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전략 역시 명성을 얻는 데 일조했다. 언론은 정체가 묘연한 그의 흔적을 쫓기 바쁘다. 단체 작업이 필요한 작품 활동도 하기 때문에 뱅크시는 집단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뱅크시는 작품을 생산, 소비하는 과정까지도 자신의 화법으로 만들었다. 생산과 소비의 과정을 포함하는 화법은 자본주의 및 국가 체계의 작동 논리를 은유적으로 지적하는 행위다. 대중을 관객으로 포섭하고 공권력과 자본주의를 비판할수록 작가의 대중성과 상품 가치는 높아진다.
뱅크시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미술 시장과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이후에도 유지하고 있는 태도, 즉 주류 사회 및 자본과 타협하면서도 그들에게 종속되지 않는 동력인 수행(遂行, performance)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라피티, 거리 예술, 뱅크시
뱅크시는 그라피티와 거리 예술의 경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하지만 그의 작업 기법, 대중과의 관계, 작품에 대한 평가를 고려하면 그라피티보다는 거리 예술가에 가깝다.
그라피티는 1960년대 미국 뉴욕과 1970년대 이후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에서 발전했다. 버려진 도시 공간에 그려지면서 권력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주변 문화 및 청년 문화를 상징했다. 그라피티 라이터는 주류에 합류하지 못하는 계층이나 연령대에 속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법과 경제 질서를 비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라피티와 그 무대는 당대 도시의 정치, 문화, 경제 질서를 반영하며 발전해 왔다.
1980년대 이후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그라피티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뉴욕 소호의 레이저(Razor) 갤러리, 이스트빌리지의 펀(Fun) 갤러리, 브롱크스의 대안 예술 공간 패션 모다(Fashion Moda)에서 열린 전시회들은 그라피티의 상업화에 기여했다.
[3] 거리 예술가인 키스 해링(Keith Haring),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가 이러한 전시회들을 통해 데뷔했고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공공장소에 그린 태그나 그림이 상품으로 변형되어 출시됐고, 대중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거리를 벗어난 작업자들은 더 이상 비판적 화법을 따르지 못하게 됐다.
주류 문화에 편입되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라피티는 대도시의 자본 및 도시 계획과 갈등을 빚어 왔다. 도시 행정부는 그라피티를 제거, 통제, 금지했다. 현대 도시의 공간 문법, 특히 자본의 논리와 이를 따르는 공간의 배치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그라피티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파괴하는 행위이자 문화에 위해를 가하는 반달리즘(vandalism)
[4]이었다. 하지만 그라피티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도시의 벽과 건물은, 다시 말해서 그라피티 라이터의 캔버스는 주변 문화가 주류 문화를 파괴하고 조롱하며 비틀어 변용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공간이다. 오용된 공공장소가 아닌 도시의 공간 문법을 변주하는 장소다.
거리 예술은 그라피티의 파생물이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크다. 우선 거리 예술은 그라피티에 비해 공격성이 덜하다. 거리 예술가들은 그라피티 라이터들이 표현하는 분노를 반드시 공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장난이나 유머를 활용한다. 두 번째로 시각적 이미지에 집중한다. 그라피티의 주된 표현 수단인 스프레이와 페인트에서 벗어나 스텐실, 포스터, 설치 예술, 행위 예술 등으로 표현 매체를 확대한다. 세 번째로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작품을 구성한다.
[5] 거리 예술은 그라피티처럼 뜻을 알 수 없는 문자의 조합이나 스타일 개발에 집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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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반응에도 차이가 있다. 1980년대 대중은 힙합 문화의 일부로 그라피티를 인지했지만 문자를 공공 공간에 남기는 행위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그림을 내세운 거리 예술은 유머를 섞어 대중에게 다가갔고 이해 가능한 예술이 됐다. 도시 공간을 점유한다는 제작 의도나 수행 기법은 비슷하지만 두 예술을 대하는 대중과 사회의 인식은 달랐다. 앞서 탄생한 그라피티가 상업적 진입 장벽을 낮춘 덕에 후발 주자인 거리 예술이 자본주의 체제에 쉽게 융화된 측면도 있었다.
예술과 현실이 교차하는 드라마
뱅크시의 활동은 퍼포먼스로 정의할 수 있다. 퍼포먼스는 말의 진위보다 언어의 수행성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결혼 행사에서 실제 결혼은 서약을 포함한 결혼식이라는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 환경 연극의 대가 리처드 셰크너(Richard Schechner)와 사회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일상의 사건이 대본을 토대로 공연되는 연극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일상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모든 활동은 퍼포먼스가 된다.
뱅크시의 활동을 퍼포먼스로 정의할 수 있는 이유도 예술과 현실을 오가는 관계의 드라마를 만들기 때문이다. 뱅크시는 현실의 문제를 예술의 주제로 삼고, 현실에 예술을 구현한다. 먼저 주제를 표현하는 매체와 장르 면에서 그렇다. 그는 도시의 벽과 공공건물뿐만 아니라 상점, 미술관,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활동한다. 때로 스텐실 기법을 벗어나 설치 예술과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퍼포먼스는 관객과 만나는 지점에서 두드러진다. 2005년 뱅크시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현대 미술관, 브루클린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영국 테이트 모던 등에 자신이 만든 모조품들을 몰래 설치했다. 위작이 의심받지 않고 전시된 순간, 위작은 기존 전시 작품과 동등한 가치를 갖게 됐다. 예술의 아우라는 사라졌다. 뱅크시는 제3자에게도 사적 용도의 작품 복제를 허용한다. 때문에 작품의 진품 여부는 추측만 가능하다. 작가의 권위를 해체시키는 이러한 행위가 퍼포먼스인 이유는 미술관과 관람객의 특권 의식을 풍자하기 때문이다. 그가 본인 작품의 공증 단체인 페스트 콘트롤(Pest Control)을 만들어 운영하는 목적은 역설적으로 진품을 부정하기 위해서다. 작가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단체가 진품 여부를 확인해 주지 않음으로써 작품이 경매에 나갈 확률은 줄어든다.
퍼포먼스에서는 진위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나 행위, 이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 2005년 뱅크시는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쪽 방호벽에 그림을 남겼다. 벽 너머의 세상을 유토피아로 표현한 그림은 폭력이 지배하는 현실과 맞물려 모순을 드러냈다. 세계 언론은 그림을 분쟁 지역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로 조명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현지인은 뱅크시에게 그 벽이 아름답게 보이길 원치 않는다며 돌아가라고 요청했다.
[7]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세운 방호벽은 영토 침입과 세계에서 고립된 자국을 상징했다. 현지인은 주권 침해의 상징을 아름답게 꾸며 자칫 분쟁 현실을 가릴 위험을 지적한 것이다. 뱅크시는 부드러운 표현으로 방호벽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현지인의 입장에서는 이 전략조차 자신들의 비극을 이용한 외부의 시선에 불과했다. 뱅크시는 현지인의 평가를 블로그에 실으며 현실과 예술의 괴리를 직접 보여 줬다. 수용자의 관점을 인정하고 이것까지도 퍼포먼스의 대상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