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범죄를 쫓는 사람들
완결

우크라이나, 전쟁 범죄를 쫓는 사람들

전쟁은 범죄를 낳고 그 흔적을 쉽게 지워버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달라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이지움(Izium)에 있는 집단 매장지. ©Photograph: Vyacheslav Madiyevskyy/Ukrinform/NurPhoto/Rex/Shutterstock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난 지 2주가 됐을 무렵이었던 지난 3월 8일, 야니나 크무네비치(Yanina Chmunevich)는 키이우(Kyiv)에서 북동쪽으로 5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지역인 보브리크(Bobryk)에 있는 자택의 정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태우면서 세어 본 러시아의 중무장 차량은 87대였다. 토목 중장비, 트럭, 무장 병력 수송 차량, 긴 화포가 달린 차량 등이 있었다. 다음날에는 러시아 군인들이 로켓 발사기를 가져오는 걸 지켜봤다.

3개월 뒤, 전쟁 전까지 주유소에서 일했던 39세의 크무네비치는 체크무늬 셔츠와 분홍색 양말 차림으로 햇빛이 드는 베란다에 앉아서 보브리크 점령의 세부 사항을 꾸준히 이야기했다. 우크라이나의 인권조사관인 마리나 슬로보디아뉴크(Maryna Slobodianiuk)가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슬로보디아뉴크는 녹빛 머리카락을 가진 가냘픈 40세 여성인데, 목소리가 매우 작아서 제대로 들으려면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온화한 태도에 속으면 안 된다. 전쟁 범죄 및 반인권 범죄를 파헤치는 우크라이나의 비영리 단체 트루스 하운즈(Truth Hounds, 진실 사냥개)의 조사 책임자인 슬로보디아뉴크는 지속적인 폭격에 시달리고 있는 도네츠크(Donetsk), 미콜라이우(Mykolaiv), 하르키우(Kharkiv) 등을 방문해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왔다.

크무네비치는 3월에 자신을 찾아온 러시아 병사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그들의 억양으로 그들이 체첸이나 아르메니아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병사들은 그녀와 친척 네 명을 벽에 줄 세우고 휴대전화를 압수하고는 물을 요구했다. 가족들은 러시아 군인들이 (그들의 소지품으로부터) 우크라이나에게 우호적인 내용을 하나라도 찾아낼 경우를 대비해 이미 소셜미디어 계정을 삭제한 상태였다.

크무네비치는 그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나무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기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내가 우크라이나에 3주 동안 머물며 만났던 다른 우크라이나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수많은 기자와 조사관들로부터 계속해서 질문을 받았고, 마치 날씨 이야기하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끔찍한 사건을 설명하게 됐다.

그녀의 남편은 러시아 군인들에게 왜 우크라이나에 쳐들어왔는지 물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이렇게 대답했다. “젤렌스키(우크라이나 대통령)와 나치들을 죽이기 위해서다.”

러시아 군인들은 보브리크에 3주 동안 있었다. 그동안 군인 중 한 무리가 이웃의 사유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무네비치는 판자로 막아 뒀던 창문에 난 틈을 통해서 그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인근의 호수 방향에서 들려온 폭발음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녀는 이 도시의 시장과 가게 주인 한 명이 머리에 비닐봉투를 뒤집어 씌워진 채 납치됐다는 이야기를 이웃들로부터 들었다. 두 사람은 구타에 시달렸다. 가게 주인은 이후 팔에 총을 맞았다. 그의 죄목은 자신의 가게에 보안카메라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2월에 침공이 시작된 이후로, 트루스 하운즈 소속 조사관 세 명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돌아다니며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기준에서 잔학 행위로 분류되는 사례들에 대해 직접적인 진술을 녹취하고 그 증거를 기록으로 남겨 왔다. 그들은 ICC와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있다. 그들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했던 2014년에 이 일을 처음 시작했다. 이번 전쟁의 독특한 점은 슬로보디아뉴크가 아주 최근에 점령됐던 지역들에서 상세하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의 언론 역시 전례 없는 취재 활동을 벌였다. 크무네비치의 베란다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바깥쪽에는 터키의 뉴스 채널에서 나온 다큐멘터리 팀이 있었다.

“아마도 역사상 취재가 가장 많이 이뤄진 전쟁일 겁니다. 기자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나라, ICC에서 임무를 받고 나온 조사관들도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키이우 소재의 언론 및 인권 옹호 기구인 즈미나(ZMINA)의 수석위원 테티아나 페촌치크(Tetiana Pechonchyk)의 말이다. 즈미나는 10여 곳의 우크라이나 NGO가 모인 협력체 ‘오전 5시 연합(5 AM Coalition)’의 일원이다. 이 협력체는 러시아가 2월 24일 오전 5시에 침공했기 때문에 이처럼 불린다.

페촌치크는 전쟁 범죄를 담당하고 있다. 지난 7월 키이우의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붉은색 정장을 입었고 립스틱의 색상도 그에 맞춘 상태였다. 그녀는 이 전쟁이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잔혹 행위의 규모를 볼 때 그 정도 관심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검찰 당국에는 매일 100건, 200건 이상의 사건이 접수되고 있지만, 여기에 현재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9월 22일 기준으로 검찰 당국에 접수된 사건은 3만 4000건이었다. 우크라이나 법률에 의하면 이 사건들은 모두 조사받아야 하지만, 꼼꼼한 조사를 통해서 그에 해당하는 정보를 찾고 혐의를 확증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것이다.

전쟁이 전개되는 와중에 이렇게 철저히 조사가 진행되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조사관들은 러시아 군이 떠난 후 24시간에서 48시간 사이에 들어온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에 대량 학살이 있었던 르완다 같은 사례와는 다르게 사법적인 기능이 어느 정도는 작동하고 있다. (르완다에서는 기존에 존재했던 사법 체계가 폭력이 자행되던 3개월 동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뤄지고 있는 증거 수집 활동은 충분히 빠르게 유죄 선고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과연 지휘 체계의 우두머리들을 엮어 넣기에 충분할까?

현재 트루스 하운즈는 다른 십여 곳의 단체들과 함께 직접 현장에 나가서 군인들이 벌인 행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 보브리크에서 크무네비치는 슬로보디아뉴크에게 러시아 군인들이 차량을 타고 피난 가던 주민들에게 총을 쏴서 최소한 2명을 죽였고, 지하실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주민을 구타해서 죽였으며, 그녀의 50세 친구를 심문하면서 개머리판으로 그녀의 앞니를 가격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군인들이 처음 쳐들어오고 11일이 지난 뒤, 더 많은 군인들이 다시 크무네비치의 집으로 찾아와서 다시 한번 그녀의 가족들을 벽에 줄 세운 뒤 그들의 여권을 검사했다. 크무네비치는 러시아 군인들이 민간인인 그녀의 가족들을 조롱하고 위협했으며, 알코올이나 약물의 기운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말투가 느렸습니다. 눈빛이 이상해 보였고, 그들의 움직임도 느렸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들이 아무리 많아야 25살도 되지 않은 “총을 가진 아이들”처럼 보였다고 설명했는데, 그들은 주민들을 조롱하면서 총의 안전장치를 건방지게 딸깍거렸다고 한다.

“그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슬로보디아뉴크가 물었다.

“그들은 만약에 우리 집에서 전화기가 한 대라도 발견되면 한 명을 골라서 쏘겠다고 했습니다.” 크무네비치는 이렇게 답했다. 그들은 떠나려던 와중 그녀의 남편을 위협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아무도 쏘지 않고 떠나려는 거야? 최소한 이 사람이나 저 개라도 쏴버리자.’”

슬로보디아뉴크는 크무네비치에게 한 시간 동안 질문한 뒤, 증언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진술한 내용을 협력 관계의 기구들과 ICC, 우크라이나의 조사 단체들, 언론사 및 기록 기관들과 공유한다는 양식에 서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그들의 집을 둘러싼 담벼락에 있는 문을 통해 나왔다. 슬로보디아뉴크는 이 여성의 진술에서 유용한 내용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보브리크에서 사망하고 구금되고 고문당한 사람들의 숫자와 군인들의 군복, 휘장, 생김새, 억양 등 상세한 부분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런 내용은 최소한 그들이 속한 부대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정보를 알 수 있다면 범죄가 보고된 지역에서 어떤 부대가 작전을 펼치고 있었는지를 추가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신원 확인을 위해 용의자의 사진을 들고 해당 마을에 되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슬로보디아뉴크는 내 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러시아의 침략에 관해 더 큰 그림을 완성하는 게 궁극적으로는 필요하겠지만, 자신과 팀의 목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영역은 끝없는 현장 조사, 피해자 방문, 거듭되는 목격자와 생존자 인터뷰, 증거 확보를 위한 불발탄 조사다. “핵심은 범죄자들을 찾아내는 것,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마리나 슬로보디아뉴크(오른쪽)와 그녀의 동료가 목격자를 인터뷰하고 있다. ©Photograph: Lauren Wolfe

 

1. 전쟁 범죄를 쫓는 사람들


나는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검찰청 소속으로 전쟁 범죄를 책임지고 있는 45세의 유리 비엘로우소프(Yuriy Byelousov)를 만났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던 비엘로우소프는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고 거만함에 가까운 자신감을 과시하며 앞으로의 업무에 대한 중요성을 설명했다. 당시 그의 사무실에는 이미 1만 8000여 건의 사건들이 접수돼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비엘로우소프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우리가 이 자리에 앉은 이후로 100건 정도의 사건이 추가로 접수됐을 거라는 농담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검사는 8000명에 불과한데, 대부분은 전쟁 범죄와 관련된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조사관들은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더 완전하게 그려 내기 위해 드론 영상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하고 있다. 비엘로우소프는 다른 여러 나라 중에서도 특히 미국, 프랑스, 영국으로부터 기술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그는 “지금 이곳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 지식이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장 힘겨운 업무는 혼란스러운 정보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사무실에 전달되는 정보의 홍수를 체계화하고, 책임을 나누고, 중복되는 내용을 배제하는 것이다. 비엘로우소프를 만난 건 이 업무를 시작한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그는 주로 기술을 업데이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는 중앙 데이터베이스로 유입되는 증거를 스캔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드론과 3D 스캐너를 활용해서 건물과 주변 지역, 도시의 파괴 모형을 만들고 있다.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이 사건들에 조언과 점검을 해주는 세계의 전문가들과 연락을 취하는 것이다. 영국, 미국, 유럽연합이 공동으로 꾸린 잔학범죄자문그룹(ACA)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수집된 자료를 살펴보고 국제 기준에 근거해 유용성을 판단한다. 비엘로우소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좋아요 여러분, 이것과 이것은 잊어버리고, 이것과 저것은 수정하세요’라고 조언을 합니다.”

비엘로우소프는 또한 자신의 부서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체코공화국 등 인근의 6개국과 긴밀하게 협력한다고 한다. 이 나라들에서 온 조사관들은 동부의 최전선에도 기꺼이 가려 한다. “아시겠지만, 이 사람들은 상당히 용감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 일을 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노력을 도와주는 이들 중에는 향후 기소를 위한 증거 수집을 목적으로 위성 사진, 음성 감청 자료 제공과 해독을 해주는 글로벌 조사관 네트워크가 있다. 탐사 저널리즘 단체인 벨링캣(Bellingcat)과 영국 소재의 인권 연구 단체인 정보회복성센터(Centre for Information Resilience) 등이 그 네트워크다. 벨링캣의 설립자 엘리엇 히긴스(Eliot Higgins)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분쟁의 기본이 될 것입니다. 향후에도 이처럼 책임감으로 뭉친 네트워크가 생겨날 것입니다.” 벨링캣은 예전에도 시리아에서 화학 무기의 사용을 추적했고, 2018년 영국의 솔즈베리에서 발생한 노비촉(novichok) 테러 사건의 용의자들을 찾아냈다.[1]

하지만 민간 진상조사위원과 기자들이 현장에 늘어나면서 생존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일부 생긴다는 우려도 있다. 비엘로우소프는 성적 폭력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을 경우 이렇게 해달라고 당부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몇 시간 동안 인터뷰하지 마시고, 그 증거를 그냥 저희에게 주십시오. (여러분이 취재하고 나면) 그 뒤에도 기자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고, 정작 우리가 찾아갈 때면 그들은 이미 1020번이나 더 고통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한 국제 전쟁 범죄 조사관도 그처럼 반복적인 질문이 생존자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뿐만 아니라 증언의 효력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목격자가 몇 번이고 이야기를 반복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 만약 일관되지 않은 진술이 나오면, 그들은 증인에서 배제되거나 ‘오락가락하는 증인’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사건을 법정에까지 가져가는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었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지난한 과정이 될 수 있다. ‘구(舊)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보스니아 내전 중이던 1993년 헤이그에 설치됐지만, 밀로셰비치가 기소된 건 1999년이 되어서였다. 그리고 그의 소재를 파악해 헤이그로 이송한 것이 2001년이었다. 밀로셰비치는 2006년에 구치소에서 사망했는데, 당시에도 그의 재판은 진행 중이었다.

ICC는 2002년 처참한 잔학 행위 배후에 있는 지도자의 처벌을 위해 설립됐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발생하는 사건 중 압도적으로 많은 수가 낮은 계급의 군인들에 의한 것이며, 그들은 우크라이나 안에서 재판을 받을 것이다. 슬로보디아뉴크는 ICC가 “매우 신중하지만 비교적 느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느리다는 것은 “주로 고위 지휘관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증거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며 로켓의 파편 같은 물리적인 증거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목격자들도 조사관들에게 말하려 했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그들은 이주를 하고, 다시 생활을 꾸리고, 그 기억을 잊어버린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온전하며 진실한 그림을 만들려면 모든 것을 빠르게 수집해야 한다.”

심각한 사건들에는 보편관할권(universal jurisdiction)의 원칙이 적용될 수도 있다. 뉴욕 소재의 기본권센터(Center for Constitutional Rights)는 이것이 “국제 사회 전체의 근본적인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대한” 범죄를 재판하기 위해 제3국이 개입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1월, 시리아의 보안 관료였던 안와르 라슬란(Anwar Raslan)은 반인권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독일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가해자의 수는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대부분은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 전쟁 당시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보스니아의 수많은 여성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강간범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버스를 타거나 밤에 길을 지나면서도 가해자들을 마주칠 수 있다. 르완다에서는 피해자의 옆집에 자신들을 고문하고 친척들을 살해한 가해자가 살고 있다.

ICC조차도 2002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전쟁 범죄나 반인권 범죄로 기소한 사람은 겨우 다섯 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모두 고위급 지휘관으로, 그중 세 명은 콩고민주공화국(DRC) 출신이고, 다른 한 명은 우간다, 나머지 한 명은 말리 출신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현재 우크라이나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해자를 많이 기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호스토멜 공항에서 발견되어 증거로 제출된 러시아의 군사 문서들. ©Photograph: Lauren Wolfe

 

2. 범죄자가 남긴 증거


우크라이나의 전쟁 범죄 수사를 총괄하는 비엘로우소프를 만나기 며칠 전에는 50대 중반의 간호사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스비틀라나 마주르코(Svitlana Mazurko)라고 부르겠다. 마주르코는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가 그린 천사와 파워퍼프 걸(Powerpuff Girls)이 섞인 것 같은 무늬의 반팔 수술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전쟁 초기에 점령당했던 키이우 북서부 외곽의 부차(Bucha)에서 살아남았다.

2월 24일 아침, 마주르코는 부차의 자택에서 아침을 준비하면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인근 호스토멜(Hostomel)의 안토노프 공항(Antonov airport)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였던 남편은 근무 중이었다. 정확히 오전 11시 5분, 그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발코니로 나갔다. 그녀는 헬리콥터가 낮게 비행하는 소리를 들었다. 건물의 2-3층 정도에 해당하는 높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두 대의 제트기가 급강하하는 걸 지켜봤다. 헬리콥터 40대 정도가 공항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제트기가 몇 차례 선회하면서 교외의 길거리에 폭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몸을 웅크리고 피하던 장면을 떠올리면서는 떨리는 손으로 무릎을 쓰다듬었다. 마주르코는 키이우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서 대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오가 되자 남편이 마침내 전화를 걸어 왔다.

그가 말했다. “붙잡혀 있었어.”

그가 출근한 뒤, 러시아 군인들이 헬리콥터에서 지상으로 착륙해 공항의 직원들을 불러 모았고, 이제부터 그들은 인질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붙잡힌 사람들은 한 시간 동안 군인들이 그 공격에서 뭘 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걸 지켜봤다.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기 위해 러시아의 머나먼 곳에서 끌려온 그 사람들은 대부분이 어렸고 일부는 술에 취해 있었으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주르코의 남편은 그날 오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그들과 협상을 벌였고, 덕분에 그를 비롯해 공항에서 근무하는 직원 약 150명이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안전하게 집에 돌아왔지만, 총격과 폭격은 멈추지 않았다. 마주르코와 그녀의 남편은 몇 명의 이웃들과 함께 주택 건물의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그 이후, 2월 28일이었다. 마주르코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방문객이 있었습니다. 러시아 군인들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몇 대의 차량과 무장 병력 수송 차량이 도착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때부터 “시간이 다르게 흘러갔다”고 한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티슈를 사용할 수 없을 지경까지 주물럭거렸고, 그러다 기어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리 건물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지렛대를 사용해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이 서로에게 소리치는 게 들렸습니다.”

부차 주변 지역에는 나무가 무성하다. 이 지역에서는 사냥 다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총기를 소유한 집이 많다. 러시아 군인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소총을 훔쳤고, 그뿐만 아니라 금붙이나 육류 통조림, 전자 제품, 심지어 낚싯대까지 가져갔다. 그렇게 러시아의 점령하에서 몇 주를 지냈다. 마주르코는 원래 닭고기를 수송하던 거대한 냉동 트럭이 마을에서 약탈한 물품들로 채워지는 걸 지켜봤다.

마주르코를 비롯한 가족과 이웃들은 여전히 지하층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 러시아 군인들이 소리치는 걸 들었다. “거기 누구야? 손들어!”

군인 30명 정도가 여성들에게 두 손을 들게 하고 벽에 세웠다. “그들은 우리의 몸을 구석구석 손으로 만졌습니다.” 마주르코의 말이다. 남성들은 속옷만 남기고 발가벗게 했다. 그들은 몸에 군대의 문신이나 소총의 반동으로 인해 어깨에 생기는 자국이 있는지 확인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런 흔적이 있는 남성들은 ‘여과 캠프(filtration camp)’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그들은 러시아로 이동해 구타당하거나 살해될 가능성이 높았다.

지하층에서 몇 주 동안 보낸 마주르코는 얼굴 혈관 일부가 파열될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지하층에 머무는 동안 그녀와 이웃들은 죽은 남성 한 명을 묻어 줬다. 사인은 심장마비인 것 같았다.

대략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눈 뒤, 마주르코는 잠시 방을 나갔다가 구겨진 비닐봉투를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손잡이 부분이 튼튼한 종류였다. 그런데 비닐봉투가 무거워 보였다. 그녀가 소파로 다가와서는 종이 뭉치와 함께 청바지 색상의 하드커버 책 한 권을 꺼냈다. 그 위에는 직인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러시아군이 떠난 뒤에 남편이 공항에서 그것들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것은 다량의 러시아 문서였는데, 벨라루스로 향하는 탈출 지도와 경유하는 지점의 좌표, 장교들의 코드명이 있었고, 파란 책에는 안토노프 공항에 착륙했던 대전차 유도 미사일 부대 병력의 이름과 주소, 부모님 성함, 심지어 다녔던 학교명까지 적혀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안토노프 공항을 키이우를 함락시키기 위한 기지로 활용하려고 했다.

나는 마주르코에게 물었다. “이전에 누구에게든 이걸 보여준 적이 있나요?”

마주르코는 그런 적 없다고 답했다. 전쟁 범죄 조사관들은 그런 종류의 원본 문서를 확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며, 그 문서가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 그 내용이 변경될 위험이 없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걸 집에 잘 보관했다가, 검찰 관계자에게 직접 전달하기 전까지는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마세요.”

그 문서의 사진들을 비엘로우소프에게 보여줬을 때 그는 기뻐했다. “그렇지, 러시아 문서, 고마워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문서들에는 잠재적 용도가 많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그 문서의 원본을 자신의 사무실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정확히 어디에서 발견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주르코의 남편과 이야기해 볼 필요도 있었다. 나는 2주의 시간을 더 보내는 동안 이 귀중한 자료들이 올바른 곳에 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내가 입수한 문서 중에는 여러 대대전술그룹(BTG)에 배속된 모든 의무병 목록과 각 의무부대 지휘관들의 호출 신호도 있었다. 이 정보를 무선 감청 데이터와 비교하면 각 부대가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한 러시아산 마취제를 다량으로 주문하는 문서도 있었는데, 의사와 조사관들에 의하면 이 약은 숙취 완화 용도로 사용될 수도 있다.

나는 트루스 하운즈의 마리나 슬로보디아뉴크에게 이 문서를 찍은 사진들을 보여줬다. 아이패드에 있는 사진들을 잠시 넘겨본 후, 그녀는 머리를 젖히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걸 찾았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중 개인 정보가 적혀 있는 하드커버 책이 특히 유용할 것 같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각각의 병사들에 대한 계약 조건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침공 전에 이미 만료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제 징집을 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번 전쟁 기간에 해당 부대에 소속되어 실제로 우크라이나에 왔던 사람 중에서 그들을 제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약 한 달 뒤에 슬로보디아뉴크와 다시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내가 전달한 모든 정보를 트루스 하운즈의 데이터베이스에 업로드했으며, 이로써 기록에 있는 러시아 병사들 각각의 신원을 좀 더 확실히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특정한 범죄와 가해자를 연결할 때, 데이터베이스에 이미 가해자의 자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보회복성센터(CIR)의 피에르 보(Pierre Vaux) 조사관은 ‘참전 병사’의 명단을 적어 놓은 하드커버의 책을 봤을 때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상에, 이건 진짜 금이잖아요!”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 책이 (러시아의) 기본적인 기록 장부라고 생각했다. 그는 날짜와 시간이 함께 기록된 (구름이 걷혔을 때의) 위성 사진과 페인트로 표시된 차량의 번호를 살펴봄으로써 어떤 병력이 어디에서 어떤 유형의 차량을 이용했는지를 확인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 문서를 활용했다.

러시아가 서둘러 철수하는 과정에서 남긴 가장 사소하고 이상한 것조차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AP 소속의 한 저널리스트는 어떤 병사가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확인했다. 키이우의 북서쪽 오제라(Ozera)에서 경찰이 발견한 것이었다. 이 편지는 어떤 종이의 뒷면에 적혀 있었는데, 이 종이는 (수륙양용 무장병력 수송차량인) BTR-MDM 122호의 승무원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기록하는 종이였다. AP 기자가 이 종이를 피에르 보에게 보여줬고, 그는 다시 이 문서를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했다. 그런 다음 그는 BTG에 배속된 러시아 의무병들의 명단을 활용해 해당 차량의 승무원 두 명이 누구인지 알아냈으며, 그들이 러시아 울리야놉스크(Ulyanovsk)에 기지를 둔 제31 독립 근위공수여단(31st Guards Air Assault Brigade) 소속 병력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탈출 경로 지도가 침공 이전의 ‘희망적인 생각’에 의해 그려진 것임을 알아냈다. 그 지도에는 점령을 위해 필요한 목표 지점이 많이 표시돼 있었지만 그중 상당수는 러시아가 빼앗지 못했다. 이 지도의 시작점인 바실키프(Vasylkiv) 공군 기지는 키이우의 남서쪽 40킬로미터에 위치한 곳으로, 러시아가 지금까지 진격했던 곳보다 훨씬 더 남쪽이다.

이는 러시아 군대가 브리핑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침공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추가적인 증거이다.

“정말이지 담뱃갑 뒷면에 그린 것 같은 지도였습니다.” 보의 말이다. “어설프게 대충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지난 4월, 경찰관들이 우크라이나의 부차에 있는 대량 매장지를 발굴하고 있다. ©Photograph: Oleg Petrasyuk/EPA

 

3. 지연된 정의


개별적인 범죄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가해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는 많은 전쟁 범죄 조사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러시아를 집단 학살 혐의로 기소하는 것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소비에트 시절에 만들어진 나라로 여기면서 러시아와 별개의 지역에서 이어져 온 오랜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대화해 본 우크라이나 NGO의 사람들은 모두 러시아의 최종적인 목표가 우크라이나의 문화를 말살하고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라는 증거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박물관위기센터(Museum Crisis Center)의 공동설립자인 올하 혼차르(Olha Honchar)는 블룸버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문화를 파괴하려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정체성의 일부이며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구분시켜 주는 것입니다.” 2월에 전쟁이 시작된 후, 약 500개의 문화유산 지구가 피해를 입었다. 우크라이나의 문화 및 정보 정책을 담당하는 카테리나 추이에바(Kateryna Chuieva) 차관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범죄는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1944년에 폴란드의 한 법조인이 처음 명명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학살)는 1946년 UN 총회에서 범죄로 인정됐다. UN 협약에서는 집단 학살을 “어느 국가, 민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자행된” 정신적 범죄와 신체적 범죄로 구성된다고 규정한다.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문화적 유산과 생식 능력을 파괴하려는 시도도 포함된다.

즈미나의 테티아나 페촌치크는 자신이 들은 어떤 여성들의 사례를 들려줬다. 러시아 병사들이 그녀들을 폭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너희들이 다시는 남자들을 보고 싶지 않을 때까지 강간할 거야.” 르완다에서는 강간을 할 때 신체 훼손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인간 이하의’ 적을 불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1992-1995년 전쟁 당시 보스니아에서는 세르비아의 병사들이 호텔이나 수용소 같은 장소에 마련된 ‘강간 캠프(rape camp)’에 여성들을 붙잡아 뒀는데, 이들은 임신할 때까지 이곳에 갇혀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법률 전문가인 라리사 데니센코(Larisa Denysenko)는 다수의 소송에서 아홉 명의 여성들을 변호하고 있는데, 그중 일곱 명은 키이우, 수미, 도네츠크, 헤르손, 체르니히우에서 러시아 병사들에게 윤간을 당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것이 점령군의 군사적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민간인들을 테러하고 협박하는 방식인 겁니다.” 아홉 명의 여성들은 모두 러시아 군인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파시스트”, “나치”[2], “창녀”와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다수의 사례에서 친인척이 있는 곳에서 강간당했고, 그들에게는 총구가 겨눠져 있었다.

페촌치크는 강간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수의 단체가 그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고 했지만, “드러나지 않는 범죄이기 때문에 그 규모를 정확한 숫자로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생존자들도 자신들이 받은 공격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현재 점령된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사관들이 거의 연락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정보라도 얻어내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페촌치크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고문받은 것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반드시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건 아닙니다.”

지난 10월 중순, UN은 100건 이상의 사례를 기록했으며, 강간이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인간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군사적 전략’이라고 발표했다. UN의 성폭력 담당 특별대표인 프러밀라 패튼(Pramila Patton)은 “그곳에 모든 징후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패튼은 성기 훼손 사례와 “비아그라를 갖고 있던” 러시아 병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량 학살과 러시아 시민권 강제 부여, 우크라이나인 러시아 이주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인 말살 시도의 증거가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조사관들은 여전히 키이우 인근의 부차와 동부의 이지움에 있는 매장지들을 발굴하는 중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두 손이 등 뒤로 묶여 있거나 두개골의 뒤쪽에 있는 총상 등 조직적이며 의도적인 살인의 징후들을 찾아내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그전에 이미 우크라이나에서 데려간 아이들이 [중략] 러시아어를 충분히 잘하지 못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페촌치크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아이들을 입양하는 이유입니다. (중략) 러시아어를 하는 러시아인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인들을 ‘러시아화’하려고 시도했던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2014년 크림전쟁 당시에는 크림반도의 주민 모두가 러시아 국적으로 바뀌었다. “1944년에는 스탈린에 의해 이런 일이 훨씬 더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크림반도의 사람들이 히틀러의 부역자라고 비난하면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아시아의 나라들로 강제 추방했습니다.”

비엘로우소프는 집단 학살의 증거를 또 다른 단체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ICC는 집단 학살 조사 여부를 확인시켜 주지 않았다. 지난 3월, ICC의 기소 책임자인 카림 칸(Karim Khan)은 ICC가 민간인과 병원 등을 포함하는 “민간 목표물”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공격을 조사할 것이며 기소할 계획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그들이 고통받아 온 것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것에 대해서 정의를 원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협업하여 법적 노력과 조사를 하고 있는 미국-영국-EU 합동조사단의 단장인 클린트 윌리엄슨(Clint Williamson)이 말한 바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검사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그들을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넘겨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를 선고받은 러시아 병사는 세 명에 불과하다.
지난 5월, 하르키우의 외곽에 있는 조사관들. ©Photograph: Iván Alvarado/Reuters

 

4. 비극이 반복되는 까닭


키이우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아침에 잠에서 깰 무렵, 이 도시는 이미 두 개의 미사일이 타격한 상태였다. 오전 6시 이후에 있었던 몇 차례의 포격은 유치원 놀이터 한 곳과 주택 건물 한 곳을 타격했고 한 명이 사망했다. 나를 잠에서 깨운 것이 그 포격 소리였는지, 아니면 아이폰의 침착한 여성이 내가 있는 곳을 향해서 미사일을 발사됐다는 경고와 함께 “주의하세요”라고 말하는 소리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약 한 시간 뒤에 내 휴대전화는 물론이고 도시의 길거리에서도 두 번째 공습 경보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경보가 울리자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든지 카페든 일터든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렀다. 하루에 수없이 많은 취재를 나간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고, 쉴 새 없이 요동치는 아드레날린 수치는 신체에 대혼란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아파트 아주 가까이에 미사일이 타격하자, 나는 방탄복을 걸치고 계단실에 가서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는 자기 자신과 외부 사이에 두 개의 두꺼운 벽이 있는 곳에, 그리고 유리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피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그곳에 앉아 있는데, 미화원 한 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트 더미를 들고 이웃 아파트로 들어가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미사일 타격을 받은 아파트 건물을 찾아갔다. 시민 한 명이 죽고 여섯 명이 부상을 입었다. 내가 이야기해 본 사람들은 (러시아가) 원래 의도한 공격 목표는 길 건너편의 오래된 군수 공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응급 구조 대원들은 무거운 검은 외투에서 그을음을 털어 내거나 노란색 형광 조끼를 손질하거나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있었다. 8층짜리 커다란 아파트 건물 한가운데의 맨 위 세 개 층이 검게 그을려진 채 거대한 주먹으로 세게 내리친 것처럼 부서져 있었다. 건물 전면의 유리창 수백 장은 거의 다 깨져 있었다.

우크라이나를 떠나기 전, 나는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유대인 3만 3000명이 살해돼 최악의 대학살이 발생했던 장소 중 하나인 바비 야르(Babyn Yar)를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곳에서는 그 이후에도 정신 병원 환자, 소비에트의 전쟁 포로, 집시 등을 포함해 7만 명이 더 살해됐다. 어둠이 짙어지는 가운데, 나는 풀이 무성한 들판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왼쪽으로는 최근에 러시아 미사일의 피해를 입어서 마치 러시아 구성주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TV 송신탑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가만히 서서 땅 밑에 묻혀 있는 유골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역사의 고통스러운 반복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바비 야르 대학살에서는 29명이 살아남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후 25년 동안 키이우와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은 나치 중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건 겨우 10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동안에도 그들 대부분은 온전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비교적 최근인 2021년에 한 변호사는 가해자들 가운데 최후의 생존자로 알려진 99세의 노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바비 야르에서 사망한 수천 명 중에서 신원이 확인된 비율은 10분의 1에 불과하다. 이는 대량 학살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키이우가 1943년에 (나치 독일로부터) 다시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된 후에 그곳을 방문한 저널리스트들이 수집한 것이다. 그들은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러시아의 전쟁 포로 세 명을 인터뷰하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유골 및 신발 등 사망자들의 유품을 찾아냈다.

뉴스위크에 그 대학살을 보도했던 빌 다운스(Bill Downs)는 1944년 자신의 부모에게 이렇게 보냈다. “독일인들이 유럽에서 벌인 일에 대해서, 그들이 저지른 잔인함과 무자비함과 짐승 같은 살육과 거세와 절단 행위를 우리가 뼛속까지 기억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들에게 너무 관대해질 수도 있을 것이고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이후에 수십 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이 학살 현장에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우크라이나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심판도 아마 느리게 진행되겠지만, 그 현장은 이미 드러나고 있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영토에서 매일같이 벌이는 범죄들을 폭로한다. 조사관들은 이지움에서 고문 현장 열 개를 확인했다. 경찰서 한 곳과 학교 한 곳, 땅에서 악취가 나는 구덩이 등이다. 이곳에서 러시아인들은 사람들의 귀에 전기선을 꽂고 그들의 손목을 묶어서 매달았다. 생존자들은 자신들이 물고문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조사관들이 이지움의 모래흙에서 수백 구의 사체를 발굴하면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은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대량 학살을 목격하며 서 있었던 바로 그 침엽수 아래에서 그 일을 벌였다.

죽은 사람들을 발굴하고 고문의 증거를 직접 목격한다는 것은 끔찍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어떤 범죄는 조사에 의해서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증거가 너무 많이 파괴됐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정의를 추구하며 수많은 증거를 수집하고 있기 때문에, 가해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1]
러시아 대령 출신의 세르게이 스크리팔(Sergei Skripal)과 그의 딸이 러시아가 개발한 신경작용제인 노비촉에 음독된 사건으로, 영국은 러시아 정보당국의 소행이라고 판단했다.
[2]
블라디미르 푸틴이 침공으로 내건 명분 가운데 하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게 적대적인 나치 세력들에게 장악되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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