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는 《주택문제에 대하여》 에서 마드리드 신문 〈해방〉의 1872년 3월 16일 자 기사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지배 계급의 가장 현명한 지도자들은 언제나 소(小)소유자의 수를 증가시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항하는 군대를 양성하려고 애썼다. 전 세기의 부르주아 혁명들은 귀족 및 교회의 대토지 소유를 분할해 분할지 소유로 세분했으며(오늘의 스페인 공화주의자들도 아직 스페인에 존재하고 있는 대토지 소유에 대해 바로 이렇게 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토지 소유자 계급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그 후 사회의 가장 반동적 요소로 변했으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운동에 대한 끊임없는 걸림돌이 됐다.”[1]
한국의 주택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엥겔스가 인용한 이 비판을 자주 떠올린다. 한국에서 국가는 줄곧 도시와 주거 문제가 ‘정치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동시에, ‘자가 소유(권) 전략’을 통해 도시 문제를 비판하는 세력들, 주거 문제에 대안을 말하려는 세력들을 체제 내로 포섭해 왔다.[2] 그렇다고 대중들이 이 전략에 수동적으로 포섭된 것은 아니다. 주택 구매 시장의 예비적 소비자인 중간 계급은 물론이고, 노동 계급 또한 주택 문제의 해법을 집합 주택의 조성이 아닌 임금 인상과 기업 복지를 통한 내 집 마련에서 찾았다.[3] 이는 노동조합이 노동자 집합 주택 건설과 공급 등을 통해 주거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 매진해 온 독일 사례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모든 사람이 ‘내 집 장만’ 이데올로기에 포획돼 집주인 되기 경쟁을 하는 동안 주택의 탈상품화나 주택 사회화를 위한 투쟁은 방기(放棄)됐다.
한국에도 주거권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과 그 주변 지역에서 오랫동안 펼쳐진 주거권 투쟁은 독일과 베를린의 주택 투쟁에 못지않게 치열하고 처절했다. 1971년의 광주 대단지 투쟁, 1985년 목동, 1986년 상계동, 그리고 1987년을 전후로 사당3동, 오금동, 신당동, 사당2동, 돈암동, 창신3동 등 20여 곳에서 철거 반대 투쟁이 벌어졌다. 투쟁은 1988년에는 도화동, 홍은동, 신정동, 전농동, 서초동 꽃마을, 석촌동, 신가촌, 남현동 등 수십 개 지역으로 확대됐다.[4] 이런 투쟁을 통해 도시 빈민들은 1989년에 마침내 25만 호의 영구 임대 아파트 공급 계획이라는 정책적 변화를 쟁취해 내기도 했다.[5] 그러나 주거권 투쟁은 1987~1992년 시기 결정적으로 변화한다. 김명수에 따르면 이 시기에 주거 운동의 이중적 전환이 이뤄진다.
1차로 운동은 주거(생존)권 운동과 소유권 운동으로 갈라섰다. 동시에 1차 분기의 뒤를 이으면서도 그와 나란히 진행된 자가 소유 운동으로의 2차 수렴이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주거권 발달을 억제한 데 그치지 않았고, 개인주의적 생활양식의 확산을 통해 부정적인 사회 효과를 만들어 냈다.[6] 베를린의 주택 점거 투쟁과 그를 뒤이은 주택 사회화 운동이 끊임없이 주택 소유의 문제 혹은 주택 소유권 확대 전략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사회적 도시와 공동체적 삶을 환기해 온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만, 베를린에서도 현재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부동산 소유 계층과 저소득 및 중간 소득 계층 사이의 양극화가 심화하며 주택 시장이 사회에 점점 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앞서 본 것처럼 베를린 주택 사회화 운동의 앞길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국민 표결에서 베를린 ‘국민’ 57.6퍼센트가 주택 사회화 정책의 큰 틀을 ‘결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결단은 법률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국민 표결과 함께 치러진 베를린시 의회 선거에서 제1당이 되어 베를린시장이 된 사회민주당의 기파이는 애초부터 주택 사회화에 시큰둥했다. 기파이는 주거의 위기를 공급파의 관점에서 돌파하려고 했다. 그이가 시장으로 취임했을 당시에는 여건도 좋았다. 전임 시장 시절 좌파당이 맡았던 도시 개발 및 주택부 장관직을 다시 사회민주당이 가져왔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의 전통적 노선은 “건설, 건설, 건설! 나머지는 시장에 맡기기”다[7]. 그들은 기존 질서의 변경에 적극적이지 않으며 행정 관료들이 제시하는 방안을 충실히 실행한다는 평가를 받는다.[8]
2021년 9월 치러진 선거 직전, 당시 시장이었던 사민당의 뮐러는 시민들의 주택 사회화 운동의 예봉을 무디게 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매각한 주택의 재매입이었다. 베를린의 양대 임대 기업인 도이체보넨과 보노비아는 합병을 추진하면서, 합병에 대한 시의 정치적 승인을 얻을 요량으로 자신들이 보유한 주택 중 2만 호를 시에 매각하기로 뮐러 시장과 비밀리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2021년 9월에 실제로 실현됐다. 시가 매입한 주택 수는 1만 4750호, 매입 가격은 24억 6000유로, 한화로 약 3조 3000억 원이었다. 2022년 1월 1일 이후 3만 명의 신규 세입자들이 이들 주택에 입주했다.[9] 이 정도 규모의 재매입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기존의 선매권 행사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기업의 양보였는가? 내실을 따져보면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매입된 것은 베를린시가 15년 전에 헐값으로 매각한 공영 주택들이었다. 이들 주택은 1960~1970년대 지어진 이래 관리가 거의 되지 않았다. 시는 15년 전 매각 당시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고 이를 재매입했지만, 매입 후가 더 문제였다. 시와 공영 주택 회사는 엄청난 비용을 투입해 이들 주택을 수선하든지, 아니면 그냥 방치하든지를 선택해야 한다. 전자를 택하면 신규 주택 건설을 위한 재원은 거의 바닥나게 될 것이고 후자를 택하면 입주민의 삶의 질이 떨어질 것이다. 이러니 돈은 기업이 벌고, 방치한 주택을 보수하는 비용은 사회가 떠안게 됐다는 얘기가 나왔다.[10]
현실은 이처럼 만만치 않다. 한편으로는 저항하는 베를린 시민들의 조직력에 감탄하면서도 심각한 주택 문제를 현재의 정치 지형에서 과연 바꿀 수 있을까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건설과 공급 확장 대신 주택 배분의 정의를 추구하고, 주택을 사적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논리를 후퇴시키고 주거의 문제를 공공의 책임으로 확실하게 정립해 나갈 수 있을까?
상황이 좋지는 않으나 이 만큼이라도 성과를 내며 도시민의 투쟁을 이어 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런 수준의 투쟁과 운동을 한국에서, 특히 서울에서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소득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임대료를 내고 살 수 있어야 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복지 국가가 추구해야 할 당연한 목표다. 다만, 앞서도 보았듯이 그 복지 국가 혹은 복지 국가 원리가 등장하고 관철되는 것은 각 국가의 역사적 특질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11] 그래서 자유주의 레짐의 한국 복지 국가에서 실행된 도시 및 주택 정책,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투쟁과 운동이 보수주의 혹은 조합주의 레짐의 독일 복지 국가에서 실행된 도시 및 주택 정책,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도시민의 투쟁과 운동을 참고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독일에는 독일 사람이 살고, 한국에는 한국 사람이 산다. “도시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특유의 걸음걸이를 지니고 있다.”[12]
사실, 복지 국가 레짐의 차이보다도 더 중요한 지점은 주택을 상품으로 보는 논리에 대한 비판 정신을 한국의 중간 계급과 노동 계급이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내 집에 갇힌 사회”의 대중은 “생존과 투기 사이에서” 각자도생하며, 소유(권)에 대한 진지한 이의 제기를 포기했다. 독일에서 주택 점거 운동이 주택의 탈상품화나 보편적 주거권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면, 한국에서 노동 계급의 주택 투쟁은 내 집 마련을 위한 평등한 기회 확대를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소유권 신화는 더욱더 강고해졌다.[13] 재개발조합, 재건축조합을 통한 주택(아파트) 건설이라는 해괴한 한국식 주택 공급 방식은 주거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토지를 소유한 조합원 간의 다툼, 땅 주인, 집주인 혹은 무허가 주택 소유자인 조합원과 세입자 간의 다툼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국가와 자본에 맞서는 ‘집 없는 사람들’의 연대를 봉쇄했다. 그 과정에서 ‘똘똘한 한 채’에 대한 소유적 개인주의의 욕망은 한층 더 커졌다.
한국인들은 세상이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불평등 원인에 대한 많은 객관적인 연구와 논의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 못하며, “불평등의 문제를 함께 풀어 가는 것보다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14] 사회가 불평등하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해결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을 잘하지 못한다. 주거 불평등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베를린의 주택 점거 운동과 그것이 가져온 변화들, 11개의 공룡 임대 주택 회사가 보유한 주택 24만 호를 사회화하자는 베를린의 국민 표결 운동을 보면서, ‘경의선 공유지 운동’ 같은 프로젝트가 대중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는, 갭투자니 뭐니 하는 말이 횡행하는 서울을 떠올렸다. 대중만 그러한가? 주택 사회화 같은 주제에 대한 법률가들의 무관심과 적대적 태도는 또 얼마나 심각한가? 한국의 법학자 및 법 실무가들은 도시민 모두가 ‘인간의 존엄에 부합하는’ 주거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끔 소유권 독재를 제어할 법리를 상상하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어떤 민법 연구자는 경의선 공유지 운동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국 재화에 대한 타인의 사소유권을 부정하고, 기존의 소유권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보인다. (…) 경의선 국유지 운동 관련 시민 단체가 자신들이 국유지를 무단 점유하여 사유화하였음에도 ‘경의선 공유지를 활용하는 우리가 어떤 피해를 주었는가?’고 항변한 것도 자신들의 사유화는 커먼즈 혹은 공(共)이라고 규정하면서 합리화하면서, 타인의 사소유권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근대 사회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개인을 긍정하고 개인의 소유를 보장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이루고자 하였는데, 커먼즈 운동은 이러한 근대의 성취를 뒤로하고 개인을 다시 집단에 예속시키려는 퇴행적 운동이라고 할 것이다.”[15]
이 글의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경의선 공유지는 명목상 국유지이다. 국유지를 모든 사람이 나눠서 사용하자고 하는 것이 왜 무단 점유가 되는가? 시민 단체들이 국유지를 “사유화”하겠다고 나서기 훨씬 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국유지는 이미 정치가와 고위 관료들이 사실상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국가 소유의 사유지”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법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한다.[16]
베를린의 도시에 대한 권리 투쟁을 추적하다 보면, 제도와 정당과 정치가 어쨌건 그 투쟁에 반응하는 프로세스를 접하게 된다. 2013년의 독일 민법 개정 이후 강화된 전국 단위의 임대료 규제 외에 2020년 베를린이 별도의 임대료 상한 규제를 시행한 것도 그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비록 ‘베를린 주택 임대료 제한법’은 연방헌법재판소 제2재판부에 의해 위헌 판정을 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고 계속해서 (법률) 투쟁을 해나가는 것이다.[17]
나는 베를린의 사례를 연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볼 때가 많다. 오랜 도시 빈민 투쟁에도 불구하고 쫓겨나지 않고 살던 곳에서 살 권리를 쟁취하는 데 실패한 사회, 주택 점거 투쟁을 그저 좁은 형법적 사고 안에서만 단죄해 온 사회가 베를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주택 사회화 운동 같은 것을 과연 조직해 낼 수 있을까? 그러나 용산 참사, 궁중족발 사례처럼, 타인의 생명과 생존권을 대가로 건물주에게 ‘아주 많을 돈’을 벌 권리를 보장하는 이 체제를 언제까지 견뎌야 할까?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이미 1975년의 ‘주택 전용 금지법’ 사례에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사적 소유권은 공공의 복리를 위해 행사돼야 한다는 헌법적 요청은 그 소유권의 객체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동료 시민(Mitbürger)의 이익을 배려해야 한다는 명령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주택을 마음대로 전용하고 “소유권을 현재보다 더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회”만 있으면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도 되는 것”, 그런 것은 인정할 수 없다. 특히 그와 같은 이용 가능성은 “주택의 공급이 불충분한 경우에는 헌법상 보호되지 않는다.” 건물주를 ‘조물주’ 위의 존재로 만들어 그에게 자기 능력껏 최대한 많은 돈을 벌 기회를 주는 것이 헌법의 명령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도시에는 45년을 세입자로 살다가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못 나가겠다고 소송을 거는 사람이 살고 있고, 어느 도시에는 2년 혹은 4년마다 폭등하는 전세,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메뚜기 신세처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살고 있다. 어느 도시는 더 많은 임대료를 받아낼 요량으로 주거 공간을 상가로 바꾸기 위해 임대차 계약을 해지한다거나, 인간다운 삶에 부합하는 최저 거주 면적, 최저 필요 시설을 갖춘 주거 공간을 쪼개, 이 공간을 의도적으로 거주 불가능한 상태로 만든 뒤 임대하는 행위를 모두 금지하지만(독일 민법 제753조 제2항 제3호 제2문; 주택 전용 금지법 등 참고), 어느 도시는 쪽방을 이용한 약탈적 임대 행위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방임하며, “청년의 피를 빨아 먹는 임대업자”가 판을 치게 놔둔다.[18] 그뿐인가? 그 도시에서는 전세 사기에 내몰린 사람들이 생을 포기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런 격차와 비참을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치고, 또 실제로 죽어 나가는데 그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정치란 과연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퇴거 과정에 휩쓸린 여덟 가정을 민족지학적 방법으로 추적한 한 사회학자는 참여 관찰을 마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난장판에서 어떤 식으로 빠져나오든지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어떤 미국적인 가치로도 이렇게 심각한 불평등을, 기회의 박탈을, 기초적인 필요에 대한 냉정한 거부를, 무의미한 고통에 대한 이 같은 공모를 정당화할 수 없다. 어떤 도덕률이나 윤리적 원칙, 성서의 어떤 말씀이나 성스러운 가르침을 소환해도 이 나라가 처하게 된 지금의 상황을 변명하지는 못한다.”[19]
‘시민 운동가’ 출신이 (서울)시장을 세 번이나 해도 시민 없는 도시 정치가 횡행하는 현실을 이제는 바꿀 때가 됐다. 자본의 투자 계획이 아니라 ‘시민의 목소리 듣기’에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도시 정치를 만들어 나가야 할 때다. 당장엔, 영등포, 대전, 그리고 서울역 앞 동자동에서 ‘투쟁’ 중인 공공 주택 사업에 도시민으로서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20]
“도시는 공물이다.”[21] “주택은 상품이 아니다!” 우리도 이것을 말로만 해서 안 된다. ‘대장동 사건’에 분노했다면, 그 마음을 모아 ‘주택 사회화’라는 전략과 방향을 함께 연구하고, 토의하며, 도시민 투쟁을 조직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도시와 도시민이 사는 길이다. 왜냐하면 도시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반란의 도시, 베를린”이 “착취 도시, 서울”에 주는 이 소중한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귀 기울이기를 희망하며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