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 전쟁이 만든 난민
완결

탄소 전쟁이 만든 난민

기후 참사로 집 밖에 내몰린 사람들에겐 보호가 필요하다. 고령화가 진행 중인 국가들이 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

거대한 격변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잖아도 거대한 이주의 행렬이 전 세계의 도시로 향하던 와중에 기후 변화 때문에 이동하는 사람들까지 더해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이민자들의 숫자가 두 배로 증가하면서, 급격하게 늘고 있는 이주민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더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로 대두됐다. 인류가 기후 붕괴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제껏 없었던 형태의 계획적이며 신중한 이주가 필요하다.
 
영국 웨일스 북쪽의 귀네드(Gwynedd) 카운티에 있는 페어본(Fairbourne) 마을의 전경. 이곳은 2045년이 되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Photograph: Kirsty Wigglesworth/AFP


1. 기후 난민과 고령화 사회의 관계


전 세계 곳곳에서 기온이 섭씨 50도를 넘어서는 날이 30년 전에 비해 이미 두 배로 늘어났다. 이 정도 열기는 인류에게 치명적이며, 건물이나 도로, 발전소 등에도 심각한 문제가 된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지구 전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는 현실에 인류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위험하고 가난한 상황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 회복력(resilience)이 더욱 뛰어난 지구촌을 건설해야 한다.

대규모의 인구가 이동해야 할 것이다. 단지 가장 가까운 도시로만이 아니라 대륙을 건너가야 할 수도 있다. 북위도에 위치한 나라들처럼 좀 더 괜찮은 여건의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수백만에 달하는 이민자들을 수용하는 동시에 그들 스스로도 기후 위기라는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급속하게 얼음이 녹고 있는 극지방 가까이에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조성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시베리아의 일부 지역은 최고 기온이 섭씨 30도에 이르는 날들이 연중 몇 달씩 이어지고 있다.

거대한 불길이 시베리아, 그린란드, 알래스카를 집어삼키며 북극 지역을 불태우고 있다. 영하 5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1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빙하권의 이탄(peat)에서는 불길이 타오른다. 이러한 ‘좀비 불(zombie fire)’은 북극권 한계선과 그 주변 지하의 토탄층에서 연중 내내 타오르다 거대한 불길이 되어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의 북방 수림대를 덮친다.

2019년에는 어마어마한 불길이 일어나 석 달 동안 타올랐다. 400만 헥타르(ha)가 넘는 시베리아의 타이가(taiga) 수림대를 파괴했고, 여기서 발생한 그을음과 잿더미로 휩싸인 구름은 유럽연합(EU) 회원국 전체의 면적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여러 기후 모델의 예측에 따르면는 북방 수림대 및 북극권 툰드라(tundra)에서 발생하는 불길이 2100년에는 최대 네 배까지 늘어날 것이다.

당신이 어디에 살고 있든, 이민이라는 현상은 당신과 아이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방글라데시엔 물에 잠길 저지대의 해안가에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살고 있으며, 그곳은 점점 더 거주하기 힘든 환경이 될 것이다. 2050년까지 전체 인구의 약 10퍼센트에 해당하는 1300만 명 이상의 방글라데시인이 이 나라를 떠날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나라뿐만 아니라  부유한 국가들 역시 향후 수십 년간 심각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단지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인구 통계학적 구성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세계 인구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증가할 예정이며 2060년대가 되면 100억 명을 돌파할 것이다. 이렇게 증가한 인구의 대부분은 열대 지역에 있을 텐데, 이곳은 기후 참사로부터 최악의 타격을 받아 수많은 사람이 그곳을 떠나 북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런데 북반구의 선진국들은 정반대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나치게 적은 노동력이 대규모의 노년층을 지탱해야 하는 상부 과중(top-heavy) 형태의 인구 통계학적 위기이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통상적인 은퇴 연령인 65세 이상의 인구가 이미 3억 명 이상이며, 2050년이 되면 이 지역에서는 20~64세의 노동인구 100명이 경제적으로 부양해야 하는 65세 이상의 고령층은 43명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1] 따라서 독일의 뮌헨에서부터 미국의 버팔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시가 이민자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서로 경쟁을 시작할 것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인적인 더위와 흉작으로 기존의 터전을 떠나 이민의 행렬에 동참할 것이다. 또한 직장의 이전 때문에 부동산 담보 대출을 받지 못하거나 손해 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원래 지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중산층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수백만 명이 기후 위기로 인해 기존의 터전에서 떠났다. 2018년에는 120만 명의 사람들이 극한의 기후, 화재, 폭풍우, 홍수 등으로 인해 사는 곳을 옮겨야 했고, 2020년이 되자 그 수는 연간 170만 명에 이르렀다. 미국에서는 현재 평균 18일에 한 번꼴로 10억 달러 이상의 대규모 재해가 발생한다.[2]

미국 서부의 절반 이상이 극심한 가뭄을 경험하고 있으며 오리건주 클래머스 유역(Klamath Basin)의 농부들은 불법적으로라도 강제로 댐의 수문을 개방해 관개용수를 공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기록적인 홍수가 발생해 데스 밸리(Death Valley)에서부터 켄터키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주민이 집을 잃었다. 과학자와 언론인이 함께 만든 비영리 단체 클라이밋센트럴(Climate Central)의 자료에 의하면, 2050년에는 미국 50만 개의 기존 가구가 매년 최소한 한 차례 이상 범람하는 지대 위에 놓일 것이라고 한다. 루이지애나의 아일 드 진 찰스(Isle de Jean Charles)라는 지역에는 해안선의 침식과 해수면의 상승 때문에 지역 사회 전체를 이주시키기 위한 용도로 이미 4800만 달러에 이르는 연방 세금이 할당돼 있다. 영국 웨일스의 페어본(Fairbourne)이라는 마을 주민들 사이에는 현재 살고 있는 집을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면서 2045년에는 마을 전체가 ‘소멸’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 큰 바닷가 도시들도 역시 위기에 처해 있다. 예를 들어서 웨일스의 수도인 카디프(Cardiff)는 2050년이 되면 그중 3분의 2가 물속에 잠길 것으로 예상된다.

UN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향후 30년 동안 환경 문제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는 최대 10억 명에 이를 것이며, 더 최근에는 2050년까지 12억 명, 2060년까지 14억 명이 이주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세계가 더욱 뜨거워지고, 2060년대 중반에 전 세계의 인구가 예측대로 정점에 도달한다면 2050년 이후에는 환경 난민이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지속 가능한 세계란 어떤 모습일까?’ 인류에게 제기된 질문이다. 우리는 식량 공급과 연료 조달, 그리고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대기 중 탄소를 줄여야 한다. 더 적은 수의 도시에서 더 과밀한 상태로 살아야 하며 전력 부족이나 위생 문제, 과열, 공해, 감염병 등 인구의 밀집과 연관된 위험성을 줄여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특정 대지에 속해 있고, 우리가 그걸 소유하고 있다는 관념을 극복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극지 근처의 새로운 도시에 살면서 전 세계적으로 더욱 다양해진 사회에 동화돼야 한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한번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지구의 기온이 1도 오를 때마다 약 10억 명의 인구가 지난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지역의 외부로 밀려날 것이다. 다가오는 격변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고 끔찍한 상태가 되기 전에 대처할 시간은 점점 줄고 있다.

이주는 사회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해결책이다. 이와 같은 전 지구적인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지, 그리고 이주 상황에서 인류가 서로를 얼마나 인도적으로 대하는지에 따라 세기의 격변이 원활하게 흘러갈지 혹은 과격한 충돌과 불필요한 죽음으로 이어질지가 결정될 것이다. 올바르게 대처한다면 이 격변은 전 지구적으로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주는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한 열쇠다.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의 한 가족이 가뭄에 시달리는 바드기스(Badghis) 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Photograph Hoshang Hashimi/AFP/Getty Images


2. 국민이라는 정체성


안전한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든, 아니면 새로운 기회의 땅을 찾아 나서는 것이든, 이주에는 수많은 협력 관계가 깊이 얽혀 있다. 이주는 모두가 광범위하게 협업해야만 가능하고, 오늘날의 세계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도 사람들이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주가 지금의 우리 사회를 만들었다. 사람들의 국가 정체성이나 국경선은 늘 유동적이었다.

국경을 이용해 외국인의 유입을 막는다는 발상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것이다. 세계 각국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보단 떠나는 것을 막는 일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노동력과 세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국기와 국가, 그리고 영토를 지키는 군대 등을 통해 ‘국가’의 개념이 형성됐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개념을 정립한 것은 성공적인 국가 체계다.[3] 복잡한 산업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정부는 개인의 삶에 더욱 크게 개입하는 동시에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국가 체계는 자국의 시민들에게도 국가적 정체성을 만들어 줬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프로이센의 실업 급여 제도를 살펴보자. 초기에만 해도 실업 급여는 (프로이센 내에 있는) 노동자의 고향 마을에서 지급했고, 그곳에서는 사람들의 신분과 고용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하려고 이주해 온 사람들에게도 지급됐는데, 이는 수혜 자격을 갖춘 프로이센의 시민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새로운 차원의 국가 체계가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시민권 증서와 국경선의 통제로 이어졌다. 각국 정부가 더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사람들은 그들이 납부하는 세금을 통해 국가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누리게 됐으며 투표와 같은 권리도 더욱 많이 얻었다. 그리고 투표권은 시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주인 의식을 심어 줬다. 그렇게 국가는 그들의 나라가 되었다.

국민 국가(nation state)는 세계가 서로 다른 동족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인위적인 사회 구조다. 이 집단들은 각자 지구의 일부 지역을 점유하며, 대다수에게 최우선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실상은 훨씬 더 복잡하다. 대부분은 한 국가 내에서도 다양한 집단의 언어를 사용하며, 인종과 문화도 다양한 것이 일반적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과 행복이 하나의 인위적인 국가 집단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관념은, 많은 나라가 그렇게 상정하고 있음에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에 대해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국민 국가를 두고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라고 말했다.

국민 국가 모델의 실패 사례가 매우 많다는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1960년 이후 국민 국가 내에서는 약 200 차례의 내전이 있었다. 물론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어도 국민 국가가 잘 작동하는 사례 역시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탄자니아가 있고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미국처럼 아예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국가는 다양한 집단들이 혼합되어 형성됐다. 어떤 국가가 흔들리거나 실패할 때 문제는 다양성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포용성(inclusiveness)이 부족한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소속 집단과는 관계없이 국가적인 차원의 형평성에 대한 것이다. 편파적인 성향의 특정 집단과 연계된 불안정한 정부는 불만을 낳고 집단들 사이의 갈등을 부추긴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를 통합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친목을 기반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결집하게 만든다.

시민으로부터 사회적 포용의 역할을 위임 받은 민주주의 정부가 일반적으로 좀 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그들 배후에도 역시 복잡한 국가 체계가 있다. 세계 각국은 이러한 국가 체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해 왔다. 캐나다나 스위스의 자치주(canton)에서는 국민 국가의 범위 내에서 권력을 지역 사회에 이양해 시민들에게 발언권과 자치권을 부여하기도 한다. 다수의 집단과 언어와 문화를 동등하게 합법적으로 포용한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 탄자니아는 적어도 100개에 달하는 다양한 언어와 부족 집단이 모여 마치 하나의 모자이크 같은 국가로 기능한다. 다민족 인구를 의식적으로 통합해 온 싱가포르의 부부들은 그들 중 최소 5분의 1이 서로 다른 인종과 결혼한 경우다. 하지만 집단들 사이의 불공평한 위계 질서는 이러한 통합을 방해하는데, 특히 소수 집단이 다수 집단을 억압하는 경우에 그렇다.

2021년 4월에 미국 사우스다코타의 주지사인 크리스티 노엄(Kristi Noem)은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사우스다코타는 바이든 행정부가 안치시키려는 그 어떤 불법 이민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불법 이민자들에게 전한다, 만약 당신이 미국인이라면 내게 전화를 걸어라.”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우스다코타가 유럽에서 건너온 수천 명의 무자격 이민자들이 1860년부터 1920년까지 자영농지법(Homestead Act)을 활용해 어떠한 보상이나 배상도 없이 미국 원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해 만들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지배층이 보여 주는 이러한 배타주의는 공공의 시민 의식을 와해하며, 그 사회에 속해 있다고 간주되는 주민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한다.

국가 체계에 정식으로 포함되는 것은 모든 시민에게 있어서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작점인데, 이민자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의 불평등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2019년,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에서 100만 헥타르(ha) 이상의 숲을 태운 불길이 지나간 자리. ©Photograph: Donat Sorokin/Tass


3. 배척 vs. 포용


지중해 연안은 유럽이 이민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의 최전선이다. 이곳은 이탈리아의 전함들이 EU로 향하는 소형 선박들을 가로채고, 그들을 아프리카 북부 해안의 리비아에 있는 항구로 몰아내는 임무를 펼치고 있다. 그중 하나인 카프레라(Caprera) 전함은 80여 척의 밀항선을 적발하며 7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막아냈다. 이민자들을 반대하는 이탈리아의 내무장관은 “우리의 안보를 수호한다”며 그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는 2018년에 전함의 승무원들과 직접 찍은 사진을 게시하며 “영광입니다!”라는 트윗을 올린 바 있다.

하지만 같은 해에 경찰은 카프레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전함의 승무원들이 이탈리아에서 판매할 목적으로 리비아로부터 70만 개 이상의 담배와 수많은 밀수품을 들여오고 있다는 사실을 적발했다. 추가 조사를 통해 다른 여러 군함도 밀수 조직과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당시에 수사를 주도한 가브리엘레 가르가노(Gabriele Gargano) 총경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마치 지옥으로 내려가는 단테(Dante)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민을 대하는 오늘날의 태도에서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 부각된다. 일반적으로 이동에 대한 통제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얘기다. 물류와는 별개의 얘기다. 우리는 국경 너머로 물자, 서비스, 자금을 이동하기 위하여 막대한 노력을 투입한다. 전 세계에서는 매년 110억 톤 이상의 화물이 배에 실리는데, 이는 1인당 매년 1.5톤에 해당하는 양이다. 반면에 모든 경제 활동의 핵심인 사람들은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한다. 선진국들은 인구 구성이 크게 변화하며 필수 노동력이 부족해진 상황이지만, 일자리가 절실한 이민자들의 고용은 차단돼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이동을 관장하는 국제단체나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나라가 국제이주기구(IOM)에 가입되어 있지만, 이곳은 UN을 실질적으로 대리하는 기관이 아니라 독립적인 UN의 ‘관련 기구’일 뿐이며 UN 총회의 직접적인 관리·감독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단일한 이민 정책을 수립할 수도 없다. 회원국들이 이민자를 받아들여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민자들은 일반적으로 각 나라에서 노동부가 아닌 외무부가에 의해 관리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찾아 주기 위한 정보나 정책 공조가 배제된 상태에서 관련 결정이 내려지곤 한다. 우리에게는 전 세계의 노동력 이동을 훨씬 더 효과적이며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가장 커다란 경제적 자산은 결국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민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가 아닌, 무엇을 허용하고 금지할 것인가에만 몰두해 왔다. 세계 각국은 이민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관리한다는 개념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적어도 경제적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이민이나 이주를 합법화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을 더 안전하게 보호할 새로운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며칠 만에, EU의 지도자들은 이 전쟁의 피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동시에 그들에게 EU 관할 내에서 3년 동안 거주하며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주거, 교육, 이동 등의 다른 부분에서도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이러한 정책이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지난한 난민 승인 절차를 거치지 않게 함으로써, 난민들이 지역 사회의 도움을 받으며 자립할 수 있는 지역으로 각기 정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EU 전역의 사람들이 난민들을 유치하기 위해 각자의 지역 사회에서, 소셜미디어에서, 그리고 다양한 기관들을 통해서 뜻을 함께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방을 내 주고, 의류와 장난감을 기부했으며, 언어 교실을 세우고 정신 건강 지원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런 모든 활동이 합법적일 수 있는 건 국경 개방 정책 덕분이었다. 이 정책은 중앙 정부는 물론이고 난민들을 유치한 지역과 난민들 모두에게도 부담을 줄여 줬다.
2022년 8월에 방글라데시 쿨나(Khulna)의 해안 지역에서 홍수로 인해 물의 수위가 상승한 가운데, 한 여성이 가축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있다. ©Photograph: Anadolu Agency/Getty Images


4. 이민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주민들에겐 자금과 인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적어도 초기에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 가족들로부터, 익숙한 언어와 환경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자 이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부모들이 자녀들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발생해,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지 못하게 된다. 중국의 특정 자녀 세대는 1년에 딱 한 번, 춘절(春節) 기간에 일주일가량만 부모와 만나며 성장해 왔다.

중국에서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시골과 도시의 중간에 걸친 어중간한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은 도시에 공공 주택, 유치원, 학교 등의 공공시설이 부족하다는 현실과 낡은 토지 법령으로 인해 도시로 완전히 이주하지 못한다. 시골 지역은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내오는 돈에 의해 지탱된다. 그리고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시골의 농지를 선뜻 팔지 못한다. 그들의 유일한 노후 보장책이라고 할 수 있는 땅을 잃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골에 남겨진 아이들은 나이든 어른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떠맡는다. 이주 노동자들은 도시에서 집을 살 형편이 안 되기에, 은퇴 후에는 다시 시골로 돌아간다. 이러한 순환이 계속된다.

어떤 곳에서는 이민자들이 도시나 외국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밀항업자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지급하기도 하는데, 결국엔 노예나 다름없는 하찮은 계약직 신분에서 그들의 여권을 되찾아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계약 내용’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이 벌어들이는 소액의 돈은 고향으로 보내진다. 중동과 유럽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들과 가사 노동자들이 이에 포함된다. 그들은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다가 결국엔 성매매 업종 혹은 여건이 열악한 음식 가공 업체나 의류 공장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려 하는 것처럼, 이민자들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이주를 택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이주를 택하기도 한다.

필자는 네 개 대륙에 걸쳐 난민 캠프에 머무는 사람들을 만나 봤다. 그곳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고 있는데, 그 기간이 때로는 몇 세대 동안이나 이어지기도 한다. 그곳을 가득 메운 이들이 수단인이든, 티베트인이든, 팔레스타인인이든, 시리아인이든, 엘살바도르인이든, 이라크인이든, 전 세계 난민 캠프의 모든 사람은 존엄성(dignity)을 원한다. 존엄성은 그들이 가족들을 스스로 부양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일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 스스로 안전하게 생계를 꾸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단순하며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만,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의 꿈은 세계 각지에서 좌절되고 있다. 세계의 환경이 변화한 결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결국 어느 곳에서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할 위험성이 높다. 전 세계적으로 굳게 닫힌 국경과 적대적인 이주 정책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현재 자신의 터전을 떠나는 사람들의 숫자는 기록적인 수준이며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2020년에 전 세계의 난민은 1억 명을 돌파하면서 2010년보다 세 배 증가했고 그중 절반은 아이들이다. 이는 지구에서 78명 가운데 한 명은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전쟁이나 재난 때문에 자신의 집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 가운데 난민으로 등록된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해서 유엔난민기구(UNHCR)의 추산에 의하면 전 세계에는 3억 5000만 명의 사람들이 무허가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미국 한 곳에서만 그 수가 2200만 명에 달한다. 여기에는 비공식 노동자들과 고대의 교역로를 통해 국경을 넘어선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 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아갈 것이다.

42억 명이 빈곤 상태로 살고 있으며 북반구 선진국(global north)과 남반구 저개발국(global south) 사이의 소득 격차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한, 결국에는 많은 사람이 이주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기후 변화의 타격을 받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더욱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세계 각국은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1951년에 채택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Refugee Convention)‘에서 규정하는 난민의 법적 정의에 의하면 기후 위기로 인해 고국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은 난민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2020년에 유엔 인권이사회(UNHRC)는 기후 난민들을 본국으로 송환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 즉, 만약 어떤 국가가 난민을 기후 위기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본국으로 송환한다면 유엔의 인권 존중 의무를 위반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권이사회의 이러한 판결은 국제 사회에서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현재 기후 위기로 인해 기존에 살던 곳을 떠난 사람들은 5000만 명에 달하며, 정치적 박해를 피해서 떠나온 사람들의 수를 이미 넘어섰다. 난민과 경제 이민을 구분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며 이러한 상황은 기후 위기로 인해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가공할 만한 허리케인이 발생해 온 마을이 파괴되면 하룻밤 사이에도 수많은 난민이 생겨날 수 있지만, 기후 붕괴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보다는 훨씬 서서히 진행되는 경우가 더 많다. 몇 년에 걸쳐서 흉작이 계속되거나 참을 수 없이 뜨거운 여름이 되풀이되는 식이다. 이러한 점진적인 과정이 결국은 위기이자 기폭제가 되어 사람들을 좀 더 살기 좋은 지역으로 떠나게 할 것이다.

세계가 앞으로 다가올 대규모 이주라는 현실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기후 변화에 대한 최종적인 형태의 적응일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환경이 점점 더 처참해지고 있음에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은 기후 비상 사태에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국경선의 군사력 강화에 더욱 큰 비용을 투입하면서 ‘기후 장벽’을 구축하고 있다. 문호를 개방하는 대신에 망명 신청자들을 위한 역외의 구금 시설과 ‘처리’ 센터를 확장하면 기후 위기로 인한 사망자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또 그것은 최빈국이 받을 기후 위기의 타격을 완화하려는 선진국들의 노력이 처참하게 실패했음을 보여 주는 가장 극명한 사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기후 민족주의자’들에게 경각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들은 우리 모두의 지구에서 좀 더 안전한 대지가 불평등하게 배분된 현실을 더욱 강화하려고 하는 자들이다.

기후 변화는 전 지구적인 규모의 위기이기 때문에 이주에 대해서는 전 세계적인 차원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분간은 EU의 회원국들이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은 지역별 자유이동협약(FMA)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협약은 대참사가 강타했던 카리브해의 섬나라 주민들이 보다 안전한 지역에 피난처를 찾는 데에도 도움을 줬다.

기후 변화의 위기에서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살아남을 수 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기후 위기가 아니라) 국경 정책이다. 이번 세기에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대규모의 이주 행렬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대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잘 관리한다면 우리를 구원해 줄 수도 있다.
이 글은 가이아 빈스(Gaia Vince)가 8월 25일에 출간한 《노마드의 세기, 기후 격변에서 살아남는 방법(Nomad Century: How to Survive the Climate Upheaval)》을 발췌한 내용이다.
[1]
2020년 기준으로 북미와 유럽의 노년부양비율(OADR)을 살펴보면, 캐나다 27.4, 미국 25.6, 영국 29.3, 독일 33.7, 프랑스 33.7이다. 참고로 한국은 22.0, 일본은 48.0, 중국은 17.0이다.
위키피디아
[2]
Adam B. Smith 〈2021 U.S. Billion-dollar Weather And Climate Disasters In Historical Context〉, 2022. 1. 24.
[3]
원문에 쓰인 ‘bureaucracy’라는 단어를 한국에서는 관료 체계, 관료주의 등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는 ‘관료 집단’이라는 뜻보다는 ‘국가 체계(state system)’라는 의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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