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트렌드의 후폭풍
유럽에 기반을 둔 아일랜드의 항공사 라이언에어(Ryanair)는 지난 2019년 “우리는 전 세계 항공사 중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가장 낮다”는 취지로 TV와 라디오에 광고를 송출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구체적 증거가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논란이 커지자 감독 당국은 규제에 나섰다. 영국 광고표준위원회는 라이언에어의 주장에 근거가 불충분하다며 이 광고를 금지했고, 결국 라이언에어 측은 논란의 카피 문구를 삭제해야만 했다.
친환경 브랜딩이 마케팅 트렌드로 자리 잡으며, 국내 역시 유사한 이슈가 발생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계열의 국내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는 지난해 4월 ‘페이퍼 보틀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하며 논란에 휩싸였다. ‘안녕, 나는 종이병이야’라는 문구와 함께 종이 재질의 용기에 담은 화장품을 선보였는데, 해당 용기는 두꺼운 종이 용기를 덧댄 플라스틱 병이었던 것이다. 친환경적인 종이 소재의 화장품을 기대하고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들은 내부에 숨어 있던 플라스틱을 발견하고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이니스프리 측은 사과문을 발표했다. 사측은 해당 용기가 기존 용기 대비 51퍼센트 적게 플라스틱을 사용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환경 성과를 조금이나마 입증하고자 했으나, 이 또한 불분명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며 도리어 소비자들의 원성을 샀다.
이처럼 녹색 트렌드의 후폭풍으로 발발한 그린워싱은 각종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린워싱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친환경 제품으로 포장하는 경우다. 최근 국내 다수 에너지 기업들이 회사명에 ‘그린’, ‘에코’와 같은 키워드를 추가해 사명을 변경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린워싱의 또 다른 유형은 친환경 제품 및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맞지만 거기서 창출한 성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영국의 밀키트 회사 구스토(Gousto)는 지난 2020년 친환경 콘셉트로 자사 제품을 홍보했다가 낭패를 봤다. 구스토 측은 조리에 필요한 식자재와 소스 등을 담아 배송하는 박스에 ‘에코 칠 박스(Eco Chill Box)’ 옵션을 추가하며 플라스틱이 아닌 100퍼센트 재활용 가능한 소재의 박스로 상품을 배송받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문제는 배송 업계에서 쓰는 포장재가 매우 다양한 물질로 구성된 만큼 ‘재생 성분 100퍼센트’라는 수치는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영국 광고표준위원회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광고를 만드는 행위가 소비자와 지구에 해를 끼칠 수 있다”며 구스토의 광고에서 ‘100퍼센트’ 문구를 제외하도록 시정 명령을 내렸다.
이외에도 석탄 발전과 같이 온실가스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시설을 건설하고 운영하면서도 ‘녹색 에너지 기업’으로 자사를 홍보하는 경우가 빈번하며, 녹색 채권을 부적절한 분야에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2021년에 일본의 기후 분야 비영리 단체들은 해외 개발 기관인 일본국제협력단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소했는데, 일본국제협력단이 녹색 채권으로 조달한 자금을 석탄 투자에 활용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린워싱이 발생하는 배경은 기업의 유형마다 차이를 보인다. 개인 소비자를 고객으로 하는 B2C 기업의 경우, 그린워싱의 가장 큰 유혹은 제품 및 서비스 홍보에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큰 소비자를 유인하고자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 나아가 기업의 가치관을 ‘친환경’과 묶어 설명하는 것이 현 마케팅 시장의 셀링 포인트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기후 위기 혹은 환경 보호 관련 성과에 전문성이 부족한 인력들이 마케팅을 주도할 경우 녹색 기준에 충족하지 않거나 오히려 반하는 활동을 종종 녹색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기업이나 정부를 고객으로 하는 B2B, B2G 기업의 경우엔 그린워싱의 효용이 약간 다르다. 제품 및 서비스 홍보보단 자사의 기업 평판을 높이고, 이를 기반으로 투자자 및 정부와의 소통을 원활히 하려는 목적이 크다. 앞서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많은 투자자와 정부가 기업의 녹색 활동에 주목하며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는 추세다. 기후 변화를 포함해 글로벌 기후 위기가 심화하고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우려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녹색 자금 조달은 앞으로도 유지 혹은 확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ESG경영’에 능한 ‘녹색 기업’으로서 자본 시장의 인정을 받고자 많은 기업들은 성과를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이때 어떤 기준으로 그린워싱을 판별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데이터다. 어렵게 창출한 친환경 성과의 의미가 언론과 대중의 반발을 사며 퇴색하지 않기 위해, 데이터에 기반한 명확한 소통이 중요하다. 온실가스를 비롯한 환경 유해 물질을 얼마큼 감축했는지 정량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공신력을 더하기 위해 기업 자체적으로 측정한 데이터에 대한 외부 기관의 평가 및 인증을 받을 수도 있다. 또는 플라스틱 재활용 등 차후 자원 순환을 통해 절약한 자원량을 측정해서 제시할 수도 있다.
핵심은 정량화된 데이터를 토대로 소통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녹색 공시 기준에 대한 이해를 보유한 전문 인력을 육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업은 전문성 있는 인력을 마케팅 과정에 참여시키거나 환경 단체를 비롯한 외부 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자사의 마케팅 방식을 검토해야 한다. 정부 또한 이들 기업에 정확한 공시 기준을 제시하고, 공시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 예컨대 유럽 연합은 지난 2021년 4월, 기존 비재무공시지침(Non-Financial Reporting Directive) 대비 강화된 지속가능성보고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유럽 연합 전체 매출의 75퍼센트를 차지하는 5만여 개의 기업은 녹색 정보에 대한 공시가 의무화됐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증권거래소는 2022년 3월 미국 상장 기업 대상 기후 정보 공시를 의무화하는 기후 공시(Climate-Related Disclosures) 초안을 공개한 데 이어 5월 25일, 그린워싱을 방지하는 투자회사법(The Investment Company Act) 개정안을 발표한 바 있다.
영국 자산 운용사 슈로더(Schroders)가 지난 2021년 650개 기관 투자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ESG 투자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60퍼센트가 ‘그린워싱’이라고 답했다. 녹색이 돈이 되는 시대에, 그린워싱의 유혹에 직면하는 기업들은 점차 늘고 있다. 정부의 적절한 규제와 소비자 개인의 현명한 판단, 보다 근본적으로는 기업의 자정적인 노력을 통해 환경 성과에 기반한 소통과 공시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이번 장에선 마케팅 트렌드로 떠오르는 친환경 제품과 여론이 분분한 전기차 산업, 그리고 EU 택소노미를 필두로 한 원자력 발전을 중심으로 그린워싱의 사례와 이를 평가할 수 있는 몇 가지 지표들을 짚어 보고자 한다.
친환경 제품의 이면
제품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대한다면 어떨까? ‘생애 전 주기 평가(LCA·Life Cycle Assessment)’란 제품의 생애 전체에 걸쳐 환경 유해 물질을 얼마나 배출하는지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체가 아닌 제품에게 ‘생애(life)’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다소 어색할 수 있지만, LCA는 제품의 생애를 그 탄생부터 소멸까지로 본다.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의 텀블러를 예로 들자. 원재료인 스테인리스를 생산한 후 이를 이용해 텀블러를 제조하고, 제조된 텀블러가 사람에 의해 사용되고, 사용이 종료된 이후 폐기되는 일련의 과정을 생애라고 지칭한다. LCA는 이러한 모든 단계에서 발생하는 환경 영향을 평가하는 것으로, 특히 기후 위기 대응의 일환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평가할 때 가장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
LCA라는 개념이 주목받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소재를 비롯해 제품의 단편적인 요소만으로 친환경 여부를 판단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특히 일회용 제품과 다(多)회용 제품 간의 친환경성 논란이 그렇다. 일회용 종이컵 대신 재사용 가능한 텀블러를 쓰자는 캠페인이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으나, 종이컵 하나를 제조할 때보다 텀블러 한 개를 만들고 폐기할 때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든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취지가 좋다는 이유로 각종 텀블러를 구매 후 몇 번 사용하지 않고 폐기한다면 전 지구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2019년 5월 기후변화행동연구소가 LCA 관점에서 텀블러와 일회용 종이컵의 온실가스 발생량을 분석한 결과, 텀블러 한 개에선 평균 671그램의 온실가스가 발생한 반면 일회용 종이컵 한 개에선 평균 28그램의 온실가스가 발생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텀블러를 구매해 24번 미만 사용한다면 종이컵보다 더 많은 환경 오염을 유발할 수 있다. 캐나다 환경 단체 시레이그(Ciraig)는 보다 상세한 연구를 진행했다. 텀블러를 원재료에 따라 가장 흔히 사용되는 스테인리스, 폴리프로필렌, 폴리카보네이트 텀블러로 구분해 각기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을 분석했다. 결론적으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한 폴리카보네이트 텀블러의 경우에도, 90회 이상을 사용한다면 종이컵보다 환경을 덜 오염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달리 말하면 텀블러를 구매해 90회 미만 사용한다면 친환경적인 소비로 보기 어렵다. 이는 환경에 미치는 영향 중 온실가스 배출량만을 고려한 계산이며, 텀블러를 세척하는 데 쓰는 물 등 다른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차이는 좀 더 극명해질 수 있다.
친환경 제품으로 자주 회자되는 에코백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8년 덴마크 환경보호국은 면 재질의 에코백은 최소 7100번 이상 사용해야 같은 크기의 비닐 봉투를 사용했을 때보다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에코백을 무분별하게 구매하는 것보다 차라리 비닐 봉투를 사용하는 것이 친환경적이라는 것이다.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기업이 의류를 대량 생산하는 과정에서 각종 폐기물을 발생시키고도 ‘친환경’, ‘지속 가능성’ 등의 키워드를 홍보에 사용하는 것 또한 유사한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H&M은 비영리 환경 단체 체인징마켓파운데이션(Changing Markets Foundation)이 지난 2021년 발표한 그린워싱 브랜드 보고서에서 ‘허위 주장 기업 1위’를 차지하는 불명예를 얻었다.[1] 자사의 친환경 의류를 적극 홍보하면서도 여전히 화석 연료로 생산하는 합성 소재의 비중이 높은 의류를 생산하고, 이를 재활용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텀블러, 에코백 같은 많은 친환경 제품들이 ‘좋은 취지’를 내세우며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기업은 제품의 생산 과정에서 유해 물질의 배출을 줄이고, 재활용 가능한 소재로 제품을 생산해야 하며 불가피하게 폐기해야 하는 제품이라면 폐기 과정에서도 유해 물질 배출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업 못지않게 소비자의 역할도 중요하다. 환경 보호에 앞장선다는 인플루언서가 매일 다른 프랜차이즈 카페의 텀블러와 명품 패션 브랜드의 에코백,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그린 마크가 찍힌 의류를 소셜 미디어에 업로드하며 “환경을 보호한다”고 발언하는 것만큼 아이러니한 일은 없다. 진심으로 기후 위기 대응에 동참하는 소비자라면 제품의 생애 주기를 토대로, 진짜 친환경 제품을 판단할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테슬라가 ESG 지수에서 퇴출된 이유
미국 테슬라가 2020년 자동차 업계 시가 총액 1위 기업으로 등극하기 전까지, 이 자리는 일본 도요타의 차지였다. 도요타는 1997년 출시한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Prius)의 성공에 힘입으며 하이브리드 시장 점유율을 높여 가는 동시에 친환경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연예인들이 프리우스를 타고 다니며 ‘환경을 생각하는 인플루언서’라는 대중의 인식이 커졌고, 이러한 도요타의 마케팅 전략은 상당 기간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하이브리드차를 정말 친환경 자동차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이브리드차가 친환경이라면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 단체들은 왜 지난 2020년 하이브리드차를 기후 변화를 촉발하는 3대장 중 하나로서 가솔린차, 디젤차와 동일하게 취급하며 그린워싱이라고 비판했을까? 이에 답하자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기 때문이다.
과거 석탄 발전이 에너지 생산 방식의 유일한 선택지였던 상황에서, 고효율 석탄 발전은 같은 양의 석탄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환경 유해 물질을 적게 배출했다. 따라서 고효율 석탄 발전은 전통적인 석탄 발전에 비해 친환경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태양광과 풍력 발전 등 재생 에너지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고효율 석탄 발전을 두고 친환경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2016년 자국에 특화된 녹색 채권 가이드 라인을 마련할 당시 고효율 석탄 발전을 녹색 사업에 포함하면서, 유럽 등 선진국의 비판을 받은 것 역시 같은 이유다.
하이브리드차도 마찬가지다. 내연차 대비 연료를 적게 소비하고 온실가스를 적게 배출한다는 점에서, 과거에는 하이브리드차가 친환경적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전기차 시대가 도래한 시점부터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내연차와 거의 비슷한 하이브리드차를 더 이상 친환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됐다. 과거엔 친환경 투자로 부상했던 기술이라도 시대가 바뀌며 유의미한 환경 성과를 창출하지 못할 때, 이를 계속 친환경 기술로 일컫는다면 그린워싱에 해당한다.
도요타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하이브리드차 시장에 집중했다. 더 큰 친환경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전기차로의 전환보다는 하이브리드차가 가진 기존의 경쟁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자사 광고에서 하이브리드차는 전기차에 비해 충전 시간이 짧다는 점을 부각하며 최근까지도 소비자에게 하이브리드차가 전기차보다 우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하지만 EU에서 2035년까지 유럽 내 내연 기관차 시장과 더불어 하이브리드차 시장을 퇴출하겠다고 발표하고, 영국이 이보다 앞선 2030년까지 하이브리드차 판매를 금지하겠다고 선언하며 도요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난 2021년 말, 도요타는 다수의 전기차 출시 계획을 발표하며 뒤늦게 전기차 시장의 흐름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EU의 친환경 정책에 철퇴를 맞은 후 급하게 방향을 선회한 도요타가 향후에도 자동차 산업 내 1위 자리를 쟁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동차 시장의 1위 자리는 이미 테슬라에게 넘어간 지 오래다. 기존 내연차 기업 중에서는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나 이 역시 현재의 추세로 보면 지속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테슬라 대비 신생 전기차 업체인 미국의 리비안(Rivian)이나 루시드(Lucid) 같은 기업들의 시가 총액은 이미 스웨덴의 볼보나 일본의 닛산 같은 전통적인 자동차 기업의 시가 총액을 앞지른다. 미래에는 전통적인 자동차 기업 중 전기차 기술력을 보유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 간의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질 것이다.
10년 전 테슬라가 처음으로 세단형 전기차 ‘모델 S’를 출시할 때만 해도 전기차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테슬라의 보급형 전기차 ‘모델 3’가 공개된 6년 전까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독일 프리미엄 자동차 회사 중 한 곳과 국내 전기차 출시를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전기차에 대한 국내 인식을 파악하고자 진행한 소비자 인터뷰에서, 대다수의 소비자들은 “전기차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긴 충전 시간, 빈약한 충전 인프라, 짧은 주행 거리 등으로 인한 불편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당시 전기차를 구매하던 소비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었는데, 한 유형은 새로운 IT 제품을 체험하는 기분으로 전기차를 구매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들이었던 반면 다른 유형은 전기차의 친환경적인 성과에 주목하고 그 가치에 공감하는 녹색 소비자들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 전기차는 이제 자동차 시장의 확고한 대세로 자리 잡았다. 국내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 제네시스는 2025년부터 전기차로만 신차를 출시하고, 2030년부터는 전기차만 판매하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 자동차 회사 역시 유사한 전략을 펼치고 있다. 유럽 자동차 시장을 선도하는 독일 폭스바겐은 유럽에서 2030년까지 판매되는 전체 차량 중 전기차 비중을 70퍼센트까지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2022년 7월, EU 차원에선 2035년 이후에는 유럽 내 내연차 판매 자체를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마지막까지 하이브리드차를 잡고 있었던 일본의 토요다 아키오(Toyoda Akio) 사장마저 전기차 시장으로의 방향 전환을 예고하며 전기차는 자동차 산업의 불가피한 뉴 노멀이 됐다.
사실 지난 130년 넘게 구축해 온 내연차 시장을 전기차 세계로 전환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다양한 부품 회사는 물론, 수많은 주유소와 자동차 수리점까지 자동차 시장은 여러 산업군에 걸쳐 연결돼 있고 막대한 자본도 함께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기차가 이렇게까지 단기간에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이유다. 기후 변화, 그리고 테슬라의 등장이다. 우선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화석 연료와의 결별은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높은 순서로 줄을 세운다면 석탄, 석유, 천연가스 순으로, 이들 에너지의 대안을 찾는 것이 세계 각국의 과업이었다. 자연스레 석유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운송 부문에서의 변화가 필수적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의 전기차 전환은 선도적이었다. 다만 자동차 산업은 유럽의 핵심 산업이고 역사와 전통이 깊은 만큼,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의 일자리와 연결된 시장인 만큼 전기차로의 전환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자동차 산업은 2022년 기준 유럽 전체 고용 중 6.1퍼센트에 기여하고 있으며 자동차 제조업에 특화해서 본다면 전체 제조업 고용 중 8.5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때 미국에서 등장한 것이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다. 테슬라는 2012년 ‘모델S’로 전기차 시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줬으며, 이후 2017년 ‘모델 3’를 통해 대량의 전기차를 시장에 보급했다. 모델 3는 2018년 말 미국 프리미엄 자동차 시장에서 판매량 1위를 기록한 것은 물론, 미국에서 가장 자동차가 많은 캘리포니아주에서 2020년 1분기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국내에서도 2020년 3월, 가장 많이 팔린 수입 자동차 1위에 등극한 바 있으며 지난해 전 세계 프리미엄 세단 판매량 순위에서도 1위에 올랐다. 이를 통해 소비자들은 전기차가 내연 기관차를 대체하거나 혹은 적어도 새로운 경험을 줄 제품이 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전기차 전환의 필요성을 느끼던 시점에, 이를 달성할 기술력을 갖춘 브랜드가 시장에 등장하며 본격적인 전기차 시대가 도래할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하이브리드차와 마찬가지로, 전기차가 과연 친환경적인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생산 과정이다. 전기차를 생산할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의 양이 내연차를 생산할 때에 발생하는 양보다 많기 때문에, LCA 관점에서 전기차가 친환경적이라는 믿음은 오류라는 것이다.
이 논쟁을 해결할 열쇠 또한 데이터에 있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폭스바겐의 내연 자동차 한 대가 생산 단계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평균적으로 5~6톤인데, 테슬라 전기차는 생산 과정에서 한 대당 평균 8~9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다만 LCA 관점에서 이 자동차의 생산 단계뿐 아니라 사용 단계와 폐기 단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특히 사용 단계를 살펴보자. 전기차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미미한 반면, 내연차는 30톤 이상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즉 생애 주기로 계산한다면 약 35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폭스바겐 내연차는 10여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테슬라 전기차에 비해 평균 약 세 배 이상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전기차의 연료인 전기를 생산할 때 발생하는 화석 연료량 또한 고려해야 한다. 유럽에서 석탄 발전 비중이 가장 높은, 거칠게 말해 가장 친환경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력을 생산해 온 폴란드의 경우에도 전기차는 내연차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약 25퍼센트 적다. 반면 친환경적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이를 전기차의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스웨덴에서 전기차를 운행할 경우, 내연차 대비 오직 20퍼센트 수준의 온실가스만 발생하는 극적인 효과를 낳는다.[2]
현재 전기차 시장을 선도하는 테슬라의 ESG 경영에 대한 업계 평가는 어떠한가? 지난 2022년 5월, 테슬라는 S&P 500 ESG 지수에 편입된 지 불과 1년 만에 인권 및 탄소 배출 전략 부재 등의 이슈로 퇴출됐다. S&P 500 ESG 지수는 미국에서 모건 스탠리가 운영하는 MSCI ESG 지수와 함께 가장 대표적으로 활용되는 ESG 지수다. 해당 지수는 환경과 사회, 지배 구조 데이터를 토대로 기업을 평가해 지수 편입과 편출을 결정하는데, 매년 그 편입 및 편출 대상을 재조정한다. 지수 퇴출 직후 일론 머스크 CEO는 탄소 배출량이 높은 석유 기업 엑슨모빌(ExxonMobil)이 해당 지수에 포함됐다는 점을 언급하며 “ESG는 사기(ESG is a scam)”이며, “거짓된 사회 정의 투사들에 의해 무기화됐다”고 비판했다. 전기차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인 테슬라가 ESG 지수에서 퇴출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친환경’과 ‘ESG’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테슬라의 전기차는 수송 부문의 온실가스 감축을 통해 기후 변화 대응에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수송 부문의 실적만으로는 테슬라를 친환경 기업 또는 ESG 기업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S&P를 포함한 ESG 평가 기관들의 견해다. 기업의 ESG 경영 수준을 평가할 때 해당 기업이 E·S·G 각 항목에서 얼마큼 성과를 관리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해당 기업의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포함한 환경 유해 물질을 감축하기 위해서 어떠한 전략을 펼치고 있는지, 임직원과 협력 업체의 인권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등 ESG 전반에 걸친 기업의 전략과 노력을 평가한다. 테슬라가 S&P 500 ESG 지수에서 퇴출된 것은 사업장 관리나 온실가스 외에 다른 환경·사회·지배 구조 측면에서는 보완해야 할 사항이 아직 많다는 점을 시사한다. 전기차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한 노력이 부실하거나, 온실가스 외에 유독성 환경 유해 물질에 대한 관리가 이뤄지지 않거나, 환경 외 다른 사회·지배 구조와 관련해 미흡한 사항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ESG 경영이 선택이 아닌 의무로 자리 잡은 시대에는 한 가지 항목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항목에서의 부족한 성과가 참작되지 않으며, 모든 구조 측면에서 다각도로 높은 수준의 성과를 달성할 것을 요구한다. 테슬라 역시 ESG 전반에 대한 활동을 보완한다면 향후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친환경 기업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기차는 원료 자체를 생산하는 과정 또한 녹색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화석 연료로 전기를 생산하는 나라에서 전기차는 반쪽짜리 녹색 상품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내연차를 대체하는 전기차로의 전환과 동시에, 녹색 에너지로의 전환도 병행해야 한다.
만약 에너지 차원의 녹색 전환도 성공한다면, 이후의 관전 포인트는 승용차가 아닌 기타 운송 수단의 변화다. 앞서 말했듯 에너지 전환은 현재 석유와 석탄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승용차 부문에서부터 이뤄지고 있다. 그다음은 운송 트럭으로 대표되는 상용차가 전기차 시장으로의 대대적인 전환을 경험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선박과 비행기 역시 에너지원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 이미 일부 선진국에서는 전기 비행기에 대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으며 수소 비행기 연구도 진행 중에 있다. 미국 나사(NASA)가 2016년부터 개발을 시작한 전기 비행기 ‘X-57 맥스웰’은 60킬로와트시의 전기 모터 2개와 9킬로와트시 전기 모터 12개 등 총 14개의 모터를 사용하며, 최고 목표 시속은 시간당 282킬로미터로 기존 비행기의 시속과 맞먹는다. 유럽의 대표적인 항공기 제조 업체 에어버스(Airbus) 또한 수소를 사용하는 ‘무탄소’ 항공기를 2035년까지 상용화하겠다고 선언했다. 형태는 터보팬(turbofan) 항공기, 터보 프롭(turboprop) 항공기, 동체 날개 일체형 항공기의 세 가지 형태로 2025년까지 적합한 기술을 개발하고 2020년대 후반에는 시제품을 내놓겠다는 것이 에어버스의 구상이다. 배터리 기술이 고도화된 다음 세대에는 전기 선박과 전기 비행기, 더 나아가 수소 비행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며 그에 발맞춰 새로운 에너지원의 친환경 성과를 정량적으로 평가할 기준 또한 마련될 것이다.
원자력, 친환경과 친기후 사이에서
올해 1월,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EU 택소노미에 포함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EU 택소노미가 녹색의 여부를 판단하는 유럽 차원의 기준인 만큼, 여기에 원자력이 포함되는 순간 원자력은 EU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친환경 에너지원이 된다. 물론 원자력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한시적인 방편으로 허용하겠다는 계획이지만, 그간 유럽이 지켜 온 탈원전 기조를 뒤엎는 선택이었던 만큼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EU 내부적으로도 의견은 갈렸다. 오래전부터 탈원전을 선포한 독일은 택소노미에 원자력을 포함하는 것을 반대한 반면, 프랑스는 안정적인 에너지원 확보를 위해 찬성의 입장을 밝혔다. 치열한 논쟁 끝에 2022년 7월, EU 택소노미에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포함하는 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됐다.
지금까지 유럽 연합이 친환경으로의 전환을 도모하던 움직임과는 상반된 결정에, 다수 환경 단체가 그린워싱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EU 택소노미는 EU가 제시한 녹색 기준이다. 따라서 ‘EU가 원자력을 택소노미에 포함한다’는 것은 ‘EU가 원자력을 녹색 발전으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다.
문제는 방사성 폐기물 문제를 비롯해, 원자력 발전이 환경 유해 물질을 줄이는 데 생각만큼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세계자연기금(WWF·World Wildlife Fund)을 비롯한 환경 단체들은 정부가 원자력 발전이 친환경이라고 선언하고 이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는 것이 국가적인 차원의 그린워싱이라고 주장한다.[3] 그렇다면 원자력 발전의 친환경 여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우선 원자력 발전은 기후 변화가 다른 환경 의제와 항상 연계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전통적으로 기후 변화는 기후 위기 시대에 도래한 여러 환경 의제들 중 하나였으며,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이 결국 환경 보호를 위한 것이었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속칭 ‘기후인’과 환경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속칭 ‘환경인’은 주로 같은 목소리를 내 왔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과 관련해서는 기후인과 환경인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계속해서 강조한 것처럼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이 핵심이며, 전력 생산에 있어서는 온실가스를 최다 배출하는 석탄 산업을 축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에 따라 한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의 정부와 금융 기관들은 탈석탄 선언을 통해 석탄 발전에 지원이나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석탄을 사용하는 기저 발전원, 다시 말해 안정적이고 낮은 가격으로 전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발전원으로서의 역할을 신재생 에너지가 대체하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자연에 의존하는 에너지인 만큼 안정성이 떨어지고, 결정적으로 신재생 에너지를 통한 전력 생산은 화석 연료, 특히 석탄 발전 대비 비용이 많이 든다. 반면 유엔 유럽경제위원회가 2022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LCA 관점에서 원자력 발전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키로와트시당 4.9~6.3그램으로 석탄 발전 중 가장 배출량이 낮은 설비인 석탄 가스화 복합 발전(IGCC·Integrated Gasification Combined Cycle)의 753~912그램보다 압도적으로 적은 배출량을 보인다.[4] 온실가스 배출만을 고려한다면 원자력 발전은 석탄 등 화석 연료를 사용한 발전과 비교했을 때 충분히 친-기후적이며,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을 고려한다면 기후 변화 대응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현실적 조건을 고려했을 때 세계 여러 나라, 특히 우리나라에서 단기간에 석탄 발전을 줄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은 원자력 발전을 늘리는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 또한 이 논리에서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원자력 발전은 방사성 폐기물이라는 또 다른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기후 변화를 늦추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은 원자력 발전이지만, 원자력 발전으로부터 발생하는 방사능 물질은 심각한 환경 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원자력 발전은 친-기후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친환경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국 어떤 가치를 우선으로 둘 것인지에 따라 원자력 사용 여부를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원자력 발전 시 방출되는 방사능 물질의 문제가 기후 변화 문제보다 심각하다면, 탈원전 기조를 유지하는 편이 합당하다. 반대로 기후 변화를 늦추는 것이 다른 환경 의제보다 중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원자력 발전을 한시적으로는 허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정이다. 유럽 연합은 후자를 택했고, 우리나라 또한 최근 새 정부의 기조에 따라 유사한 선택이 예상된다.
이러한 EU의 결정에 따라 국가적 차원의 그린워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원자력 발전이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할 수 있다고 해서 친환경 에너지로 부각하고, 그 이점을 홍보하는 것이 그러하다. 향후 수소 에너지 등 원자력을 대체할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성을 확보해 상용화된다면, 원자력은 고효율 석탄 발전이나 하이브리드차와 같이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에너지원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도리어 방사능 문제 등 심각한 환경 피해를 유발함에 따라 퇴출 대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소비자는 물론,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도 원자력 발전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접근이 필요하다.
실제로 EU 역시 원자력을 무기한적인 ‘그린’으로 인정하겠다는 입장은 아니다. 원자력 발전을 녹색으로 인정하는 유효 기간은 2045년까지며, 천연가스 발전은 이보다 앞선 2030년까지만 녹색으로 인정한다. 그때부턴 새로운 대안이 등장해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대체하리라는 전망하에 이러한 유예 기간을 마련한 것이다. 원자력의 폐기물과 관련해서도 기후인과 더불어 환경인의 요구를 함께 만족시킬 수 있는 엄격한 환경 관리 기준을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2050년까지 고위험의 방사성 폐기물을 관리 및 처리할 수 있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에 대한 국가 계획을 수립하고, 여기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핵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로 인해 원자력 발전 내부 시설물이 녹아내리는 노심 용융(nuclear meltdown)에 대한 대책도 포함돼 있다. 노심 용융 현상에 따라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확산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2025년부터는 원자력 발전 시 사고 저항성 핵연료(ATF·Accident Tolerant Fuel)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과 같이 폐기물 처리에 안일했던 원자력 발전 방식은 한시적으로라도 인정하기 어려우며, 새롭게 도입한 높은 수준의 기준들을 만족해야만 2045년까지 새로운 원전 건설을 허가해 주겠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EU도 원자력을 녹색 분류 체계에 포함했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은 친환경 에너지원이자 앞으로도 인류가 추구할 최상의 에너지원”이라고 얘기한다면 이는 명백한 오류이며, 이 관점에서 환경 정책을 펼친다면 국가적 차원의 그린워싱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원전은 기후 변화라는 전 세계적 위기에 대응하고자 단기적으로 취하는 에너지원이며, 새로운 대안이 생긴다면 퇴출해야 할 에너지원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회 과학 분야의 다른 많은 논쟁 거리처럼, 녹색의 기준 역시 기술의 발전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혹은 지금은 필요하지만 미래엔 부적절한 경우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영화 〈아이언맨(Iron Man)〉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생명을 유지하는 동시에 아이언맨 슈트를 가동하기 위해 가슴팍에 아크 원자로를 달고 있다. 아크 원자로는 팔라듐이라는 원소를 촉매로 한 아주 작은 핵융합 장치인데, 이 팔라듐에서 나오는 독성 물질로 인해 아이언맨이 점점 죽어가는 내용이 〈아이언맨2(Iron Man2)〉의 주요 줄거리다. 결말에서 토니 스타크는 결국 아버지로부터 영감을 받아 독성이 없는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몸에 퍼져 있던 독성을 해소해 더 강한 에너지를 가진 아이언맨으로 거듭나게 된다.
생존을 위해 몸속에 독성 물질을 달고 다녔던 토니 스타크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원자력 발전을 한시 허용한 현실 세계의 상황과 겹쳐 보인다. 토니 스타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낸 만큼, 지금의 국가적 과제는 원자력을 불가피한 에너지원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충분히 친환경적이라고 대중을 안심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원자력 발전의 문제를 해결할 또 다른 에너지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인공 태양, 수소 에너지 등 새로운 에너지원에 대한 연구가 대대적으로 이뤄져 왔으나 갈 길은 멀어 보인다.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중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두 위기에 동시 대응할 새로운 에너지원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녹색을 도모하는 길목에 숨은 그린워싱의 유혹을 뿌리치며, 객관적으로 녹색을 판가름하는 새 시대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