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당시의 경부 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나?
효율화를 지향하는 사고방식은 이미 우리에게 체화돼 있다. 누구나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 당장 내 삶만 봐도 그렇다. (웃음) 효율적으로 일하지 않으면 평가가 박해지니 말이다. 경부 고속도로만이 그 사례가 아니다. 오세훈 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계획도 결국은 ‘길’을 뚫겠다는 것인 만큼, 효율 증대를 따진 결과물이다. 속도에 대한 경쟁,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속도를 조절하는 건 개인의 몫이 됐다.
무엇이 우리를 달리게 하나
고속도로는 자동차가 달리는 곳이다. 자동차는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자동차로 인한 환경 문제는 단순히 배기가스의 문제만이 아니다. 자동차의 등장 자체가 환경에 큰 영향을 준다. 자동차가 달리려면 도로가 있어야 한다. 도로와 자동차는 지구에 더 많은 무게를 가한다. 토양이 지치기 쉽다. 도로 건설로 인해 쉬는 땅이 없어지는 것도 큰 문제다. 등산로를 생각하면 편하다. 등산로가 생기면 산을 오르기는 쉬워지겠지만, 그만큼의 땅은 못 쓰게 된다. 유휴 부지가 없어지는 것도 자동차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기차가 자동차의 대안으로 논의된다. 전기차는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있나?
걸리는 부분이 많다. 전기가 화석 연료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어떨까?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뿜지 않는다고 해도, 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배기가스가 나올 것이다. 그 연결 고리를 인정하지 않는 한에서만, 전기차는 완벽한 친환경적 대안으로 보인다. 배터리 문제도 있다. 모두 자원을 채굴해서 배터리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자원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원주민 공동체가 해체될 위험도 있다. 차량을 이용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안에서 인간이 최선을 다해 답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환경은 좁게는 생태와 기후에 관련된 문제로 한정할 수 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연결된 문제다. 인간이 쓰는 모든 자원은 어디에선가 온 것이고, 어딘가로 가야 한다.
현대 사회는 경부 고속도로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제도를 바꾸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우리 모두의 몫이기 때문이다. 효율을 추구하는 것과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살아가는 것, 그 둘 사이의 균형은 모두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물론 개인의 책임도 있겠으나, 지금의 가속은 사회가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 많은 아이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남들 다 하니까’라는 구조 아래에서 모두가 속도에 지쳐가는 듯하다.
더 나은 환경을 위한 제도의 전환은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까?
환경 문제 해결의 핵심은 기존의 권력과 삶의 형태를 전환하는 것에 있다. 물론 개인적인 활동도 큰 영향을 미친다. 제로 웨이스트 운동은 가장 효능감이 높은 기후 행동 중 하나다. 한국 사회가 할 것은 이런 종류의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도록 뒷받침하는 역할이다. 지금 한국의 환경 정책은 너무 무력하다. 유권자는 정책에 대해 좋고 싫음을 판단하지 않나. 그런데 환경 정책은 그 판단조차 가능치 않은 상황이다. 정치의 힘은 크다. 독일은 시민 사회의 요구에 따라 녹색당이 연정에 들어가 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녹색당을 향한 지지가 적을 뿐 아니라, 소수 정당은 표를 얻기 어렵다는 제도적 한계도 있다. 환경에 대한 담론도 그만큼 작을 수밖에 없다. 환경 담론은 다른 분야와 고립돼 있으면 안 된다. 미국의 IRA만 봐도 그렇다. 환경과 산업, 경제와 정치가 긴밀히 연결돼 있는데, 우리나라는 모두 분리돼 있다.
우리나라의 환경 문제에서 큰 쟁점 중 하나는 원전 문제다.
원전은 환경론자들 사이에서도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문제다. 찬성파는 원전을 통한 에너지 발전이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집중하고, 반대파는 원전이 진정한 탈탄소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시멘트 바르고, 차로 나르고, 우라늄을 가져오는 건설 과정부터 시작해, 원전은 언제나 무기가 되고 핵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의견 대립이 첨예한 상황에서 판단은 시민의 몫이다. 제20대 대선 당시에는 국민이 원전을 찬성하는 쪽에 손을 들어 줬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사회적 공론화는 전무한 상황이다. 모든 정부에게 중요한 건 에너지의 공급일 수 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 한국도 제조업 국가로서 그간 에너지의 공급 문제에 매우 집중해 왔다. 그러나 곧 닥칠 미래에는 원전의 폐기물 문제가 논란이 될 수 있다. 물론 핀란드에도 원전과 폐기물 처리소가 있다. 다만 이는 수십 년간 진행된 공론화의 결과물이었다.
환경 보호를 설득하는 법
“환경을 말하려면 뜨거운 마음을 조금 더 차갑게 식혀야 하는 시대”라고 언급했다. 효율화에 대응하는 냉정하고 차가운 설득 방법도 있을까?
환경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언제나 뜨거운 사람이었다. 막막한 감정이 들 때도 많았고, 데스크의 외면이나 다소 아쉬운 지시에 분노하고 슬퍼하며 기사를 쓴 적도 있다. 어느 날은 금융 분야도 기후 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증권 전문가를 만난 적 있다. 이분께 경제 산업으로 기후 이야기를 푸는 게 쉽지 않다며 하소연했다. 돌아온 답변은 “포기할 건 포기하세요”였다. 확신은 바꾸기 어렵다. 그래도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는 있다.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보다 제인 구달의 가슴을 울리는 스토리가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뜨겁게 분노하는 것만이 세상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과 상황에 맞는 설득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 답변을 듣고 조금은 실망했지만, 사실 ‘그 방법밖에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다. 명화에 으깬 감자를 던지던 ‘저스트 스톱 오일(Just Stop Oil)’의 시위 이후에, 오히려 미국 대학에서는 기후 위기 대응에 대한 공감도가 떨어졌다는 설문 결과가 있다. 기후 활동가에게는 뜨거운 마음이 있다. 그 뜨거운 마음을 잘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냉정한 전략가처럼 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논의와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하다. 기자로서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경험했을 것 같다.
동물권이나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의 출발선이 아예 다를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한번은 에너지 전환에 대해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했는데, 강의가 끝날 때쯤 한 분이 “재생 에너지가 뭐냐”며 질문한 적도 있었다. 설득할 때 상대가 어느 정도의 수용성을 가졌는지를 면밀히 살피면 좋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타인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건 타인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역사와 마음이 켜켜이 쌓여서다. 그 다름을 이해하고 먼저 받아들이면 설득 방법이 보인다.
기술은 환경을 구할 수 있나?
지금 개발되는 기술의 미래에 대한 판단은 2030년까지는 유보하려 한다. 왜 2030년이냐면, 탄소 예산이 그때쯤 끝나서다.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하나의 기술이 인권을 향하도록 사회가 유도하는 일이다. 그때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다. 소비자가 바뀌면 기업이 바뀌듯, 시민이 바뀌면 사회도 바뀐다. 시민은 언제나 제도와 정치적 결정에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대하는 기술은 무엇인가?
세상을 바꾸는 기술들에 기대를 걸고 있다. 자율주행이 노인을 위한 기술이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데 지금은 돈 많은 사람을 위한 기술이 되기 쉽다는 우려가 든다. 키오스크와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도 참 이상하다. 왜 인간이 기술을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할까. 기술이 인간을 향하는 게 옳은 방향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지구의 환경을 위한 기술을 포함해 약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기술에 관심을 쏟고 있다. 물론 이런 기술들을 어떠한 목적과 방향에서 사용할 것인지는 결국 사회의 몫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을 하나 꼽는다면?
환경 기사를 쓰면 쓸수록, 환경 문제가 삶의 속도의 문제라고 느낀다. 멈추지 못한다면, 이 속도를 조금 늦추는 삶을 살아 보는 건 어떨까. 모두가 일을 줄이는 삶이 가장 환경친화적인 삶일 테다. 지금 당장 도시를 떠나라는 게 아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속도를 늦춰도 된다는 시그널을 주고받자는 것이다. 빠르게 도로를 달리는 게 아니라 주변의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다면, 모두가 환경 문제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콘크리트 바깥의 길
미국의 작가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는 당시의 젊은이를 ‘완전히 지친(beat) 세대’라 명명한다.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라 불린 이들은 물질주의와 기성도덕에 반기를 들고 끝없이 펼쳐진 미국 서부의 흙길을 달렸다. 그들에게 길은 소진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이었다. 당시의 길에는 제시된 방향도, 꼭 마주쳐야 하는 목적지도 없었다. 그들은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길이 아닌 곳으로 걸었다. 케루악의 소설이 출간된 1957년과 비교하자면, 지금의 길은 비트 세대가 걸었던 그것보다 튼튼하고, 딱딱하며, 명확하다. 곳곳에 놓인 표지판과 화살표는 걸어야 할 방향부터 거닐 수 있는 폭까지 정확히 일러준다. 음성 내비게이션의 시대에 운전자가 신경 써야 하는 유일한 것은 숫자다. 목적지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 지금의 공간에서 허락되는 최대 속력과 같은 것들. 반세기 만에 길의 의미, 풍경, 그 위를 다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많은 것이 바뀐 셈이다.
고속도로는 그 목적을 향한 질주의 첨단에 자리한 발명품이다. 고속도로에서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임시적 공간으로 발명된 휴게소에서 보내는 잠시의 휴식, 또 하나는 사고로 인해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정지다. 그런 의미에서 고속도로는 이유 없이는 멈출 수 없는 길이다. 그 덕분에 고속도로는 기적이라 부르는 성장을 가능케 했다. 농촌과 도시가 연결되고, 사람들이 더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닿을 수 있게 되자 한국은 비로소 선진국이 됐다. 한정적으로 주어진 땅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층 빌딩과 아파트는 고속도로의 정신을 공유했다. 아름답지 않거나 효율적이지 않은 공간은 산 위나 저지대에 숨겨졌다. 하늘 높이 솟은 서울에는 1제곱킬로미터당 1만 5000명의 시민이 모였고, 저지대 강남의 반지하에 사는 시민들은 다가올 여름의 폭우를 걱정한다.
사는 모습만 바뀐 건 아니었다. 최우리 기자가 말하듯, “경험은 중요”하고 “시공간의 확장은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서울과 부산을 이은 콘크리트와 쭉 뻗은 도로가 가능케 한 효율의 삶은 50년 동안 사람들의 생각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경부 고속도로 건설 당시 청소년기를 보냈던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속도와 연결은 풍요와 동의어였다. 그 이후의 세대에게 고속도로적인 사고방식은 당연한 감각이 됐다. 청년들은 임시적 공간인 휴게소에 잠시 머물 듯 5평 남짓의 원룸에서 대학 시절을 보낸다. 교통사고처럼 불시에 찾아오는 감속과 정지는 극복할 수 없는 뒤처짐으로 번역된다. 이 과정에서 젊은 세대는 두 가지 길로 분화한다. 전자의 청년은 ‘번아웃 세대’로 명명되고, 후자의 청년은 소외된 은둔 청년으로 불린다.
경부 고속도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사고방식을 응축한 것이다. 성장과 효율이 유일한 선택지 마냥 주어진 탓에, 많은 이들은 그 바깥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길 위를 질주한다. 지금 경부 고속도로를 새로운 눈으로 보자는 것은 콘크리트 도로 바깥을 상상해 보자는 제안이다. 가드레일 바깥에서 떨고 있는 야생 동물과 콘크리트 아래 숨 쉬고 있을 흙, 콘크리트의 작은 크랙 사이에서 자라난 민들레 같은 것들 말이다. 가속화되는 기후 위기와 지속 불가능한 도시에 대응하기 위해 효율성과 성장의 문법, 그다음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의 서사가 필요하다. 최우리 기자는 모두가 잠시 속도를 낮추는 것으로도 새로운 길을 상상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닌, 제도가 개인의 선택을 뒷받침하고 도울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는 대중의 참여로 도시를 바꿔 보고자 했다. 그들이 택한 대안은 ‘오픈 소스 도시주의(open source urbanism)’였다. 오픈 소스 도시는 국가와 건축가가 설계한 완벽하고 딱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프리슈티나가 택한 건 절대 바꿀 필요가 없는 완벽한 도시가 아닌, 언제나 더 나은 결과를 향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였다. 프리슈티나에는 두꺼운 콘크리트 대신 노란색 페인트가 놓였다. 이동식 가구는 그때 그곳을 지나는 시민의 필요에 따라 때로는 벤치가, 때로는 울타리가 됐다. 사람들은 도시 전체를 이동하며 풍경을 바꿨다. 프리슈티나의 모습은 항상 달랐다. 그래서 도시의 생김새만 봐도, 그곳을 지나친 시민을 그려 볼 수 있다. 콘크리트는 담지 못하는 우연한 만남이다.
지친 세대가 머물렀던 1960년대의 흙길처럼, 현대 사회에게도 콘크리트 바깥의 길이 필요한 건 아닐까? 왜 2020년대의 모두는 길을 달리기만 할 뿐, 길 근처에 머물지 못할까. 이 시대를 위로할 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길 위에 놓인 모두가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글 김혜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