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하에서 도시민과 시민이라는 개념을 의식적으로 구분해서 사용하겠다. 시민 혹은 공민(公民) 개념에서는 국민 국가의 시티즌십(citizenship)을 전제로 한 국민에 초점이 놓이지만, 도시민은 그와 같은 국적 혹은 주권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도시민은 르페브르식으로 말하자면 도시에 깃들어 ‘거주한다는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도시민의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제도 정치가 주장하는 도시 의제(예컨대 2016 유엔-해비타트 Ⅲ의 도시 의제[1])나 ‘주거권’에 만족하지 않는 일이다.
크로이츠베르크, 변방에서 중심으로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는 1970년대 이래 도시에 대한 권리 투쟁의 아성이다. 1980년대 주택 점거 투쟁의 본산이었던 이곳은 2000년대 들어 베를린 세입자 투쟁의 중심이 됐다. 특히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다수의 임대 주택이 (고급) 자가 주택으로 변모하면서, 크로이츠베르크는 주택 사회화 주장이 그 어느 곳보다 높은 곳이 됐다. 도시민 투쟁의 중심으로서 크로이츠베르크라는 위상은 20세기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맞닥뜨려야 했던 역사적 경험과도 연결된다.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도시 한 가운데를 관통하면서 도시는 큰 변화를 겪는다. 그곳은 졸지에 분단이 만든 변방이 됐다. 동독 당국은 동독인들이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장벽 앞 ‘중심지’들, 특히 프리드리히스하인 지역의 낡은 집들을 빈집으로 방치했다. 이들 빈집은 통일 직후 점거의 대상이 됐다. 갑작스러운 통일로 인해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자, 몇 달 사이에 미테, 프렌츠라우어베르크, 프리드리히스하인, 그리고 리히텐베르크 지역에서만 130호가 넘는 빈집이 점거됐다.[2] 베를린의 주택 점거 운동을 연구한 바스데이밴은 이 상황을 “빈 곳을 점령하기: 베를린 장벽 붕괴 후의 스쿼팅”이라고 표현했다. 다만, 이 시기의 광범위한 주택 점거를 동독 정권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건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동독 지역에서도 ‘몰래 들어가 살기’, 혹은 빈집 점거는 1970~1980년대 내내 베를린, 할레,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포츠담, 에어푸르트, 예나와 같은 대도시의 일상이었다. 1970년대 초반에 이미 주택 점거는 동독 전역에 퍼져 있었다.[3]
베를린 외에도 동독의 대도시 도심 지역의 주택은 대체로 낡고 부서진 채 방치된 경우가 많았다. 동독 정권이 도시 외곽에 대규모 산업 단지를 만드는 데 이데올로기적 우선권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도심 주택은 상대적으로 노후화했고 도심 내 살만한 주택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이에 1960년대 중반부터 동독인들도 8년에서 10년에 이르는 국가의 공식적인 배당 절차를 기다리지 못하고 ‘방치된’ 주택을 암암리에 점거하며 살았다.[4] 다만, 동독에서의 주택 점거 동기는 서독(서베를린)의 그것과 달리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는 모두에게 적정한 주거를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으로 인해 감행한 자구책의 성격이 강했다.[5]
서베를린 쪽 도심, 그러나 분단 시대에는 한 발만 더 내디디면 죽음의 선인 장벽이 서 있던 크로이츠베르크도 사정이 비슷했다. 이곳은 원래 도심에서 약간 빗겨나 있는 변두리였지만 분단 이후 말 그대로 변방이 됐다.[6] ‘세상의 끝’[7]인 이곳에는 튀르키예계 외국인 노동자와 저소득층 주민, 가난한 대학생, 기성세대와 불화한 청소년들이 다수 거주했다.[8] 철거 직전의 저렴한 임대 주택이 많은 이곳에서 이들은 주택 점거 투쟁을 전개하고, 시 당국의 도시 정책에 저항했다. 거리의 예술가들은 빈집과 공적 공간에 그라피티를 그려 넣음으로써 도시 공간의 규칙과 소유권을 무시했고, 활동가들은 기존의 사회 및 공간 질서에 도전했다.[9]
이들은 스스로 집을 고쳐 가며 살았고 자본주의적 삶과는 다른 방식의 생활도 실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을 “대안적인 삶과 주거와 노동의 형태를 현실화할 수 있는 곳”이자 “서독의 규범 저편에 있는 유토피아”라고 평가했다.[10] 이곳에서는 가난한 노인과 젊은 주택 점거자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연대했다.[11] 따라서 (후술하듯이) 이곳의 주택 점거 투쟁은 ‘도시의 변용(變容)을 통해 잉여를 흡수하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12]에 대항하면서, 철거 직전의 집을 지키고 고쳐 가며 함께 만들어 온, 마을의 모습과 주민 구성을 보존하려는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크로이츠베르크의 이러한 ‘주민 및 마을 구성’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도 한동안 유지됐다.[13] 이것은 포츠담 광장 주변의 급격한 변화와도 대비된다. 자본가들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가 흑백의 필름으로 노출한 공터를 ‘창조적으로 파괴’하여, 그곳에 소니 센터와 같은 마천루들을 세웠다. 그러나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의 가난한 이들은 쉽게 쫓겨나지 않았다. 크로이츠베르크는 최근 힙한 거리로 떠오르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의 중심,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되고 있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도시의 중심성을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싸운다. 그 점에서 나는 이들의 투쟁을 도시에 대한 권리 투쟁의 한 전범(典範)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말하는 도시의 중심성은 르페브르가 1960년대에 생각했던 방식, 즉 코뮌주의자들이 파리 중심부를 장악했던 것처럼 되찾아야 할 도시의 절대적 중심의 의미가 아니라, 도시적인 것의 세포 형태, 그 분자적 구조, 그것의 필수 조건인 어떤 것이다.[14] 구체적으로 이것은 르페브르가 1970년대 작업에서 표명한 “어떤 주어진 공간 안에 공존하는 모든 것의 회합이자 함께 만나는 것, (…) 이런 식으로 공존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는 비어 있지만, 내용을 요구하는 형태”[15]다. 중심성(centrality)은 집중화(centralization)를 분쇄해야 한다. 집중화는 부와 지식, 정보와 권력을 집중시켜 통제와 지배라는, ‘전체화하는’ 임무를 완수한다. 반면 중심성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논리와 전략을 탄생시켜야 한다.[16] 이는 결국 베를린, 특히 도심에서 토지 사용 권리를 중심에 놓고 마을을 만들어 왔던 각양각색의 주민들에게 도시 공간을 재차 자신들의 일상적인 사용 및 필요에 맞게 재조직하고 변형할 수 있게끔 하는 이론적, 실천적 도구를 부여하는 일이 된다.
도시에 대한 권리, 중심성에 대한 권리
도시에 대한 권리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1968년의 파리 봉기의 맥락에서 이미 정식화했던 구호였다.[17] 1960년대 후반에 도시에 대한 권리가 급진적인 요구이자 호소로 표출됐을 때, 르페브르는 이 민주적 권리를 처음으로 개념화했다.[18] 르페브르는 도시 계획상의 잘못된 발전을 비판하면서, 《도시에 대한 권리(Le droit à la ville)》를 썼다.[19] 이는 일종의 ‘도시적인 것’에 대한 선언이었다.
르페브르의 도발적인 책은 건축과 도시 계획에서의 주류적 태도에 맞서는 고발장이기도 했다. 1960년대 말 프랑스 사회는 기능주의 건축 사조(思潮)(대표적으로 르 코르뷔지에)와 근대화 이념의 지지하에, 파리 등 도시 외곽에 거대 단지와 고층 아파트 건설을 관료주의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 다수는 도시적인 것, 도시의 ‘중심’으로부터 분리, 배제되고, 도시 공동체에서 ‘몫 없는 자들’로 전락했다. 르페브르가 예감한 대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주거 단지는 오늘날 방리유(Banlieue) 문제의 아지트가 되고 있다.[20]
이 책의 기초를 이루는 생각은 마르크스의 이론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르페브르의 다음과 같은 테제다.[21] 도시와 도시 현실은 사용 가치에 속하며, 또한 속해야 한다. 그러나 도시와 도시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교환 가치이며, 이것이 도시를 파괴한다.[22] 여기서 르페브르는 도시 혁명을 통해 사회적 실천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수 세기에 걸쳐 교환 가치에 종속돼 왔던 사용 가치가 재차 우위에 놓일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23] 구체적으로 이 권리와 함께 도시민은 공간의 단순 이용자에서 공간에 대한, 그리고 공간 내에서의 욕구를 스스로 정의하는 행위자가 될 수 있다. 르페브르는 이를 해방적-정치적 구상으로서의 수평적 자주 관리(autogestion) 개념으로 설명했다.[24]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르페브르는 주민들이 도시에 대해 갖는 여러 권리, 즉 자유에 대한 권리, 사회화 속에서의 개인화의 권리, ‘주거지’에 대한 권리 및 ‘거주한다는 것’에 대한 권리의 상위 형태로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제시했다.[25] 르페브르는 거주한다는 것과 주거지를 구분하면서, 거주한다는 것에서 도출되는 점유의 권리와 주거지에서 도출되는 소유의 권리 사이의 이론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인, 변증법적이며 동시에 갈등적인 운동에 주목했다.[26]
도시에 대한 권리는 (자본주의적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서의 도시와 그것의 제작에 참여할 권리, 소유에 대한 권리와 확실하게 구분되는 전유(專有)의 권리를 포괄한다.[27] 르페브르는 도시란 단순한 물질적 생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 작품에 비견되는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는 누구인가? 그것은 역사다. 도시는 역사의 작품이다. 이 말은 곧 역사적 조건 아래 이 작품을 생산한 특정한 인간과 집단이 존재한다는 뜻이다.[28] 그들에게는 이 작품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 이를 르페브르는 전유의 권리로 설명하고 있다. 전유의 권리는 “도시 공간에 대한 집단적 재전유”와 “도시의 사용 가치에 초점이 맞춰진, 새로운 도시적 삶”을 요구한다.[29] 한국에서는 이러한 전유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강제 퇴거 금지법’ 제정 운동으로 표출된 바 있다.[30]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도시의 통합적 기능을 강조했다. 그는 도시 혹은 도시 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중심성에 대한 권리를 도시에 대한 권리의 주요 내용으로 포섭했다.[31] 그가 보기에 중심성은 도시 공간의 근본적 특성이다.[32] “도시의 삶은 만남, 차이들의 대면, 도시 내에서 공존하는 삶의 방식들, ‘패턴들’의 상호적 인식 및 승인을 전제로 한다.”[33] 그런데 19세기 전반에 걸쳐 농민적 기원의 민주주의가 도시 민주주의로 변모해 가자, 이것이 자신들의 특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신흥 지배 계급은 도시의 중심으로부터 그리고 도시 그 자체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를 축출해 도시성을 파괴함으로써 도시 민주주의가 생명력을 갖는 것을 방해했다.[34]
따라서, 중심성에 대한 권리에서 핵심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도시 중심에 구체적인 몸을 갖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정치적, 전략적 토론에 접속하는 것, 도시 정치의 모든 수준에서 발생하는 충돌과 대결,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중심을 공간의 문제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중심성에 대한 권리에서는 서로 다른 사회 집단 간의 만남, 그들의 커뮤니케이션 및 정보와 관점의 교환, 그리고 이 ‘공간’을 완전하고 전면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시간’의 사용도 중요하기 때문이다.[35] 중심은 “결정의 중심, (사회의) 부의 중심, 권력의 중심, 정보의 중심”을 의미하며, 정치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이들은 이런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난다.[36]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전통적인 도시들을 방문하거나 그 도시들로 회귀할 단순한 권리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것은 변용되고, 쇄신된 형태의 도시적 생활에 대한 권리로만 표현될 수 있다. ‘도시적인 것’이 만남의 장소가 되고, 사용 가치의 우선성을 보장하고, 제반 재화 중 최고의 재화의 지위로 고양된 시간을 기입하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그 형태학적 기초와 그 실제적·감각적 현실을 유지하는 한, ‘도시적인 것’이 시골을 잠식하고, 농민 생활 가운데 살아남은 것을 옥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건 없다.”[37]
중심성과 역동적인 핵심 없이는, 도시도 도시성도 있을 수 없다. 도시에는 활기 넘치고 개방적인 공공 포럼, 생기 있는 순간과 마주침으로 가득한 곳, 교환 가치와 무관한, 그런 장소가 있어야 한다.[38] 중심성에 대한 권리는 도시의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자원에서 생겨난 잉여물을 공동체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권리, 이로써 그 잉여물을 ‘이윤을 추구하는 개별 집단’에서 빼내 일반 대중에게로 귀속시킬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39] 이렇게 봤을 때 ‘우리’는 중심성에 대한 권리를 주변화된 인구 집단도 “사회의 부의 장소, 도시적 인프라의 장소, 지식의 장소에 접근할 수 있는”[40] 권리로 재정의할 수 있다.[41] 중심성에 대한 권리는 노동자와 빈민, 외국인과 소수자, 성 노동자가 도심으로부터 축출되는 모든 도시에서 주장될 수 있지만,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라면 그 의미는 더욱더 각별하다.
법제화, 문제 해결의 열쇠?
르페브르의 구호인 도시에 대한 권리가 프랑스 외부에서도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의 《공간의 생산(La Production de l’espace)》이 영어로 새로 번역되어 나온 해가 1992년이다. 이 번역은 공간을 사유의 카테고리로 재발견해 내는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왔다.[42] 편집자 코프만과 레바스는 1996년에 르페브르의 글과 인터뷰를 묶어 《도시에 관한 글들(Writings on Cities)》을 펴냈다. 여기에 르페브르의 글 〈도시에 대한 권리〉도 포함됐다. 이어 2000년대가 시작되자 이 권리를 다룬 출판물이 ‘말 그대로’ 쏟아졌고, 도시에 대한 권리는 (비판적) 도시 연구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43]
그런데 도시에 대한 권리는 학문의 상아탑 내에서만 논의된 게 아니다. 어떤 이는 이 개념이 2001년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의 반세계화 투쟁이 폭력적으로 진압된 이후 생긴 ‘침묵’을 메우며 등장했다고 말한다.[44] 그렇게 보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 도시적인 것의 신자유주의화가 본격화하면서 등장한 사회 운동과 이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려고 한 제도권의 대응이 이 개념의 ‘세계적 유행’에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45] 이제, 도시에 대한 권리는 현재의 도시 투쟁에서 발생하는 각양각색의 논쟁을 포괄하는 개념이 됐다.[46] 사람들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이 권리의 의미를 두고도 투쟁해 왔다.[47]
다소 도식적인 설명이 될 수 있지만, 이 개념의 수용과 활용은 크게 두 개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과 서유럽의 비판적-학문적 논의들이 르페브르 계수 (繼受)라는 큰 틀 아래, 현존 (사회) 질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글로벌 사우스의 운동 단체와 비정부 기구는 이 권리를 앞세워 도시의 실제적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48] 이를 두고 르페브르의 혁명적 계승 혹은 개혁적 계승이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49]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서유럽과 달리,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따라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공급되는 도시 인프라(예컨대 수도 공급)가 구축돼 있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사회 운동의 관심이 ‘실용적’ 요구 쪽으로 경도되리라는 건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이 후자와 이들의 요구를 받아 안으려는 정부 기구들은 도시에 대한 권리를 형식적, 제도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강화해 왔다. 이들은 ‘권리’ 개념에 착안해 이 개념을 법률적으로 제도화하는 데 힘썼다. 도시에 대한 권리를 국가의 법규로 제도화하려는 세계도시포럼(World Urban Forum)이나, 국제 비정부 기구인 국제주거연맹(Habitat International), 그리고 도시 정부들이 이런 맥락에서 도시에 대한 개념을 이해했다. 예컨대 2004년 세계도시포럼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숙소 및 깨끗한 물에 대한 권리로 정의했다.[50] 2001년에 성립한 브라질 도시법도 이런 흐름 위에 있다.[51]
도시적 편익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을 개인들의 요구라는 주관적・개별적 권리에서 출발해, 그러한 요구를 객관적 법이라는 보편적 심급으로까지 일반화하는 운동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52] 상가 임차인들이 임대료 인상, 공공 공간으로부터의 축출 혹은 국가적 억압에 맞서 그들의 주관적 권리를 주장하고, 쟁취한 권리를 객관적인 법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를 도시에 대한 권리 투쟁으로 명명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운동이 법제화로 끝나 버리거나 법제화만을 최종적인 목표로 상정했을 때 발생하는 이론과 현실의 괴리, 혹은 운동의 ‘제도적 포획(捕獲)’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의 제도화, 형식화에서 도시 정부, 인도주의 조직 및 비정부 기구들은 도시에 대한 권리 전략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의 목표를 분명히 한다. 즉, 그들은 특정 정치 행정 단위에 소속돼 있는 사람들, 예컨대 도시에 등록한 주민 혹은 선거권을 가진 공민에게만 도시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도시에 대한 권리의 이와 같은 형식적 법률적 제도화는 르페브르의 원래의 급진적 개념 구상, 비판적 도시 연구자들의 개념 이해와 결을 달리한다.[53]
첫째, 도시에 대한 권리의 법제화가 이뤄지면서 주민의 일부는 이 권리에서 배제된다.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는 도시 공간의 생산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정당화된다고 보면서, 이를 위해 제도적 형식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참여는 제도화 이전에 이미 일상 활동 모두에서 행해지는 것인데, 제도적 형식화가 오히려 참여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시 공간에 대한 통제는 소유 관계 혹은 형식적 시민권과 무관하게, 이 공간의 모든 주민(도시민)에게 맡겨져야 한다. 이것은 국민 국가 혹은 국가 연합의 공민의 권리에 기초해, 법적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제도적으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 참여’와 구별되는 구상이다.
둘째, 도시에 대한 권리의 제도화는 이 권리 구상의 (반자본주의적) 기본 사고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도시에 대한 권리의 법제화를 주장하는 제도화론자들은 대부분 자원의 신자유주의적 배분 논리를 거부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도시 공간을 돈으로 평가하는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를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순치할 수 있으며,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도시에 대한 권리의 제도화는, 해방된 사회의 변화된 삶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미래를 그리며 도시의 현재 상태를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현상을 개선하는 개혁을 추구할 뿐이다. 이를 두고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슬로건의 (정신) 분열적 해석이라고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54]
셋째, 도시에 대한 권리의 과정적 성격은 참여를 제도적 형태로 만드는 것과 부합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제도적 시도에서 참여는 대부분 도시 계획 절차에 시민이 단순히 자문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이런’ 참여적 절차를 통해 개선되기는 하지만, 국가 및 대표자들의 권력은 온존된다. 르페브르가 원한 것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치적 위임의 보강, ‘개선된’ 대의제 민주주의하에서의 ‘더 인간적인’ 삶이 아니라 도시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일상적 투쟁을 가능케 할 무기였다. 이것은 도시 계획 절차에 시민이 참여하는 구상을 뛰어넘는다. 르페브르는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을 제도적 절차에 한정하지 않고, 도시 공간의 생산에 공헌하는 모든 결정으로 확대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매일 자신의 자전거를 세워 두는 벽을 그라피티로 채우겠다는 결정일 수도 있고, 빈집을 점거하자는 결정일 수도 있다.[55]
결국 르페브르가 말한 도시에 대한 권리는 부르주아 사회에 익숙한 법의 범주로는 파악하기 힘든, 사회적 삶의 급진적 전환을 향한 집단적 요구로 이해해야 한다.[56] 그러나 현실은 도시에 대한 권리의 형식화-제도화-법제화가 압도하는 상황이다. 이런 모습을 목격하면서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 구상을 영어권에 처음 소개했던 하비[57]는 점차 이 권리가 텅 빈 기표(시니피앙)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했다.[58]
권리는 좌파만이 아니라 우파에게도 동기를 부여한다. 우파는 사법 권력을 통해 관철할 수 있는 많은 자원을 동원해 실제로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한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도시 공간 형성 프로세스에 대한 도시민들의 모종의 형성적 권력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이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금융 투자자와 개발업자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점점 목격하게 되는 건 도시에 대한 권리가 사적이거나 그와 유사한 이권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지금 형성되고 있는 도시에 대한 권리는 대부분 한 줌의 정치적·경제적 엘리트들에게만 너무나 협소하게 한정, 제한돼 있고, 이들은 도시를 점점 자신의 욕구에 맞춰 만들어 낼 위치에 올라서고 있다.”[59]
브라질의 홈리스운동단체(MTST) 활동가들도 2001년 브라질 도시법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들은 이 법률이 강제 퇴거 절차로부터 거주자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며, 자본주의적 도시화의 기초에 놓여 있는 소유권 논리를 일소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지 않았다고 비판한다.[60] 2001년 도시법은 도시 행정의 민주화, 소유권에 대한 정당한 과세, 도시 불평등과의 투쟁,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위한 권리의 보장을 위한 여러 법적 수단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에 대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세력들은 도시의 구획 및 공유 재산(도시 재산)에 대한 법적 규율의 현재 모습을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계속하여 이윤을 뽑아내기 위한 그들의 전략을 이 권리 안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61]
후술할 주택 사회화 운동을 포함한 베를린, 특히 크로이츠베르크의 도시에 대한 권리 투쟁은 위의 두 흐름 중 어느 것에 가까울까? 사실 이 질문에 답하는 건 쉽지 않다. 여러 다양한 투쟁 현장과 국면을 두 개의 방향성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하의 논의를 위해 나름 정리를 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크로이츠베르크의 투쟁에는 현존 (사회) 질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빠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투쟁은 제도 정치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 이 투쟁의 주체들은 도시에 대한 권리의 제도화, 법제화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도시에 대한 권리가 형식화되는 것은 경계했다.
도시에는 경제적 불평등 외에도 다른 권력 관계도 아울러 작동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해방적 역량을 고려할 때는 자본주의적 도시와의 대결이 중심이 되지만, 인구의 나머지 부분을 생각하면 인종주의적, 가부장적 혹은 이성애 규범적(heteronormativ) 도시와 도시의 이런 면모와 결합된 불평등과의 대결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인종적으로 타자인 이들(대표적으로 이민자들)은 인종주의적, 가부장적, 이성애 규범적 도시 내에서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 노동 정책과 이민 정책을 분리하고 위계화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에 일조한다. 이런 상황에서, ‘급진적 변혁을 위한 사회적 힘’을 오로지 노동 계급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모든 도시민을 도시의 변혁에 참여시키는 시각이 필요하며,[62] 이민자의 시각에서 볼 때 도시에 대한 권리는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질문해야 한다.[63] 크로이츠베르크는 그러한 질문을 놓치지 않은 곳이다. 난민과 이방인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곳에서 도시에 대한 권리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존엄은 그곳을 찾아온 새 이주민들을 대우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