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
강제력이 없는 법안이 통과되면 차별금지법의 효용이 없거나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나?
법 자체에는 강제력이 없더라도 차별금지법에 근거한 판단이 내려지면, 이를 근거로 민사 소송이나 행정 소송 등을 제기할 수 있다. 직접적인 강제력은 없지만,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또한 법적 강제력이 없다고 해서 무력한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기업에서 차별 사건이 발생하면 차별금지법에 따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다. 국가 기구인 인권위가 차별이라고 인정하면 기업에 시정 권고를 한다. 강제력이 없다는 것은 기업이 이 시정 권고대로 집행할 법적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국가 기구가 엄정한 조사를 거쳐 차별이라고 판단을 내렸는데, 기업이 이를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럴 것이다. 강제력이 없더라도 사회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차별금지법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이미 남녀고용평등법이나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의 법안은 존재한다. 법학자의 시선에서, 그럼에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우선 지금 논의하는 차별금지법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말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금지하는 법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놓이는 일반법으로서, 일종의 우산 역할을 한다. 일반법도 필요하고, 구체적인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법도 필요하다.
개별 입법을 정말 촘촘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네 개 영역에서 20여 개의 사유로 발생하는 차별을 규율한다. 개별 영역과 사유에 따라 각각 개별법을 만든다면 산술적으로 80개 이상의 법률이 필요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두고, 개별 사유와 영역에서 특별히 규율이 필요한 경우 개별적인 차별금지법을 두어 보완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즉,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개별적 차별금지법은 둘 다 필요한 법이다.
최근 용혜인 의원과 정의당은 기존 혼인 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을 꾸릴 수 있게 하는 ‘생활동반자법’을 발의하기도 했다.[2]
생활동반자법에도 차별 금지의 이념이 담겨 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이 있더라도 생활동반자법의 내용을 포괄하진 못한다. 생활 동반자에 관련한 법제는 고유한 세부 내용이 있어 별도의 법제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차별금지법의 이념에 따라 개별 법률이 더 필요할 수 있다.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 심각하게 본 차별 사례가 있는지 궁금하다.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일부 금융 기관과 공공 기관 채용 과정에서 드러난 성차별 사건이 충격적이었다. 고위 임원들이 직접 관여해서 여성 지원자의 점수를 일률적으로 감점한 사건이었다. 교묘하게 한 것도 아니고, 증거를 은닉한 것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벌인 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관련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금융·공공 기관의 임원이라면 한국의 엘리트 집단 아닌가. 그들의 ‘차별’에 대한 인식이 겨우 이 정도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가 크게 발전해 왔지만, 차별에 관한 한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정도는 경영진의 자유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노키즈존 논란도 떠오른다. 사업장에서 손님을 막는 것은 운영자 개인의 권리라는 주장은 어떻게 보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
그린 북(Green Book)〉(2018)에는 흑인이 들어갈 수 없는 음식점과 호텔이 나온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조차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제지당하는 것을 보며 다들 분노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차별이 벌어지는 곳은 공공 기관이 아니다. 사업자가 사적으로 운영하는 곳들이다. 개인 사업장이라고 해서 운영자 마음대로 차별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화를 보며 공감했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그런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분야에 따라 손님을 구분해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가능하다. 하지만 합리적 이유 없이 자의적으로 특정 연령이나 성별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해선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노키즈존이 합당한 이유로 운영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거의 동일한 형태의 영업을 하는 두 카페가 있다. 한쪽은 아이를 받으면 영업에 중대한 방해가 된다며 노키즈존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쪽은 노키즈존이 아닌데도 문제없이 영업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가 영업에 중대한 방해가 된다는 것’이 합당한 이유라고 볼 수 있을까? 손님 입장에서는 어느 카페가 노키즈존으로 운영되는지 짐작할 수 없고, 왜 그런 방침을 두는지 알기도 어렵다. 그래서 매번 카페에 방문할 때마다 노키즈존 팻말이 붙어 있는지 살펴야 하고, 예약할 때는 아이를 받아 주는지 확인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때에 따라 모욕적이고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장이 공공시설인지 개인 사업장인지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공공 기관이건 사적 기관이건 다 똑같이 부당하게 느껴질 것이다.
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냉정하게 보아, 차별금지법이 이번 국회 회기 내에 통과될 가능성이 있을까?
현실적으로 보아 쉽지는 않다. 정치 일정상 2024년에는 총선이 있다. 선거 국면으로 접어들면 차별금지법 통과는 뒷순위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총선 다음엔 지방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2021~2022년에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현실적으로는 그렇지만,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지 않나. 계기가 생긴다면, 적극적인 의지만 있다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실제로 역사를 더듬어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계기를 만나 극적으로 법안이 통과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입법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민주당이나 정의당 등에는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에 등장하는 의원들이 충분히 많다.
일본은 G7을 앞두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논의했다. 현재 다른 선진국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차별금지법을 입법할 것인지는 이미 논점이 아니다. 주요 국가들에는 이미 차별금지법이 제정돼 있다. 요즘은 ‘법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주로 논의된다. 가령 양육 분담에 있어, 형식적으로는 성차별이 철폐됐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여성에게 더 많은 부담이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적극적인 차별 상황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이 차별받게 되고 각종 정치, 사회 영역에서 과소 대표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미국·유럽에서는 비백인들이 백인 남성 주류 문화에서 소외되며 승진 등에서 사실상 불이익을 겪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미세 차별(microaggression)’ 문제가 대두되기도 한다. 명시적이고 직접적인 차별은 아니지만, 당사자의 고통과 불이익은 상당하다. 기존 법리로 포착해 내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한국 정도의 국가라면 이런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차별을 대상으로 하는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움을 넘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별금지법이 있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 성숙한 인권 국가가 될 것이다. 인권 문제는 나라가 발전함에 따라 진화한다. 과거에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국가였다. 고문이나 강제 구금, 표현의 자유나 정치적 참여를 제한하는 식으로.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그다음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나는 평등과 차별 금지를 꼽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전시켜 왔던 인권과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차별금지법은 한국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의 시금석이다.
차별금지법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건 차별받지 않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고, 국가가 이것을 보장해 주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도 있고, 회사에 취업할 수도, 모임에 참여하고 정치를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 참여 과정에서 불이익이나 어려움을 겪는다. 장애가 있어서, 성적 지향 때문에, 인종이 다르거나 여성이어서, 혹은 나이가 많아서 참여를 주저하게 되거나 실질적으로 불이익을 겪는다면, 사회 참여 권리가 제약되는 것이다. 사회에 참여할 권리가 제약된다면 다른 모든 종류의 권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건 간에, 지위가 무엇이건 간에 그 사회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차별금지법의 당사자는 사회 전체다. 대중의 역할을 어떻게 보는가?
차별금지법은 그 자체로 최종 목표가 아니다. 실제로 차별은 법률 하나로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사회와 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하나의 계기를 제공할 뿐이다. 차별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인식과 행동에 달려 있다.
법이 할 수 있는 일
법의 역할을 진지하게 논하는 것은 법철학의 영역이지만, 누구나 때때로 법에 대해 생각한다. 금연 구역에서 담배 피우다가 범칙금 10만 원을 낼 때, 업무와 관련하여 바뀐 법을 공부해야만 할 때,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으로 인해 3만 원이 넘어가는 식사를 할 수 없을 때 법은 직접적으로 내 생활 안에 들어온다. 뉴스 보며 분노할 때와는 다른 차원으로 법이 피부에 와 닿는다.
우리 행동에 한계를 규정하는 법은, 그래서 무언가를 금지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오해받기 쉽다. 차별금지법에서 ‘금지’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 발생하는 오해는 이런 종류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거나, 많은 기업이 처벌받아 경제가 무너질 거라는 오해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반대 진영의 인터뷰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은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모두가 잘 알면서, 동시에 모두가 잘 모르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금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복잡한 논의를 품고 있다. 21대 국회 들어 가장 먼저 발의된 장혜영 의원의 차별금지법안은 차별의 이유로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용모 등 신체 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學歷), 고용 형태, 병력 또는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등’을 든다. 이러한 기준은 충분한가. 부당한 차별 행동은 무엇이고 차별을 없애는 데 법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질문이 이어진다.
그 질문의 끝에서 나왔던 물음은 ‘차별금지법의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가?’였다. 홍성수 교수는 “확신”이라고 답했다. 차별금지법은 “당신이 어떤 속성을 가졌건, 지위가 무엇이건 간에 사회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무언가를 금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부당한 이유로 차별받던 사람에게 더욱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선사한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정치 현장에서 말하지 못하고 주저했던 누군가가 말할 수 있게 될 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더 다양한 목소리를 담으며 한 발 나아갈 수 있다.
개인은 각자의 개성과 인격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에게 내재한 개별성만으로 한 사람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독일 출신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에서 개인의 ‘누구임’은 자신의 내재적인 특성을 넘어 그가 사회에 참여할 때 드러난다고 말한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공적 공간에서 말과 행위를 통해 활동할 때 진정으로 한 인간은 그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전제는 공적 영역이 그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온 사람들은 20년 가까이, 그러니까 한 사람이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할 시간 동안 이것을 외쳐 왔다. 이 주장에 도장을 찍어 기어코 공식화할 주체는 입법자로서 기능 부전에 빠져 있는 국회다. 너무 오래 끌어온 싸움의 끝을, 이제는 봐야 한다.
글
백승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