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이, 인터넷을 기회로 만들다
완결

이베이, 돈 되는 인터넷의 창세기

인터넷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구글이나 페이스북, 아마존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인터넷을 가장 먼저 정복한 기업은 이베이였다.

이베이의 독일 사옥, 2006년. ©Photograph: Sean Gallup/Getty Images

1. 이베이의 탄생

1995년 9월의 어느 주말, 피에르 오미디아르(Pierre Omidyar)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웹사이트를 하나 만들었다. 처음 만들어 본 웹사이트는 아니었다. 28세가 될 때까지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을 위한 공식이라고 할 수 있는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코딩하는 법을 배웠고, 이듬해에는 그가 만든 스타트업을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가 인수하면서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이미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르게 될 예정이었다. 그는 핸드헬드(handheld) PC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이 분야는 차세대 혁신 산업으로 널리 주목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남는 시간에 인터넷에서 본업 이외의 프로젝트들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그가 새로 만든 웹사이트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바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팔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에는 온라인에서 물건을 사고판다는 것이 상당히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1995년 5월에 빌 게이츠(Bill Gates)는 장차 인터넷이 회사의 최우선 사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메모를 마이크로소프트 사내에 돌렸다. 같은 해 7월에는 투자은행 출신의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가 아마존닷컴(Amazon.com)이라는 온라인 스토어를 개설했는데, 그는 이곳이 “지구상 최대의 서점”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달에는 당시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웹브라우저를 만든 넷스케이프(Netscape)가 기업공개(IPO)를 진행했다. 넷스케이프는 그다지 수익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장 첫날 거래가 마감될 무렵이 되자 거의 30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기업이 되어 있었다. 월스트리트는 이런 상황을 주목하고 있었다. 닷컴버블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1995년 당시에는 인터넷의 미래가 황금빛인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인터넷이 수백만 명의 신규 사용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었을 수는 있다. 1995년 당시의 인터넷 사용자는 전년에 비해 76퍼센트가 늘어나서 거의 4500만 명에 육박했지만, 사용자에게 그다지 친화적이지는 않았다. 콘텐츠를 찾기도 까다로웠다. 사용자들은 수많은 하이퍼링크(hyperlink)로 연결된 사이트들을 돌아다니거나, 현대적인 검색 엔진이 등장하기 전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포털 사이트인 야후(Yahoo!)가 수작업으로 만든 디렉터리(directory)에 있는 페이지들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찾아서 볼 수 있는 콘텐츠 자체도 많지 않았다. 1995년에 인터넷상에 존재했던 웹사이트는 겨우 2만 3500개 정도에 불과했다. (참고로 5년 뒤에는 그 수가 1700만 개를 넘게 된다.) 당시에 존재했던 대부분의 웹사이트는 엉망이었으며 제대로 이용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초기의 웹이 보여주었던 소박함과 느림의 미학은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비교적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단순히 인사를 하거나, 반려동물의 사진을 올리거나, 〈스타 트렉(Star Trek)〉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기를 원했다.

오미디아르도 이런 형태의 온라인 활동을 좋아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인터넷에 심취해 있었으며, 온라인상의 다양한 커뮤니티에도 참여했다. 그러던 그는 이제 닷컴 분야에 점점 더 많은 돈이 흘러드는 현상을 약간의 우려 섞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훗날 그가 어느 기자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당시 인터넷에 올라탄 기업들은 사람들을 그저 “지갑과 조회수(wallets and eyeballs)”로만 여겼다고 한다. 상업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의 비즈니스는 조잡하고 형편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마치 좀비처럼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했는데, ‘이곳을 보세요’, ‘이곳을 클릭하세요’, ‘여기에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하세요’와 같은 식이었다. 이런 점들은 그가 알고 있었던 인터넷의 참여적인 속성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오미디아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직접 생산자가 될 수 있는 힘을 주고 싶었는데, 물론 소비자 역할도 겸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1995년 9월에 웹사이트를 만든 것이다. 그는 이곳을 옥션웹(AuctionWeb)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는 누구든 무언가 판매할 물건을 올릴 수 있었고, 누구라도 경매에 응할 수 있었으며, 해당 물품은 가장 큰 금액을 제시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것은 마치 경제학 교재에서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완벽한 시장이었다. 경쟁이라는 놀라운 과정을 통해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게 되고, 상품의 진짜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완벽한 시장이 만들어지려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옥션웹은 바로 그런 전제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다.

이 사이트는 빠르게 성장했다. 개설 둘째 주에는 야마하(Yamaha) 오토바이, 슈퍼맨 캐릭터 도시락, 마이클 잭슨의 사인 포스터 등이 판매목록에 올랐다. 1996년 2월이 되자 오미디아르가 이용하던 호스팅 업체에서 월 이용료를 인상할 정도로 트래픽이 빠르게 증가했다. 그래서 그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중개수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거의 곧바로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부업으로 시작했던 프로젝트가 어엿한 비즈니스가 된 것이다.

그러나 완벽해야 했던 시장이 실제로는 완벽하지 못한 마켓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구매자들과 판매자들 사이에 수많은 분쟁이 발생했고, 오미디아르에게 중재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쳤다. 하지만 그는 심판 역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용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법을 떠올렸다. 포럼(forum)을 만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피드백을 남기면서 일종의 점수 시스템을 만든다는 방안이었다. 그는 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게재했다. “칭찬할 만한 사람들은 칭찬하고, 비판해야 할 사람들은 비판하십시오.” 부정직한 사용자들은 쫓겨나고, 정직한 사용자들은 보상받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용자들이 제 역할을 해주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처럼 야심 찬 계획의 성공 여부는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에 달려 있습니다.”

옥션웹의 운명은 사용자들이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사용자들이 더욱 많이 기여할수록, 이곳은 더욱 유용한 사이트가 될 수 있었다. 만약에 이 마켓이 하나의 커뮤니티가 된다면, 그건 다름 아닌 사용자들 스스로 만드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들은 오미디아르가 바랐던 것처럼 소비자이자 생산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용자들은 결국엔 콘텐츠도 만들어서 나중에 이 사이트를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1996년 여름이 되자 옥션웹은 한 달에 1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오미디아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 일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원래 전자상거래 열풍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으나, 결국엔 성공적인 전자상거래 기업을 만든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1997년, 그는 이 사이트의 이름을 이베이(eBay)로 바꾸었다.

2. 인터넷이 돈을 번다는 신화

이베이는 인터넷 초창기에 설립된 대기업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일찌감치 수익성을 확보했고, 닷컴 시대의 거물로 성장했으며, 닷컴 버블의 붕괴를 거치면서 살아남았고, 지금도 여전히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 기업들 가운데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그런데 이베이의 성공 사례가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뭐냐 하면, 설립 초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훗날 ‘플랫폼(platform)’이라고 알려지게 되는 현상의 핵심적인 특성들을 예상하였느냐 하는 점이다. 이베이는 단지 수집가들이 희귀한 비니 베이비스(Beanie Babies) 인형을 두고 늦은 밤에 입찰 경쟁을 벌이는 장소가 아니었다. 돌이켜 보자면 그곳은 인터넷의 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오미디아르가 만든 이 사이트가 인터넷에 잠재되어 있었던 수익화 기법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개척했던 것이다. 나중에 구글과 페이스북을 비롯한 기술 대기업들이 스스로를 ‘플랫폼화’ 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베이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비유를 들어도 인터넷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의 비유는 다름 아닌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다. 플랫폼이라는 용어는 원래 기술적으로 특정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개발자들이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수 있는 운영체제(OS)와 같은 기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는 온라인에서 실행되는 다양한 유형의 소프트웨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요즘에는 특히 기술업계의 거대 기업들이 배포한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마이크로소프트연구소(Microsoft Research)의 탈튼 길레스피(Tarleton Gillespie) 수석연구원은 ‘플랫폼’이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이렇게 변화한 것이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서비스를 ‘플랫폼’이라고 지칭함으로써, 구글과 같은 기업들이 개방적이며 중립적이라는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를 단지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조연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그들이 우리의 디지털 생활공간을 통제하고 있으며 그런 공간의 질서를 확립하는데 있어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호해진다. ‘플랫폼’이라는 단어는 부정확한 표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디지털 공간의 정체를 명확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는 단어이다.

인터넷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로는 초창기부터 인터넷의 설계자들을 안내해왔던 스택(stack)이라는 개념이 있다. 스택이란 차례대로 쌓아 올리는 일련의 층 구조를 말한다. 건물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자면, 맨 아래에 지하실이 있고, 그 위에 1층이 있고, 그 위에 다시 2층이 있고, 그렇게 계속 올라가서 맨 위에는 옥상이 있는 구조를 스택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의 위층에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아래쪽에 위치한 시설들에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에 2층의 욕실에서 샤워한다고 예를 들면, 일단은 지하의 수도관에서 찬물을 끌어 올려서 보일러로 가열해야 하며, 그걸 다시 파이프를 통해 욕실까지 올려보내야 한다.

인터넷에도 그와 비슷한 지하실이 있으며, 그 지하실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주로 파이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파이프들이 실어 나르는 것은 바로 데이터이다. 그리고 우리가 스택의 위쪽에서 수행하는 모든 일들은 이러한 파이프들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가능하다. 스택의 맨 위쪽에는 수많은 웹사이트와 앱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이메일을 보내거나 트위터를 확인하거나 동영상을 스트리밍하는 등 스크린의 픽셀을 통해서 인터넷을 실제로 경험하는 위치도 바로 이곳이다. 기술 기업들이 ‘플랫폼’이라고 부르는 이런 웹사이트와 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터넷의 사유화’라는 방대한 이야기 일부로 파악해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인터넷은 1970년대에 미군의 연구자들이 만든 실험적인 기술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80년대에는 정부가 소유한 컴퓨터 네트워크로 성장했는데, 주로 학계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유화가 시작되었다. 인터넷의 사유화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공공 영역에서 민간 부문으로의 소유권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들이 네트워크의 모든 계층에 이윤추구라는 목적을 프로그램으로 새겨 넣은 훨씬 더 복잡한 움직임이었다. 인터넷은 원래 과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구축한 시스템이었지만, 그것이 이제는 사적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수십 년에 걸쳐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관련 규제, 기업가 정신 등을 장악했다. 그리고 인터넷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공간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인터넷 사유화의 절차는 맨 밑의 파이프에서 시작되었고, 그다음에는 스택의 위로 뻗어나갔다. 오미디아르가 훗날 이베이가 되는 웹사이트를 개설하기 불과 다섯 달 전이었던 1995년 4월, 미국 정부는 민간 부문이 네트워크의 배관을 장악하는 걸 허용했다. 수많은 가정과 기업들이 온라인에 접속하기를 원했으며, 통신회사들은 그들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도와주면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온라인에 접속하게 만들면서 벌어들이는 돈은 시스템 전체에 잠재된 수익 일부에 불과했다. 투자자들의 자본을 실질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하는 행동으로부터 돈을 벌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다음 단계는 사람들이 실제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위층에서 수익을 최대화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진짜 금맥은 인터넷 접속을 유료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의 활동을 수익화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미디아르가 효율적으로 해냈던 일이다. 그는 온라인에 사람들이 물건을 사거나 팔고 싶어 하는 공간을 만들었고, 그 거래에서 수수료를 받았다.

닷컴 붐은 1995년 8월에 넷스케이프가 성대하게 IPO를 단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수만 개의 스타트업이 설립되었고, 그들에게 수천억 달러의 자금이 흘러들었다. 벤처 자금은 광분 상태에 빠졌다. 1995년부터 2000년 사이에 미국 전체의 벤처 캐피털 투자액은 120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수백 개의 닷컴 회사들이 상장했고, 그들의 주가는 상장하자마자 치솟았다. 닷컴 붐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 기술주들의 가치는 5조 달러가 넘었다. 이베이는 1998년에 상장했는데, 거래 첫날 그들의 기업가치는 2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주가 상승이 지속되면서, 오미디아르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2007년 보스턴 컨벤션 전시 센터(Boston Convention and Exhibition Center)에서 개최된 이베이의 라이브 이벤트 ©Photograph: MediaNews Group/Boston Herald/Getty Images

3. 닷컴 버블의 민낯

그러나 당시에 스타트업들이 거액의 투자를 끌어모으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다. 거창하게 선전했던 수익은 대체로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2000년에 거품이 터지기 시작했다. 블룸버그 미국 인터넷 지수(Bloomberg US Internet Index)에 등록된 280개의 종목에서 3월부터 9월 사이에 거의 1조 7000억 달러가 사라졌다. 당시 CNN의 어느 기자는 “한 분야의 산업이 이렇게 빠르고 완전하게 증발해버리는 것은 상당히 보기 드문 일”이라고 논평했다. 다음 해에는 훨씬 더 심각한 소식이 들려왔다. 닷컴 시대가 사망한 것이다.

요즘에는 그 시기를 일반적으로 집단적 광기의 사례로 기억한다. 당시에 연방준비제도(FR)의 의장으로 재직했던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은 잘 알려졌듯이 닷컴 버블을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라고 명명했다. 당시의 어리석음을 가장 잘 대표하는 사례이자 이후에도 자주 언급되곤 하는 기업이 바로 온라인에서 반려동물용품을 판매했던 펫츠닷컴(Pets.com)이라는 스타트업이다. 이 회사는 전혀 수익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슈퍼볼(Super Bowl) TV 광고를 포함하여 거액의 광고비를 집행했다. 그리고 2000년 2월에 IPO를 하면서 8250만 달러를 조성했지만, 아홉 달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닷컴이라는 실험이 실패한 데에는 오만과 탐욕, 허황된 생각, 그리고 비즈니스적으로 잘못된 결정 등이 모두 작용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따로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해당 기업들의 투자자들과 경영진들은 당시의 시기를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닷컴 기업들이 인터넷 사유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 애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즉, 그들은 인터넷의 스택 구조에서 사유화의 단계를 하나 더 위로 밀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에는 그러한 시도를 현실화 시켜줄 수 있는 컴퓨팅 시스템이 지금까지 갖춰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기업들은 사용자의 활동으로부터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분석하면서,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인 포섭과 “실질적”인 포섭을 구분했다. 형식적인 포섭으로 보자면, 기존의 노동과정(labour process)이 그대로 유지되되, 자본주의적 기반에서 노동이 수행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먹거리를 직접 재배하던 소작농이 다른 누군가의 농장에서 일하는 임금 노동자가 되는 식이다. 그가 밭에 나가 작업하는 방식은 동일하게 유지된다. 반면, 실질적 포섭으로 본다면 노동과정이 자본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혁신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전까지는 자본이 기존의 노동과정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이제는 자본이 노동과정을 다시 만들게 된다. 다른 사람의 농장에서 일하는 임금 노동자가 된 예전의 소작농은 이제 현대적인 공장식 농장의 산업화한 시스템 속으로 통합된다. 그가 일하는 방식은 완전히 바뀐다. 그의 일과에서 예전의 소작농들이 하던 것과 닮은 부분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형태의 계약은 농장주가 더 많은 이익을 거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 의도 그대로의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분석은 인터넷의 진화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그리고 닷컴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유용한 관점이다. 1990년대 중후반에 인터넷의 사유화가 진행되긴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수익 창출에 최적화된 상태는 아니었다. 연구자들을 위해 설계된 초기 시스템의 형태가 너무 많이 남아 있었고, 이는 인터넷에 새롭게 요구되는 사항들에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형식적 포섭은 이루어졌지만, 실질적 포섭은 여전히 요원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실질적 포섭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새로운 유형의 시스템 구축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발전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공장식 농장의 디지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닷컴 기업인들을 소모시키고 결국엔 그들을 무너뜨리고 말았던 문제, 다시 말해서 스택의 위쪽으로 사유화의 단계를 어떻게 끌어올리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찾아왔던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베이는 그 해결책이 어떤 모습인지를 처음으로, 얼핏 보여주었다.

4. 이베이, 자유주의자가 설계한 유토피아

이베이는 사용자들을 독려해서 그들과 함께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들은 물품을 올리는 판매자인 동시에 입찰에 참여하는 구매자였으며 포럼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피드백을 작성하는 평가자였다. 그들의 기여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베이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미디아르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베이를 구축함에 있어서 일종의 전통을 활용했다. 1971년, 레이 톰린슨(Ray Tomlinson)이라는 프로그래머가 이메일(email)을 개발했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이다. 톰린슨은 펜타곤이 미국 전역의 컴퓨터들을 연결하기 위해 만든 최첨단 네트워크였으며 인터넷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파넷(Arpanet)의 사용자였다. 이메일은 아르파넷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이메일은 처음 개발된 지 불과 2년 만에 아르파넷을 오가는 모든 네트워크 트래픽의 4분의 3을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1980년대를 거치며 인터넷이 성장하면서 이메일은 훨씬 더 널리 보급되었다. 멀리 떨어진 사람과 즉시 메시지를 교환할 수 있는 이메일의 기능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유형의 협업과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는데, 특히 최초의 온라인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는 메일링 리스트(mailing list)를 통해서 그런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메일은 유용한 도구 그 이상이었다. 인터넷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면서 케이블과 컴퓨터로 구성된 차가운 공간을 사람이 사는 곳처럼 느끼게 만들어준 것이다. 인터넷은 이제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고 낯선 사람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곳은 정치에 관해 토론하거나 공상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프로토콜(protocol)을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에 대하여 논의하는 곳이 되었다. 이곳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였다. 나중에 등장하는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것도 이러한 커뮤니티적인 속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월드와이드웹을 만든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는 훗날 이렇게 쓴다. “나는 사람들이 더 쉽게 서로 협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월드와이드웹을 만들었다.”

오미디아르가 인터넷에 관하여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점도 바로 그곳이 가진 커뮤니티라는 속성이었으며, 그러한 특성이 닷컴이라는 골드러시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음을 우려했다. 오미디아르 혼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급진적인 메일링 리스트들에서는 인터넷의 상업화로 인한 영향력에 대하여 격분을 토로하는 반체제 인사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미디아르는 반-자본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시장이 가진 해방의 힘을 믿었다. 그는 인터넷의 상업화에 반대하지 않았다. 상업화는 다만 인터넷이 취하고 있는 특정한 형태일 뿐이었다. 조잡한 디지털 매장을 개설하고 웹이라는 공간을 배너 광고로 도배하는 기업들은 상업화라는 걸 엉터리로 실행하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사용자들을 단지 소비자로만 취급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터넷이 사회적 매개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베이는 이러한 사실에 굳건히 기반을 두고 있었다. 옥션웹이라는 이름으로 첫선을 보였을 때부터, 그들의 웹사이트는 스스로를 커뮤니티라고 설명했으며, 이러한 자기규정은 그들의 정체성과 회사의 운영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오미디아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시장의 공세로부터 커뮤니티를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커뮤니티를 하나의 시장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그 둘을 서로 융합하는 것이었다.

인터넷의 미래를 정확히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빌 게이츠에게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오미디아르가 옥션웹을 선보였던 것과 같은 해인 1995년에 게이츠는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이라는 책을 공동으로 출간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였던 그는 이 책에서 인터넷을 “궁극의 시장”으로 바라본다는 자신의 관점을 제시했다. “인터넷은 우리 사회적 동물들이 물건을 팔고, 거래를 하고, 투자를 하고, 가격을 흥정하고, 물건을 고르고, 논쟁을 벌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어울리는 공간이 될 것이다. 뉴욕의 증권거래소나 농산물 직거래 장터나 서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매혹적인 이야기와 정보를 찾아서 북적거리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된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계약에서부터 가벼운 썸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인간적인 행위들이 펼쳐질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회적인 관계가 마켓에서의 관계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합쳐진다. 인터넷은 이러한 결합을 위한 도구이다. 그것은 자본의 간판을 내걸고 그 아래에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다. 게이츠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책인 출간되던 당시에 옥션웹은 이미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커뮤니티와 마켓의 결합은 수익성의 측면에서도 뛰어난 혁신이었다. 주로 커뮤니티의 형태로 위장하여 이뤄지는 상호작용은 마켓의 재무적 가치를 더욱 강화해주었다. 옥션웹은 커뮤니티라는 기치를 전면에 내걸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구매자들과 판매자들은 피드백을 교류하는 포럼에서 서로에게 별점을 매기거나 배송 방법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등의 활동을 무료로 수행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그리고 더욱 많은 사람이 이러한 활동에 참여할수록, 그곳은 더욱 매력적인 공간이 될 수 있었다. 더욱 많은 사람이 옥션웹을 이용한다는 것은 그곳에는 더욱 많은 상품이 등록되어 있고, 더욱 많은 구매자가 경매에 입찰하며, 더욱 많은 피드백이 포럼에 게재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곳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그곳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이러한 현상을 경제학자들은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라고 부른다. 비즈니스가 급성장하더라도 인터넷에서는 그에 대한 대비가 상당히 쉬운 편이다. 물리적인 사업장을 갖추어야 하는 오프라인 비즈니스와 비교하자면, 호스팅(hosting) 용량을 늘리는 작업은 훨씬 더 간단하면서도 저렴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이유는, 특정한 규모에 도달하면 네트워크 효과가 작용하여 경쟁우위의 요소들을 거의 독점하게 되고, 다른 경쟁업체들은 그러한 장벽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또 하나의 장점은 그들의 웹사이트가 가진 중개인으로서의 역할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닷컴 기업들은 자신들이 직접 상품을 판매했다. 그래서 펫츠닷컴(Pets.com)은 고객들의 문 앞까지 반려동물 음식 배송하기 위하여 거액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베이는 구매자들과 판매자들을 서로 연결만 해주었고, 배송 비용은 그들에게 떠넘겼다. 이런 방식 덕분에 이베이는 사용자들의 거래로부터 수익을 거두면서도 회사 조직은 최소한의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재고도 없었고 물류창고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웹사이트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옥션웹은 단순히 중개 역할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이 교류하는 방법에 대한 규칙을 제정하는 규제기관이었으며, 사람들이 그렇게 교류하는 공간을 만드는 설계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할은 처음부터 오디미아르의 계획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원했던 것은 구성원들에 의해 운영되는 마켓이었으며, 그러한 마켓이 바로 자신의 자유주의적 신념이 이상적으로 구현된 형태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그가 피드백을 위한 포럼을 만든 배경에도, 시장은 본질적으로 자기조직화(self-organisation)를 한다는 이념이 투영되어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더해서 수많은 분쟁에 더 이상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도 반영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그들의 사이트가 특정한 유형의 통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면 이 마켓은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피드백을 나누는 포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언제부터인가 사용자들이 친구들에게는 칭찬의 글을 남기고 적들에게는 악의적인 리뷰어(reviewer) 무리를 보내면서 피드백을 조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회사가 계속해서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개입했던 이유는 단지 마켓을 관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상품 카테고리들을 통해서 더욱 많은 구매자와 판매자들을 끌어들이고 새로운 국가들로 진출함으로써 마켓을 더욱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1998년에 이베이가 상장한 이후 주주들이 이 회사에 부과한 명령이었다. 사회학자인 케이반 카슈쿨리(Keyvan Kashkooli)는 이베이의 발전에 관해 연구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초기에는 잠시 주저하긴 했지만, 이 회사는 점점 더 그곳을 지배하게 되었다.” 회사의 수익성이 더욱 증가하면서 사이트 전체에서 사용자들을 규제하는 규칙을 제정하든, 아니면 이용자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든, 어쨌든 사람들의 행위를 관리할 필요가 생겼다.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그리고 중개자인 동시에 통치권자이기도 한 그들의 독특한 지위로 인하여 이베이는 손쉽게 수익을 창출했다. 2000~2001년에 버블이 붕괴했을 때도 그들은 거의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닷컴 버블 붕괴의 여파로 투자자들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으며 궁지에 몰린 기술업계는 스스로를 재창조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결국 기술업계가 제시한 아이디어는 이베이가 초기에 성공의 기반을 형성했던 생각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베이가 미친 영향력은 의도적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직접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관련성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었다. 1990년대 중반에 오미디아르가 만든 커뮤니티 마켓은 미래를 내다본 일종의 창구였다. 이후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것은 상당히 원시적이었다. 그리고 인터넷이 아직 수익의 극대화라는 목적을 위해 리모델링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엔 시스템이 리모델링에 성공하고 인터넷을 더욱 완전한 형태로 사유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오미디아르가 실행했던 기본적인 패턴들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새롭게 거듭난 시스템들은 스스로를 플랫폼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가장 많이 닮아 있었던 것은 쇼핑몰이었다.
 
미네소타의 블루밍턴(Bloomington)에 있는 몰 오브 아메리카(Mall of America) 쇼핑몰 ©Photograph: Star Tribune/Getty Images

5. 인터넷의 석탄, 데이터

최초의 현대식 쇼핑몰이 지어진 시기는 1956년이었고, 그 장소는 미국 미네소타의 이다이나(Edina)였다. 이곳의 설계자인 빅터 그루엔(Victor Gruen)은 비엔나 출신의 유대계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미국의 자동차 문화를 좋아하진 않았다. 그는 20세기 중반에 교외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포드(Ford) 자동차 밖으로 끌어내고, 유럽의 대도시에서 즐기는 것과 같은 “풍요로운 공공 사회생활”을 연상시키는 장소로 불러 모으고 싶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단지 가게 매장만이 아니라, 도서관과 영화관과 커뮤니티 센터를 제공하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설계한 쇼핑몰은 상호교류의 공간이 되어야 했으며, 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아울렛’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도시에서와는 다르게, 쇼핑몰에서는 이러한 어울림이 통제된 환경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 도시 생활의 혼란스러움이 합리적으로 설계된 절제미로 대체되는 것이었다.

그루엔의 발명품은 점차 인기를 끌면서, 처음에 그가 제시한 비전의 상당 부분은 그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상업적 활동과 공공의 광장이 결합한 환경을 조성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루엔이 남긴 유산은 자본주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설계자들은 이러한 쇼핑몰을 가리켜서 ‘사유화된 공공 공간’이라고 평가했다.

인터넷이라는 스택(stack)의 가장 위쪽에 있는 생활을 지배하는 시스템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쇼핑몰의 개념을 대입시켜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학자인 야탄 사도프스키(Jathan Sadowski)는 생각한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쇼핑몰들은 그들이 인터넷이라는 공공 공간을 사유화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플랫폼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 그곳은 울타리로 둘러싼 기업의 사유지이며, 그러한 울타리 내에서만 다양한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현실에서의 쇼핑몰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호작용들 가운데 일부는 판매자에게서 옷을 사는 것과 같은 상업적인 행위도 있으며, 일부는 친구들과 놀러 가는 것과 같은 사교적인 행위들도 있다. 그러나 온라인 쇼핑몰이 오프라인 쇼핑몰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데이터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무언가를 클릭하거나, 채팅을 하거나, 게시글을 올리거나, 검색을 하는 등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움직임은 디지털 형태의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이러한 흔적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기회를 제공해준다.

오프라인 쇼핑몰의 주요한 비즈니스는 임대업이라고 할 수 있다. 쇼핑몰의 소유주는 세입자들에게 임대료를 부과하는데, 기본적으로는 각 매장의 매출액에서 일정 부분을 가져간다. 온라인 쇼핑몰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데, 이베이가 초기에 보여준 것처럼 그들은 사이트 내에서 이뤄지는 거래에서 수수료를 받는다. 그러나 사도프스키가 지적하는 것처럼 온라인 쇼핑몰들은 또 다른 형태의 임대료도 얻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데이터 임대료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발생한 활동으로 생성되는 디지털 흔적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사유지 내부를 구석구석까지 통제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유지의 형태를 수정하는 것도 새로운 코드를 적용하면 될 정도로 간단한 문제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키텍처(architecture)를 변경하여 사이트 내에서의 활동이 더욱 많은 흔적을 생성하게 만들거나 다른 유형의 흔적을 남기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흔적들은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 요즘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그런 흔적들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이 필수적인 업무가 되었을 정도이다. 오미디아르가 만든 커뮤니티 마켓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상호교류를 장려하고, 그러한 상호작용을 위한 규칙을 제정하며, 더욱 많은 사람끼리 상호작용을 할수록 더욱 많은 이익을 얻는다. 그런데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며, 결국엔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수익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데이터는 타깃 광고(targeted advertising)를 판매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알고리즘에 의한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여 개별 노동자들로부터 더욱 많은 수익을 뽑아낼 수 있다. 또한 머신러닝(ML) 모델을 훈련해서 챗봇(chatbot)과 같은 자동화된 서비스를 개발하고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게 개발된 챗봇은 인건비를 줄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고객 서비스가 개선되기 때문에 새로운 수익원을 열어줄 수도 있다. 데이터는 또한 투자자들 사이에서 기술 기업들이 단지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믿음이 지속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온라인 쇼핑몰이 예전의 형태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데이터를 생성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데이터를 활용하기 위하여 설계되어 있다. 데이터는 그들의 핵심 원칙이며 필수요소이다.

때로는 데이터를 석유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석탄에 비유하는 것이 좀 더 비슷하다. 석탄은 증기기관에 처음으로 동력을 공급해 준 연료였다. 석탄은 19세기에 장인들의 수작업을 산업적인 기반으로 바꾸고 공방 작업을 공장 시설로 전환하면서 제조방식이 자본주의적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촉진해 주었다. 데이터도 비슷한 역할을 해왔다. 데이터는 연구용 네트워크의 잔재를 제거하고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엔진을 완성하면서 인터넷이 자본주의적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촉진시켜 주었다.

1995년 당시에만 하더라도 우리는 인터넷이 이토록 엄청나게 복잡한 시스템이 될 것이라고는 좀처럼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옥션웹의 등장이라는 커다란 한 걸음이 있었기에 그것은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현대의 인터넷에 관하여 이야기를 할 때면 주로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우리의 온라인 생활을 장악한 빅테크 기업을 논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기 이전에도 이미 현재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 선례가 있었다. 그것은 소일거리로 시작했으나 우연히 성공을 거두었다. 이베이는 인터넷에서 막대한 돈을 벌기 위한 기본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글은 벤 타노프(Ben Tarnoff)의 《사람들을 위한 인터넷: 우리의 디지털 미래를 위한 싸움(Internet for the People: The Fight for Our Digital Future)》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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