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안전한 곳에 있나. 하르키우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
전쟁 전에는 하르키우 북쪽에 거주했었다. 3월 이후로는 너무 위험해서 그곳에서 살지 않는다. 전쟁 4일 차에 러시아군이 방어를 뚫고 주택 지역까지 들어온 적도 있다. 주택가 앞 도로에서 전투가 일어났었다. 현재는 하르키우 시내 중심에서 지내고 있다. 하르키우는 우크라이나 제2 도시로 매우 큰 도시다. 그러다 보니 지역마다 상황이 많이 다르다. 안전한 곳도 있고 안전하지 않은 곳도 있다. 지난 몇 달간 이곳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 특히 6~7월은 매일 밤마다 도시가 폭격당했다. 도시의 인프라가 계속해 무너지고 있고 학교, 회사, 창고, 식당, 매장 등이 폭격을 당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르키우는 전선 바로 근처인데 하르키우에 위치한 주민 센터 두 곳이 현재 러시아군에 의해 사로잡혀 있다.
전쟁 전 실제 침공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나?
내 주변 어느 누구도 지금 상황처럼 전쟁이 진행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수년간 전쟁 상황이 지속되고 있던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 크름반도(Crimean Peninsula), 돈바스(Donbas) 지역
[1] 등에서 상황이 악화할 것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우크라이나수도인 키이우(Kyiv)부터 북부인 하르키우, 심지어 러시아와 멀리 떨어진 서부의 르비우(Lviv)까지 사실상 우크라이나 전역에 폭격이 가해지며 침공이 일어날 거라곤 민간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2월 24일 당시 어디에 있었나?
단독 주택인 부모님 집에서 자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반려견들을 데리고 곧장 짐을 챙겨서 부모님이 계신 1층으로 내려가 부모님, 누나와 함께 지하 창고에 임시로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폭격이 시작된 이후 몇 시간 내로 전기와 인터넷을 연결하고, 따뜻한 옷을 옮기며 모든 준비를 마쳤다.
창고에서 지낸 기간은 얼마나 되나?
약 3~4주간 아버지와 그래도 안전하게 지냈던 것 같다. 누나와 엄마, 반려견들과 고양이는 더 안전한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전쟁이 일어난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자동차를 주고 서쪽으로 피신시켰다. 그들은 폴란드에 갔다가 지금은 독일에 있다. 아버지와는 3월 말까지 지하 창고에 숨어지내며 가끔 화장실이나 부엌에 갈 때, 혹은 잠시 외출이 필요할 때만 밖으로 나왔다.
새로 지낼 안전한 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당시 하르키우는 폭격 위험이 커서 아버지가 하르키우를 떠나시도록 설득했고, 다행히 아버지도 오래지 않아 가족들에게 합류하셨다. 아버지가 떠나시며 나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숙소를 옮기게 됐다. 하르키우 시내에서 자기 아파트를 에어비엔비(Airbnb)로 렌트하던 친구가 있는데 다행히 그 집이 비어 있었고, 마침 내가 일하던 자원봉사단의 창고가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에 곧바로 그 집으로 들어가 현재까지 거주 중이다.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쟁이 시작되고 전기나 수도 등 인프라 시설이 마비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
모든 상황이 악화하기까지 한 달이 채 안 걸렸다. 도시가 계속 폭격을 당했고 주민들이 살고 있던 주택 위에도 폭탄이 떨어져 전기가 끊기고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고 난방이 끊기기 시작했다. 시에서도 더 이상 대중교통을 운영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개인 자가용을 타고 이동하는 것 역시 안전하지 못했다. 가장 심각한 건 물류였다. 각국에서 들어오는 물류가 끊기고 나니 마트나 매장이 운영될 수가 없었다.
굉장히 절망스러운 순간이었겠다.
도시 외곽부터 시내 중심까지 폭격이 이어지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하르키우는 계속 버텼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고 버려지지 않았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던 것에는 시의 도움이 컸다. 전기가 끊기거나 물이 나오지 않았을 때 시에서 어떻게 해서든 시민들을 도와 주려고 노력했고 주민들의 신고에 최대한 빠르게 조치하려는 게 느껴졌다. 도시 인프라가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는 상황이었지만 가장 위험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계속 시에서 복원 작업을 했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없었나. 그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자원봉사를 할 생각을 했나?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모두가 서로서로 돕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공적 지원이 있다고는 해도 국가나 시에서 도울 수 없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자원봉사자들이 주로 그런 부분을 도맡았다. 사실 자원봉사는 어떻게 보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험하다고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막상 닥쳤을 때 극복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많고, 만약 그렇지 못한 상황이더라도 위험을 감수한 봉사의 대가로 얻게 되는 과실은 값지다.
그 과실은 자원봉사로 인한 보람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많은 이들에게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 정신적 도움이 된다. 우리에게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 상황을 이겨낼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해서 서로서로 도와야 한다. 그것이 곧 도시의 방어 능력을 키워나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봉사 활동의 시작은 어땠나? 막상 뭔가를 하려 해도 상황이 마땅치 않았을 터다.
자원봉사를 해야겠다는 것은 일찍부터 마음 먹었고 내 고민은 오히려 어떻게 돕는지에 있었다. 자동차도 가족들을 피신시키느라 이미 떠나보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휴대폰을 붙잡고 자동차를 어디선가 구할 순 없을지, 중고차라도 구입할 수 없을지 계속 알아봤다. 다행히 자원봉사를 하던 지인에게 연락이 와 하르키우에서 자동차를 팔려고 내놓고 떠난 사람의 얘기를 해줬다. 전쟁으로 판매가 어렵다고 판단해 자원봉사자에게 기부하겠다고 하셔서 그 차를 쓸 수 있었다. 처음엔 친구와 함께 도시 이곳저곳을 살피며 도시 상태를 체크했다.
도시의 상태는 어땠나?
내가 사는 곳은 주코프스키(Zhukovsky)라는 마을이었는데 폭격이 가장 심했던 살토프카(Saltivka) 지역과 도보로 15분 거리다. 주로 북동부 지역을 따라서 교전이 일어났는데, 러시아는 하르키우 북부의 치르쿠니(Tsyrkuny)를 점령해 살토프카를 비롯한 하르키우 북동부 지역을 공격했다. 살토프카는 길이만 10킬로미터가 넘는 넓은 동네라 지역 내 건물의 파괴 정도가 매우 달랐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은 대부분의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남부로 이동할수록 폭격의 흔적이 조금씩 줄었다. 치르쿠니가 5월에 해방되며 일부 지역엔 슈퍼마켓이 열리고 지하철이 운행되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일상을 보내고 한쪽에서는 전쟁이 이어지는 묘한 상황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체에서 유독 공습이 심한 지역에 있으니 억울한 마음도 들 것 같다.
복잡한 심정이다. 누군가가 투쟁할 때 누군가는 살아가야 한다. 때때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일상을 되찾은 것을 보면 억울한 마음도 들지만 전쟁 중인 나라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이 하르키우의 위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더 버티고 견뎌야 서쪽 르비우에 있는 우리 지인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하루라도 더 안전하게 보낼 수 있지 않겠나. 우리 정부군이 하르키우를 버렸다거나 하는 얘기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 효율적인 곳으로 병력을 운용하는 과정일 거다.
그들에게 닿아야 한다
주변에 자원봉사자가 많은가?
그렇다. 나만 유일하게 하는 게 아니다. 내 지인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지금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자녀의 안전을 위해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도시에 남아서 누구보다 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을 돕고 있다.
각 자원봉사 단체들은 어떻게 구성되고 연결되어 있나?
우크라이나 사회는 서로 돕는 마음이 강하다. 민간 자원봉사를 중앙에서 통제하는 조직은 없다. 대부분의 자원봉사 단체는 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조직되었다. 그래서 분산되어 있고, 서로를 알아도 활동에서의 교차점이 생기진 않는다. 어떤 팀은 식료품을 어떤 팀은 약품을 어떤 팀은 군사 지원을 어떤 팀은 피난 지원을 하고 어떤 팀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챙긴다. 이 모든 일은 조직적이지도 않고 매우 즉흥적이지만 그럼에도 조화롭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6월까지 진행했던 ‘케어박스(Carebox)’는 어떤 프로젝트였나?
케어박스는 각 주소지로 식료품을 배달하는 이니셔티브(Initiative)였다. 크게 세 가지 업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성금 모금, 구호품 구입, 그리고 배달이다. 성금은 해외의 인도적 지원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도네이션(기부금)을 받아 진행했다. 앞서 말했듯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첫 한두 달 동안은 대체로 도시 인프라가 작동되지 않고 식료품점도 운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르키우 내에서 음식을 구할 수 있는 장소가 거의 없었다. 노인이나 장애인 등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나 저소득층에게 굉장히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음식을 구할 수 없는 분들의 연락처를 모집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의 신청을 받아서 그분들에게 직접 음식을 배달하는 게 주요 활동이었다. 비교적 더 안전한 도시였던 폴타바(Poltava)나 드니프로 의 마트에서 식료품을 구입해 퀵 배달처럼 전달했다. 당시엔 의약품을 구할 곳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배송 물품에는 의약품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도움을 받았던 분들의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땠나?
도시는 굶주린 상태에 있었다. 자신의 집이나 동네에만 갇혀 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지인들도 떠난 상태로 불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지냈고 바깥소식도 접하지 못 한 상태였다. 심지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식료품 배달 요청을 한 사실도 몰라 우리가 도착했을 때 감동하셨던 분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