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가 불법이 될 수 있나요?
완결

권리가 불법이 될 수 있나요?

미국 연방대법원은 임신 24주 이전까지의 임신 중단을 인정한 1973년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었다. 그리고 같은 날 각종 총기 규제 법률에 위헌을 선언했다.

1895년 무렵의 위스콘신. ©Photograph: Wisconsin Historical Society/Getty Images
내가 사는 시골 카운티의 역사학회에는 과거의 시간이 각종 공고문이나 신문 스크랩, 지도, 손으로 쓴 색인 카드 속에 느슨하게 살아 있다. 머리가 희끗한 여성들은 오크 테이블에 앉아서 낡은 사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과거의 조각들을 끼워 맞춘다. 서쪽으로 기운 햇빛이 스며들어 와 어스름하게 실내를 비추는 가운데, 그들은 사진에 찍힌 사람이 누구인지, 세상을 떠난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린다. 자원봉사자들은 수다를 떨며 지역 신문에 실린 부고 기사를 오려 낸다.

내가 이곳에 들른 이유는 어떤 소문 때문이었다. 위스콘신에 있는 내 소유지의 낮은 지대에는 오래된 묘지가 있는데, 오래전부터 내 이웃주민은 몇 안 되는 묘비의 수보다 더 많은 시체가 그곳에 묻혀 있을 거라고 말해 왔다. 1978년의 대홍수 때 이름 없는 무덤들의 표식이 쓸려 내려갔는데, 그는 그 무덤의 주인들이 남북전쟁의 전사자들이라고 했다. 나는 죽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알고 싶었다. 그동안 묘지를 자주 지나다니다 보니 이젠 남아 있는 무덤들의 표시가 익숙하다. 어느 좁다란 받침돌에는 그냥 ‘마스(MAS)’라고만 적혀 있다. 단풍나무들 사이에는 대리석으로 된 묘비 세 개가 특이한 각도로 놓여 있다. 얼룩투성이에다 비바람에 깎이고 이끼로 뒤덮인 그 묘비들의 주인은 각각 1850년대와 60년대에 죽은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아이 두 명이었다. 남자아이의 묘비에는 슬퍼하는 수양버들의 그림이, 자매의 묘비에는 장미 꽃봉오리가 새겨져 있다.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의미다.

나는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곧 역사학회의 보조 큐레이터인 캐롤(Carol)이 묘지에 대한 기록을 묶은 바인더를 하나 건네주었다. 내 바로 옆에는 낯선 여성이 한 명 앉아 있었고, 우리의 맞은편에는 그녀의 남편이 앉아 있었다. 나는 내 땅에 묻힌 사람들의 명단을 찾아보았다. 거기서 아이들의 이름은 확인했지만, 남성들의 이름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여성의 이름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낸시 앤 해리스(Nancy Ann Harris).”

그러자 옆자리의 낯선 여성이 말했다. “벤저민 프랭클린 해리스(Benjamin Franklin Harris)와 결혼한 분이에요. 벤저민은 제 남편의 고조 작은할아버지시고요.” 그녀가 남편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자, 남편도 그 말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마주 봤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낯선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임신중단 때문에 돌아가셨거든요. 듣기로는 임신중단 수술을 아주 많이 받았대요.”

“그건 또 어떻게 아세요?”

“할머님의 사망 기록을 봤거든요.”

“공공 기록물에 왜 그런 내용까지 넣었을까요?”

근처에 서 있던 캐롤이 대답했다. “지금과는 다른 시대였거든요.”

나는 캐롤에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에서 듣고 있던 또 다른 여성이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낸시라는 여자가 뭔가 이상했던 거겠죠.”

나는 경멸조로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깜짝 놀랐다. 나는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오히려 캐롤과 나, 낯선 여인, 그리고 내 땅에 고조 작은할머니가 묻혀 있는 그녀의 남편이 모두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매장된 다섯 명의 이름을 다시 한번 내려다 보았다. 그곳을 나온 지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반박을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1. 낸시를 찾아서


나의 땅에는 과거가 그 자체로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오래전에 죽은 농부들이 남겨 놓은 수로를 헤매고 다닌다. 그리고 신대륙 정착민들이 심어 놓은 나무에서 열리는 사과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재배하던 인디언감자를 먹는다. 벌목되지 않고 남겨져 있는 오크 나무들 아래에 느긋하게 누워 있기도 하고, 화전(火田)을 위해 몇 세기 동안이나 일부러 불을 놓았던 들판에 다시 수풀이 번져서 예전의 대초원으로 돌아가게끔 내버려 둔다. 그렇잖아도 나는 예전에 이곳에서 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고 불을 놓았던 사람들이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제 낸시라는 사람이 손을 뻗어 오더니 나더러 마술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 해리스(이하 프랭크)의 생애에 대해서는 기록이 잘 되어 있었다. 그는 유명한 부대의 소속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낸시의 출신이나 생애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이후 다시 역사학회를 찾아갔을 때, 나는 캐롤에게 물었다. “역사 자료에 혹시 임신중단에 관한 파일이 있나요? 아니면 1800년대 여성의 산부인과 관련 자료는요?” 둘 다 없었다. 우리 지역의 역사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농부의 아내 아니면 교원학교의 졸업생, 또는 초기의 참정권 주창자 등 틀에 박힌 것이었다.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이나 기쁨은 여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서 우리에게 잊혀져 버렸다.

나는 마을 건너편에 있는 기록보관소에 들러서 낸시의 사망 기록을 찾아보았다. 쾌활하고 수다스러운 담당 직원은 그녀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갓 찍은 손녀의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내게 기록실에 들어가도 된다고 허가하기 전, 출입명부에 서명해 달라고 요청하고 나의 방문 목적을 물어보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물었다. “족보를 조사하시나요?”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얼떨결에 낸시 앤 해리스는 나의 가족이 되었다.
 

2. 아이고 주여, 정말 다행입니다


낸시는 1876년 12월 16일, 서른다섯의 나이에 죽었다. 그녀의 사망은 가죽으로 제본되어 누렇게 변색된 기록물 가운데 첫 번째 권에 기록되어 있었다. 사망 원인은 ‘산욕복막염(puerperal peritonitis)’이었다. 그런데 주석 표시가 달려 있었다. 마치 손가락 모양처럼 생긴 그 기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니 줄 사이의 여백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임신 3개월째의 낙태로 인해 유발된 복막염, 이번이 10번째의 낙태로 추정, 나머지 경우에도 모두 상당한 출혈이 있었음.’

이것은 거기 있는 모든 기록 중에서도 가장 설명이 길게 적혀 있는 사망 원인이었다. 그녀의 사망 진단서에 서명한 로버트 델랍(Robert H. Delap) 박사는 아마도 이 지역의 기록관에게 자신이 작성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옮겨 적으라고 지시했던 것 같다. 아니면 당시의 기록관이 낸시의 사망에 대하여 의사가 작성한 내용을 요약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외에 임신중단이 기록된 경우는 단 한 건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초기의 기록물에는 19세부터 47세 사이의 여성들이 산욕복막염, 산욕열, 산욕패혈증, ‘분만 이후의 염증’, 자간(子癎, eclampsia, 임신 중독증의 일종), ‘아이를 낳던 과정’에서 죽었다는 내용이 모든 페이지마다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었다. 늙은 남성들보다도 가임기 여성들의 사망 기록이 훨씬 더 많았다.

낸시가 살던 시대에는 임신중단이 산아 제한을 위해 흔히 사용되던 수단이었으며, 인종이나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여성이 가족의 숫자를 제한하고 가용한 자원을 관리하며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제임스 모어(James Mohr)가 1978년에 쓴 《미국에서의 임신중단(Abortion in America)》에 따르면, 예전에는 출산보다 오히려 더욱 안전한 임신중단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부 여성들은 출산을 ‘병적인 증상이나 두려운 것’으로 여겼고, 그렇지 않은 많은 여성들도 출산을 할 때면 혹시나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낸시를 포함한 당시의 모든 여성은 친구들이나 자매들, 또는 사촌들이 아이를 낳다가 죽거나 건강을 크게 해친 경우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일부러 출산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1700년대와 1800년대 초에는 임신이 여성의 자연스런 신체 균형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설령 유산을 유발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들은 신체의 안정을 되찾기 위하여 때로는 ‘막힘을 제거(removing a blockage)’하거나 ‘생리를 복원(restoring the menses)’하는 요법들을 사용하곤 했다. 임신한 여성은 대개 4개월부터 태동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시기 전에 행해지는 임신중단이라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모두 용인되었다. 비록 태동이 의학적 진단이 아니라 임신한 여성의 주관적 인식에 의한 판단이었긴 하지만, 과학적인 임신 테스트 기법이 없었던 그 당시에는 태동을 아기가 생겨나는 분기점이라고 생각했다. 레슬리 J. 레이건(Leslie J. Reagan)이 1996년에 쓴 《임신중단은 언제부터 범죄가 되었는가(When Abortion Was a Crime)》에서 지적하듯, 예전에만 하더라도 태동이 있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심지어는 가톨릭 교회조차도 거기에 인간의 생명이 깃들었다고 믿지 않았다.

임신중단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이루어졌기에, 어떤 의사는 ‘한 번 이상 임신중단을 경험하지 않고 출산 과정을 거치는 기혼여성을 찾기가 매우 드물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여성들은 임신중단에 대하여 편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것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들은 ‘임신중단(abor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당시에만 해도 이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어휘가 아니라 의학적인 전문용어였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은 ‘정리하기(put straight)’나 ‘열어젖히기(open up)’, 또는 ‘고치기(fix)’ 등으로 부르곤 했다. 어떤 의사는 여성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서 흔히 말을 하며 서로 아낌없이 정보를 나눈다”고 썼다. 그리고 임신중단을 시술하는 의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나 시골 지역에 사는 이들을 비롯한 많은 여성은 약물 또는 약초를 사용하거나 세대를 거쳐 전해져 내려온 지혜에 기대어 자신이 직접 임신중단을 시도했다.

좀 더 젊었을 때의 낸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모에게, 아니면 내 땅에 묻힌 두 딸의 어머니인 어맨다 마틴(Amanda Martin)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생리를 두 번이나 놓쳐서 그 주기를 다시 돌려놔야겠어요.” 나이 든 여성들은 그녀의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도 똑같이 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생리를 건너뛰면 ‘감기에 걸렸다(take the cold)’고 에둘러 말하곤 했는데, 이는 그들이 임신이라는 상태를 걸렸다 낫는 흔한 질병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낸시가 요청했으면 얼마든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임신중단약의 성분으로 흔히 사용되었던 식물인 페니로열(pennyroyal). ©Photograph: Science History Images/Alamy


3. 부도덕하고 여성스럽지 않으며 비애국적인 행위


낸시가 막 결혼 생활에 들어갔을 무렵, 그래서 그녀가 아이를 가졌든 아니면 갖지 않기로 했든 간에, 임신중단에 대한 국가의 정책이 변화하고 있었다. 당시에 우편으로 주문하는 알약이나 약물은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았고, 따라서 때로는 매우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1820년대와 30년대에는 이러한 독성의 위험성 때문에 임신중단에 영향을 미치는 최초의 법률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약제를 구입하거나 사용한 여성들이 아니라 그 약을 공급한 이들을 처벌하는 법안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해당 여성들이 태동을 느끼기 전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낸시와 같은 여성들이 약초를 채취하거나 민간요법을 공유하는 걸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태동을 생명 발생에 대한 법적인 요건으로 보는 시각도 없애지 못했다.

어느 단계를 막론하고 임신의 중단에 대하여 처벌을 내리는 법률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도입되었다. 1857년에 당시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미국의학협회(AMA)가 허레이쇼 R. 스토러(Horatio R. Storer) 박사의 주도로 캠페인을 벌여서 임신중단을 종식시켰던 것이다. 미국의학협회가 이런 캠페인을 벌인 이유는 다양했지만, 여성들의 건강이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아니었다. 레슬리 J. 레이건은 미국의학협회와 그 회원들이 이런 일을 추진했던 이유는 ‘전문가적인 영향력을 쟁취하고, 의료 행위를 통제하고, 특히 동종 요법 치료사나 산파와 같은 그들의 경쟁자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계층, 인종, 젠더에 대한 불안 요소들로 인하여 의사들은 자칫하면 권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당시에 이민자들은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백인, 개신교, 중산층 여성들의 출산율은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유산이나 비혼, 불임 때문이 아니었다. 피임 방법이 발전한 것도 그 원인의 일부였긴 하지만, 임신중단 비율이 증가한 것도 이러한 경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스토러를 비롯한 동료들은 후자의 요인에 집착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캠페인은 태어날 권리(right to life)를 지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회의 지배적인 위계 질서를 유지하는 것과 더욱 관련이 깊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레슬리 J. 레이건은 이렇게 쓰고 있다. “임신중단을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이민자 가족들의 비중이 더 크고, 그들은 머지않아 신대륙에서 태어난 미국 백인들의 인구를 앞질러서 미국 태생 백인들의 정치적 권력을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국가 전체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망자가 집계되었고, 유럽계 미국 정착민들에게 더욱 많은 땅을 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스토러는 백인 중산층 여성들에게 임신중단이 아닌 출산을 독려하기 위하여 《왜 안 되는가?(Why Not?)》라는 책을 썼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서쪽과 남쪽 지역이 “우리의 아이들로 가득해야 하는가 아니면 외부인의 아이들로 채워져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여성 독자들에게 “당신들의 허리에 국가의 미래 운명이 달려 있다”고 훈계했다.

동시에 스토러를 비롯한 남성 동료들은 자신들의 의료가 전문적이라며 널리 홍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의술이 돌팔이들의 치료와는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의학협회(AMA)는 의학 교육을 받았으며 정통 의술로 치료하고 있는 남자들을 (오직 남자들만을) ‘정식’ 의사로 인정했다. 그 외에 동종 요법 치료사나 산파들은 ‘정식이 아닌’ 존재들이었고, 낸시가 세상을 떠난 1876년까지도 여성 의사들은 승인받지 못했다. 정식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으며, 유산을 시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임신 3개월째의 낸시가 중단 시술로 사망했던 1870년대에 미국의학협회에 소속된 의사들은 새로운 낙태 반대 법안을 열렬히 홍보하면서 밀어붙였다. 참고로 그들은 정치인을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낸시의 사망 진단서에 서명했던 의사도 스스로를 정식 의사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로버트 델랍은 의학 교육을 이수했고, 한동안은 위스콘신의료학회(Wisconsin Medical Society)의 카운티 지부를 책임졌다. 다른 많은 정식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델랍 또한 주의회 의원으로 일했다. 아마도 그는 동료들과 함께 임신중단이 그토록 흔한 현실을 한탄했을 것이다. 임신중단에 반대해 달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교회와 언론은 그것을 근절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여성에 대한 교육이 확대되고 임신중단에 대한 정보가 점차 널리 확산하면서 미국의 출산율이 가파르게 떨어지는 현실을 개탄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국 여성들이 어째서 가톨릭 이민자 여성들만큼 빠르게 아이를 낳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위스콘신의료학회는 1879년에 발간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 명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두 명의 아이가 불법 낙태를 통해서 사라지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과장이었을 것이다.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 조사에 의하면, 이 시기에 의도적으로 중단된 임신 사례는 전체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그 사실을 본인 혼자만 알고 있었다면, 정확한 비율을 과연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을까? 결국 임신중단이라는 것은 남들 모르게 출산을 제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모어는 《미국에서의 임신중단》에서 “(임신중단은) 남성은 통제하거나 막을 수도 없으며, 여성들만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썼다. 어떤 남성들은 임신중단을 두고 “제멋대로의 극성스러운 행위”라고 표현했다.

레슬리 J. 레이건에 의하면, 여성들이 스스로의 지위를 향상하려고 노력하자 정식 의사들과 정치인들은 임신중단을 “부도덕하고 여성스럽지 않으며 비애국적인 행위”라며 공격했다고 한다. 그들은 임신중단이나 기타 출산을 제어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출산에 대한 주체성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여성들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정식 의사들과 의회의 의원들에게 있어서는 실존적인 싸움이었다. 만약 그들이 백인 개신교 중산층 여성들을 통제할 수 없다면, 신세계에서 그들의 인구는 수적으로 열세에 놓이게 된다고 생각했다.

 

4. 불법이 된 임신중단


낸시 앤 해리스는 프랭크와 결혼한 지 10년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 나는 프랭크가 슬픔에 겨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델랍 박사가 낸시의 사망 진단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서부터 이곳까지 도착했을 때, 남편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낸시가 예전에 임신중단을 했다는 사실을 델랍이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그녀가 남편인 프랭크에게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슬픔과 혼란에 빠져 있던 그가 델랍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델랍 박사 역시 우호적인 사람들이 요청하면 유산을 도와주는 시골 의사였을 가능성도 있다. 밀워키의 어떤 의사는 위스콘신의학저널(Wisconsin Medical Journal)에 투고한 편지에서 시골에 그런 동료가 한 명 있다고 밝혔다. 그 시골 의사는 이렇게 시인했다. “훌륭한 가정과 여성을 보호해야 할 때면 우리 모두 그런 시술을 하고 있습니다.” 정식 의사들이 공개적으로는 피임과 임신중단을 비난하면서도 실제로는 각자의 재량에 따라서 은밀하게 그런 진료를 제공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만약 델랍이 낸시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아마도 그는 그녀의 사망 진단서에 주석으로라도 미국의사협회(AMA)의 입장을 적어두어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낸시의 사망 기록은 위스콘신 역사학회의 디지털 자료실에도 보관되어 있긴 하지만, ‘임신중단’이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그 단어로 검색하면 12개의 결과만 보여준다. 대부분의 검색 결과는 1970년대와 90년대에 임신중단 합법화를 찬성하며 벌였던 행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그러나 늘 얼굴을 찌푸리고 다른 사람을 쏘아보았던 침례교 목사인 윌리엄 H. 브리즈번(William H. Brisbane) 박사에 대한 결과는 없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북쪽으로 이주하여 낸시가 묻힌 곳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마을을 세웠다. 프랭크나 델랍과 마찬가지로 브리즈번도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고, 노예 제도에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사실로 위스콘신주의 다른 여러 자료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었다. 브리즈번 역시 의사였고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낙태 반대 운동가였다. 낸시가 프랑크와 결혼하기 몇 년 전에 브리즈번은 위스콘신주에서 임신중단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법안을 제출하고 로비 활동을 벌였다.

1858년에 위스콘신은 브리즈번이 제출한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태동 이전에 임신중단을 시행하는 여성들에게 법적인 제재를 부과하는 미국 내 세 번째 주가 되었다. 형량은 최대 3개월의 징역형과 300달러(현재 가치로 약 1만 달러)의 벌금이었다. 그러나 대중적인 여론이나 의회 차원에서 이 법안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다.

브리즈번은 자신의 법안이 강제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실제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미국의사협회에 보낸 편지에서 썼듯이, 설령 낙태를 불법화하는 법안으로 그 행위에 대한 처벌까지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것을 예방할 수 있는 도덕적인 영향력을 확실히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낸시나 그녀의 자매들, 사촌들, 친구들은 물론이고 의료계의 외부에 있는 사실상 모든 사람은 그 누구도 임신중단을 범죄로 생각하지 않았다. 19세기의 미국 여성들 가운데 임신중단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받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어떤 여성이 임신중단을 했다는 사실을 당국에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여성이 임신중단 때문에 사망하는 경우뿐이었다.

상황이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학협회 소속의 의사들과 정치인들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연방 차원에서는 대표적으로 1873년에 통과된 컴스톡 법(Comstock Act)을 근거로 임신중단 시술 및 약제에 대한 광고를 금지했다. 이 법안에 의해 임신중단과 연관된 정보를 담고 있는 공개적인 유인물이 금지되었으며, 임신중단 시술은 부도덕한 것이라는 인식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1880년이 되자 미국 내의 모든 주가 단계를 막론하고 고의로 임신을 중단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이 계속해서 임신중단을 시도하고 있었다. 《여성의 몸, 여성의 권리(Woman’s Body, Woman’s Right)》(1976)라는 책에서 저자인 린다 고든(Linda Gordon)은 어떤 판사의 추정치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뉴욕주 한 곳에서만 1890년대 내내 매년 10만 건의 임신중단 시술이 행해졌다고 한다. 머지않아 세기가 바뀌었고,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산부인과 의원들이 개업하면서 다양한 피임법이 점점 더 대중화되고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출산율은 계속해서 하락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민족주의와 전통적인 성 역할 구분이 부활하면서 미국 내에서 잠시나마 출산율이 반등했고 베이비붐 현상이 나타났다.
 

5. 무덤에 묻혀 버린 지혜


낸시가 사망한 직후의 일요일 아침, 프랭크는 그녀를 씻기고 예복을 입히는 일을 여성 친척이나 친구에게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시신을 관에 안치할 때에는 그녀의 몸을 직접 안아 올렸으리라. 햇볕이 화창했던 그날을 상상해 본다. 그가 말을 끌어 관을 옮길 때 땅 위에는 눈이 살짝 덮여 있다. 어린 두 딸은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좀 더 나이가 많은 딸들과 아들은 그 뒤에서 걸어온다. 그들은 낸시가 약초를 채취하기 위해 걸어갔던 그 경로를 따라서 묘지까지 그녀의 관을 운반한다. 밤사이에 얼어붙은 땅은 모닥불을 피워놓은 덕분에 살짝 녹아 있다. 무덤은 이미 파놓았다. 묘비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 묘비를 구입하는 데 무려 5달러를 지출했을 프랭크를 떠올린다. 그 묘비에 낸시의 이름, 그녀가 태어난 날과 죽은 날, 그리고 그녀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풍성한 나무를 새겨 넣었을 프랭크를.

오하이오에서 위스콘신으로 이사를 왔던 프랭크는 낸시의 죽음 이후에 좀 더 서쪽에 있는 네브래스카로 이주했다. 낸시와 함께 살았던 집을 버리고 떠난 것을 보면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지금 내가 사는 마을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만약 1978년에 발생한 홍수가 내 땅의 묘지에 있던 묘비를 쓸어갔다면, 그것은 어느 이름 모를 병사의 것이라기보다는 낸시의 묘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내가 우리 지역의 역사학회에서 ‘낸시 앤 해리스’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던 그날, 사실 나는 내 땅의 묘지에 플로런스 파머(Florence Palmer)라는 또 다른 한 명이 묻혀 있다는 기록을 보았다. 낸시는 내 땅의 바로 남쪽에 살았고, 플로런스는 바로 북쪽에 살았다. 그리고 파머는 낸시의 결혼 전 성이었다. 낸시가 죽었을 때 플로런스는 10살이었다. 플로런스는 낸시가 결혼할 무렵에 태어난 그녀의 조카였던 것이다. 나는 어른들이 낸시의 죽음에 대하여 플로런스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플로런스는 1892년에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당시는 전국을 휩쓸던 낙태 반대 법률이 마침내 강제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였다. 유산을 시술하는 비공인 의사들과 산파들은 기소되었다. 임신중단을 받고 죽은 여성들의 사인을 밝히다 보면 그들의 혐의가 드러나곤 했다. 여성들의 대화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교회들도 낙태 반대 운동에 합류했다. 저명한 페미니스트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합류했는데, 그들은 임신중단을 시도하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여성들이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성관계를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낸시 세대의 여성들은 이후 3세대 뒤의 여성들보다 임신중단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오늘날의 여성들보다도 그것에 대하여 훨씬 더 자유롭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플로런스의 사망 기록에는 그녀의 사인이 낸시와 동일한 ‘산욕복막염’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주석이 달려 있지 않았다. 플로런스에게 이미 네 명의 아이와 세 명의 의붓자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설령 그녀가 임신중단과 연관된 문제로 죽었다고 해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1892년의 위스콘신 지역에서는 ‘생리를 복원’하는 방법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정식 의사들은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고, 1873년에 제정된 외설법(obscenity law)에서는 그와 관련한 정보를 공개적으로 퍼뜨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살아 있었다면) 플로런스에게 상담을 해줄 수도 있었던 같은 지역의 경험 많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얻은 지혜를 무덤으로 가져갔다.
 
©Photograph: Jeremy Woodhouse/Getty Images


6. 조금 일찍 떠난 사람


여름에 부츠를 신고 묘지가 있는 곳을 걸어서 지나가면, 땅에 발자국이 찍힌다. 땅은 울퉁불퉁하고 축축하며, 원추리(daylily)가 가득하지만 그늘이라서 꽃은 피지 않는다. 나는 내 발밑에 얼마나 많은 유골이 묻혀 있는지 궁금했다. 낸시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그녀의 모습에 대하여, 그리고 묘비를 대신해 내가 만들어놓은 무덤의 표식에 대하여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엿듣던 여자의 말이 기억난다. “그 낸시라는 여자가 뭔가 이상했던 거겠죠.” 만약 그 여자와 내가 다시 한번 역사학회에서 마주친다면, 이제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반박할 것이다. 그녀에 대한 편견은 21세기의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낸시의 가족과 이웃들은 그녀의 죽음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관이 내려갈 때 그 옆에 서있던 여성들은 그녀를 ‘가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녀의 사망 원인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현대의 여성들이 피임약을 복용하는 친구에 대해서 수군대는 정도였을 것이다. 낸시 앤 해리스는 ‘뭔가 이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사망 진단서에 의사가 주석을 달아 놓은 것이 조금 예외적이긴 하지만, 그녀는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여성이었다. 오히려 그 의사가 사망 진단서를 작성했던 다른 여성들보다 조금 일찍 떠났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 글의 원문은 계간 문예지 〈아메리칸 스칼러(The American Scholar)〉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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