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과 바람, 그리고 비가 그치지 않았죠.” 당시 영국 남극조사단(BAS)의 단장이었던 스티븐 마틴(Stephen Martin)은 말했다. 살기에 열악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이 섬에는 1965년에 그리트비켄(Grytviken)에 있던 마지막 고래 어업 기지가 폐쇄된 이후로 정주 인구가 없었다. 다만 영국 남극조사단은 지금도 리스 항(Leith Harbour)과 그리트비켄에 여름 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사우스조지아는 항해자이자 탐험가인 제임스 쿡(James Cook)이 1775년에 점령한 이후로 명목상 영국령이었다. ‘SIQQ 1XX’라는 영국식 우편번호 체계도 갖고 있다. 반면에 아르헨티나는 1927년에 처음으로 이 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며,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반복했다.
1981년 12월에 다비도프가 이 섬에 상륙하자 영국의 외무・영연방부(FCO)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비도프는 영국 회사 크리스천살베센(Christian Salvesen)과 계약을 맺고 사우스조지아의 오래된 포경 기지 가운데 하나에서 고철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그는 그리트비켄의 남극조사단에 그 사실을 고지해야 했는데, 그 의무 조항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영국 측은 문제를 제기했고, 다비도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국 대사관에 개인적으로 사과하며 이듬해 3월에 다시 이 섬에 돌아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다비도프는 이내 아르헨티나 정부의 끄나풀이 되고 만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대통령이었던 레오폴도 갈티에리(Leopoldo Galtieri) 장군에게 반대하는 분위기가 점점 더 고조되었다. 갈티에리 대통령의 군사 독재 정권은 혼란에 빠져 있었고, 아르헨티나 경제는 비틀거렸다. 인플레이션은 무려 600퍼센트에 달했던 반면, 실질 임금은 20퍼센트 하락했다. 대중들의 인내심이 점차 바닥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수천 명의 정치적 반대자를 살해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투옥 시키는 억압적인 정권하의 ‘더러운 전쟁(dirty war)’ 과정에서 이미 고통받고 있었다. 노동조합들은 총파업을 외치고 있었다.
갈티에리는 낙담한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독재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확실한 기법에 의지하기로 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여전히 목격할 수 있는 방식이며, 2022년에는 유럽의 동쪽 변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국가주의 정서에 호소한 것이다. 전쟁을 개시할 시간이었다. 그는 이 전쟁에서 패배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 해안에서 950마일(약 1500킬로미터) 떨어진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는 걸 목표 삼았다. 아르헨티나에서 그곳은 말비나스(Malvinas)로 알려진, 아르헨티나가 오랫동안 소유권을 주장해 온 곳이었다. 그는 영국이 이 전투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오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두 나라 사이에서 포클랜드 제도의 주권에 대한 논의가 다소 잠잠해지긴 했지만, 이것이 갈티에리의 추정처럼 영국이 그곳에 관심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영국이 그곳의 주권에 대해 논의하지 않은 이유는, 영국은 그 섬들을 양도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갈티에리는 영국이 런던에서 거의 8000마일(약 1만 3000킬로미터)이나 떨어진 이 섬들을 되찾으려 애쓰지 않을 것이라는 데 베팅했다.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들고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영국이 최근에 포클랜드 제도의 군사력을 줄였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갈티에리는 만약 포클랜드 제도의 수도인 포트스탠리(Port Stanley)에 아르헨티나 국기가 휘날린다면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10년 혹은 그 이상 집권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포클랜드 전쟁 40주년이 다가옴[1]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침공과 이후 그 제도를 되찾기 위한 영국 해군 특수 부대의 파병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중에서도 구스그린(Goose Green) 전투와 산카를로스(San Carlos) 전투, 포트스탠리 비행장 폭격, 아르헨티나의 순양함 제너럴벨그라노(General Belgrano)와 영국 해군의 구축함 셰필드(Sheffield)의 침몰 등이 자세히 회자될 것이다.
2. 40년 전, 포클랜드 전쟁의 시작
포클랜드 침공의 전주는 그곳에서 동쪽으로 800마일 떨어진 곳에서 이미 연주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 다비도프는 자신이 그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다비도프에게 후안 롬바르도(Juan Lombardo) 제독의 측근인 에드가르도 오테로(Edgardo Otero) 제독과 대통령의 해군 참모인 호르헤 아나야(Jorge Anaya)가 찾아왔다. 롬바르도 제독은 갈티에리로부터 포클랜드 침공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오테로 제독은 사우스조지아를 합병하여 영국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했다. 주력 침공 부대에게서 그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다비도프는 이미 정해진 자신의 운명이 못마땅했다. 그는 영국 측과 비즈니스 계약을 맺은 상태였고, 그걸로 돈을 벌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계획대로라면 다비도프는 자신의 생계 수단을 잃을 것이고, 일부 시선에서는 그가 의도치 않게 전쟁을 도발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몇 년 뒤,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제 비행기, 선박, 회사 등 모든 걸 잃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병을 얻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듬해 3월, 다비도프는 바히아부엔수체소(Bahia Buen Suceso) 호에 승선하여 다시 사우스조지아로 향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선원들이 탑승해 있었는데, 그들은 민간 과학자로 위장한 아르헨티나 해병대 비밀 요원들이었다. 그들의 임무에는 ‘알파 작전(Operation Alpha)’이라는 암호명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남대서양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다피도프는 이번엔 일부러 영국 남극조사단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3월 19일에 그가 리스 항에 상륙하는 장면이 남극조사단원 한 명에게 목격되었고, 그는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리스 항에 군복을 입은 남성들이 있고, 공중에 소총이 연달아 발사되었으며, 아르헨티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상륙한 대원들은 리스의 조사단 기지에 침입하여 영국 표지판을 훼손하고 비상식량을 훔쳐 갔다.
영국 외무부는 그들에게 깃발 제거를 요구하고, 다비도프는 물론이고 바히아부엔수체소의 선장과 선원들에게 그리트비켄의 스티븐 마틴에게 상륙 사실을 신고하라고 알렸다. 브리아토레(Briatore) 선장은 자신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국 대사관에서 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영국 외무・영연방부는 이를 부인했다. “아마도 슬쩍 찔러봤던 것 같습니다.” 스티브 마틴의 말이다. 브리아토레 선장은 알프레도 아스티즈(Alfredo Astiz) 소령의 지휘하에 해병대원들을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다. 아스티즈 소령은 ‘죽음의 금발 천사(Blond Angel of Death)’라고 불렸는데, 더러운 전쟁 기간에 유럽 시민권자들이 사라진 것 때문에 다수의 나라에서 이미 수배가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3월 21일, 아르헨티나 병력을 축출하기 위해 포클랜드 제도에서 닉 바커(Nick Barker) 선장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의 인듀어런스호가 출동했다. 여기에는 22세의 키스 밀스(Keith Mills) 중위가 이끄는 22명의 영국 해병대원들과 두 대의 헬리콥터가 승선해 있었다. 포클랜드 제도로부터 영국의 방어 병력을 끌어내려는 아르헨티나 측의 교란 전술이 먹혀드는 것처럼 보였다. 인듀어런스호는 이틀 뒤에 리스 항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또 한 척의 아르헨티나 군함을 발견했다. 세자르 트롬베타(Cesar Trombetta)가 지휘하는 바히아파라이소(Bahia Paraiso)라는 그 배는 더욱 많은 해병대원들을 상륙시키고 보급품을 내렸으며, 두 대의 헬리콥터가 실려 있었다.
바커 선장은 아르헨티나 해군이 무엇을 시도하려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인듀어런스는 그전까지 남대서양에서 몇 년을 보내며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여러 항구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했다. 칠레의 해군 장교들은 포클랜드 제도와 관련한 아르헨티나의 계획을 그에게 종종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실제로 불과 몇 달 전에 아르헨티나 해군의 고위 장교 한 명이 그에게 직접 그런 사실을 시인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말을 들었다. “말비나스를 둘러싼 전쟁이 있을 겁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만간입니다.” 그는 이런 모든 사실을 런던에 보고했지만,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저는 심지어 트롬베타를 직접 만나서 상황을 진정시켜보겠다는 제안까지 했지만, 당국은 우리에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다. 그럼에도 영국은 여전히 교전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인듀어런스는 감시 체제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영국의 외무장관 캐링턴 남작(Lord Carrington)은 아르헨티나의 니카노르 코스타 멘데즈(Nicanor Costa Mendez) 외무장관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섬에 상륙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그곳에 일시적으로 체류할 수 있도록 그리트비켄에서 그들의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멘데즈 장관은 그 섬들의 소유권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주장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국 측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의 반응은 분쟁이 불가피함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국 해병대는 리스 항 위쪽에 감시 초소를 구축했지만, 여전히 아르헨티나 측을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병력은 영국의 그런 움직임을 간파했는데, 영국 측이 위치한 지점의 상공을 날아가며 ‘오래된 무례한 제스처’를 보여준 후 다시 바히아파라이소로 되돌아갔다. 그런 다음 바히아파라이소는 남대서양으로 향했다. 인듀어런스는 그들을 따라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우스조지아로부터 영국 측을 떨어트려 놓으려는 계략이었다. 영민하지만 허를 찔린 바커 선장은 이제 그것이 모두 교란 전술이라고 확신했다. 훗날 그는 그것을 두고 “우리를 골탕 먹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포클랜드 침공이 임박했음을 감지했다. 영국의 해군 본부가 이번에는 그에게 적절한 통지를 하달했다. 그가 데리고 있는 해병대원들을 사우스조지아에 내려놓고 포클랜드제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우리는 결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사우스조지아와 포클랜드 사이에 붙들려서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바커의 회상이다. “저는 흥분됐습니다. 전쟁이 다가오는 걸 보았습니다.”
영국의 해병대원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서둘러서 그리트비켄의 남극조사단 기지로 향했다. 런던에서는 그들에게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대하여 최소한의 저항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하여 밀스는 분명하진 않지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젠장,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해 주겠습니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선박인 게리코(Guerrico)라는 구축함은 더욱 많은 헬리콥터와 거의 100명에 가까운 추가적인 해병대원들을 싣고 사우스조지아에 도착했다. 게리코와 바히아파라이소는 모두 그리트비켄으로 향했는데, 이곳에서는 영국 해병대원들이 참호를 파고 섀클턴하우스(Shackleton House)의 남극조사단 기지에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 해병대원 세 명은 야생 동물 사진작가인 신디 벅스턴(Cindy Buxton)과 애니 프라이스(Annie Price)를 보호하기 위해 세인트앤드류스베이(St Andrews Bay)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사람이라곤 거의 마주치기도 힘든 이 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이 국제적인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닷새들의 사진을 찍으러 갔던 것인데, 나중에는 해군에 배속하게 되었습니다.” 프라이스의 말이다.
3.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 개시, 그리고 전쟁
그의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엔 스티븐 마틴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인듀어런스가 포클랜드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그리트비켄의 영국 해병대원들은 라디오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같은 날, 아스티즈와 트롬베타는 부하들에게 헤오르히아스 작전(Operation Georgias)을 개시할 것이라고 알렸는데, 이는 그리트비켄에 대한 공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상 악화로 인하여 아스티즈의 공격은 24시간 동안 지연되었다. “경고를 한 뒤에 자위적인 사격”만 하고 “불필요한 인명을 잃을 수도 있는 수준 이상으로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여전히 따르고 있던 밀스는 부하들에게 방파제 아래에 철조망과 지뢰, 그리고 45갤런의 드럼통에 휘발유와 페인트를 채워서 급조한 폭탄 등을 설치해서 그리트비켄 해변의 방어선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남극조사단의 마틴 단장 역시 밀스에게 부대원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