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룩셈부르크의 정수는 ― 유럽의 중심부에 있는 하나의 점으로서 ― 그런 야심적인 모험을 허용하고 심지어 요구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모토는 ‘우리는 우리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We want to remain what we are)’이다. 이런 독립 정신으로 부르고뉴(Burgundy)의 공작,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 오스트리아의 황제, 네덜란드의 왕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에 걸친 지배를 견뎌 왔다. 1876년에야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이 나라는 세계인의 상상 속에서 이상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들어 봤을 엄청난 경제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도에서 정확한 위치를 짚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UC 버클리 대학의 경제학 조교수인 가브리엘 주크만(Gabriel Zucman)은 룩셈부르크가 금융계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룩셈부르크는 스위스처럼 사설 은행을 가지고 있고 아일랜드처럼 거대한 뮤추얼 펀드 산업을 가지고 있고, 버뮤다나 네덜란드처럼 기업들의 조세 피난처로 사용되고 있고, 두 개의 국제 중앙 유가 증권 보관소 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어서 유로본드에서 활동적입니다. 룩셈부르크는 금융업의 모든 단계에 존재하는 조세 피난처들의 조세 피난처입니다.” 현재 세계 금융에 관해 기고하는 런던의 전 은행가인 토니 노필드(Tony Norfield)는 룩셈부르크를 ‘기생의 전형(a paragon of parasitism)’이라고 묘사했다.
변방의 약소국이 세계 대전과 경제 위기, 기술 진보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아 금융 강국이 된 이야기는 작은 나라가 세계 자본의 요구를 예측하고 이에 부응하는 데 전념한다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논쟁적인 사업이다. 주주들은 룩셈부르크의 기업 친화적인 법률과 세금을 피해 갈 수 있는 구멍을 칭찬하지만, ‘바닥 치기 경쟁(race to the bottom)’을 야기하는 룩셈부르크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룩셈부르크 같은 나라에서는 국가의 주권이라는 가장 귀한 자원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리고 룩셈부르크는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이를 더 잘해 냈다. 룩셈부르크는 혁신적인 규칙, 법률, 규제를 고안해서 은행, 통신, 컨설팅 산업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기 전에 그 회사들을 유치했다. 이제 그들은 소행성 채굴업자들을 다른 누군가가 진지하게 대하기 전에 끌어들여서, 결국 우주의 상업화에서도 같은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
룩셈부르크 최초의 주요한 자유화 시도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라디오 방송이 인기를 끌자 룩셈부르크는 이웃 나라들과 달리 공영 라디오 방송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전파를 민간 상업 방송국에 넘겼다. 지금은 RTL로 알려진 이 회사는 유럽 전역에 여러 언어로 음악, 문화,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최초의 광고 기반 상업 방송국이 되었다. 2000년에 출간된 룩셈부르크의 경제사에 관한 책에서는 “공익에 대한 권리를 민간 기업에 넘겨줌으로써 언론 주권을 상업화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룩셈부르크 은행이 출판한 이 책의 제목은 ‘국가 주권의 결실’이다.
1929년 주식 시장이 붕괴되기 바로 3개월 전에, 룩셈부르크 의회는 지주 회사 ― 즉 다른 회사를 소유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모기업 ― 에게는 법인세를 면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이 통과된 후 첫 5년 동안 지주 회사 700개가 설립되었다. 1960년에는 1200개가 되었고, 2000년이 되자 룩셈부르크에는 약 1만 5000개의 ‘우편함 회사(letterbox firm, 현지에는 주소만 있는 회사)’가 설립되었다. 시민 18명당 하나 꼴이다. 2006년 EU 집행위원회가 이런 면세 조치를 EU 규정 위반이라고 밝히자, 룩셈부르크는 즉시 EU 조약의 의무를 준수하면서도 동일한 금전적 이익을 제공하는 ‘가문 자산 관리 회사’를 창설했다.
20세기 전반에 룩셈부르크의 주요 산업이던 철강업은 1980년에 이르자 거의 붕괴되었다. 그러나 철광 광산이 폐쇄되기 전에 이미 룩셈부르크는 신중하지만 강력한 규제 자유를 내세워 금융업을 키웠다. 국내에서 태동한 경제 모델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반(反)탈세 운동 단체인 조세정의네트워크(Tax Justice Network)의 표현에 따르면 ‘세계의 핫 머니를 끌어들이기 위해 고안된’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향후 수십 년간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룩셈부르크의 정책 입안자들은 부족한 것이 실제로는 많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81년부터 경제부에서 일하면서 국가 경제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해왔던 공무원 조르주 슈미트(Georges Schmit)는 중앙은행을 두지 않은 것이 룩셈부르크의 초기 핵심 성공 요인이라고 말한다. 이 나라는 1921년부터 벨기에와 통화 동맹을 맺어 왔고, 금융 회사에 지급 준비 제도를 부과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 은행들은 지급 준비금으로 묶어 둬야 하는 돈을 빌려주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슈미트의 말대로 룩셈부르크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덜 한 것’이다.
수년에 걸쳐 룩셈부르크 정부는 자산 유동화 기구부터 이슬람 은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외국 금융 기관을 설득했다. 그리고 소비자 수준에서는 낮은 세율을 채택해 조세 회피 성향이 있는 유럽의 소액 자산가들을 끌어들였다. 1960년대부터 국제적인 경제 언론에 자주 언급되던 ‘벨기에 치과 의사’와 ‘독일 정육점 주인’들이 본국의 세금을 피해 룩셈부르크에 돈을 예치하기 위해 당일 관광을 시작했다. 룩셈부르크 정부는 당일 관광객 유치를 위해 심지어 차량 연료비를 인하했고, 1981년에는 스위스와 견줄 만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은행 비밀주의를 도입했다.
다음 세기, 치과 의사들은 카타르 왕자들, 중국 태자당, 세계 슈퍼리치들로 바뀌었다. 슈미트는 말한다. “나라가 작으면 나머지 세계가 넓은 법입니다. 독립 이후 우리는 더 큰 경제 영토를 찾아야 했습니다. 지역적이든 대륙적이든 말입니다.” 탈규제와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수십 년간 투자자, 기업, 시장을 위한 허브를 제공함으로써 룩셈부르크는 국제 금융 시스템에서 없어서는 안 될 톱니바퀴가 되었다.
조세 협상은 불법이 아니었고 룩셈부르크에서만 시행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스캔들은 파장을 일으켰다.
2009년에 슈미트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평생의 과업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실리콘밸리의 총영사 및 무역 사절 자격으로 조국이 돈을 끌어모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거의 30년 전 그가 새로운 혁신 전략을 만들기 위해 경제부에 들어간 이후, 그의 나라는 역경을 극복하고 명백한 약점들을 장점으로 만들어 갔다. 나라가 작은 것은 미국 다음으로 큰 투자 기금의 중심지가 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고, 인구가 적은 것은 사법재판소 같은 EU 기관이나 다국적 기업의 본사를 유치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립국이자 EU 기구들의 창립국으로서 EU 집행위원회를 이끌기 위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세 명의 정치인을 파견했다.[4] 또한 유럽으로의 접근성, 교육받은 노동력, 은행 비밀 유지(이 제도는 다른 나라들과 OECD의 압박으로 인해 2014년 폐지되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규제 완화의 이점을 마케팅해서 거대한 금융 지구를 구축했다.
결정적으로, 룩셈부르크는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50년 전 상업 라디오 방송 지원에 이어 유럽 최초로 위성 텔레비전을 민영화했다. 1985년 룩셈부르크는 우주에 있는 인공위성에서 시청자의 집으로 직접 TV를 방송할 수 있는 권리를 유럽 인공위성 협회(Société Européenne des Satellites·SES)라는 회사에 부여했다. 17년간 SES 이사회에서 활동한 슈미트의 말이다. “이것이 우주 민영화였다는 점이 큰 혁신입니다. 다른 모든 운영자들은 국제 협약을 통해 정부 소유였어요. SES는 방송을 위해 우주를 활용한 최초의 상업 회사죠.” SES의 수익성이 커지면서 룩셈부르크의 시도는 보상을 받았다. 이 작은 나라는 거대 통신 회사의 본거지가 되었고, 룩셈부르크는 초기 투자자로서 파이 한 조각을 받게 되었다.
2000년대 초, 룩셈부르크는 아마존과 애플 같은 소매업체들에게 세금 혜택을 제공할 기회를 노렸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가장 낮은 부가 가치세라는 특전이 있었는데,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지 않고 대기업들과 개별적으로 조용히 협상했다. 기업들이 몰려들었지만, 금융 위기의 여파로 부의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긴축 정책으로 유럽인들이 고통을 받게 되자 룩셈부르크는 이런 협상을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했다.
2014년 말, 국제 탐사 보도 언론인 협회(International Consortium of Investigative Journalists)가 룩셈부르크 조세 당국과 다국적 기업들의 비밀 거래를 공개하면서 룩셈부르크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룩스리크스(Lux leaks)’로 불리는 이 자료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룩셈부르크 국세청은 AIG, 이케아, 도이체방크를 비롯한 300개 이상의 대기업이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세금을 탈루할 수 있게 하는 비밀 거래를 승인했다.
조세 협상은 불법이 아니었고 룩셈부르크에서만 시행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스캔들은 파장을 일으켰다. 언론의 비난과 유럽 전역의 시위가 잇따랐고, EU 내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관련 문제에 대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측의 조사가 이어졌고, 소송에서 많은 회사 정보가 공개되었다[주목할 만한 작은 사실 하나: 아마존은 28단계 이르는 조세 회피 전략에 룩셈부르크 국조(國鳥)의 이름을 따서 ‘상모솔새 프로젝트(Project Goldcrest)’라고 명명했다].
토마스 피케티(Thomas Piketty)와 함께 파리 경제 대학에서 수학한 가브리엘 주크만은 이 무렵에 국제 조세 회피와 탈루에서 룩셈부르크가 맡고 있는 역할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은 다국적 기업이 아니라 틈새 규제와 허점을 통해 투자자가 특정 세금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룩셈부르크의 번영하는 펀드 산업에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유명한 금융 중심지이지만, 주크만은 그의 책 《국가의 잃어버린 부(The Hidden Wealth of Nations)》를 집필하는 동안 조사한 통계를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2015년 룩셈부르크 자료에 따르면 뮤추얼 펀드에 3조 5000억 달러(3934조 원) 상당의 주식이 있었는데, 다른 나라들의 자료를 합산하면 2조 달러(2248조 원)밖에 되지 않았다. 매일 이자가 쌓이고 있을 나머지 1조 5000억 달러(1686조 원)는 식별 가능한 소유자가 없는 셈이었다. 다시 말해 이 불경한 1조 5000억 달러에 대해 세금을 부과해야 할 국가들은 그 돈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크만은 조세 회피 기업들과 공생 관계에 있는 룩셈부르크, 버진 제도, 파나마의 비밀주의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국가와 납세자들이 빼앗긴 자산이 ― 부동산이나 사치품, 금 등을 제외하고도 ― 8조 달러(8992조 원)에 달한다고 계산했다. 그는 저서에서 룩셈부르크를 ‘국제 금융 산업의 경제적 식민지’라 묘사하고, 룩셈부르크의 가장 큰 자산인 주권에 의문을 제기했다.
“해양 플랫폼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그곳의 주민들은 낮에는 어떠한 법이나 세금도 없이 자유롭게 생산과 무역을 하고, 저녁이 되면 가족이 있는 본토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크만은 룩셈부르크의 특이한 인구 통계를 소개한다. 룩셈부르크 인구 50만 명 중 47퍼센트가 외국인이고, 노동 인구의 44퍼센트가 매일 국경을 건너 일하러 온다. “생산량의 100퍼센트를 해외로 보내는 곳을 국가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주크만은 계속 말한다. “주권의 거래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팔릴 수 있고, 협상이 가능합니다. 룩셈부르크는 주권을 판 유일한 국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권을 파는 데 있어서 가장 멀리 간 국가입니다.”
룩셈부르크의 우주법에는 시민도 국경도 없다. 오직 우주에서 바라본 푸른 지구 하나만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룩셈부르크의 조세 제도에 대한 언론과 대중, EU의 조사는 곤란한 시기에 퍼져 나갔다. 2013년 말 룩셈부르크는 자비에르 베텔(Javier Bettel) 총리를 선출했다. 베텔의 연립 정부에는 민주당, 사회당, 녹색당이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직전 총리인 장 클로드 융커(Jean Claude Juncker)의 경제 정책과 거리를 두고 EU 규정에 따르기를 원했다. 베텔 총리는 취임 직후 룩셈부르크 은행 협회에서 가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조세 피난처와 범죄의 온상이라는 비난에 질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를 다시 만들어 가야 합니다. (…)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확실히 알도록 해야 합니다.”
당시 경제부 장관이던 에티엔 슈나이더도 이 노력에 동참했다. 과거와 단절하고 박수갈채를 받는 대신, 정치인들은 권력을 장악한 순간부터 끊임없이 지난 과오를 상기했다. 새 정부는 룩셈부르크의 경제 발전 모델을 새로운 정치적 현실과 일치시켜야 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무엇보다 논의의 주제를 바꿔야 했다.
2014년 여름, 조르주 슈미트가 미국 팔로알토에 있는 나사 에임스 연구 센터(NASA Ames Research Center)를 방문해서 센터의 전 이사인 피트 월든(Pete Worden)과 대화를 나누면서 기이한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월든은 슈미트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부상하고 있는 뉴 스페이스 산업과 다른 행성에서 생명체를 찾는 그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슈미트는 월든이 슈나이더와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해 서로를 소개시켜 줬다. 처음에 슈나이더는 소행성 채굴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슈나이더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말을 듣고는 이 사람이 아침에 대마초를 피웠나 싶었어요. 완전히 공상 과학 소설처럼 들렸으니까요.”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월든은 슈나이더를 설득했다. “이 일은 일어날지 말지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날지가 문제예요. 이 일에 먼저 뛰어든 나라들이 나중에 가장 많이 돌려받게 될 겁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과 룩셈부르크 사이에 일련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들이 2017년 4월의 무역 사절단과 비슷했다면 기술 회사들의 지루한 견학 투어와 우주가 어떻게 지구에 ‘세 번째 산업혁명’을 가져올지에 대한 격정적인 연설과 교통 체증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것이다. 또한 인류가 자기만의 우주 공간을 만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슈나이더는 그의 희망과 정치적 미래를 별에 걸었다. 논의를 세금에서 우주로 바꿀 기회, 룩셈부르크의 미래를 위한 산업을 확립할 기회, 심지어 과학과 인간의 지식에 기여할 기회가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힘든 시기에 미지 탐험의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뉴 스페이스 분야의 기업들은 룩셈부르크과 함께 일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자금과 관심에 목말라 있었고, 미국에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룩셈부르크는 고위급 정치인들과 몇 분 만에 회의를 가질 수 있는 나라다. 모두가 훌륭한 영어를 구사하며 관료주의가 거의 없고, 낮은 세금은 여전히 유효하다. 뉴 스페이스의 한 간부가 내게 말했다. “우리는 그저 방해가 되지 않는 정부와 일하고 싶을 뿐입니다.”
유일한 걸림돌은 우주법의 모호함이었다. 기업들은 우주에서 노력해 일군 결실이 지구상에서 인정된다는 확신을 원했다. 이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서는 국가가 기업에 광산 채굴권을 부여하거나 개인이 토지 개발 권리를 팔 수 있지만, 대기권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명백한 법적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실제로 1967년 UN에서 107개국이 서명한 우주 조약은 국가들이 천체 주권을 주장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아무도 이 위대한 미지를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면, 누군가 그중 작은 조각을 소유한다 해도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뉴 스페이스 분야가 출현한 이후, 국가들은 우주 사유 재산에 대한 기대가 혁신과 강도 높은 노동을 촉진할 것이라고 생각해 기업가들에게 약간의 명확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2015년 통과된 미국 우주법(American Space Act)은 우주 자원의 소유권을 인정한 최초의 법(먼저 발견한 사람이 소유하는 ‘finders, keepers’)이지만, 미국 시민이 소유한 회사에 한해 적용된다.
2015년 10월 룩셈부르크는 법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를 의뢰했다. 2016년에 완성된 이 보고서는 “현재의 법과 규제하에서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지만 우주 채광 활동이 적어도 금지된 것은 아니다”라고 기술하며 룩셈부르크가 우주 채굴자에게 채굴한 것을 지킬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야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연구가 끝난 직후 관련 법이 제정되었고, 2017년 8월 1일 발효되었다. 룩셈부르크의 우주법은 국적 또는 회사 본사의 소재지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사실, 이 법은 기업들에게 편의치적[5]을 제공하려는 룩셈부르크의 의도를 보여 준다. 국제적으로 구속력 있는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한 나라의 미래 지향적인 규칙에 따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가 투자한 또 다른 우주 탐사 회사인 딥 스페이스 인더스트리(Deep Space Industries)의 회장 릭 텀린슨(Rick Tumlinson)은 룩셈부르크의 법에는 시민도 국경도 없이 오직 우주에서 바라본 푸른 지구 하나만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건 다양화가 아닙니다. 단지 조세 피난처의 논리를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 무역 사절단이 다녀간 지 6주가 지난 뒤, 나는 룩셈부르크 공항 활주로에 착륙한 작은 비행기에서 회색 정장과 검정색 가방을 끌며 내렸다. 나는 대규모 자산 관리, 주식 펀드 광고들을 지나 주차장으로 들어가 시내 중심부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개발 중인 수십 개의 대형 건물들과 공사 중인 트램 선로, 두 개의 거대한 노란색 타워를 지나쳤는데, 오후 햇살이 비친 타워는 하늘에 닿을 듯한 두 개의 금괴처럼 보였다.
한 시간 만에 나는 라스 슈미츠(Lars Schmitz, 29세), 가브리엘 타이유페르(Gabrielle Taillefert, 21세)와 함께 구도시의 목욕탕 맞은편에 있는 바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둘은 ‘리히퉁22(Richtung22)’라 불리는 지역 극장 및 예술 집단의 일원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집단은 그들 나라가 돈을 버는 일에만 치중하는 것을 풍자하는 일련의 공연을 개최했다. 이들은 각본을 쓰지 않고 법, 언론 보도, 연설문, 의회 회의록, 홍보 영상 등을 활용해 극적인 콜라주를 만든다.
이들의 초기 작품 중 하나는 해외 홍보를 위해 2013년 3월 설립된 룩셈부르크 국가 브랜드위원회를 풍자했다. 문화부가 일부 자금을 지원한 이 연극의 제목은 ‘룩셈부르크, 흉악한 똥더미’였다. 그 이후로는 정부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슈미츠는 말했다.
짧은 금발 머리에 체격이 왜소한 슈미츠는 여가 시간에 반파시스트, 반자본주의 조직 활동에 참여한다. 정치가 너무 추상적이고 세계적이어서 풀뿌리 저항이 필연적으로 익살극의 형태를 띠는 이 나라에서 그는 우스꽝스러운 좌익 운동가를 자처하고 있다. 리히퉁22의 최신 연극은 뉴 스페이스 산업을 유치하려는 국가의 노력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연극의 제목은 ‘룩셈부르크의 사적인 우주 탐험 - 혁신적이고 초매력적인 소행성 맞춤’이다. 슈미츠는 우주 채굴을 주권 판매라는 오래된 사기를 첨단 기술로 포장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말한다. “룩셈부르크의 비즈니스 모델은 숨겨져 있습니다. 회사가 원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그 회사들의 위험을 부담하고 있어요. 그러나 정부는 이것을 ‘우리가 얼마나 현대적인가, 이것은 새로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크만은 슈미츠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전략을 우주 정복 산업에 적용하는 것은 역외 금융 센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건 다양화가 아닙니다. 단지 조세 피난처의 논리를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무대 위에서 전체 우주 산업은 민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냉소적이고 돈벌이에 집착하고 룩셈부르크의 오명을 씻지 못하는 대참사로 묘사된다. 슈미츠는 말했다. “우리 나라가 세계를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아무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아요.” 그는 조세 회피를 조장하고 EU 은행 규제를 빠져나가는 등 룩셈부르크의 허물 십여 가지를 꼽았다. 이런 작은 나라에서는 국익에 반하는 솔직한 말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자라고 생각하죠.”
나는 이 나라에 좋은 점은 있는지 물었다. 슈미츠는 “이곳은 아름답다”고 인정했다. 그는 옳았다. 룩셈부르크는 아름답다. 특히 화창한 5월의 저녁이 매력적이다. 도시는 두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 ‘낮은’ 도시에는 강을 따라 기묘한 작은 거리와 길거리 카페들이 있고, ‘높은’ 도시의 중심지는 값비싼 부티크, 화려한 초콜릿 상점, H&M 같은 체인이 있는 활기찬 번화가다. 카페는 거품이 많은 로컬 와인 끄레망(crémant)과 프랑스의 풍요로움에 기름진 독일풍을 가미한 로컬 음식을 광고한다.
다음 날 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좌파당(déi Lénk)의 국회의원 마크 바움(Marc Baum)을 만나러 갔다. 그는 슈나이더의 우주 채광 계획을 비판한 당 정책 문서를 나에게 건넸다. 그들은 슈나이더가 주도한 법이 룩셈부르크의 우주 조약 이행 의무와 모순되며, 억만장자들을 더 부유하게 하고 환경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믿는다. 더 심각한 것은 그것이 국가 간의 ‘협력 대신 경쟁’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움은 테라스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외쳤다. “무한대의 자본주의입니다!”
바움은 배우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의 〈코뿔소〉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코뿔소〉는 오직 상투적인 말만 하고 여기에 의심 없이 순응한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해 버리는 마을에 관한 부조리극이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휴머니즘은 죽었다. 이를 따르는 사람들은 단지 옛 감상주의자일 뿐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코뿔소가 되기로 한 그들의 결정을 정당화한다. 주인공인 베랑제는 코뿔소가 되기를 거부하지만 다른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다. 그는 마을 전체에서 코에 뿔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이 연극과 바움이 처한 곤경 사이의 유사점이 코에서 조금 보이는 것 같다. 바움은 2017년 7월 우주법에 반대표를 던진 두 명의 정치인 중 하나였다.
아마도 상인 기질은 작은 나라가 세계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주법이 국회를 통과하기 한 달 전인 2017년 6월, 슈나이더와 그의 동료들은 또 다른 영업을 위해 뉴욕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미국 동부에 있는 벤처 투자자들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슈나이더는 룩셈부르크 우주 경쟁의 재정적 측면과 상업적 우주 탐사를 본격화하려는 국가의 의도에 중점을 두고 연설했다. “미국 우주법에 따르면 당신 자본의 대부분은 미국 것이어야 합니다.” 그는 미국 시민에게 우주 재산권을 인정하려는 미국의 의지를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깨끗하기만 하다면,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슈나이더의 말에 따르면, 룩셈부르크는 유러달러 시장, 국제 지주 회사 및 다국적 기업들을 위해 했던 일을 우주 자원 무역을 위해서도 할 수 있다. 사업을 잘 운영할 수 있도록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예리하면서도 협조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폄하하는 사람들의 평가로는 고분고분하게 아첨하면서 말이다. 슈나이더는 법률 통과 후 룩셈부르크가 자체 우주 기관을 설립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나사의 복제판이 아니라 상업적인 우주 자원에만 초점을 맞추는 기관이다. 슈나이더는 룩셈부르크가 뉴 스페이스 회사들을 위해 민간 자본을 모으고, 어떤 회사에 투자할지 결정하기 위해 벤처 투자자들의 조언을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소행성 채굴이 실제로 시작된다면 룩셈부르크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슈나이더의 친구들이 말하는 ‘얼리어답터’가 될지도 모른다.
도박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룩셈부르크가 지난 세기 동안 독창적인 개발 전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디에 위치할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세계 경제를 위해 복무하는 것에 외에는 다른 대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조력한 자들에게는 후한 보상이 주어진다. 아마도 상인 기질은 작은 나라가 세계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우리는 우리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는 모토는 프랑스의 옛말인 ‘plus ça change(변해 봤자 그게 그거다)’의 룩셈부르크 버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