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디자인 시대
1화

프롤로그 ; ‘공공’이라는 편견

2020년 5월,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뉴욕 브루클린에 근무하던 한 공무원은 도미노 공원(Domino Park) 잔디밭에 지름 2.4미터의 흰색 동그라미 30개를 그렸다. 당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가 권고한 사람 간 1.8미터 거리를 지켜 그려졌고, 시민들은 이 동그라미 속에서 혼자, 연인, 그리고 가족끼리 자유로울 수 있었다. 원 안에서만큼은 타인과의 거리를 지켜야 한다는 걱정이나 불안 없이 편안하게 코로나19 이전과 같은 일상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동적인 규제가 전혀 느껴지지 않으면서 나와 타인을 보호해 주는 원이었으며,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원 안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만약 디자인 분야에도 노벨상이 있었다면 노벨상이 아깝지 않을 디자인이었으며, 이 거리 두기 아이디어는 샌프란시스코 돌로레스파크, 체코 프라하광장 등 세계 각지로 퍼졌다. 이처럼 사회 문제에 디자인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 그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행복과 자랑스러움을 선사한다.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공공디자인’이다.

놀랍게도 공공디자인(public design)이라는 용어는 대한민국에서 태동했다. 선진국의 경우 공공디자인이란 용어가 따로 필요 없었다. 선진 도시는 처음 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필요에 따라 개입하고, 따라서 공공시설물들의 역사가 도시만큼이나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포함해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된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달랐다. 도시의 급격한 팽창으로 새롭게 요구되는 도심 기반 시설물들은 선진국을 따라 적절히 기능하도록 경제성에 입각해 제작, 설치됐다.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도심 시설물들은 대체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나 서로 비슷한 회색빛의 개성 없는 도시 경관을 낳았다. 혹시 도시가 개성과 경쟁력을 갖추는 데 공공시설물들이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공공디자인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우리나라는 전쟁이라는 매우 특수한 상황을 겪으며 전 세계에 유례없이 빠르게 발전을 이뤘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정부 주도로 사회 곳곳의 효율성을 높여 왔고, 시민들이 동참해 경제적 가치 중심 국가를 만들었다. 1970년 새마을 운동은 단순히 물리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립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문화와 기반을 만드는 운동이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함께 ‘잘살아 보자’는 목표를 공유한 공동체 의식이 있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무브먼트(movement)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계기가 됐다. 이후 우리나라는 가파른 성장을 거치며 국가적 위상이 높아졌고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올림픽 게임을 서울과 일부 수도권에서 개최하게 됐다. 전쟁 후 달라진 대한민국의 모습을 국제 사회에 처음 보인 것이다.

그런데 보여 주기에 창피한 모습들도 많이 있었다. 정부는 국제 사회의 시각에서 부족해 보이는 도시의 모습을 개선하고자 서울 등의 도시에서 대대적인 정비 사업을 펼쳤다. 특히 시내의 비포장도로를 인적 및 물류 이동이 편리하도록 정비했다. 김포 공항에서 올림픽 주경기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개선한 올림픽 대로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후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준비하며, 한국은 또 한 차례 도시를 정비하게 됐다. 이때 공공시설물들은 안전이나 사용성의 차원뿐 아니라 심미적 차원에서 고려됐다. 눈으로 보는 도시 환경의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걸 인식하며 디자인 전문가들에게 다양한 역할이 주어졌다. 효율 중심에서 아름다움과 쾌적함을 중심으로 도시를 바라보는 사고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공공디자인은 그 이후로 한동안 빛을 발하지 못했다. 지난 2006년 서울시는 오세훈 시장 취임 이후 “21세기는 모든 것이 디자인 시대”라 규정하고 공공디자인 사업들을 대대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공공디자인의 목표와 방향성을 명확하게 수립하지 못한 채 시민들에게 보여 줄 전시성 사업들을 주로 시행했고, 그 결과 사업을 오래 지속하기 어려웠다. 공공디자인을 아직은 이미지 소비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공디자인의 시작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왜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2016년 8월 시행된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은 바로 이 관점을 명확히 한다.

“제1조(목적) 이 법은 공공디자인의 문화적 공공성과 심미성 향상에 필요한 사항을 정함으로써 국가 및 지역 정체성과 품격을 제고하고 국민의 문화향유권을 증대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행복과 문화적 삶을 지향한다는 의식하에 공공재의 기획부터 실행과 설치, 관리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프로세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처음 그 개념이 태동한 대한민국에서 공공디자인이 자랑스러운 도시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면, 한국과 유사한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공공디자인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디자인은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보이는 부분은 도시에서 시민이 접하는 가로등, 벤치, 보도, 간판, 공공 건축물 등 물리적 시설들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부분은 무엇일까? 보이는 부분이 만들어 낼 가치를 포함해,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지속 가능한 사회
를 만드는 가치들이다. “현대적 의미의 ‘디자인’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모든 행동을 일컫는다.”[1] 이런 의미에서 공공디자인은 ‘보이는 부분’을 넘어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사회를 혁신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도시의 가치를 만든다.

특히나 이런 공공디자인의 가능성은 전 세계적으로 기업 경영 ESG[2]가 대두되며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제는 재무적 성과뿐 아니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비재무적인 성과가 기업 경영에 중요한 요소가 됐다. 기업의 친환경(Environmental), 사회적 책임(Social), 협치(Governance)가 얼마나 건전하고 투명하게 운영되는지 평가해 연기금 등의 투자자들은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판단하고 투자를 결정하게 됐다. 코로나19와 기후 재난 등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한 지구의 현상들을 개인은 물론 정부나 국제 기구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생기고 있다. 이러한 와중, ESG 경영은 공공디자인과 맞물려 브랜드 액티비즘이라는 중요한 형태로도 발전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어떤 사업이나 프로젝트에 ‘공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공공의 일원이지만 딱히 소속감을 느끼지도 못한다. 오직 나와 관련된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공디자인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용어 자체도 생소할 뿐더러 그저 정부나 지자체가 필요에 의해 하는 사업에 ‘디자인’이란 말을 붙이면 좀 더 세련돼 보이니 ‘공공디자인’이란 말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공공디자인은 최근 몇 년간 크게 발전해 왔으며 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지하철과 버스를 하나의 승차권으로 여행할 수 있는 나라는 흔치 않으며, 버스 정류장의 안내 단말기는 각각의 버스가 몇 분 뒤 도착하는지, ‘곧 도착’하는 버스는 몇 번인지 알려 줄 정도로 친절하고 똑똑하다. 자동차를 타고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새롭게 건설된 도로 수준 또한 만만치 않다. 혹시라도 운전자가 길고 단조로운 터널 속에서 무심코 졸음운전을 할까 호루라기 소리, 사이렌 소리를 삽입해 뒀으며 고속도로 갈림길에서는 길을 놓치지 않도록 차도에 분홍색, 녹색의 유도선까지 그려두었다. 이처럼 한국의 공공디자인은 고도로 발전해 왔으며 이제는 기능성과 효율성, 심미성을 넘어 사람의 행태에까지 관심을 갖고 서비스 디자인을 접목해 성장하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출연한 외국인들이 보는 대한민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한민국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디든 거리가 잘 정비돼 있고, 일상 속 사소한 영역까지 기술이 침투해 있는 IT 선진국이다. 이처럼 제삼자의 시각에서 볼 때면 새삼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 나라가 됐으며, 이제는 편의를 넘어 프라이드를 심어 주는 도시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 책에선 ‘공공’이라는 가치와 더불어 일곱 가지 침술 개념으로 도시 문제들을 풀어가는 공공디자인을 살피고자 한다. 낡은 제도를 개선하거나 도시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들에게 예술적 감응을 선사하는 등 더 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테라피로서 기능한다는 의미에서 ‘침술’이라 칭했다. 일본의 대표적 디자이너 하라 켄야는 “지금은 물건이 아니라 가치를 만들어 가는 시대”라고 했다. 오늘날 한국은 공공디자인을 통해 도시의 감각을 매만지고, 국가의 가치를 브랜딩하고 있다. 이젠 ‘공공’이라는 편견 너머 우리가 살아갈 도시의 모습을 함께 고민할 때다. 머물고 싶은 도시의 주인공은 결국, 시민이기 때문이다.

〈‘공공디자인’의 정의〉
•공공디자인은 보다 더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합의의 과정과 노력이다.
•공공디자인은 시민과 함께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며 공공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공공디자인은 공공의 정책과 서비스, 사회적 합의, 의제 도출과 과정 전반에 디자인을 적용해 개인의 삶의 질과 사회 문화적 가치를 향상시키는 움직임이다.
•공공디자인은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긍정적 변화를 일으켜 공공의 가치 창출과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공공디자인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 가치를 창출하는 계획과 활동의 총체이다.

- 홍익대학교 공공디자인학과, 2021
[1]
에치오 만치니(조은지 譯),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 안그라픽스, 2016, 4쪽과 14쪽.
[2]
ESG는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영어 단어 첫 알파벳을 딴 용어이다. 2004년 UN 보고서에서 처음 사용됐다. 증권시장에서 기업에 대한 투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기업의 재무적 성과뿐 아니라 환경 보호, 사회적 책임, 기업의 지배 구조와 같은 비(非)재무적 성과를 보고 투자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KDI 경제정보센터 ‘ESG’ 검색 결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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