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교수는 인구 감소와 노령화, 저출산 등으로 인한 도쿄의 빈집 문제에 주목했다. 고바야시 교수는 도쿄의 중심부에서 동쪽에 위치한 스미다(墨田)구에 필요한 건축 형태를 제안했다. 이 지역은 도쿄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마스터플랜이 적용된 곳이다. 도쿄는 농업 지역이었던 스미다구를 공업 도시로 바꿨다.
1960년대 스미다구는 인구수와 공장 수가 최고점에 도달했고, 섬유나 금속으로 된 생활 제품, 비누 등을 생산했다. 그러나 곧 환경 문제가 대두되며 큰 공장들이 도시를 떠났고, 가족 경영을 하는 작은 공장만이 주택 사이에 남아 지역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현재는 이런 공장마저 노동자의 고령화로 숙련된 기술자를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고바야시 교수는 문이나 창호, 계단이나 발코니 등을 주문 생산하는 공장을 도입하고, 여기서 만든 물건이 주변의 빈집을 개조하는 데 사용되는 도시 생산 주거의 모델을 제안했다. 독거노인들이 생산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목표로, 공장이라는 공간이 노년 세대에 필요한 교류의 장이 되는 것을 꿈꿨다.
도쿄가 서울에 비해 더 빠른 속도로 탈산업화와 인구 감소 문제가 떠오른 곳이라면, 타이베이는 서울과 비슷한 단계의 문제를 겪고 있는 도시다. 황 엘리사 조쑨은 위탁 생산(OEM) 산업에 의존하던 타이베이의 섬유, 패션 산업 단지에 주목했다. 대만의 섬유 산업은 대만 경제의 번영을 이끈 산업이었지만, 글로벌 기업들이 자동화 생산 설비를 갖추고 자국 공장을 만들면서 위기를 맞았다. 동시에 대만에 기반을 둔 소규모 브랜드는 로컬 마켓을 만들어 내며 성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양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중규모 공장이 없다는 점이다. 황 건축가는 타이베이 섬유 시장의 중심인 다다오청(大稻埕) 지역에 주거 공간을 만드는 방안을 제시했다. 패션 디자이너와 섬유 관련 노동자 등이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 재료 공급과 생산, 유통 등의 과정이 한 지역 내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서울의 완구 산업 메카였던 창신동을 주제로 삼은 존 홍 교수의 프로젝트와도 연결된다. 홍 교수는 기술 노동자의 노하우가 남아 있는 지역의 장점을 살려 완구 산업이 AI 기술과 융합되면 부가 가치가 높은 장난감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본다. 완구 시장 근처에는 전자 제품 시장이나 봉제 공장, 변호사나 회계사 사무소 등이 있어 제품 생산부터 비즈니스 운영까지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자동차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골목의 장점을 살려 보행자가 중심이 되는 컨베이어 벨트 형태의 복합 공간을 제안했다.
베이징에서는 다른 도시가 겪은 문제들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아틀리에 앨터는 베이징 노동자의 강제 이주 문제를 다뤘다. 도시는 소수의 엘리트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노동자 가족을 위한 거주 공간을 제안했다. 아파트와 유치원, 공장과 박물관 등의 유닛이 하나의 건물 안에 수직 형태로 자리 잡는 것이다. 이들의 제안을 통해 도시 생산 주거라는 형태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사는 도시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도시 생산 주거는 특정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델이 아니라, 이 시대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도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이다. 앞으로 주거와 생산의 결합은 제품 생산에만 한정되는 모델이 아니라, 지식이나 콘텐츠 생산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정보 산업이 발달하면 인간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하는 목소리도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우리의 삶과 일자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미래 도시는 기술로 인한 편의 이상의 것을 제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통근 시간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스마트 도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공간적으로 통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도록 설계할 수도 있다. 사물 인터넷으로 도시를 연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전에,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도시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 우리가 몰랐던 사회주의 도시의 장점과 교훈이 미래 도시 설계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회주의 도시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도시 모델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주의 도시가 꿈꾸던 공동체 사회는 대량 생산과 효율성이 강조되던 시기에 발달하면서 부작용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비효율적인 생산 방식은 물론이고, 주거 지역 인근에 낙후된 공장이 있다는 것은 분명 좋지 않은 도시 모델이자 주거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도시의 개념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 도시 모델 안에 녹아 있는 공동체에 대한 철학은 그동안 우리 도시가 무엇을 잃어 가고 있었는지 보여 준다.
공원이나 광장과 같은 공간도 중요하지만, 도시 내의 생산 시설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사회주의 도시에서 도시 생산 시설은 도시 공간의 균등화를 위해서 도입된 개념이다. 주거 단위에서 공동 생산을 통해 공동체를 강화하는 목적도 있다. 사회주의 도시 모델에서의 마이크로 디스트릭트는 직장과 주거가 인접해 있어야 한다는 직주 근접의 원리를 실현하면서도, 공동 생산을 통해 생산과 소비가 하나의 단위에서 일어나게 함으로써 자생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도시 생산과 주거는 불균형 발전과 공동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의 도시가 고민해야 할 요소임에 틀림없다.
아파트 개발과 기억의 리셋
서울은 이미 세계적인 도시다. 행정 구역 안에만 10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고, 수도권 인구까지 더하면 약 2500만 명 규모에 이른다. 한국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하나의 도시에 이렇게 높은 비율로 인구가 집중돼 있는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성숙한 도시다. 인구 1000만이 넘는 30여 개 도시 중에서 서울보다 경제력이 높은 도시는 대여섯 곳에 불과하다. 서울은 600제곱킬로미터 정도의 매우 작은 면적 안에서 고밀도로 발달하며 새로운 산업 모델을 만들기도 했다. 전자, 전기 산업의 메카였던 을지로는 ‘재료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술 수준이 높았다. 도심에서 금속 용접 산업이나 인쇄업, 전자 부품을 구할 수 있는 도시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의 IT 산업은 어떤가. 아파트 단지 안에 하나의 광케이블을 두고 수백 가구가 접속해서 쓰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하지만 개발의 시대를 지나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지금, 서울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서울의 주거 영역은 오래 전에 대규모 아파트에 점령당했다. 2017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국내 아파트 주거 비율은 60퍼센트에 육박한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는 이야기다. 제한된 면적에 많은 인구가 사는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지만, 서울보다 인구 밀도가 더 높은 도시에서도 아파트 대단지 개발이 50여 년에 거쳐 지속되고 있는 사례는 없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의 아파트 개발 역사는 반세기를 넘겼다.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계산해도 40년이 지났다. 《아파트 공화국》의 저자 발레리 줄레조(Valerie Gelezeau)는 “서구의 아파트가 주로 노동자를 위한 국민 주택으로 기획됐다면 한국의 아파트는 독재 정권이 재벌과 손잡고 이루어 낸 한국적 발전 모델의 압축적 표상”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한국, 특히 서울의 아파트 개발은 한국의 경제 개발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대규모 개발 과정에서 공동체의 붕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년간 한 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이 아파트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흩어졌고, 공동체는 사라졌다. 아파트라는 공간에는 서로 데면데면한 입주민들이 들어왔다. 아파트 개발 초창기에는 그래도 나았다. 마을 공동체 생활에 익숙했던 아파트 입주 첫 세대는 아파트로 이사한 후에도 반상회를 열고 경로당을 운영하며 공동체 생활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에는 마을 공동체나 골목길, 자투리 마당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과거에는 복도가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어른들이 이웃을 만나는 공간으로 쓰였지만, 전용 면적을 늘리기 위해 그마저도 없애는 단지가 많다.
아파트 공간 내부에서는 발코니가 사라졌다. 발코니는 아파트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통로이자, 내외부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절반의 공공 공간(semi-public space)이었다. 건설사들은 설계도에는 발코니를 넣어 시공 허가를 받았다가, 허가가 떨어진 후에는 발코니를 거실 등 실용적인 공간으로 바꾸는 방법을 사용한다. 입주자들도 발코니가 없는 대신 거실이 넓은 집을 선호한다.
우리나라에서 아파트에 살겠다는 것은 외부와 단절된 채로 지내겠다는 의미다. 아파트 개발의 목표는 더 높은 가격으로 팔리는 아파트를 만드는 것이다. 공동체 논의가 들어올 틈이 없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은 이웃 주민들과 단절될수록 더 안전한 공간이라고 느낀다. 비교적 최근에 지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단지 입구에서부터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친구 집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약 4~5단계의 보안 장치를 통과해야 했다. 단절이 안전이라는 말로 포장돼 아파트 가격을 높이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아파트가 소비재로 거래되며 입주자가 내가 사는 곳을 삶의 터전으로 인식하고 애착을 느끼기도 어렵게 됐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좋은 교육 환경, 적정한 가격 등 조건을 충족해서 택한 것일 뿐, 이유가 없어지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이다.
아파트를 개인과 가정의 삶이 묻어나는 장소라고 여겼다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구조의 집에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파트를 단순한 소비재나 재테크 수단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다. 이런 관점으로 아파트를 보면 평수와 가격만이 중요해진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아파트 공간 구조가 비슷한 이유이자, 국민의 과반수가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서 살게 된 배경이다.
아파트 재건축은 그나마 생겨날 수 있는 공동체조차 정기적으로 소멸시킨다. 최근 서울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을 앞두고 입주민의 이사가 진행됐다. 1980년에 준공된 둔촌주공아파트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단지 중 하나로, 그 규모만 62만 제곱미터가 넘는다. 큰 면적에 걸맞게 세대수도 6000여 세대에 육박한다. 둔촌주공아파트는 2018년 철거 과정을 거쳐 약 1만여 세대를 위한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되고, 약 4만 명이 새 단지에 입주할 예정이다. 서울 시내 아파트의 재건축 마라톤은 약 10년 전 잠실주공아파트의 재건축으로 시작했다. 현재 둔촌주공아파트, 잠실주공아파트 5단지와 반포주공아파트, 은마아파트 등이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다. 재건축 아파트 단지들은 정부가 서울의 강남을 개발하려는 의지로 1970년대에 대규모로 세운 곳들이다. 콘크리트로 지은 아파트의 수명이 30~40년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의 안전성 문제는 지금 시점에서 꼭 짚어야 하는 문제다. 지금은 강남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이야기지만, 앞으로는 서울은 물론 수도권 아파트의 대부분이 재건축 사정권으로 들어오게 된다.
노태우 정권 당시 건설된 아파트 200만 호가 곧 30년을 맞는다. 당시의 아파트 건설 과정은 지금보다 부실 공사가 만연했기 때문에 재건축은 가까운 미래에 시급한 과제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주민들이 지속해서 가꿔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30~40년마다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공동체가 자라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파트 재건축이 불러올 위기는 강남의 재건축 시장을 잡겠다는 근시안적 접근으로는 해결되기 어렵다. 아파트 재건축 과정에서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둔촌주공아파트 단지에는 ‘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라는 이름의 모임이 있다. 어릴 때부터 이 단지에서 자라며 추억을 공유한 젊은 세대가 모여서 곧 사라질 아파트 단지에 담긴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리다. 깨끗한 아파트를 분양받아 살게 된다고 해서 어릴 적에 즐겨 찾던 놀이터와 40년 동안 길게 자란 나무가 있는 고향의 모습을 지워 버리기는 쉽지 않다. 평생을 이 아파트에서만 보낸 30대, 40대 일부 주민들에게 둔촌주공아파트의 재건축은 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기억의 리셋이다. 재건축을 경험한 세대는 한 동네에 기억을 쌓으며 살아갈 이유를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