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는 영속하지 않는다. 시민과 사회가 성숙해지며 기존의 사회 제도에 대한 점검도 잇따라 요구되고 있다. 제도 침술이란 이러한 제도의 개선 혹은 신설을 통해 도시의 심미성과 효율성, 그리고 도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공공디자인의 한 방식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은 근대 도시화의 초석을 닦았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며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 개발을 시작했다. 최고 수준의 공공디자인이 21세기 런던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원론적인 정책보다는 도시 상황에 맞춘 실현 가능한 대안들을 마련하자는 취지였으며, 그 영향력은 곧바로 유럽 내 다른 국가들에도 퍼졌다.
우리나라는 공공성을 담보한다는 뜻에서 직관적으로 ‘공공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반면 영국은 ‘도시디자인’, ‘경관디자인’, ‘환경디자인’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가치가 등장하는데, 영국의 공공디자인은 ‘좋은, 혹은 보다 나은 디자인(good, or better design)’을 넘어 그 자체로 질이 높은 디자인을 추구한다.
[1] 옛 제도가 사회 인프라의 양적 성장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로운 제도는 기존 시설의 심미성 및 효율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방점을 두었다. 잘못된 정책 결정과 디자인이 개인 및 지역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줄이려는 것이다. 비슷한 개념으로 우리나라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 도입됐다.
[2] 유니버설 디자인의 목적은 남녀노소가 장애 여부나 국적 등에 관계없이 안전하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경제, 문화, 환경 등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적용되며, 다양성을 포용하고 시민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물론 공정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이 기본 철학이다. 도시의 인프라를 공평하게 사용하도록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배제, 환경적 불평등과 같은 도시 제반 문제점들을 최소화하는 접근법이다. 2021년부터 서울시는 모든 공공 건축물 및 시설물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의무적으로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제도 침술로서 시민의 보다 나은 삶을 지원한다.
습관을 바꾸는 디자인
어느 한여름, 일기 예보는 종일 무더운 날씨를 예상했고 거리에는 맑은 햇살이 가득한 날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걷는 동안 덥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한 채 오래도록 쾌적하게 걸었다. 이처럼 오랜 시간 거리를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간단했다. 거리의 가로수들이 보도 위로 끊이지 않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것이다.
《액티브 디자인 가이드라인(Active Design Guidelines)》은 지난 2010년 뉴욕시가 보다 건강한 건물, 거리 및 도시 공간을 위해 발표한 디자인 전략 매뉴얼이다. 학술 연구와 모범 사례를 기반으로 만든 자료로, 도시 디자이너 및 건축가에게 제공된다.
[3] 컴퓨터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앉아서 작업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운동 부족으로 다양한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의사의 처방과 권고, 약물 복용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도시에서 사람들이 운동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액티브 디자인 가이드라인》은 그 해답을 디자이너의 역할에서 찾는다.
시민의 활동성을 위해 고려할 디자인적 요소는 수없이 많다. 계단이 시민의 눈에 더 잘 보이게 만들고,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에게 매력적인 거리 풍경을 제공해 걷고 싶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보행자가 걸을 수 있는 녹지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거나, 환승 체계를 편리화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도시 디자인을 통해 더 많은 시민들이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이 있는 시장과 연결되도록 한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이를 가로에서 진행함으로써 보행자들이 즐겁고 쾌적한 환경에서 산책하는 동시에 행사에도 참여하도록 한다.
《액티브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제시하는 것은 제한적이거나 규격화된 도시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아니다.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건강과 활동성을 중심으로 도시를 디자인한다. 이는 시민이 일상에서 활동성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뉴욕시가 도시 전반의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 독보적인 제도 침술이다.
만남이 있는 도시
도시는 만남의 장소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 제도의 필요성도 여기서 태동했다. 도시는 작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대도시들이 많다. 2022년 4월 기준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메가시티가 전 세계 32개나 된다. 도쿄, 상하이, 자카르타, 델리를 이어 서울은 인구 2560만으로 세계 5위 메가시티다. 도시가 커지면 장점도 있지만 일터와 주거 공간이 점점 멀어진다는 단점도 발생한다. 이에 대부분의 대도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이동에 쏟는다는 문제를 안고 산다.
2020년 안 이달고(Anne Hidalgo) 파리 시장은 ‘15분 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자전거를 타거나 도보로 이동 시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15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크기로 동네를 구획하겠다는 계획이다. 자동차 없이 집, 직장, 학교, 병원, 공원 등 모든 일상 서비스가 15분 이내에 접근 가능한 자족적인 생태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15분 도시에선 주차장이 불필요하고, 차들이 들어서 있던 공간에 새로운 기능들이 추가될 수 있다. 학교를 비롯해 주간에만 활용하던 시설들의 새로운 쓰임새를 도모해 야간 및 주말에도 활용된다. 이에 따라 삶의 편의와 질이 보장되고 마을 주민 누구나 공공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이처럼 15분 도시 계획은 근접성이라는 가치를 통해 도로에서 허비하던 시간을 자기 계발이나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치환함으로써 인간적인 삶의 형태를 회복한다.
파리시의 도시 정책 자문 카를로스 모레노(Carlos Moreno) 교수가 내세운 15분 도시 핵심 원칙은 다음과 같다.
[4]
•모든 시민이 깨끗한 공기를 즐길 수 있도록 충분한 녹지 공간을 제공한다.
•각 지역에 가족 유형별로 다양한 유형과 크기의 주택을 제공하고, 일터와 가까운 곳에 살 수 있도록 한다.
•원격 근무자들을 위해 집 근처에 소규모 사무실, 소매 및 접대 시설, 코워킹 스페이스를 둔다.
•모든 시민이 상품과 서비스, 특히 식료품이나 신선한 음식 및 건강 관리 서비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15분 도시는 불필요한 이동 시간을 줄이고 더 많은 공공 공간을 제공한다. 지역 번화가에 활기를 불어넣고 커뮤니티 의식을 강화하며, 건강과 웰빙을 촉진하고 기후 위기에 대한 내성을 높인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왜곡된 거대 도시의 모습을 작은 세포처럼 구획해 시민을 위한 동네 마을들로 구성하겠다는 파리의 계획에 세계 많은 도시 정책자들이 공감했다. 푸드 트럭(food carts) 붐을 일으킨 오리건 포틀랜드(Portland)의 ‘완전한 이웃(complete neighborhoods)’
[5], 호주 멜버른(Melbourne)의 ‘20분 이웃(20 minute neighborhoods)’
[6] 또한 유사한 형태의 제도 침술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따라 2022년 8월 부산시는 디지털과 스마트 개념을 더한 15분 생활권 도시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생활 속 문제를 구체화하고자 지역 주민과 전문가가 함께 의견을 수렴하고 해결책을 실험해 보는 ‘Happy 챌린지 거버넌스’를 시작해 차량 중심의 도시를 사람 중심의 도시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다수를 위한 다수의 공간
뉴욕의 도로는 자동차로 가득하다. 시끄러운 경적 소리와 급브레이크음, 정지된 차들이 내뿜는 매연이 도로를 가득 채운다. 마음 급한 운전자들의 거친 운전, 교통 질서를 지키지 않아 꽉 막혀 버린 사거리 등은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안긴다. 지난 2018년 뉴욕시 비영리기관 파트너십포뉴욕시티(Parnership for New York City)의 발표에 따르면 뉴욕 시민들은 교통사고와 교통 체증 등으로 인해 연간 6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입는다. 2020년 미국 뉴욕 시애나대학연구소에서 진행한 한 설문 조사에서 공공 공간에 대한 뉴욕 시민들의 생각은 아래와 같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