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2화

트럼프의 시대는 일시적 일탈인가?

“이 세기에 피와 본능이 자본과 지성에 대항하여 그들의 권리를 회복할 것이다. 개인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도주의, 자유가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대중들은 체념하는 심정으로 강한 인물인 시저의 승리를 받아들이고 복종할 것이다.”
오스발트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 중에서[1]

 

세상을 뒤집을 혁명가, 블랙 스완의 등장


트럼프 시기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내 머릿속엔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오래된 문장이 먼저 스쳐 지나간다. 슈펭글러가 누구인가? 그는 20세기 초 전쟁의 참화 위에서 서양 문명의 근저가 되는 삶의 방식의 퇴조와 몰락을 예언한 사상가이다. 슈펭글러의 때 이른 선언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이상주의의 끝판왕인 유럽 연합(EU)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심지어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오늘날 유러피언 드림을 미래의 종착지로 선언했다. 그리고 서구에서 냉전이 종료되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한 발 더 나아가 자유 민주주의의 최종적 승리와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계절의 필연적 변화처럼 인류 역사도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은 것일까? 유럽 연합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고 트럼프를 비롯한 복고적 포퓰리스트들이 전 세계를 휘젓고 있다. 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런 혼돈기에는 예술 매체가 진리 포착의 유용한 도구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는 언제나 시대의 근본 분위기(Grundstimmung)를 전위적으로 보여 준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배트맨 3부작 시리즈는 오늘날 혼돈의 정치 질서 지형을 잘 표현하는 새로운 정치학 교과서다. 영화 속 슈퍼 부자와 홈리스가 극단적으로 공존하는 고담(Gotham)시는 뉴욕, 나아가 지금 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뉴욕은 미국이 주도해 온 근대 문명의 상징인 바벨탑이다. 뉴욕은 오늘날 금융, 영화, 패션 등 모든 첨단 트렌드의 수도다. 하지만 하늘 끝을 향해 상승하는 뉴욕 마천루에는 그 높이만큼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2008년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씨티그룹의 성장세는 꺾일 줄 몰랐다. 씨티그룹 회장을 지낸 금융인 로버트 루빈(Robert Rubin)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 제국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였다. 야심 찬 신자유주의 노선과 군사력이 뒷받침된 개입주의 노선을 가지고 등장했던 빌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은 재임 시절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출근하는 재무장관 루빈을 아니꼬워했다. 하지만 클린턴은 마치 루빈을 비롯한 금융 자본의 이사회 노선을 매우 충실히 집행하는 CEO처럼 움직였다. 보스니아, 코소보 내전에 개입하면서 클린턴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를 이식하는 일이었다. 소비에트의 붕괴도 제국의 물리력인 나토(NATO·북대서양 조약 기국)의 본격적 확장은 물론이고 신자유주의 체제를 사회주의권에 이식할 절호의 기회로 인식했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서 1997년 한국 금융 위기에 개입한 IMF의 배후에 미국 재무부가 있었다고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클린턴 시대를 과거 영국, 네덜란드 등이 주도하며 영토를 침탈하던 제국주의(imperialism) 시대와 대비되는 제국(empire)의 시대로 적절히 이론화한 바 있다. 이들은 제국이 민족 국가, 다국적 기업, 유엔 같은 지구적 NGO 등이 결합한 하나의 혼합체로서 지구적 질서를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지구적 경찰 역할을 떠맡는다고 본다. 예를 들어 걸프전 개입은 물론이고 석유 등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음에도 개입한 코소보, 보스니아 내전은 미국이라는 한 주권 국가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개입이라기보다는 지구적 경찰로서의 치안 유지 활동으로 더 잘 설명된다.

클린턴과 그에 이은 부시(George Bush)는 당적, 이념, 지지 기반 등에서 사뭇 달랐지만 공격적으로 제국을 팽창시키려는 충동에서는 비슷했다. 클린턴 정부는 확장 노선을 통해 러시아 인근은 물론이고 중국까지 신자유주의 체제에 포함시키려는 야심 찬 비전을 선보였다. 심지어 클린턴 정부의 이론적 뒷받침을 담당한 아미타이 에치오니(Amitai Etzioni)라는 사상가는 이 확장 시대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서구와 동양 사상의 융·복합에 근거한 지구 공동체주의를 꿈꾸기도 했다. 부시 정부의 이론적 뒷받침을 담당한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분파들인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자)들은 보다 명시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제국적 질서를 꿈꾸었다. 이들은 제국이라는 비난의 낙인을 오히려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제국이라는 명칭에 대한 이들의 자긍심은 미국의 초기를 되돌아보면 놀라운 변신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원래 프랑스의 귀족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목격했듯이,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격리된 자족적 ‘세계 국가’였다. 모든 것을 자체 조달 가능하고 침략의 위험이 낮은, 그야말로 민족 국가의 유토피아였다. 비록 미국 건국의 시조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며 계속 확장하는 열린 네트워크 국가를 꿈꿨지만 그 열망은 주로 미 대륙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미국은 토크빌의 찬양을 배신하며 서서히 제국적 충동을 발전시켜 갔다. 시어도어(Theodore Roosevelt)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라는 두 보수, 진보 대통령은 미국을 제국으로 도약시킨 투톱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문어발 자본을 효율화해 자본주의의 혁신을 만들어 내고 해군력의 확장을 통해 제국적 진출의 토대를 닦았다면, 후자는 뉴딜(New Deal)과 마셜 플랜(Marshall Plan), IMF 등을 구축해서 미국 주도의 제국적 질서를 완성했다. 뉴딜과 마셜은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과 히틀러의 파시즘이 유럽과 미국으로 전염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는 방파제였다. 그리고 루스벨트 이후 본격화된 공산권과의 투쟁에서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확장해 나가면서 동시에 비민주적으로 공산주의의 적과 싸워야 하는 모순적 과제를 비틀거리면서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결국 비효율적 경제 시스템과 제국적 충동의 과잉이라는 내적 모순을 견뎌 내지 못한 소비에트의 팽창주의 제국은 레닌의 우파 후계자인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급진 개혁을 계기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네그리와 하트의 오류는 제국의 핵심적 특징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 클린턴 집권기야말로 제국이 흥청망청 마지막 파티를 열었던 시기라는 점을 놓쳤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모두가 잊었지만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Jimmy Carter) 시절 이미 미국의 실질적인 경제 성장률은 다른 선진 자본주의와의 경쟁 격화, 임금 상승 속에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미 카터는 지구 행성을 착취하는 화석 중독 경제의 위험성을 경고하다가 최악의 연설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받아야 했다. 사실 앞선 1965년 린든 존슨(Lyndon Johnson)도 오늘날 기후 변화의 부작용을 의회에서 강력히 경고한 바 있다. 이들 대통령 뒤에는 로마 클럽과 같은 예지력을 갖춘 시민 사회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들의 조기 경보를 무시하고 무제한의 성장과 소비 파티를 즐겼다. 네그리가 일시적인 거친 질주라고 평가하며 다시 제국의 세련된 작동 논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전망했던 부시의 광폭 행보 시절은 사실 제국이 본격적으로 가파르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시점에서 돌아보면 이매뉴얼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과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 옳았다. 그들은 네그리와 하트보다는 더 정확하게 제국의 흥망성쇠와 허장성세를 예리하게 들여다보았다. 과거 사회주의의 붕괴를 놀랍게 예언한 월러스타인은 이제 구조적 위기의 본격화와 평형의 붕괴라는 키워드로 자본주의 제국의 미래를 예견한다. 월러스타인은 2013년 시스템 과학 이론을 응용하여 자신의 자본주의 사이클 결정론을 완화한 바 있다. 그는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라는 공저에서 이미 자본주의는 구조적 위기 심화로 수십 년간의 평형 상태가 깨졌다고 진단한다. 구조적 위기라는 의미는 자본 간 경쟁 격화 및 생태적, 사회적 비용의 증가로 자본 축적에 필요한 비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기존 정부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제는 평형의 복원력보다 해체의 원심력이 더 커져 구조적 위기가 만성화되었고, 후속 체제를 위한 각 세력의 이행기 투쟁이 시작되었다.

월러스타인이 평형의 붕괴를 분석했다면 존슨은 백래시(Backlash)를 들여다보았다. 존슨이 보기에 제국적 질서의 욕망과 구축 시도는 안과 밖의 배제와 충돌, 욕망 조절 실패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클린턴 시기는 안으로는 고삐 풀린 고도 금융 자본의 과잉 확장 속에서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레짐에 저항하는 세력의 잔혹한 배제를 시도했다. 흔히 2008년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부시를 말하지만 실은 클린턴 시기의 규제 완화와 투기 바람은 경제 위기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었다. 클린턴은 미국식 삶의 방식을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지막 파티를 벌였다. 동시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자신들의 대통령이라고 불렀던 클린턴 시기는 스리 스트라이크 아웃 법(Three Strike Out Law·세 번 범죄를 저지르면 종신형에 처하는 법) 등 사회적 약자의 범죄에 대한 처벌의 패러다임이 정교하게 구축된 시기이기도 하다. 미국식 모델에 근거한 네트워크화라는 급진적 유토피아는 중부 유럽, 러시아 등 전 세계에서 양극화라는 백래시를 불러오면서 전체주의에 대한 향수를 낳았다. IMF의 권고가 한국을 초경쟁 자본주의 정글로 전환시킨 것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IMF와 클린턴은 나중에 가서야 천연덕스럽게 ‘우리 제안이 너무 나간 건가’ 하는 실토를 하고 있다. 이미 파티가 종료된 줄 모른 부시는 9.11 테러 사건을 빌미로 20세기 초 제국적 확장기의 게임을 즐기다가 결국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지고 2008년 경제 위기를 낳고 말았다.

무너지는 고담시의 곤경을 구할 영웅으로서 오바마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하지만 애초에 오바마는 자신의 담대한 희망이란 구호를 실제로 믿을 만큼 어리석었다. 비록 주변에 탁월한 월가 금융 전문가를 둔 덕분에 2008년 경제 위기를 예측했지만, 그는 구조적 위기의 특성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사실 오바마는 제2의 루스벨트라기보다는 영국 제국 퇴조기에 단명한 노동당 윌슨(Harold Wilson) 총리의 운명에 더 가까웠다. 나는 당시 《프레시안》 칼럼에서 취임 전 루스벨트의 100일을 연구하는 오바마를 보고 조소를 보낸 바 있다.[2] 오바마의 단견은 미국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존 주디스(John Judis)가 2018년 《민족주의의 부활(The Nationalist Revival)》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바마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까지 나토를 확장하자는 전임 부시 대통령의 지지 요청을 손쉽게 승인했다. 오바마는 지금은 제국의 지나친 확장 노선을 연장할 때가 아니라 질서 있게 퇴각할 때라는 인식을 취임 초기에는 가지지 못했다.

오바마의 임기가 본격 시작되자 그가 꿈꾼 담대한 희망이란 사실 의료 보험 개혁 정도라는 것이 드러났다. 물론 그는 정권의 명운을 걸고 용감히 뛰어들었지만 사실 내용적으로는 보수 재단인 헤리티지 재단의 어젠다를 구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망가진 자본주의를 고치기 위한 월스트리트 개혁 법안인 도드 프랭크 법[3]도 애초보다 훨씬 보수적으로 땜질된 채 종결되었다. 월가의 충실한 관리자인 가이트너(Timothy Geithner) 재무장관은 위기의 관리에만 급급했다. 결국 미국 주류 언론이 한국 자본주의를 비난할 때 쓰는 대마불사라는 표현이 미국의 금융 자본들에게 적용되었다.

물론 이러한 한계를 두고 오바마의 소심함만을 탓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 자본과 의회 내 지형의 취약함, 그리고 오바마를 문명의 적으로 규정하는 공화당의 극단적 방해 같은 요인은 임기 내내 오바마를 괴롭혔다. 반면에 오바마 왼쪽에 있어야 할 의원들은 너무 적었고 외부의 강력한 사회 운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클린턴도 그랬지만 오바마도 과거 링컨이나 루스벨트가 누린 전환적 운동 에너지의 행운이 따르지 않은 것이다.

백악관에 입성한 오바마는 국내 개혁은 물론이고 국제 관계에서도 담대한 희망보다는 질서 있는 퇴각이 필요한 시대라는 걸 점차 깨달아 갔다. 오바마의 중동에서의 발 빼기와 아시아 회귀 전략은 클린턴의 확장 및 중국 견인 노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오바마가 시리아 내전에 본격적인 개입을 거부한 사실과 이란과의 핵 위기를 봉합한 점에 대해 당시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유약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미국이 과거 청년기와 달리 꿈의 크기를 줄이고 중년기의 쓸쓸함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시점에서 지난 대선을 회고해 보면, 이 퇴조기라는 큰 맥락 속에서 힐러리의 재등판은 애초부터 매우 어색하다. 이미 힐러리는 2008년 새천년 세대와 다인종 연합의 후보인 오바마에게 패배한 바 있다. 힐러리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제외하고는 오바마 시대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미래로 가는 리버럴이 아니라 이전 시대로의 복귀를 상징한다. 힐러리는 매파인 매케인과 친교를 나누며 강력한 총사령관으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시대는 준비된 대통령을 원하지 않았다.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와 티 파티(Tea party) 운동의 결과로서 시민들은 기성 질서를 뒤집을 혁명가를 원했다.

처음에 힐러리에 맞서는 트럼프의 등장은 블랙 코미디의 소재였다. 심지어 트럼프 가족도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미래를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지 않다. 트럼프의 전략가이자 극단적 음모론자인 스티브 배넌이 트럼프의 당선을 장담한다고 한 말에 귀 기울일 정도로 트럼프 주변은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트럼프는 배트맨 영화의 조커처럼 기존 체제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희한한 역할을 하면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월가 체제를 공격했다가 하루는 제국적 개입주의를 건드렸다. 우리는 북미 정상 회담 직후 트럼프가 한미 군사 훈련을 위험한 워 게임(War Game)이라고 공격하던 충격적 장면을 기억한다. 나는 그 순간 트럼프가 혹시 김정은이 세운 맨추리안 켄디데이트(The Manchurian Candidate)[4]가 아닌가 하는 환상에 빠질 정도로 놀랐다. 지금까지 미국 대선 역사상 트럼프는 가장 충격적인 블랙 스완(Black Swan)[5]이었다.

 

트럼프는 문명 충돌론자다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은 어차피 그의 과격함은 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며 취임 후 곧 정상을 찾을 것이라 예측했다. 백악관에서의 학습 경험이 실용주의자인 그를 바꾸어 놓을 것이라 많은 이들이 단언했다. 하지만 예측과 달리 2018년 중간 선거 패배 이후에도 트럼프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2019년 새해 국정 연설에서 트럼프는 초반에 초당적 타협을 주장하는 듯 선회하다가 다시 국경 장벽을 세우자는 급진적 주장으로 돌아가곤 했다. 트럼프 이전의 모든 대통령은 취임 후 온건해지는 물리 법칙을 피해 가지 못했다. 강경 보수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레이건조차 집권 후 너무 말랑말랑해져서 네오콘들의 불만을 샀다. 심지어 닉슨은 중국과의 화해 시도로 집토끼들 사이에서 간첩 취급까지 받았다. 트럼프는 왜 예외인 걸까? 예측은 왜 빗나간 걸까?

지금은 리버럴이 부활을 염원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보수주의자들이 꿈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불가능한 시대다. 제국의 상승기가 아니라 하강기이기 때문이다. 레이건 시절만 하더라도 비록 양극화가 심화되는 추세였지만 여전히 ‘미국의 아침(Morning in America)’을 대표 구호로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는 디스토피아의 분위기가 지배한다. 지금의 하강기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평형의 불가역적인 붕괴로 인해 불타오르는 증오감, 격렬한 갈등과 혼돈, 그리고 불확실성의 시기다.

이 디스토피아에는 칸트류의 계몽주의적 낙관이 아니라 니체, 슈펭글러의 서양 문명에 대한 회의주의가 지배한다.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키워드는 분노, 냉소, 혐오, 공포, 절망이다. 이 서구 몰락의 시대정신은 스스로 시대의 주인이라고 믿었던 백인 노동자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켰고, 위대한 리더의 부활을 꿈꾸게 했다. 그들은 삶의 방식, 제조업 직장, 지위 등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현실에 발버둥 친다.

특히 미국의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도덕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고대 사회를 꿈꾼다. 사실 미국 보수의 대부인 레오 스트라우스는 미국을 소비에트와 같은 근대 컨베이어 벨트 사회가 아니라 고대적 덕성을 갖춘 근육질의 사회로 만들고자 했다. 스트라우스는 고대 로마의 원로원에 해당하는 상원과 같은 제도가 존재하는 미국의 고대적 특성을 찬양했다. 이런 특징을 더욱 확장시키는 열망이 스트라우스의 철학을 관통한다. 이들에게는 트럼프의 난봉꾼 기질이나 속물근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단지 트럼프가 자신들의 복고적 유토피아를 실현할 도구일 수 있는가 하는 기준만이 중요할 뿐이다. 카지노 자본주의의 가장 속물적 특징을 가진 트럼프를 수단으로 한 고대 덕성으로의 복귀라니 기이한 조합인 셈이다. 트럼프를 뒷받침하는 집토끼인 기독교 근본주의 진영,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를 매개로 한 친이스라엘 강경 우파, 피터 나바로(Peter Navarro) 백악관 무역 제조업 정책 국장을 중심으로 한 신중상주의 진영, 그리고 스티브 배넌의 극우 포퓰리스트 진영은 저마다 다양한 스펙트럼과 실리를 추구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문명 충돌론이란 접착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트럼프는 이 문명 충돌론의 시대 분위기를 타고 과거로 가는 역주행의 대변자에 불과하다. 국내적으로는 권위주의적 정치와 문화,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정서가 강화되고 대외적으로는 미국 우선주의와 서구 문명의 배타적인 블록이 강조된다. 1930년대의 미국은 자신감을 가진 상승기였기 때문에 파시즘이 아니라 뉴딜을 택했다. 하지만 오늘날 하강하는 미국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더 나아가 지구 환경 파괴 문제는 경쟁의 격화 및 새로운 파시즘의 토양이다. 트럼프의 파시즘에 대한 충동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배경으로 에너지를 얻는다.

다른 한편으로 시진핑의 권력 연장을 개인의 권력욕으로만 이해하는 이들은 지금의 전 지구적 지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진핑의 시도는 이 평형 붕괴 시대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필사적 생존 전략이다. 마치 과거 자본주의와의 사활을 건 내전에서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선택했듯이 말이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고독한 트럼프와 시진핑은 아마 서로에 대해 연민의 정이 많을 것이다.

사업가인 트럼프는 항상 실리를 추구한다는 평가가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 실리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와 피터 나바로를 중심으로 한 중국 때리기로 상징되듯 중국 등 타자에 대한 악마화와 배타적 블록화를 동반한다. 트럼프는 오늘날 호주, 영국 등의 서구 문명권을 동원하고 힌두 문명권인 인도까지 끌어들여 중국 봉쇄에 나서고 있다.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트럼프의 인도·태평양 전략이나 반대로 남미의 히스패닉 문명권에 대한 중국의 구애는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테제를 연상시킨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미국과 중국 간의 문명 충돌이 무제한적으로 확산되기는 어렵다. 미국의 주가와 미국의 기업들이 중국에 의존하는 것처럼 세계의 네트워크가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의 잭 니카스(Jack Nicas) 기자는 최근 애플의 추락이 겨우 나사 수급 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실었다. 니카스는 아직까지 중국은 10만 명을 금방 모아 철야 작업을 시킬 수 있는 나라인데 이런 나라에 미국 기업들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을 지적한다. 아직은 어떤 나라도 중국의 규모와 기술과 인프라, 저비용이 결합된 이익을 따라갈 수 없다.[6] 당분간 미국은 중국 때리기와 중국 의존이 동시에 일어나는 신경 발작적 상황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세계 체제의 사슬에 결박된 중국도 미국 기축 통화가 아직 건재하는 한 미국 때리기와 미국 의존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신중하게 돌아보면 오늘날 미국 내 중국 때리기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접속시킨 시도 자체는 미국의 입장에서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좀 더 정교한 길들이기에는 실패했지만 말이다.

과연 트럼프는 과거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 성공할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공하기 어렵다. 트럼프는 제국을 확장하고자 한 클린턴이나 부시 노선을 거부했다. 뒤늦게 수선하며 연착륙하고자 한 오바마 노선도 거부했다. 그나마 외관이 비슷한 것은 스티븐 월트류의 현실주의 노선이다. 이 현실주의 노선은 미국의 질서 있는 퇴각, 불가피할 경우의 매우 절제된 개입을 추구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월트와 달리 난폭한 질주를 하고 있다. 트럼프 노선을 현실주의로 오해하는 이들을 상대로 월트는 최근 저서 《선의의 지옥(Hell of Good Intention)》에서 트럼프 방식은 잘못된 문제 해결의 전형이라고 완전히 거리를 두고 있다. 트럼프는 그저 질서 이탈과 카오스의 노선을 걷고 있을 뿐이다.

최근 자이한은 미국 내 전반적인 비관주의 분위기의 흐름과 달리 미국이 세계로부터 철수하고 자족하는 국가로서 살아가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그려 주목받고 있다. 지리학적이나 인구학적 관점에서만 보면 자이한의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미국은 셰일 가스로 에너지를 자급하고, 이민으로 인구를 유지하는 영원한 청년기의 나라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놓친 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파국적으로 다가오는 기후 변화의 정도다. 그간의 자본주의와 지구 생태계의 평형이 깨지면 과연 과거 토크빌이 찬양한 고립주의적 미국이 가능할까? 트럼프의 고립주의 충동과 우주군 창설의 모순은 이러한 현실을 보여 준다. 트럼프의 미국은 부상하는 새로운 제국 중국과 혈전을 벌여야 하며 동시에 불필요한 확장으로부터 대거 철수해야 한다. 기후 변화를 거짓이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국방부를 통해 기후 변화가 야기하는 심각한 국가 안보 위기를 준비해야 한다. 트럼프의 혼돈과 모순은 미국이 처한 현실을 드러낸다. 그저 그때그때의 상황을 규정하는 기준은 미국 우선주의, 더 정확하게는 트럼프 우선주의일 뿐이다. 당분간 이 카오스에서 산뜻하게 탈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서구의 황혼을 노래한 슈펭글러의 계파에 속한 키신저(Henry Kissinger)는 2018년 7월 28일자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예리한 말을 남겼다. 마치 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연상시키는 이 짧은 단상은 오늘날 트럼프 시대를 가장 잘 요약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7]

“트럼프는 역사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그 시대의 낡은 가식(Pretences)을 포기하도록 몰아가는 인물 말이다. 트럼프가 꼭 이런 것을 이해하고 있거나, 다른 훌륭한 대안을 고려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사고(Accident)일 수도 있다.”
[1]
David Rothkopf, 《Running The World: The Inside Story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and the Architects of American Power》, 2005, p. 159에서 재인용.
[2]
안병진, 〈9.11의 시대, 월스트리트에서 종언을 고했다〉, 《프레시안》, 2011. 10. 13.
[3]
제2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2010년 7월 미국에 도입된 월가 개혁 법안이다. 법을 입안한 민주당의 크리스토퍼 도드 상원의원과 바니 프랭크 하원의원의 이름을 땄다. 골자는 세 가지다. 첫째 대마불사 금융회사 규제 강화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망하기엔 파급력이 너무 커 국민의 세금이 투입됐던 금융회사를 보다 엄격하게 감독하겠다는 취지다. 필요성을 주창한 폴 볼커 전 백악관 경제 회복 자문 위원장 이름을 붙여 ‘볼커 룰’이라고도 불린다. 은행의 헤지펀드 투자를 자본의 3퍼센트 이내로 규제하고 파생상품 거래도 제한됐다. 둘째는 중구난방이던 금융감독 체계를 효율적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14개 기관이 참여하는 ‘금융안정 감시위원회’가 새로 생겼다. 마지막은 독립 기구인 ‘소비자금융 보호국’을 세워 외면받았던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는 내용이다.
이새누리, 〈이번 주 경제 용어 – 도드 프랭크법〉, 《중앙일보》, 2017. 2. 14.
[4]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세뇌당한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콘돈이 1959년에 발표한 동명의 냉전 스릴러 소설을 원작으로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이 1962년에 발표한 영화의 제목이다. 한국 전쟁 당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납치당해 세뇌당한 군인이 미국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려 한다는 내용을 다룬다.
[5]
블랙 스완은 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 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다.
〈블랙 스완〉, 《두산 백과》.
[6]
Jack Nicas, 〈A Tiny Screw Shows Why iPhones Won’t Be ‘Assembled in U.S.A.’〉, 《The New York Times》, 2019. 1. 28.
[7]
Henry Kissinger, 〈Kissinger Takes Lunch With the FT〉, 《Financial Times》, 2018, 7. 20.
김진호, 〈트럼프의 ‘몬테네그로 때리기’ 뒤엔 서방과 러시아 ‘나토 갈등’〉, 《경향신문》, 2018. 7. 2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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