구가 나올 때마다 논쟁에 다시 불이 붙는다. 안락사 지지자들은 안락사법의 확장을 도덕적 진보라 평가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우리가 고령자나 심각한 정신 질환자처럼 ‘쓸모없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나치 독일을 연상시키는 사회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 논쟁은 주춤거리는 단계에 들어섰다. 매우 네덜란드답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이제 말문이 막힌 듯하다. 네덜란드 ― 다른 어떤 나라보다 모든 사람의 자발적인 죽음에 대한 권리를 믿고 싶어 하는 나라이자, 고통 없는 죽음을 환불 보장처럼 가볍게 말하는 나라 ― 는 치매와 죽음을 둘러싼 딜레마와 싸우고 있다.
사과 꽃이 피는 봄을 한 번 더 본 뒤에 깊은 치매에 빠지기를 원한다면, 일찍 안락사할 기회는 사라진다. 무덤으로 가는 긴 여정만 남을 뿐이다.
나는 2012년 9월의 춥고 비 오는 날에 욥을 처음 만났다. 그는 70대였다.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고 1년이 지났지만 욥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그러나 합창단의 요양원 공연 이야기를 20분 동안 세 번이나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치매가 이미 그의 단기 기억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욥은 자신의 병이 정신을 얼마나 잠식했는지는 몰랐지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그는 요양원에서 봤던 장면들을 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아내 제니와 함께 지낼 수 없는 날이 오면 차라리 죽기로 결정했다.
“그날은 어떨까?” 내가 물었다. 그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이들과 손주들이 작별 인사를 하러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의사가 와서 주사를 넣겠지.” 그가 말했다.
그건 다소 순진한 생각이었다. 한동안 제니와 욥은 그가 정한 시간, 다시 말해 욥이 더 이상 집에서 지낼 수 없을 그날이 오면 죽음을 도와줄 의사를 찾았다. 의사들은 욥의 고통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기 전에는 안락사를 실시할 수 없다고 했다. 욥이 “치매가 더 심해져서 내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뭘 해줄 수 있소?”라고 묻자, 의사들은 그 단계에서는 안락사를 행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욥이 이 딜레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치매는 안락사 사례에 특별한 문제를 제기한다. 네덜란드 법에 따르면 중증 치매 환자이면서 정신이 온전할 때 미리 안락사 사전 지시서(advance euthanasia directive)를 준비한 경우에 한해 의사에게 안락사가 허용된다. 욥은 그중 한 가지 조건만 충족했다.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매년 치매로 사망하는 1만 명 중 아마 절반이 안락사 사전 지시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의사가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법으로 허용되었으며 그들의 명백한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성인 열 명 중 네 명은 의사가 사전 지시서에 구속되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의사에게는 의무가 없다. 안락사는 합법이지만 권리는 아니다.
의사가 이 자비로운 살인에 독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욥 같은 경우 궁극적으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그들의 윤리적 기준이다. 사전 지시서는 의사가 안락사를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안락사가 합법이라 해도 심각한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에게 안락사를 행할 의사는 거의 없다. 그런 환자들은 ‘신중히 고려된’ 죽음을 요청할 정신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딜레마다. 죽음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건강한 치매 초기라면 죽기에는 ‘너무 이르다’. 아직 좋은 시절이 몇 년 남아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치매가 악화되어 죽음을 원할 때가 오면 더 이상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다’.
슬픈 이야기다. 네덜란드는 그토록 오랜 기간 죽을 권리에 대해 논의해 왔기에, 네덜란드인은 각자 원할 때 죽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실행하려고 하면 환자는 안락사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의사만이 결정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없다. 최악의 상태는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수천 명의 치매 환자에게 네덜란드의 안락사법은 완전히 실패다. 2017년 네덜란드에는 6585건의 공식적인 안락사가 있었다. 반면, 중증 치매 환자는 2012년 이래 단 일곱 명만 안락사했다. 치매 환자는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적정 시기’에 죽을 수 없다는 뜻이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수차례 올랐던 벨기에의 작가 휴고 클라우스(Hugo Claus)는 2008년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안락사를 선택했다. 클라우스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지만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정신 상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결정을 ‘용감’하다고 했지만 강한 비난도 있었다. 네덜란드에 이어 안락사를 합법화했지만 여전히 안락사를 큰 죄로 간주하는 가톨릭교회의 반대에 직면한 벨기에에서 특히 비난이 거셌다.
하지만 클라우스의 죽음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사회학자 휴고 반 데르 베든(Hugo van der Wedden)은 치매 환자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사람들도 이전보다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법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일부 의사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기존 해석을 바꾸었다. 미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몇몇 의사들은 치매 초기 단계의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딜레마는 남아 있다. 환자는 자신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갖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너무 오래 머물고, 사과 꽃이 피는 봄을 한 번 더 본 뒤에 깊은 치매에 빠지기를 원한다면, 일찍 안락사할 기회는 사라진다. 무덤으로 가는 긴 여정만 남을 뿐이다.
2002년 이후 치매에 걸린 네덜란드인 15만 명이 사망했다. 이들 중 수만 명이 안락사 사전 지시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너무 일찍’ 죽음을 택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너무 늦게’ 죽었다. 안락사법이 발효된 후 처음 몇 년 동안 중증 치매 환자 중 아무도 그들이 원했던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었다. 최근 몇 년간 치매 환자는 100명 중 한 명만 차선책을 택해 ‘너무 일찍’ 안락사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2017년 5월 8일 의사의 조력으로 안락사한 욥이었다.
우리가 뒤에 남겨지게 될 때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내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은 명백하다.
2016년 2월 어느 월요일 저녁, 150만 네덜란드 시청자들은 TV에서 해니 고드리안이라는 여성이 죽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다큐멘터리는 안락사 직전의 해니를 보여 줬다. 누군가가 해니에게 물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말 알고 있느냐고.
“무슨 뜻이죠?”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는 왜 의사가 병실에 들렀는지 알고 있을까?
“아,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 정말 가길 원해?” 그녀의 남편 게릿이 말했다.
“음, 원해. 준비됐어. 단숨에.”
“확실해?” 게릿이 다시 물었다.
“응.”
화면 속 해니 고드리안은 짧은 회색 머리칼의 나이 든 여성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얇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나한테 미안하지 않아?” 안락사 담당 의사가 해니의 반대편에 앉았을 때 게릿이 물었다.
“미안하지. 그래서 서두르는 거야.” 해니가 말했다.
“때가 됐어, 여보.” 게릿이 말했다. “용기를 내. 당신 정말 오랫동안 용감했어.”
그는 아내에게 팔을 두르고 아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마치 아내에게서 평안을 구하는 것처럼. 해니는 남편이 하는 대로 뒀다. 남편이 그녀를 안았다. 해니의 왼손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과 투명한 링거줄은 의사가 들고 있는 주사기와 연결되어 있다. 의사는 다른 손으로 해니의 왼 손가락 두 개를 쥐었다. 그러고 나서 정맥에 용액을 주입했다. “무서워.” 68세의 해니가 죽기 전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