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오전 10시 30분, 아르헨티나 군대가 도착했다. 일부 보고에 의하면 트롬베타는 그리트비켄을 영국 해군이 아닌 남극조사단 요원들만 지키고 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는 포클랜드 제도의 총독인 렉스 헌트(Rex Hunt)가 항복했으며 사우스조지아는 이미 아르헨티나에게 양도되었다고 선언하고, 영국인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밀스는 인듀어런스로부터 이것이 거짓임을 전해 들었다. 포클랜드 정부가 항복한 것은 맞지만 사우스조지아의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한 시간 뒤에 밀스를 비롯한 부대원들이 방파제에서 아르헨티나 측 대표단이 도착할 거라고 예상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아르헨티나의 헬리콥터 한 대가 섀클턴하우스 근처에 착륙했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르헨티나의 해병대원들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려서 몸을 숨겼다. “솔직히 말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우리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습니다.” 당시 일병이었던 조지 톰슨(George Thomsen)의 말이다. “우리는 X같은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상당히 압도적이었고, 저는 만약 우리가 그들 중 하나라도 죽이면 그들이 복수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 해병대원들은 끈질기게 저항했고, 아르헨티나 측의 추가 병력을 실은 또 다른 헬리콥터가 섀클턴하우스의 반대편에 도착했다. 그들은 서둘러 파낸 참호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영국의 기관총이 단 한 차례의 사격으로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헬기에 손상을 가했다. 그것이 첫 번째 교전이었다. 뒤이어서 영국의 총알이 빗발쳤다. 엔진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조종사는 헬기를 다시 띄워서 해변의 만을 가로질러 날았지만, 군함에 무사히 착륙하기 전에 추락하여 나뒹굴고 말았다. 두 명이 사망했고 네 명이 중상을 입었다. “덕분에 우리는 예상보다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톰슨의 회상이다.
아르헨티나의 첫 번째 파견대원들은 그렇게 병력 보충 없이 영국의 사격에 의해 별관에 갇혀버렸다. 그들의 지휘관은 게리코호에게 엄호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게리코호는 그리트비켄 해변 인근의 후미로 접근하면서 사격을 개시했지만 총구가 막혀버렸고, 배는 비좁은 길목에 꼼짝달싹 못하고 갇히게 되었다. “그 배는 아주 천천히 들어왔습니다.” 해병대원이었던 스티브 처브(Steve Chubb)의 말이다. “거대해 보였고, 배의 총구가 회전해서 우리가 있는 곳을 가리켰을 때 그게 곧바로 저를 겨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완전 무방비 상태였죠.” 영국군은 대전차 로켓을 발사하며 대응했다. 밀스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했다고 말한다. 해병대원 데이비드 콤스(David Combes)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그의 대전차 무기에서 발사된 탄환이 물 위를 스치며 날아가더니 수면 위에 떠 있는 게리코호에 명중한 것이다.
그걸로 아르헨티나 선원 한 명이 사망하고 배의 무기도 손상되었다. 배에 물이 들어차고 선체가 30도로 기울자 그 코르벳함은 퇴각했다. 사실상 거의 무장을 하지 않은 영국군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전과였다. 그러나 영국군에게는 불행하게도, 퇴각한 게리코호는 여전히 손상되지 않은 장거리포를 이용해 영국군 근거지를 타격할 수 있었다.
양측은 두 시간 동안 격렬한 포격을 주고받았다. 밀스는 밤이 될 때까지 버티다가 섬을 가로질러서 북쪽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게릴라 전술로 싸우면서 침략군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 중 한 명인 나이절 피터스(Nigel Peters) 상병이 아르헨티나의 총탄에 두 번이나 맞았다. 더욱 많은 아르헨티나 해병이 상륙하고 게리코의 포격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밀스는 부하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미 아르헨티나가 무력을 사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그들이 국제법을 위반하게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한 상태였다.
오후 12시 48분, 계속해서 싸우고 싶어 하는 피터 리치(Peter Leach) 하사와 톰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스는 흰색 코트를 들어서 흔들며 아르헨티나의 공격대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름의 휴전을 제안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교전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처음에 무척 화가 났습니다.” 톰슨의 말이다. “저는 절대로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키스(밀스 중위)가 체면을 잃지 않고도 그걸 상당히 잘 처리해냈고, 그는 매우 용감했습니다.”
22명의 영국 해병대원들이 앞으로 나서는 걸 본 아스티즈는 나머지 대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렇게 적은 인원으로 그토록 완강한 방어벽을 구축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아르헨티나 측은 자국 사망자들을 수습했고, 영국군은 남극조사단원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두 명의 야생 동물 사진작가와 아르헨티나에 의해 발견되지 않은 13명의 남극조사단 과학자들은 여전히 본연의 업무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이 섬을 탈환했을 때에야 비로소 대피할 수 있었는데, 그제야 프라이스는 해병대가 그녀에게 사용법을 알려주었던 권총을 꺼내놓았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그걸 사용할 수 있는 배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조지아는 모두 아르헨티나가 점령하게 되었다.
4. 제국의 반격과 국제 사회의 반응
이 분쟁의 최종적인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은 갈티에리가 바라던 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는 포클랜드 제도의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군홧발’ 아래에 살게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내에서 정치권과 대중으로부터 상당히 합치된 지지를 얻으면서, 침공이 있은 지 불과 사흘 만인 4월 5일에 영국 해군의 특수 부대가 남대서양으로 향했고, 영국군 255명과 아르헨티나 병력 649명이 목숨을 잃은 뒤인 7월 14일,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했다. 그보다 50일 전인 4월 25일, 사우스조지아 섬도 패러캣 작전(Operation Paraquet)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155명의 아르헨티나 병사를 생포하고 한 명을 살상했다. 이러한 작전에서 공표된 많은 발언이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수부대 사령관이었던 브라이언 영(Brian Young) 대령이 해군 본부에 보낸 무전 메시지가 아주 유명하다. “여왕 폐하에게 사우스조지아에서 유니언잭 옆에 화이트엔슨(White Ensign)
[2]이 나란히 휘날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미국의 《뉴스위크(Newsweek)》 매거진은 이를 두고 “제국이 반격하다”라고, 그리고 덜 관대한 《보스턴글로브》는 “식민주의의 마지막 숨결”이라고 썼다.
이것이 공정한 평가였는지, 또는 더욱 위대한 원칙이 위기에 처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자결권(self-determination)은 1945년에 제정된 유엔 헌장의 1조에 명시되어 있는 권리이며, 영국은 포클랜드 주민들을 대신해 아르헨티나의 침공이 이 원칙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유엔에 의해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특히 영국 정부가 여전히 외교적 논의에 돌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뒤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은 그러한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아르헨티나 정권은 침공 초기에 자국에서 얻은 엄청난 대중적 지지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소수의 남아메리카 국가들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군사 독재 정권이 자주 민주 국가의 취약한 전초 기지를 침공하는 것을 지지할 나라들은 거의 없었다. 유엔은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4월 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아르헨티나 군대의 철수와 적대 행위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안 502호를 통과시켰다.
소비에트연방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가지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나토 회원국인 영국과, 우파 독재 국가인 아르헨티나 모두를 적대 국가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의 일원이었던 영국은 EC 회원국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영국 국방부 장관이었던 존 노트(John Nott)는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대통령에게 프랑스가 “우리의 가장 위대한 동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당시와 같은 분쟁이 오늘날 발생한다면 브렉시트로 인해 이런 주장이 얼마나 많이 달라질지는 상상에 맡길 뿐이다.
유럽공동체와 달리 미국은 침공이 있기 전에는 관련 사안에 대해 표면적으로 중립을 취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 갈티에리 정권에 대해 제재를 가했고, 그러면서도 그러한 결정이 나토나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해치지 않기를 바랐다. 미국 행정부는 이 분쟁에 대해 다소 당혹스러워했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왜 미국의 두 우방이 “저 아래쪽의 얼음처럼 차가운 조그만 땅덩어리”를 갖고 다투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의 추가 개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약에 미국이 영국을 도와준다면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의 사안에 대해 유럽이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미국의 먼로독트린(Monroe Doctrine)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건과 그의 국방 장관이었던 캐스퍼 와인버거(Caspar Weinberger)는 나중에 영국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고, 이는 오히려 그들이 공개적인 선언 이상으로 영국을 도와줬다는 외교계의 믿음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남미 국가들 가운데 일부는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군사적으로 지원한 나라는 페루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쿠바와 볼리비아에서 지원받은 것이었지만 말이다. 반면 칠레는 전적으로 영국을 지지했는데, 이는 아르헨티나와의 오랜 군사적 갈등은 물론이고 포클랜드에서의 승리가 확정되면 비글해협(Beagle Channel)의 섬들까지 합병하겠다는 아르헨티나의 위협 때문이었다. 마거릿 대처가 영국에 도움을 제공한 칠레를 칭송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그녀는 칠레의 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와 결탁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피노체트 역시 정치적 반대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것에 있어서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피노체트가 그의 나라에서 저지른 인권 위반 혐의로 16년 뒤에 영국에서 스페인 판사가 발부한 영장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영국 정부는 그를 석방해도 된다고 보았다. 그것이 1982년의 협조에 대한 보상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국제 사회의 일부는 그렇다고 여겼다.
5. 사우스조지아 전투가 영국 대원들에게 남긴 유산
이 분쟁의 국제적인 영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잡음을 울리고 있다. 그렇다면 사우스조지아의 전투로 인한 좀 더 소소하면서도 개인적인 유산은 무엇일까?
포로로 붙잡혔던 영국 해병대원들은 생포된 뒤에 사려 깊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두 집단 사이의 상호 존중이 더욱 커졌다고 보고했다. “저는 실제로 그들이 우리가 겨우 22명뿐인 걸 발견하고는 우리를 두려워했다고 생각합니다.” 톰슨의 말이다. 또 다른 영국 병사였던 앤드류 리(Andrew Lee)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우리에게 악의를 품지 않았다.” 그들의 전우 세 명이 영국 수비군에게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맡은 임무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해병대원들이었다.” 부상을 당했던 피터스는 아르헨티나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았고, 영국 해병대원들을 비롯한 다른 수감자들은 실제로 포클랜드 전쟁이 종식되기 이전에 우루과이를 통해서 영국으로 송환되었다. 참고로 이는 밀스가 제안한 항복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었는지는 몰라도, 밀스와 그의 부대원들은 아스티즈를 비롯한 아르헨티나의 전쟁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4월 25일 탈환 이후에 사우스조지아로 돌아오게 된다.
리의 동료이자 아르헨티나 헬기를 격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이클 풀(Michael Poole)은 이후에 화해를 추진했다. 지금부터 10년 전, 그는 전쟁 당시에 그와 맞서 싸웠던 빅토르 이바네즈(Víctor Ibanez)와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들은 든든한 친구가 되었다. 2013년에 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각자가 맡았던 역할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밀스는 수훈십자훈장(DSC)을 받았고, 영국 해군 인듀어런스호의 헬리콥터 지휘관인 존 엘러벡(John Ellerbeck)도 마찬가지였다. 밀스의 부하였던 리치 하사는 공로훈장(DSM)을 받았다. 바커는 훈작(CBE) 작위를 받았다. 아르헨티나 측에서는 프란시스코 솔라노 파에즈(Francisco Solano Paez) 하사가 국가의 전투용맹(Valor en Combate) 훈장을 수상했다.
그렇다면 이 침공의 의도치 않은 설계자였던 다비도프는 어땠을까? 그는 자신이 영국 정부와 체결한 계약이 결코 이행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훗날 그는 자신이 사우스조지아로 돌아갈 때는 노동자들만 동행했으며 군인들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근거는 그렇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계약의 이행을 허용하지 않는 영국 정부를 상대로 벌이는 송사에서 보탬이 되기 위한 수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고, 아르헨티나 정부도 그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민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해병대를 보낸 영국을 비난했다. “저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음모에 휘말린 다비도프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습니다.” 밀스가 BBC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나쁘게 보아도 그냥 거짓말 정도였고, 기껏해야 자기기만이었습니다. 정작 나쁜 건 영국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점령이었습니다.”
사우스조지아는 1985년에 포클랜드 제도의 관리로부터 벗어나서 현재는 사우스조지아 및 사우스샌드위치 제도(South Sandwich Islands)라는 영국 해외자치령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포클랜드 제도와 마찬가지로 사우스조지아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소유권 주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헌법에도 조항으로 명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