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성; 열정 넘치는 신입 사원
원하는 기업에 취직해 하고 싶었던 직무를 맡았다. 매일 출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는 것에 기쁘고 감사하다.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최선과 최고,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다. 일을 할 시간이 없다면 잠을 줄이거나 주말을 포기할 수 있다.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직무와 관련된 역량을 키우기 위해 수업을 듣는다. 일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생의 전부다. 이렇게 열심히만 한다면 빠른 승진도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침체; 내가 비워진 삶
업무가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워라밸(Work-life balance)은 사라진 지 오래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를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만큼 일에 더 집중해 보려 하지만 입사 초기의 열정은 식어 간다. 이제는 일이 아닌 다른 것에 더 관심이 간다.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회사의 연봉 수준, 근무 시간과 근무 환경 등이 점차 눈에 보인다.
좌절; 적은 보상과 인정
기대했던 성과 평가 결과가 나왔다. 열심히 일했는데도 낮은 연차와 높은 목표치로 인해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았다. 나의 적성이 이 직무와는 잘 맞지 않는 것인지,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의문이다. 한편으로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회의감도 든다. 노력에 비해 보상이 적고, 이러한 보상과 인정을 받으면서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힘들다. 예전에는 없었던 두통과 복통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앞으로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업무가 몰아치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최대한 피한다.
무관심; 나와는 멀어진 일
일을 계속하면 할수록 불만과 스트레스만 더 쌓인다. 이제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최소한의 일만 한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새로운 프로젝트에도 무관심하다. 신경 써봤자 스트레스만 더 심해진다. 몸은 회사에 있어도 하루 종일 퇴사 생각이 가득하다. 마땅히 퇴사하고 갈 곳도 없지만 당장 주어진 업무에서 벗어나고 싶다.
대부분 자신이 번아웃에 빠졌음을 자각하는 순간은 세 번째 단계인 좌절과 네 번째 단계인 무관심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기대와 열정을 갖고 업무에 임하는 첫 번째 단계인 열성, 그 열정이 식고 업무 외적인 조건들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두 번째 단계 침체도 번아웃의 초기 증상이다. 초기 단계를 번아웃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회복하기 어려운 후기 단계가 돼서야 번아웃을 자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막기 위해 초기 단계부터 자신이 업무로 인해 지나친 부담과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쳐서 업무에 흥미와 보람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다.
열정을 먹고 자라는 번아웃
팬데믹 이후 부상한 대퇴사 현상은 MZ세대 사이에 번아웃이 만연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퇴사로 이어지지 않는 번아웃 역시 조직에게는 위험한 신호다. 번아웃에 빠진 구성원은 조직에 대한 애정도가 낮아진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구성원과 갈등을 빚기 쉽고 조직 전체의 의지를 불식시키기도 쉽다. 이 경우 타 구성원에게 번아웃을 전염시킬 수 있다.
[5] 번아웃을 겪는 이는 하루하루를 살아남는 것에 집중한다. 먼 미래를 위한 발전과 성장 의지, 거시적 목표 달성에 대한 관심도는 자연스레 낮아진다. 조직 내에 번아웃을 겪는 구성원이 많아지는 것은 단기적 성과 하락이나 경제적 손실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직 전체의 장기적 비전을 무너트리기도 쉽다는 것이다.
번아웃은 개인과 조직을 넘어 사회적 문제로도 쉽게 번진다. 우울증, 과로사와 같은 공중 보건 문제와 안티 워크 운동 등의 거시적 움직임도 이에 해당한다. 개인은 조직을 구성하고, 조직은 사회 전체의 구조를 구성한다. 지금의 사회는 번아웃을 개인적 증상이나 특정 조직의 현상으로 축소시키기보다, 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야만 한다.
예일대학교 감성 지능 센터(the Yale Center for Emotional Intelligence) 연구팀이 직장인 약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업무몰입도가 낮은 집단보다 높은 집단에서 더 높은 비율로 번아웃을 경험했다. 몰입도가 높은 집단의 경우 업무에 대한 열정과 함께 스트레스, 좌절감, 불안감이 동시에 나타났고, 다섯 명 중 한 명이 번아웃 위험군에 속했다. 이직에 대한 고려와 생각도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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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글로벌 인사 컨설팅 기업 ‘DDI’가 핵심 인재(High-Potential Employees)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무려 86퍼센트가 번아웃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발표했다.
[7] 기업의 핵심 인재인 고성과자들이 번아웃에 취약한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성취 지향적이고 일에도 열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인 특성만이 번아웃을 전부 설명하지는 않는다. 조직 역시 고성과자를 번아웃의 지대로 몰아넣고 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arvard Business Review)’는 전략 매니지먼트 컨설팅 펌에서 근무하는 리사(Lisa)의 말을 빌려 고성과자가 번아웃에 빠지는 과정을 설명했다. 고성과자는 다른 구성원들에게 모범이 되기 때문에 다른 구성원을 지원하고 도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고성과자는 점차 다른 구성원보다 더 많은 업무를 짊어지거나 더 어려운 업무를 맡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의 기대는 점차 커진다. 업무 성공의 기준도 더욱 높아진다. 고성과자는 대개 업무에 대한 열정이 많기 때문에 회사의 기준과 자신의 상황을 조율하기보다는 회사의 요구에 자신의 삶을 맞추는 선택을 한다. 결국 고성과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 강도에 시달리게 되며, 번아웃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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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과자는 기업의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오히려 적응력이 높은 이들은 부정적인 업무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조직을 떠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쉽게 적응하는 구성원은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이거나 부조리한 일을 목격했을 때,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60퍼센트 높은 이직 의도를 보였다. 고성과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자신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조직의 환경에 더 큰 좌절감을 느낀다.
[9] 불합리한 제도, 부정적 조직 문화와 같은 구조적 문제를 방치하고 개인의 몫으로 남겨둔다면 결국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인재를 놓치게 된다.
또한 MZ세대가 조직적으로 앓는 번아웃은 행동주의로 확산할 가능성이 높다. 세대적 특성이 달라지며 직업관과 가치관 역시 이전과 달라졌다. MZ세대에게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고, 부당한 대우와 불공정한 제도는 개선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들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공정성’이라는 가치다. MZ세대는 어릴 때부터 경쟁과 그 과정을 평가하는 시험 등의 제도를 거치며 평가 체계가 객관적이고 납득 가능한지를 따졌다. 행여 기준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느낀다면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많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성적을 최종으로 확정하기 전 공식적인 성적 이의 제기 기간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성장한 MZ세대는 입사 후에도 조직의 평가와 보상을 신중하게 받아들였다.
2021년 초 발생했던 ‘SK하이닉스’의 성과급 논란은 입사 4년 차인 MZ세대 A군으로부터 시작됐다. A군은 회사 CEO를 포함한 모든 임직원을 대상으로 이메일을 보내 경쟁사 대비 낮은 성과급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이어 회사에게 성과급 지급 기준과 경쟁사 대비 성과급이 적은 이유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플랫폼인 ‘블라인드(Blind)’와 SNS는 하이닉스의 논란을 활발히 퍼트렸다. 다양한 플랫폼에서 연봉, 복지, 조직 문화 등에 대한 정보가 공유됐기 때문이다. 해당 사건을 시작으로 대기업과 IT 업계는 임금 수준을 대폭 인상했고, 성과급 지급 기준을 재검토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MZ세대는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문제를 혼자 감내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연대해 문제를 가시화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1년 있었던 성과급 논란 이후 결성된 MZ세대 중심의 사무직 노조다. 이들은 평가 보상 체계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요구하며 MZ세대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았다. ‘현대자동차’, ‘LG전자’, ‘카카오뱅크’, ‘금호타이어’를 비롯한 기업 곳곳에서 MZ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사무직 노조가 결성됐다. 적극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개선 여지가 보이지 않거나, 현재의 조직이 자신의 발전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MZ세대는 다른 기업으로 쉽게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