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무리, 주택을 점거하다
주택 점거는 독일과 유럽에 고유한 투쟁이 아니다. 미국과 캐나다는 물론이고, 남미 대륙을 포함,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1] 주택 점거자의 다수는 과거는 물론 현재도 브라질 등 글로벌 사우스에 살고 있다.[2] 주택 점거 운동의 역사는 연원이 깊다.[3] 1871년의 파리코뮌은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사업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되찾으려는 열망에서 봉기한 사건의 성격도 갖고 있어 20세기 주택 점거 투쟁의 선구로 평가받기도 한다.[4]
지난 세기의 주택 점거는 68혁명에 닿아 있으며, 전유의 권리, 중심성에 대한 권리를 현장에서 실천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이념적으로도 도시에 대한 권리와 연결된다. “도시에 대한 권리가 품은 대안적 전망을 봉쇄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질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택 점거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5] 하이델베르크와 런던에서 최근 새롭게 소생한 주택 점거 운동은 도시에 대한 권리 운동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6]
지난 세기 유럽에서 주택 점거는 전후 자본주의가 위기 국면으로 접어들던 1960년대 말에 시작됐다. 당시 주택 점거는 여러 나라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선도적인 투쟁은 이탈리아에서 벌어졌다. 1969년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수천 건의 주택 점거가 있었다. 남부 지역에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이 토리노, 밀라노 등지에서 주거 공간을 점거했다.[7] 이탈리아에서는 “1951년부터 1971년까지 농업 노동력 비율이 43.9퍼센트에서 18.8퍼센트까지 급락했다. 400만 명의 사람들이 남부를 떠났고 시골에서 북부 도시들로 이주했다. 1951년에서 1966년 사이에 이탈리아 대도시들의 인구는 500만 명 이상 증가했다. 같은 시기에 사회적 서비스를 개선하거나 그러한 대량 이주를 수용하는 데 필요한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일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로마, 토리노, 밀라노 그리고 나폴리는 너무나 급격하게 성장해서 많은 이들이 인간다운 삶에 부합하는 주거를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단칸방에서 잤고 판자촌이 퍼져 나갔으며, 점거자들이 빈 건물을 점거하는 일도 확산했다. 대략 1969년부터 1975년 사이 이탈리아의 점거자 수는 2만 명으로 추정됐다. 1977년 밀라노에서만 핵심 점거자들 2000명과 3만 5000명의 일시적인 참가자들이 약 50채의 건물을 점거했다.”[8]
“이탈리아 동지들의 주택 점거와 임대료 파업”은 독일의 주택 점거자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독일에서는 1960년대 내내 토지 투기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 당시 집권당이었던 기독교민주당/기독교사회당이 1960년 6월 23일 제정한 ‘주택 통제 경제의 폐지와 사회적 임차법・주택법에 관한 법률’은 주택의 수급 조절에 대한 공적인 통제를 폐지하고, 주택 임차료를 자유화하며, 주택 임차인에 대한 해약 고지 보호를 약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독일의 도시들은 2차 대전으로 큰 손상을 입었고, 패전 이후 주택 부족 사태는 아주 심각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1950년대 내내 주택 통제 경제를 유지했다. 이후 ‘라인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부흥을 빌미로, 임차인 보호를 주된 내용으로 한 주택 통제 경제를 폐지한 것이 위의 법률이었다.
일명 뤼케법이라고 불린 이 법률의 부정적 효과는 1960년대 중반 이래 분명해졌다. 토지(부동산) 투기꾼은 당시 독일의 정치·경제적 위기 국면에서 부정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토지 소유자들에 대한 조세 특례는 지속됐다.[9] 1969년에 수상에 취임한 빌리 브란트가 토지 개혁의 서곡을 울리고 있었지만,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도시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70년대 초에 활동가들은 뮌헨, 쾰른, 함부르크와 괴팅겐, 서베를린에서 첫 번째 점거를 조직할 수 있었다.[10]
1970년대 전반기 점거 투쟁에서 특히 주목할 도시는 프랑크푸르트였다.[11] 2차 대전 패전 후 프랑크푸르트는 베를린을 대신해 서독의 수도 기능을 상당 부분 떠안았다. 특히 경제적 관점에서 프랑크푸르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도시 개발에 대한 수요가 커졌다. 도시의 확장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서쪽 끝(베스트엔트) 주택 단지의 재개발을 부추겼다.[12]
1970년 9월 19일, 프랑크푸르트의 몇몇 대학생들과 이민자들이 철거를 앞둔 베스트엔트의 빈집을 점거했다. 이들은 1908년에 지어진 유겐트슈틸(아르누보) 풍의 고급 빌라에 의도적으로 ‘침입’해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들은 이 건물을 헐고 고층 사무 빌딩을 지으려는 부동산 투자자에 맞서 싸웠다.[13] 이 ‘투자자’에게는 뒷배가 있었다. 바로 사회민주당 시 정부였다. 그들은 ‘자동차에 최적화된 도시(autogerechte Stadt)’를 만들려고 했다.[14] 정치가와 도시 계획가들은 도심을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곳으로 만드는 일에 골몰했다.[15] 이에 맞선 주택 점거는 도시 중심 지구가 기업가적 결정과 프로젝트에 의해 급격히 변모하는 데 대한 광범위한 두려움을 새롭고 분명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상징화한 행동으로 평가됐다.[16]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973년 초까지 모두 17채의 주택이 점거됐으며, 그 중 베스트엔트 지구의 점거는 1970년대 중반까지 ‘토지 투기꾼’을 둘러싼 논쟁의 계기를 제공했다.[17]
한편, 프랑크푸르트의 점거 투쟁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1970년대 중후반 이후에는 운동의 소멸을 점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좌파 주택 정책을 위해 싸웠던 어떤 이는 “1973~1974년을 기점으로 주택 점거는 점진적으로 그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 상태의 보존”이라는 방어적 내용으로는 주거와 생활 조건의 개선을 원하는 대중들을 장기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18] 그러나 이런 그의 전망은 몇 년도 안 돼 현실에서 뒤집혔다.
1980년부터 독일에서는 점거 운동의 새로운 물결이 밀려왔고,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투쟁은 마치 전초전과 같은 양상이 됐다. 전국적 주목을 받은 투쟁이 쾰른, 뒤셀도르프, 슈트트가르트, 뉘른베르크, 괴팅겐, 그리고 재차 함부르크에서 발생했지만, 이 새로운 흐름의 중심지는 누가 뭐래도 서베를린, 그것도 크로이츠베르크였다. 서베를린에서는 1979년 가을에서 1982년 봄까지 적어도 239채의 주택을 대상으로 한 265건의 주택 점거 행동이 감행됐으며, 대략 160~170채가 실제로 점거됐다. 경찰은 이들 건물에서 총 3106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점거자의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점거자 수는 일시적으로 1만 명에 달하기도 했다. 여기에 주택 밖에서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사람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2만 명에 달한다.[19]
점거된 주택의 규모와 점거에 참여한 사람들 수만 놓고 베를린에 주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20]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에서의 주택 점거는 금융 메트로폴리스인 프랑크푸르트에서의 그것과는 그 동기를 달리했다. 베를린에서는 ‘낡은’ 주택을 빈집으로 방치하다가, 철거 후 사무실 전용 건물을 짓는 식의 투기적 개발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당시 동독 지역 한가운데 위치했던 서베를린은 경제적 투자의 관점에서 볼 때 여타의 메트로폴리스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21] 오히려 도시 개발 자체가 충분한 공적 보조금이 지원돼야 가능한 상황에서, 크로이츠베르크 지구의 개발은, 정부 주도하에, 튀르키예계 외국인 노동자, 반항적인 젊은이와 예술가, 가난한 사람들이 주류인 구역을 재차 독일인 중심의 ‘건전한’ 중산층 마을로 만드는 ‘재개발’을 중심으로 진행됐다.[22]
이 재개발은 프랑크푸르트에서처럼 (전면) 철거 및 신축 프로젝트 형태가 아니라 구옥의 임대 주택을 정비하고 대수선하는, 그러면서도 오래된 거리의 모습은 보전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말 그대로 개축이었다. 이런 재개발은 오늘날 우리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부르는 도시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었기 때문에, 주택 점거자들은 이러한 투기적 행위를 반대한다는 주장과 함께 ‘애써 가꾼 소중한 마을 공동체의 몰락’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들은 지역·지구의 재정비가 임대료 상승과 저소득 임차인의 축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고, ‘토착의 생활 환경’ 혹은 ‘토착의 사회 구조’를 보존하는 것이 투쟁의 목표가 돼야 함을 분명히 했다.[23] 대다수가 세입자인 베를린의 주민들이 ‘불법적’인 주택 점거 행위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은 위와 같은 운동의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1981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서베를린 주민 82퍼센트가 불법 빈집 점거를 지지했다. 서독 주민 전체로 따지면 이 비율은 62퍼센트였다.[24] 이것도 높은 비율인데, 서베를린 주민의 빈집 점거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토착의 생활 환경 혹은 사회 구조의 보존이라는 투쟁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의 주택 점거자들이 선택한 수단 중에 하나가 바로 수리 점거 혹은 수복적 점거(Instandbesetzung)였다. 수리 점거란 (투기적) 소유권자가 개발 이익의 상승을 노리고 그냥 방치한 집을 점거자들이 고쳐 가면서 점거 행위를 계속하는 것을 말한다. 주택을 점거(Besetzung)하면서 수리 노동(Instandsetzungsarbeit)을 이어가므로, 이 두 행위를 결합한 신조어로 수리 점거라는 말이 만들어졌다.[25]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한스 프루이지트는 주택 점거, 20세기 후반기의 스쾃을 다섯 유형으로 구분한다. 이들의 교집합도 가능하다. ① 무주택과 주택 부족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스쾃, ② 대안적 생활 형식・방식으로서의 스쾃, ③ 대안적 사업 운영 및 사회적 만남의 장소로 공간을 사용하는 ‘기업가적’ 스쾃, ④ 건물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스쾃, 마지막으로 ⑤ 사회 질서의 극복을 위한 전투적 전략의 한 부분으로서의 스쾃이 그것이다.[26] 1980년대 서베를린의 주택 점거에서는 이 다섯 유형 모두가 나타났는데, 수리 점거는 이 중에서도 ①~④ 유형에 속한다. 이런 여러 유형의 주택 점거자들은 각기 다른 목표와 전략을 추구하면서 합치고 헤어졌다.[27]
점거자들의 면면은 무지개색이었다. 그 스펙트럼은 노동자 계급 출신의 록가수에서 페미니스트까지, 튀르키예 출신 이민자에서 노인까지, 학생에서 미혼모까지, ‘새로 태어난’ 기독교인에서 이데올로기적 아나키스트들까지 다양했다. 그들은 다수가 학생인 신좌파처럼 자기 규정적 집합체(collectivity)라기보다는 각양각색의 무리(collection)였다. 그들 중에는 수동적 비폭력, 대규모 교육 프로젝트, 공동체 생활, 모든 삶에서의 조화롭고 자유로운 감수성의 개발을 지향했던 긴 머리의 생태 지향적 활동가들도 있었고, 이들보다 더 과격하고 전투적인 사람들도 있었다.[28] 점거자들은 마치 “반항적인 갈리아 사람들의 다채로운 무리”처럼 결코 단일한 대오가 아니었다.[29]
주택 점거 현장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시 정부와 협상해야 할지의 문제, 사안별 해결을 추구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점거 주택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는지의 문제, 지원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돈을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가 논의됐다. 주택 점거를 주거 및 생활 관계를 바꾸는 데 복무하는 수단으로 쓸 것인지 아니면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폭발하기도 했다.[30]
1980년 12월의 역사적인 크로이츠베르크 점거 이후 당시 여당인 베를린 사회민주당은 주택 점거를 수인(受忍)한다는 노선을 취했지만, 경찰과 사법의 대응은 상대적으로 강경했다. 당연히 이들의 억압적 태도에 점거자들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것이 사회민주당 시 정부를 정치적 위기에 빠뜨렸다.[31] 이에 시 정부는 최소한의 임대료를 내는 조건으로 점거자들의 점거 주택 생활을 용인하는 타협안을 제안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이 빈 건물의 ‘불법 점거’를 용인하는 것이라며 사회민주당을 격렬히 비난했다. 반면, 점거자 내부에서는 이를 체제에 투항하게 만드는 시도로 보는 측과 자신들의 개별적 주택 문제에 대한 단기적 해결 기회로 보는 측 사이에 몇 번의 격렬한 논쟁이 발생했다.[32] 1981년에는 연방 정부 차원에서도 이러한 합법화 시도가 전술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즉 베를린, 함부르크와 같은 대도시의 점거 주택을 합법화함으로써 정부는 운동의 중심을 흩트리고 현존 질서와 싸운다는 투쟁 감각을 제거하려고 했다. 당연히 합법화를 반대하는 측은 이러한 제안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들은 합법화를 억압적 질서에 맞서 일상적 저항을 실천하며 살던 사람들을 갑자기 — 낮은 임대료의 집뿐만 아니라 집 수리 비용까지 대주는 — ‘빅 브라더’의 손님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고 봤다.[33]
한편, 낡은 건물을 수리해서 사용하려 했던 사람들이 모두 주택 점거자는 아니었다. 주거 공간을 합법적으로 임대 혹은 점유한 사람 중에도 수리 점거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을 자력 구제자 (Selbsthelfer)라 한다. 비록 법률적 조건은 달랐으나 이들 모두는 크로이츠베르크와 같은 대안적 환경에서 살면서, 시 정부의 ‘관료주의적’ 도시 계획에 맞서 자력으로 낡은 주택을 완전히 고치거나 부분 수리하려고 했다. 주택 점거자 중에는 이후 시 정부와 정식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여 합법적으로 주거권을 보장받은 이들도 생겨났으므로 나중에는 주택 점거자인지, 자력 구제자인지의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34]
폭력의 사용 문제는 점거자들 내부에서도 매우 논쟁적인 주제였다. 미디어와 정치가 중 일부는 주택 점거자들을 폭력적이며 테러 그룹에 가까운 사람들로 낙인찍고 그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급진적인 점거자들은 오히려 소수였다.[35]
폭력의 사용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택 점거가 추구한 목표였다. 예컨대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영국의 주택 점거자 다수는 주택 시장 및 주택 정책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류적 관심사는 무주택자들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이 운동은 유럽 대륙의 대안적-학생 운동적 투쟁과 비교할 때 부르주아적 특성이 상대적으로 강했다.[36] 반면,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에서 주택 점거자들은 집단적인 자기 실험이라는 의미에서의 주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는 값싼 주거 공간의 확보만이 아니라 주거 공동체 및 도시 공동체에서의 공동생활을 만드는 것을 중요시했다. 또한, 도시 공동체는 토착의 사회 구조와 이민자, 홈리스 혹은 정신 장애인과 같은 사회의 소수 집단을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이것은 수리 점거자와 자력 구제자 모두가 공유하는 도시 투쟁의 목표였다.[37] 르페브르식으로 말하자면, 19세기 말 이래 그 고유한 가치가 상실된, 도시에서 거주한다는 것, 산다는 것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셈이다.
이러한 투쟁 방향은 베를린시 정부를 압박해 베를린 주택 정책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민-지구 유지 구역 제도의 실행을 강제하는 뒷배가 됐다. 신중한 도시 재생, 즉 폭력적 철거를 단념하고, ‘지금 여기 거주하는 주민의 이해와 욕구를 반영하고, 주민과 함께 구상하고 실행하는’ 도시 재생 계획이라는 원칙이 크로이츠베르크를 거점으로 수립될 수 있었던 것도 주택 점거 투쟁, 특히 수리 점거 투쟁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1970년대 프랑크푸르트 주택 점거 투쟁에 참여한 요쉬카 피셔(녹색당 출신으로 1998~2005년 독일 연방 공화국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회주의를 기약 없는 미래로 밀쳐 두지 않고, 지금 이곳에서 지배자에게 복종하지 않는 삶의 형식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38]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에서의 투쟁은 위와 같은 결심과 다짐을 어느 한순간에 끝내지 않고, 긴 시간에 걸쳐 일상적으로 실천했다. 이 점이 베를린에서의 ‘도시에 대한 권리’ 투쟁, 크로이츠베르크에서의 주택 점거 투쟁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
주택 점거는 불법인가?
필자가 독일과 유럽에서의 주택 점거 투쟁을 우호적으로 설명할 때면 다수의 ‘법조인’들은 그와 같은 불법적인 행동을 ‘법학자’가 지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만 접근하면, 독일 정부의 ‘합법화 전술’을 이해할 수 없으며, 주택 위기에 대처하는 정치 투쟁은 헌법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
사람들은 항상 체계화된 생각을 선호하고, 그 체계에 따라 무언가를 판단하려고 한다. 르페브르는 이 체계들을 깨부수려고 했다. 다만, 그것을 분쇄하고자 한 이유는 하나의 체계를 또 다른 체계로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유와 행동에 ‘문을 열어 주기’였다. 왜냐하면 체계는 사유를 봉쇄하고 새로운 가능성에 문을 닫아 버리는 경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39]
독일에서 주택이 불법 점거됐을 때 대도시 경찰은 이를 쉽게 진압하지 못했다. 반면, 운동의 거점이 작은 소도시나 소읍에서는 결코 이러한 관용이 허용되지 않았다. 점거자들은 곧바로 경찰에 의해 강제 퇴거당했다.[40] 합법과 불법의 문제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이런 사태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영국은 주택 점거에 대한 대응에서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법률이 통용되는 나라이며, 네덜란드식 관용은 1980년대 이후 상황이 주택 점거자들에게 불리하게 바뀌었을 때, 법적 처벌과 보복적인 폭력이라는 새로운 칼날로 벼려졌다.[41] 법(제도)의 설계와 운용은 시대, 국가, 주택 점거에 대한 대중의 지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미국인들은 함부르크의 ‘하펜슈트라세’가 어떻게 경찰에 저항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시기(1985년 5월 13일)에 경찰은 필라델피아의 유사 집단인 MOVE,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동네 전체를 대량의 소이탄으로 쓸어 버렸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에서 점거자들은 압도적인 경찰력에 의해 일상적으로 잔인하게 축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필요하다면) ‘격렬한 물리력의 사용(deadly force)’도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분별력 있는 마음(delicate nature)’ 같은 것을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42]
물론 미국도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공황기에는 매년 벌어지는 강제 퇴거에 직면했던 빈민 가정의 수가 지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는데도 퇴거가 일어나며 폭동이 발생할 정도였다. 이웃들은 판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퇴거의 대상이 된 가정이 원래 살던 곳으로 들어오도록 돕거나 이들의 가구를 깔고 앉아 퇴거에 저항하다가 직접 집행관들과 맞붙기도 했다.”[43] “대중 저항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변화를 일으킬 집단 역량이 있다고 믿을 때만 가능하다.”[44] 미국에서 그런 믿음은 1980년대 이후 상당 부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다시 주택 점거, 특히 빈집 점거와 관련한 법률문제로 돌아와 보자. 영국과 웨일스의 경우에는 2012년 전까지 빈집 혹은 이용하지 않는 주택을 점거해도 형사상 처벌되지는 않았고, 민사상의 문제만 생기는 걸로 돼있었다. 또한 비주거용 부동산의 점거는 여전히 민사 문제로만 다뤄진다.[45] 1970년대 중반 이래 강화되고, 2012년에 완전히 억압적으로 바뀌기 전, 주택 점거 관련 영국 법제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이었다. 이런 영국 법제는 주택 점거를 형법이 아닌 민법의 문제로 다뤘으며 주택 점거자들을 강제 퇴거로부터 보호했던 ‘1381년 강제 침입법(1381Forcible Entry Act)’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46]
네덜란드의 경우, 주택 점거는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수인됐다. 예컨대 점거된 주택이 최소한 1년 이상 빈집 상태를 유지했으며, 소유주가 해당 주택을 조만간 사용하거나 임대할 예정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점거가 가능했다. 1년 이상 빈집 상태로 두면 합법적 점거가 가능했다는 말은, 네덜란드법이 주택의 소유권보다도 집의 사용을 더 두텁게 보호했다는 의미다.[47] 1968년과 1981년 사이에 암스테르담에서만 1만 채가 넘는 주택과 아파트가 점거됐으며, 네덜란드의 나머지 지역에서 추가로 1만 5000채의 주택 및 아파트가 점거자들 (kraakers)에 의해 접수됐다.[48] 그러다가 1994년에 1년 미만의 빈집을 점거하면 형사 처벌하는 것으로 법이 개정됐고, 2010년 1월 1일 이후로는 모든 주택 점거를 금지하는 법률이 시행됐다.[49]
독일에서도 각 주의 법률 혹은 게마인데의 조례에 따르면, 대체로 소유자가 3개월 이상 주택을 빈집 상태로 두는 경우,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는 한, 그러한 방치 자체가 ‘위법’이 된다.[50] 다만, 이런 경우라 하더라도 빈집을 점거하면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는지는 논쟁이 된다. 지배적 견해는 이를 긍정한다.[51] 대표적인 주석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따라서 이른바 ‘수리 점거’도 주거 침입죄에 해당한다. 기본법 제14조 제2항은 이러한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동 조항은 (주택의 전용 금지와 같은-필자 추가) 관련 법적 조치의 근거가 될 수는 있지만,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형법 제123조에 열거된 목적물을 아무나 제멋대로 취할 수 있게끔 하는 데 이용될 수는 없다. 만약 후자가 가능하다면 이는 재산권 질서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52]
점거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집을 구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집주인이 자기 소유의 집을 오랜 시간 빈집으로 방치해 소실되게 만드는 것은 재산권의 사회적 구속(기본법 제14조 제2항)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형법 주석서들은 이런 반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아울러, 주택 점거는 공적 주체의 의무(예컨대 청소년 센터를 만들어 점거자들과 같은 ‘청소년들’이 유익한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를 대중에게 환기하는 사회적으로 정당한 수단이라는 논거도 배척한다. 주택 점거는 주택 문제의 심각성을 ‘시위’하기 위한 긴급 피난 행위(독일 형법 제34조)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세입자들이 겪는 곤궁은 우월한 법익으로 주장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각한다. 점거자들이 그들의 행위를 시민 불복종이라고 주장하면, 시민 불복종은 법 위반을 전제로 하므로 이것도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현행법상 가능한 해석은 양형상 고려, 형 유보로서의 경고(독일 형법 제59조), 혹은 ‘편의주의’(재량)에 따른 형사 절차의 중단뿐이라고 한다.[53]
그러나 이런 주류적 해석에 대항하는 학설과 실무도 존재한다. 초기에 독일 법원은 빈집 점거는 집회의 자유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경우에도 정당화되지 못한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실무는 대체로 지지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0년의 베를린-크로이츠베르크 투쟁 이후 이를 비판하는 학설, 판결, 공론이 등장했다. 주택 점거자들을 주거 침입자로 무조건 ‘범죄화’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할 뿐만 아니라 법 해석학 측면에서도 오류라는 것이다. 이들은 점유자 혹은 소유자가 의도적으로 빈집으로 방치한 공간은 형법상 주거 침입죄의 보호 법익, 보호 객체인 ‘울타리가 쳐진 토지’, 즉 위요지(圍繞地)가 되지 않으며, 이 경우 주택 점거와 관련한 법적 문제는 형법이 아니라 민사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봤다.[54]
예컨대 뷔케부르크 구법원 판사인 귄터 뷜케는 주거 침입죄의 혐의를 받고 있는 주택 점거자들의 인적 사항 확인에 필요한 수색 영장 발급을 거부했다. 이것을 ‘뷔케부르크 노선(Buckeburger Linie)’이라고 한다. 이 결정은 뷔케부르크 지방법원의 소년부에 의해 파기됐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점거자들은 —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 울타리가 쳐진 토지에 침입한 것이 아니다. (…) 빈집이 흔히 그렇듯이, 문과 창문은 부서져 있었고, 따라서 앞마당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거리에서 해당 집으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서, 해당 주택은 울타리가 쳐진 토지라는 법적 성격을 상실했다. (…) 나아가, 사용하지 않는 주택의 점거는 형법 규정의 보호 목적에 의해 포착되는 행위가 아니다. 보호돼야 하는 것은, 그것이 지금껏 사적으로 이용된 주거 공간인 한에서,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사적 영역이다. (…) 이용되지 않는 주택에는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55]
1981년의 이 결정 이후 본안(本案)에서 주거 침입죄에 대한 무죄 판결 혹은 본안 절차 개시 중지 결정이 다수 내려졌다. 예컨대 뮌스터 구법원 자비네 슈타히비츠 판사의 무죄 판결은 동일한 사안에 대한 동 법원 타 재판부의 유죄 판결과 대비됐다. 유죄 판결들은 기존의 주류적 해석을 신중하게 재검토해 보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유죄 판결은 특정 행위가 어떠한 범죄 구성 요건에 해당하는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거나, 점거된 장소가 객관적 구성 요건 표지들, 예컨대 주거용 집, 사무 공간, 위요지, 공공 공간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유죄 판결을 내린 판사들은 세입자를 내쫓는 투기적인 주거 공간 파괴 혹은 잘못된 도시 계획에 의한 주거 공간 파괴가 초래하는 사회적 부정의에 눈감았다.[56]
주거권이 아니라 소유권 보호를 제1의 원칙으로 생각하는 대다수의 판사는 ‘남’의 주택을 점거하는 행위는, 그 점거 대상이 (1년 이상) 투기의 의도로 방치한 빈집이든 아니든, 곧바로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된다는 심증을 굳힌다. 그러나 슈타히비츠 판사에게 그런 논리는 의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마우라흐-슈뢰더[57]의 형법 교과서를 인용하면서, 독일 형법 제123조가 보호하는 법익이 “재산권 그 자체가 아니라, 인신의 자유의 중요 부분인 ‘특정한 사람과 관련된 가택권(personenbezogenes Hausrecht)’”이므로, “위요지”라는 개념 표지도 바로 “이 법익”에 맞춰 판단해야 한다고 설시했다.[58] 그는 주거 침입죄의 보호 법익을 생각하며, 행위의 형법적 가벌성의 근거를 진지하게 되물음으로써 주택 점거 운동의 정당성을 지지할 수 있는 사법적 판단을 내놨다.[59]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중요한 것은 소유의 권리가 아니라 사용의 권리다. 이런 생각과 행동을 국가와 자치 행정 당국이 주거 침입죄 등으로 단죄하려고 했을 때, 슈타히비츠 판사와 같은 소수 견해는 용감하게 ‘낡은 도그마틱’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주거 침입죄 무죄’를 논증하려고 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독일의 사회 운동에 공감한 이들의 무죄 판결은 당시에도 주류적 해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소유권 질서의 굳건한 수호에 자신의 역할을 가두는 법률가 상(像)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소중한 선례가 된다.
독일 형법의 주류적 이론과 실무가 주택 점거 행위를 주거 침입죄로 엄격하게 처벌하는 가운데 나온 이러한 해석이 용산 참사와 같은 도시 재난이 발생해도 소유권 질서에 대한 도전을 철저히 실정법 물신주의의 관점에서 단죄하는 한국의 판사들에게 하나의 ‘각성’이 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위와 같은 ‘논쟁’ 과정을 거쳐 왔기에 베를린 시민들은 도시 문제, 주택 문제를 오로지 사적 소유권을 중심에 놓고 사유하는 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적 소유권과 그 가치관을 신자유주의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정치의 헤게모니적 형태가 된”[60] 이 시대에 이러한 ‘대항 헤게모니’는 주택 사회화 운동이라는 헌법 투쟁과 법률 투쟁에도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된다.
모두의 도시를 위한 국민 표결
암스테르담에서 주거 점거에 관한 자유주의적 법률이 폐지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베를린에서와 마찬가지로 임대료 폭등이 일어났다. 시민들이 저항하지 않으면 관료들이 도시 정치를 좌지우지해 버린다. 도시민들이 도시 정부를 압박하고, 나아가 중앙 정부를 움직이지 못하면 주택 시장에서의 규제는 작동하지 않고 투기 자본이 날뛴다. 민중의 운동이 멈추면 자본이 운동을 개시한다. 이것은 어디에서나 철칙이다.
1980년대 정점에 달한 베를린의 주택 점거 운동은 관료와 자본이 결탁한 불도저식 도시 재개발에 저항했다. 이를 통해 신중한 도시 재개발이라는 원칙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베를린이 다시 독일 연방의 수도가 된 이래,[61] 베를린의 주거 사정을 지배한 것은 재차 주택의 시장화, 금융화였다.[62] 베를린에는 엄청난 공적 자금이 투하됐고, 10여 년의 수도 재개발이 진행된 2000년대 중반에 도시 정비는 이미 상당 수준에 도달했다. 도시의 외형을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는 만큼, 도시 내부의 생존을 배려할 재정은 부족했다. 공영 주택은 매각됐고, 부동산 투자는 본격화했다. 부동산 투기 자본은 말한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도시인가. 여기에 투자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기후 변화 대처라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주택을 ‘현대화 = 대수선’하고 이것을 근거로 임대료를 올릴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도 주어졌으니 금상첨화다. 주택 거래 가격과 월세가 폭등했다. 원주민들은 살던 곳에서 축출되고 관광객의 눈에만 힙한 가로가 늘어났다. 자유와 연대의 가난한 마을은 관광객이 몰리는 부자들의 도시로 변모 중이다.
이에 저항하려면 개별 주택의 점거와 같은 분산적 투쟁에서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제도 투쟁이 필요했다. 거대 주택 임대 회사의 주택을 재사회화해 이를 거주자 공동체가 중심이 돼 관리하자는 운동은 이러한 배경 아래 등장했다. “도이체보넨과 같은 주택 임대 회사의 주택을 수용하자(Deutsche Wohnen & Co. enteignen)”[63]는 슬로건을 내건 베를린의 주택 사회화 운동은 민영화, 탈사회화의 광풍이 불었던 통일 이후의 지난 30년을 반성하며, ‘거주한다는 것’의 사회적 성격을 주택 정책의 주요 의제로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이 운동은 도이체보넨과 같은 거대 주택 임대 회사가 보유한 대략 25만 호의 주택을 재사회화하자고 주장했다.
이 수치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2019년 현재 베를린 내에서 3000호 이상을 보유한 민간 주택 임대 회사는 11개 정도로 추산된다. 도이체보넨(2021년 6월에 보노비아에 합병됨), 보노비아, 아켈리우스가 3대 민간 주택 회사이고, 그 외에, 놀라운 수익률을 올리고 있는 그랜드시티프로퍼티즈 등이 있다.[64] 이들 기업이 베를린에서 보유하고 있는 임대 주택을 전부 사회화하면 대략 24만 호 정도가 된다.[65] 이 수치는 독일 통일 이후 베를린시 당국이 민간에 넘긴 주택 수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 운동의 목표가 자의적으로 설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0여만 호 주택의 사회화를 시민들이 들고 나오자, 반대 진영은 ‘바보야 집을 더 지으면 돼. 한 25만 호 더 짓자’고 반박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고 공급으로만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다고 현재의 주택난이 해결될 리가 만무하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아프게 경험해 온 이들이 바로 한국인이다.
베를린의 주택 사회화 운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용어 정리부터 해야 한다. 이 운동을 보도하는 한국의 언론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운동을 주택 몰수 운동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몰수가 아니고 사회화다.[66] 몰수는 범죄 행위에 사용했거나 범죄 행위로써 취득한 물건의 소유권을 범인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국가의 소유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형법 제48조 참조). 이 개념을 형법이 아니라 공법(헌법, 행정법)적으로 이해하면 무상(無償) 수용이 된다. 그런데 현행 독일 기본법은 무상 수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1919년 바이마르 헌법 제정 이전에 공산당(좌파)과 사회민주당 내의 다수파(우파) 사이에 벌어진 생산 수단의 사회화 논쟁에서 각 진영은 사회화를 각각 ‘Vergesellschaftung’과 ‘Sozialisierung’으로 표기했다. 전자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분쇄한다는 혁명적 내용이 담긴 말로서 생산 수단의 사회화, 즉 보상이 없는 무상 수용을 의미했다. 반면, 후자는 개량주의적 관점에서,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통한 유상의 사회화, 즉 상당 보상을 전제로 한 유상 수용을 의미했다.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우파’는 결국 자신들의 견해를 관철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용어인 Sozialisierung도 Vergesellschaftung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바이마르 헌법 제156조가 Vergesellschaftu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본래의 것과는 이미 거리가 먼 것이었다.[67]
현재의 주택 사회화 운동은 바이마르 헌법 제156조를 계승한 현행 독일 기본법 제15조에 근거해 전개되고 있으므로 무상 수용, 즉 몰수와 전혀 관련이 없다. 외국 제도를 소개할 때에는 용어 하나의 번역에도 유의해야 한다. 특히 헌법상의 재산권 부분에 대한 사회 국가적 이해가 부족한 한국 사회에 독일의 제도를 소개할 때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베를린의 주택 사회화 투쟁을 주택 몰수 운동이라고 번역하면 한국에서는 당장 “사회주의 하자는 것이냐”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주택 사회화를 위해 베를린 시민들이 선택했던 수단은 국민 표결(Volksentscheid)이었다. 이 ‘Volksentscheid’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한국 언론은 예외 없이 이를 주민 투표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것은 ‘주민’ 투표가 결코 아니다. 주민 투표는 지방 자치상의 쟁점을 주민이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다. 주민 투표로 주택 사회화와 같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단’할 수 없다. 재산권 질서에 아주 중대한 변화를 초래할 법률의 제정, 정책의 추진을 주민 투표로 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반면 주권자인 국민은 비상(非常) 입법자로서 중요한 정책이나 법률안에 대해 결단할 수 있다. 베를린은 함부르크와 브레멘처럼 도시 주(州)다. 베를린이 주라는 것은 베를린이 하나의 독립된 국가라는 의미다. 그래서 베를린에는 베를린 헌법이 있다. 그 베를린이라는 ‘나라’의 ‘국민들’이, 의회와 집행부 수장(경우에 따라서는 상원)이 견해 차이로 어떤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 주권자의 지위에서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것이 바로 국민 표결이다. 따라서 이것을 주민 투표라 하는 것은 헌법적 결단을 주민 자치의 행정법적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국민(das Volk)의 의지와 결단을 이렇게 폄하하면 안 된다.
독일은 연방 차원의 직접 민주주의를 사실상 배척한다. 즉, 독일 기본법은 제29조에서 아주 예외적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규율하고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뒀다. 반면, 주 헌법 차원에서는 직접 민주주의가 규정돼 있다. 이 직접 민주주의의 수단으로 국민 투표가 각 주 헌법에 보장돼 있다. 국민 투표는 크게 국민 발의(Volksinitiative), 국민 청구(Volksbegehren), 국민 표결로 나뉜다.[68]
국민 발의라는 사전 절차를 거쳐 2019년 4월에 본격화한 ‘도이체보넨 사회화’ 국민 표결 운동은 같은 해 9월 26일의 투표를 앞두고 이른바 ‘사회화법 초안’[69]까지 발표했다. 다만, 국민 표결의 대상은 이 법안 자체가 아니고, 시 정부가 의결해야 할 사항이었다. 즉, 주택 사회화를 위한 국민 표결의 투표 용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법률안을 시 정부가 만드는 것에 찬성하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① 베를린 내의 3000호 이상의 주택을 보유한 모든 민간 주택 회사를 사회화한다. 단, 공공이 소유권을 갖는 기업, 사법인으로 돼있는 공영 주택 건설 조합, 세입자들이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주택은 예외로 한다.
② (새로 만들어질) 공기업(Anstalt des öffentlichen Rechts·AöR)이 이들 주택에 대한 공동 경제적, 비영리적 운영을 위한 행정을 책임진다.
③ 공동 소유가 된 이들 주택을 공기업 직원, 세입자 및 시영 회사의 다수결 및 민주주의적 참여하에 관리・운영한다.
④ 주택을 관리할 공기업의 정관에 재사유화 금지를 명기한다.
⑤ 보유 주택이 사회화 대상이 된 기업에 대해서는 시장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보상한다.
참으로 과감한 도전이다. 그러나 시가 보유한 주택을 시장에 내다 팔아 버린 과거의 잘못을 교정하려면 이 정도의 재공영화 조치는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확보한 주택을 이번에는 선선히 관료들의 통제에 넘겨주지 않겠다고 한다. 세 번째 요구에서 르페브르가 말한 수평적 자주 관리의 이념을 읽어 낼 수 있다.
주택 사회화를 위한 이 5대 방침에서 드러나듯이 이 운동의 근거는 독일 기본법 제15조이다. 일부에서는 기본법 제14조 제3항의 수용 조항도 근거로 들고 있지만, 사회화 대상 주택(기업)에 대한 보상을 시장 가격 이하로 해야 한다는 두 번째 요구가 분명히 하고 있듯이, 운동의 헌법적 기초는 제14조 제3항이 아니라 제15조다. 사회 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유럽의 여러 나라 헌법이 그러하듯이(대표적으로 포르투갈 헌법) 독일 기본법도 의식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재산을 중심으로 재산권 일반을 규율하는 제14조와 별개로 생산 수단의 소유를 규율하는 제15조를 두고 있다.
재화의 생산이 공장에서의 다수 인간의 공동 작업에 의하여 행해지게 된 이래, 사적 소유가 생산 수단에 대한 물적 지배를 규제하는 적합한 수단인지가 심각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천연자원에 대한 소유권도 마찬가지다. 배타적인 법형식인 소유권을 토지에도 인정해야 할 것인지를 논의한 것은 더 오래됐다. 모든 인간은 대지 위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그 대지가 사적 지배하에 놓인 곳이라면 자유로운 공동생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100년도 더 전부터 바로, 이들 생산 수단, 천연자원 및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공업적 생산, 지하자원의 이용, 대지 위에서의 생활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고려하는 소유 형태로 대체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돼 왔다. 독일 헌법 제15조의 목적은 이들 영역에서의 소유제의 구조적인 변혁을 보상을 전제로 허용하는 것이다.[70] 조문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토지, 천연자원 및 생산 수단은 사회화의 목적을 위해 보상의 방법과 정도를 규율한 법률에 의하여, 이를 공동 소유 혹은 그 밖의 공동 경제의 제 형태로 옮길 수 있다. 그 보상에 관해서는 제14조 제3항 제3문과 제4문이 준용된다.”
사회화의 경우에도 보상은 해야 한다. 다만, 이 경우 보상은 제14조 제3항에 따른 완전 보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이한 관점의 형량 하에서의 보상을 뜻하므로 완전 보상을 밑돌아도 무방하다.[71]
사회화와 공용 수용은 그 목표 설정이 다르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 기본법 제14조 제3항의 공용 수용은 “공공의 복지를 위해”서만 허용되지만, 제15조의 사회화는 “사회화의 목적을 위해” 행해진다.[72] 예컨대 토지는 똑같이 제14조 제3항에 의해서도, 제15조에 의해서도 수용이 될 수 있지만, 제15조에 따른 수용은 사회화의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므로, 수용된 재산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생산 수단으로 이용된다. 반면, 제14조 제3항에 따른 수용은 여러 다양한 공공복지의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므로, 수용된 재산이 그 재산이 원래 갖고 있던 기능이나 목적대로 사용된다는 보장은 없다.[73]
따라서 사회화의 경우, 공용 수용에 요구되는 ‘특정한, 공익의 측면에서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정당화 사유가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화의 목표는 생산 수단, 천연자원 및 토지의 이용이 갖는 사회적 성격에 맞게 소유권 질서를 조율・재조정하는 데 있다. 이로부터 “공동 소유 혹은 그 밖의 공동 경제의 제 형태”라는 문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해진다. 그것은 재화의 이용에 있어 사회적 형태를 조성하는 것, 즉 재화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사람 모두를 그 재화의 재산법적 이용에 참여시키는 것이다.[74]
헬무트 리더는 유명한 1951년 국법학자 대회 발표문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회화는 수용의 하위 범주가 아니다. 사회화는 그 자체로 고유한 제도적 본질을 갖고 있다. 수용은 구체적 행정 계획을 직접 실현하려는 ‘적극적 목표 설정’하에 행해지지만, 사회화는 특정한 재화에 대한 사적 소유를 허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유해한 결과를 제거하는 ‘소극적’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리더는 이로부터 앞에서도 언급한 시장 가치를 밑도는 보상의 정당성을 도출해 냈다.[75]
다만, 기본법 제정 이후 한 번도 현실에서 이용되지 않았고, 냉전 시대 ‘사실상 잊힌 조항’이 돼버린 제15조를 근거로 거대 임대 주택 회사 보유의 주택을 사회화하자는 운동을 누구나 지지한 것은 아니다. 특히 헌법학 내에서는 이를 두고 본격적인 헌법 논쟁이 벌어졌다.
베를린 주택 사회화 운동은 법 실무의 관점에서 보면 제15조에 대한 최초의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된다.[76] 따라서 이를 둘러싼 헌법 논쟁, 이데올로기 투쟁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사회화를 위한 국민 표결이 발의되자마자 법률가들은 각각의 전문가 자문 의견서를 발표하며 논쟁을 벌였다. 슈파이어대학교의 공법 교수인 요하임 빌란트(Joachim Wieland)는 독일 연방의회와 베를린시 의회 내 좌파당의 의뢰로 완성한 전문가 의견서에서 임대 주택의 사회화는 기본법 제15조에 의거, 베를린 법으로 시행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합헌 의견을 제시했다.[77] 반면 베를린주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한, 베를린자유대학교의 공법 교수인 헬게 조단(Helge Sodan)은 베를린의 가장 큰 주택 기업 협회인 BBU의 의뢰로 제출한 전문가 의견서에서 위헌 의견을 제시했다.[78]
현실에서 한 번도 실천된 바 없는 제15조 사회화 조항은 여러 법적 쟁점을 제기한다. 특히 무엇이 사회화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조건은 어떠한가, 그리고 그 경우 보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핵심인데, 이에 대한 판례는 아직 나온 게 없으며,[79] 관련 연구 문헌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80]
베를린 주택 사회화 운동을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다음과 같은 법리를 펼친다. 베를린 헌법 제23조 제2항은 재산권에 대한 침해 형태로 수용만 언급하고 있고, 사적 소유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침해가 될 사회화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므로, 베를린 국민은 연방 헌법상의 재산권 보장과 비교할 때, 더 강한 보호를 받고 있다. 더욱이 독일 통일 이후인 1995년에 국민 표결을 통해 베를린 헌법 제23조 제2항을 개정했는데, 이 조항은 사회화, 즉 ‘사기업을 국가 기업으로 변경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한다. 베를린 국민들은 여전히 생생한, 사회주의적 인민 소유에 기초한 동독 경제의 실패 경험에 근거해, 제2의 사회주의적 소유 질서가 등장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보는 게 맞다.[81]
헬게 조단의 의견도 유사했다. 그도 두 가지 반대 논거를 제시했다. 첫째, 베를린 헌법 제23조는 (행정) 수용만을 허용할 뿐, 사회화는 그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건전한 개념 이해”에 따를 때 사회화는 재산권 침해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둘째, 연방 헌법 제142조의 취지에 따를 때, 베를린 헌법이 기본법 제14조, 제15조보다 더 두터운 재산권 보장을 제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수 견해는 이러한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다. “베를린 헌법은 사회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사회화 금지로 해석할 수는 없다.” 사회화에 대해 아무런 내용도 담지 않은 “베를린 헌법의 공백은 기본법에 의해 메워졌다고 하겠다. 기본법 제15조는 베를린에도 적용된다.”[82]
요하임 빌란트는 1947~1948년 시기 베를린시 의회 의사록에 근거하여, 사회화를 배제하는 것이 당시 베를린 헌법의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헌법이 오히려 사회화의 허용성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다고 논증했다. 그에 따르면 1995년의 헌법 개정은 이러한 전통적인 헌법 상황을 유지한다는 취지로 이해해야 하므로 사회화는 가능하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기본법 제15조의 체계적 의미에 부합한다.
이 조항은 ‘경제 질서의 헌법적 개방성’이라는 헌법 제정 당시의 정파 간 합의, 즉 정치적 상황 여하에 따라 서독의 경제 질서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양방향 중 그 어느 쪽으로도 전개될 수 있다는 합의를 반영해 이를 규범화한 것이지, 제14조의 재산권 침해 구성 요건을 단순히 확장한 것이 아니다. 사회화 수권은 “당연히 재산권 보장과 함께” 기본법이 허용한 것이어서, 주 헌법이 이를 무효화할 수 없다. 또한, 주 헌법의 규정들은 기본법 제142조에 따를 때, “기본법 제1조~제18조와 일치하는” 한에서만 효력이 있다.
빌란트의 해석은 역사적으로 볼 때 설득력이 있다. 독일 기본법 제정 당시, 주 의회 대표자로 구성된 의회 대표자 회의의 회의록을 보면 사회화가 경제 헌법의 구조 변경을 위한 하나의 가능한 수단으로 언급되고 있다. 또한, 토지 개혁도 명목상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시행할 수 있다는 논의가 등장한다. 국가주의자인 보수 법학자 한스 페터 입센조차도 기본법의 “경제 정책적 결단”의 기본 부분에 해당하는 사회화 권한 덕에 법적 계속성의 단절 없이도 자본주의적 질서의 해체가 가능하다고 봤으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놀라울 정도다.
이처럼 헌법 논쟁을 포함한 여러 정치적 논쟁이 펼쳐졌지만, 2021년 9월 26일의 국민 표결에서는 투표에 참여한 베를린 유권자 57.6퍼센트가 주택 사회화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로써 국민 표결은 통과됐다. 80퍼센트가 임대 주택에 살고 있는 베를린 세입자의 단결과 투쟁, 호별 방문 등 이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성공의 요인이었다. 정치적 지형도 불리하지 않았다. 2021년 당시 베를린 연립 정부 중 좌파당이 수장을 맡고 있었던 건설부의 입장은 주택 건설 쪽이 아니라 사회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83] 이 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좌파당은 예전부터 시 정부가 선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민-지구 유지 구역의 전면적 확대, 장기간 공실로 비어 있는 빈집에 대한 강제 수용권 발동과 같은 정책을 추진해 왔다.[84]
과반의 찬성은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주택 사회화 정책을 반대하는 논리와 세력은 2019~2021년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만만치 않다. 베를린 건설부의 정책에 반대했던 베를린상공회의소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화를 정책 수단으로 사용하면 잠재적 투자자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줄 것이고, 그들의 투자 의욕을 잠재울 것이다. 임대인 보호라는 미명하에 실행된 정책들은 그것이 약속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을 뿐이다. 임대료 상승에 대한 제동 장치, 주민-지구 유지 구역 지정을 통한 보호 조치, 시 정부의 선매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주택 임대료는 전 방위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게 우리가 매일매일 겪고 있는 현실이다.”[85]
베를린상공회의소 회장은 자기도 모르게 문제의 핵심을 말해 버렸다. 그의 말마따나 앞서 검토했던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의 주택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 아닌가? 예컨대 주택이 매매되는 과정에서 임대료 폭등의 조짐이 보이면, 시 정부가 매매에 개입해 우선적으로 주택을 매입하고, 향후 이를 시영 주택 등으로 운영하는 조치인 자치 단체의 선매권만 해도, 이를 행사할 수 있는 아주 엄격한 조건 때문에 사실상 극히 일부의 사례에서만 적용될 뿐이지 않은가? 주택 사회화와 같은 정책을 추진할 때는 물론 신중해야 한다. 다른 수단으로는 주거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을 때 사실상 최후의 방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수단이 주택 사회화인 것도 맞다. 그러나 다른 수단이 사실상 없지 않나?
법리적으로 해석하면, 그의 말은 사회화 조치가 비례 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헌법상 비례 원칙 혹은 과잉 금지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침해의 최소성이다(최소 침해의 원칙). 이것은 도시민의 주거 안정 및 주거권 보장을 위해, 사회화 조치보다 덜 침해적이면서도 목적 달성이 가능한 다른 수단이 있을 때는 사회화 조치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도 인정했듯이 주민-지구 유지 구역 지정을 통한 보호 조치, 구청의 선매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상승하고 있다면 남은 것은 사회화 조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주택 사회화 운동 이전에도 세입자 단체는 사안별로 강제 퇴거에 반대하는 것에서부터, 주민 구성 변경을 초래할 개발 반대 운동을 해왔다. 그러다가 더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사회화 운동을 정치적 의제로 내세웠던 것이다.[86]
합헌론자들도 바로 이 점을 파고든다. 그리고 이 논쟁은 2021년 9월 26일의 국민 표결 이후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의 국민 표결은 법적 구속력이 없으나 베를린시 정부는 대체로 국민 표결을 수용해 왔다. 그러나 2021년 말에 새롭게 사회민주당-녹색당-좌파당의 연립 정부의 수장이 된 기파이(Franziska Giffey) 시장(사회민주당)은 이 국민 표결을 즉각적으로 실천할 의지가 없었다. 그러다가 2023년 3월의 재선거 이후 정권을 잃고 재차 기독교민주당-사회민주당의 대연정이 시작되자, 기파이는 재빠르게 건설부 장관으로 변신해 해결책은 더 빨리, 더 많이 건축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2023년 3월 재선거 과정에서 기파이는 주택 사회화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물론 보수파인 기독교민주당의 시장 후보였으며 현재 시장인 카이 베그너(Kai Wegner)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두 당의 연정 협상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포함됐다.
만약 “도이체보넨과 같은 주택 임대 회사의 주택을 수용하자”는 국민 표결의 결과를 실행하기 위해 시 정부가 소집한 전문가 위원회가 사회화가 헌법에 부합한다고 확인해 준다면, 베를린 연립 정부는 사회화 기본법을 의결한다. 이 법률은 생존 배려를 위한 사업 영역(수도, 에너지, 주거 등)을 기본법 제15조에 의거해 사회화하기 위한 법률상의 기본 틀과 객관적 정성적 지표 및 기준, 그리고 사회화에 따라 요구되는 적절한 보상에 관한 원칙들을 정의한다. 법률은 비례 원칙도 준수해야 한다. 법률은 공포 후 2년 후에 발효한다.[87]
전문가 위원회는 2022년 3월 29일 베를린시 정부에 의해 소집됐다. 13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동 위원회는 2023년 6월 28일 153쪽 분량의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88] 이 보고서에서 위원회는 다수 의견으로 합헌적인 사회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베를린시는 (주택) 사회화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갖고 있다는 점, 사회화를 통해 주택이 수용되는 기업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재선거 운동 과정에서 주택 사회화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현 시장이 이 문제에 적극적일 가능성은 없다. 그는 문제 해결을 질질 끌 것이다.
실제로 연정 협상문에 명시돼 있는 것은 ‘사회화 기본법’의 제정 의무다. 이 기본법은 주택 사회화를 위한 대강(Rahmen)을 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택 사회화 운동 측에서는 사회화 기본법이 아니라 ‘주택 사회화법’을 바로 제정하라고 반박한다. 이런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 연정 협상문에도 불구하고 주택 사회화를 향한 길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그래도 베를린 사람들은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베를린에 이어 함부르크에서도 2021년에 주택 사회화 투쟁이 시작돼 국민 표결을 향한 시민 조직화가 이뤄지고 있다.[89] 부침과 일진일퇴가 있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주택 사회화 투쟁의 선구자로서 베를린의 세입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끝까지 감당하려고 할 것이다.
베를린에서의 정치적 논쟁을 지켜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도시가 있다. 바로 오스트리아 빈이다. 이미 민영화된 주택들을 다시 사회화하자는 운동을 보면서, 빈 시민들은 ‘왜 베를린 시민들은 시 정부가 공영 주택을 민간에 넘기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하고 한탄한다. 빈의 시 정부는 “사회적 평화와 지불 가능한 임대료로 살아갈 수 있는 주거 공간의 유지를 위한 적절한 개입”이 주택 정책의 요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영 임대 주택을 여전히 다수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했다.[90] 그러나 빈에서도 위기의 순간은 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1990년대는 민영화가 본격 시작된 시기다. 이 시기, 국영 기업과 시영 주택들이 헐값에 매각됐다. 심지어 정치가들은 수도 공급과 같은 아주 민감한 영역도 개인 기업의 손에 넘기려고 했다. 오스트리아라고 다르지 않았다. 당시 빈의 연립 정부에 참여한 오스트리아국민당(ÖVP)은 게마인데, 즉 시가 갖고 있는 주택을 매각하는 안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그때 연립 정부의 제1당이었던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SPÖ)의 실행 계획을 저지하고 나선 정치 세력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녹색당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도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적극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오스트리아사회민주당은 기존의 게마인데 보유분을 단지 유지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더 늘리려고 한다.[91] 이로써 100년 전, 생동하는 노동자 문화가 만들어 낸, 그러면서도 독일과는 다른 방식의 사회 주택 개념 — 한번 사회 주택은 계속해서 사회 주택으로 유지한다 — 을 갖고 있는 ‘붉은 빈’은 계속해서 우리 시대의 정신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베를린상공회의소 회장과 같은 공급파들은 수요에 맞게 주택을 더 많이, 더 높게, 더 조밀하게 짓는 것이 베를린을 살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배분파는 그것이 베를린을 죽인다고 반박한다. 배분파는 공급파의 주장대로 하면 ‘도시는 승리’할지 모르나, 도시민들은 패배하며, 도시는 부자가 되지만 도시민들은 비참에 빠진다고 말한다. 도시가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것일 뿐이라는 공급파의 인식에, 배분파는 도시가 가난한 사람들을 내쫓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맞선다.[92] 두 세력의 싸움은 결국 주택 정책의 중심을 시장에 둘 것인지 아니면 국가에 둘 것인지 하는 대립의 문제이기도 하다.
독일 제국이 출범한 1871년부터 2023년의 현재까지 150년 동안 독일의 주택 정책을 놓고 대립해 온 이 두 세력의 싸움은 현재도 진행형이다.[93] 그리고 이 대립은 미래에도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주택은 언제 충분한가, 혹은 언제 부족한가? 주택이 충분한지 부족한지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독일의 경우 주택 부족이 심각하다고 여겨지던 1920년대에도 “주택 부족이 아니라 주택 배분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독일에서 시장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정당인 자민당에서는 주택을 더 싸게, 더 많이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재 주택은 부족하지 않으며 문제는 소득 하위 계층이 도심에서 주거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전혀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94]
공급파들은 ‘도시를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도시가 그런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면 더 높이, 더 효율적으로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은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적 삶을 전제로 한다. 그들은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러면서 이것 외에 무슨 대안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반면, 배분파는 공급이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주택 단지 조성 등이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현재의 건물을 기후 위기 시대에 맞게 수선하고, 특정 회사나 개인이 독점하고 있는 주택 스톡(stock)을 잘 배분하는 일이라고 반박한다. 공급파들이 개발이 극히 제한돼 있어서 전 세계에서 모인 엘리트들만이 살 수 있는 도시가 돼버린 파리의 사례를 들고 나오면 배분파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사람들이 적절한 가격의 집을 구할 수 있도록 건물을 더 많이 짓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기존 주민을 쫓아내지 않고 그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면서 행복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않는 개발과 공급은 위험하다.[95]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베를린이 기로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베를린은 사회 국가 성립 이전인 19세기 말에 이미 사회 도시(sozialstadt)라는 선구적 형태를 선보인 도시다. 게다가 2차 대전 이후에는 사회 주택을 발전시켜 왔다. 이런 독일과 베를린에서라면 글레이저 같은 ‘도시의 승리파(공급파)’가 간단히 다수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배분파의 상대적 우위가 앞으로도 유지된다면, 우리는 ‘도시 발전에서 베를린의 길’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 것이다. ‘도시성의 새로운 패러다임’[96]을 제시할 그 길은 베를린을 ‘반란의 도시’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