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냥터에 산다
사회학자 하인츠 부데(Heinz Bude)는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 안고 있는 보편적 문제로 불안을 꼽는다.[1] 많은 이들이 추락에 대한 염려, 경쟁 사회에서 제거될 수 있다는 불안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청년 세대는 취업 및 결혼이나 내 집 마련에 대한 불안을, 중·장년층은 자녀의 교육과 양육, 결혼에 대한 염려와 노후 불안을 안고 산다. 노년층은 빈곤층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데 두려움을 느끼며 자녀에게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줄까 노심초사한다.
실직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만 불안한 것이 아니다. 정규직 노동자나 자영업자, 전문직 종사자, 공무원도 직업 안정성에 대해 우려하고 노후 불안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특정 세대나 계층, 직업을 가리지 않고 불안이라는 정서가 나타난다. 여기에 정치 문제, 갑작스러운 사고와 질병에 대한 염려, 천재지변, 전쟁, 테러 등 다양한 불안이 가중된다. 한국인 모두가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불안의 시대다.
우리는 왜 불안할까? 불안은 인간의 실존 문제와 분리해 논할 수 없는 삶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의 거장이 불안을 실존 문제의 중요한 화두로 다룬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감염성 강한 집단 불안은 본성에만 기대어 설명하기에 무리가 있다. 지금의 불안은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집단 불안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이 적절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우리가 이전에 마주한 적이 없는 일련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강조한다. 역사의 국면이 고형적(solid) 단계에서 유동적(liquid) 단계로 바뀌었다.[2] 세상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던 사회 구조와 제도가 사라지고 있다. 국민 국가의 권력은 약화되고, 정치는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사회의 결속과 유대도 와해되고 있다. 개인의 실패나 불행을 보호했던 장치가 사라지고 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계획하고 행동했던 삶의 양식은 붕괴했다. 개인은 이제 끊임없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맡아야 한다.[3]
유연성으로 귀결되는 이런 변화는 급속한 정보화와 신자유주의의 여파다. 사람들은 결혼, 이혼, 출산, 취업, 투자, 소비, 여가, 이직, 이주 등을 혼자 힘으로 기획하고 결정하며, 스스로 자신의 경력을 만들어 가야 하는 개인화 사회를 마주하고 있다. 개인에게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는 사실 보호 장치의 소멸, 과잉 경쟁과 양극화의 위험을 내포한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려 있다. 개인이 어떤 선택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은 선택에 따른 위험을 감수할 의무도 개인에게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자도생은 솔깃한 메시지가 된다. 필사적으로 노력해 살아남는 것, 즉 독자적 생존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가장 절실하고 긴요한 과제다. 화려한 경력은 자아실현과 출세의 조건이 되지만,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의 결과이자 끊임없는 스펙 사냥의 과정일 뿐이다.
바우만은 오늘날 생존을 위해서는 사냥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전엔 사냥터지기의 자세가, 근대에는 정원사의 자세가 필요했다. 사냥터지기가 밀렵꾼의 덫을 찾아내고 사냥꾼의 침입을 막아 자연의 균형을 지키는 자였다면, 정원사는 설계도에 따라 정원에 적합한 식물들을 심고 잡초라 명명된 것들은 뽑아 가며 정해진 틀을 강요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사냥꾼의 관심은 자연의 균형도 아니고 잘 고안된 정원의 디자인도 아니다. 오로지 자루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사냥감을 죽이는 것에만 신경 쓴다. 분별없는 사냥으로 숲이 망가져 사냥감이 고갈되면, 사냥감이 우글대는 또 다른 숲으로 옮겨 가면 될 뿐이다. 현대 사회는 어떤 온정이나 생태학적 양심도 기대할 수 없는 사냥터 같은 세상이고, 우리는 모두 사냥터 한복판에 내던져진 외로운 사냥꾼에 불과한 존재들이라는 게 바우만의 시대 진단이다.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자세는 사냥꾼이 되는 것 또는 사냥꾼의 자세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사냥감으로 전락하거나 사냥꾼의 대열에서 추방될 수 있다.[4] 현대인이 공유하는 불안의 현주소는 여기에 있다. 어떤 희망도 희망할 수 없는 사회에서 불안이 싹튼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
1997년의 외환 위기 이후 덕담으로 등장한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이 시점에 한국인의 심성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이 밀려드는 물질적 가치에 전도된 시점이었다. 취약 계층은 물론 중산층을 자처하던 사람들까지 실직과 도산으로 거리에 내몰린 경험에서 얻은 교훈은 미래가 너무나 불확실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는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만성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제는 더 열심히 일해도 계급 사다리를 올라갈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사노라면 옛이야기하고 살 때가 올 것’이라는 어른들의 위로는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에게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조롱에 가깝다. 이런 정서는 ‘티끌 모아 봐야 티끌’, ‘고생 끝에 골병 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더 피곤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늦었다’ 같은 인터넷 유머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런 문구가 온라인 세계에서 명언으로 회자되는 것은 현실의 정곡을 찌르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 불안의 한국적인 특징은 불안의 연계화, 중층화, 복합화다. 한국에서 불안은 생애 과정 전체에 걸쳐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10대는 명문 학교 진학을 위한 학업 불안을 겪고, 20~30대는 취업 불안과 주거 불안에 시달린다. 30~40대의 중·장년은 일자리 불안과 승진 불안을, 40대 이후에는 건강 불안을 포함한 노후 불안, 노부모 부양에 대한 불안을 겪는다. 부모와 직계 자녀로 구성된 가정에서 두 세대의 불안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도 한국의 특징이다. 자녀의 학업, 취업, 결혼, 주거 불안과 부모의 고용 및 승진, 노후 불안 등이 중첩되어 있다. 불안의 성질도 계속 달라진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 인구 감소와 급속한 고령화로 인한 복지 수요의 팽창, 가족 제도나 가족 의식의 변화로 인한 보호 기능의 약화 등은 불안을 고도화한다.[5]
한국은 단기간에 유례없는 발전을 이룬 국가다. 식민과 해방, 전쟁과 분단, 산업화와 군부 독재, 외환 위기와 세계화, 정보화라는 질곡을 거치며 절대 빈곤국에서 경제 강국으로 변모했다. 빠른 발전은 복합적인 사회 문제를 만들었다. 자랑스러운 성장 신화의 부작용인 부정부패, 전쟁이나 재난 위험, 사회 안전망의 부재 등이 불안과 갈등의 위험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성장의 결실을 분배하기도 전에 맞은 신자유주의의 파고로 경쟁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상화됐다.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구제해야 한다는 초개인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초개인주의는 자기 해방과 자율성, 동등성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와는 다른, 개인의 성취와 자기 충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다.[6] 이런 현실은 자기 통치나 자기 착취가 강제되는 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패배하거나 낙오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심리를 추동한다.[7] 강박은 다시 패배와 낙오에 대한 두려움을 낳고, 경쟁을 강화하는 악순환 고리를 만든다.
불안은 개인을 넘어 사회를 파괴한다. 상대방을 패배시켜야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생존 경쟁은 극단적인 피로와 탈진으로 이어지고, 더 나은 삶을 꿈꾸기 힘든 하루살이 인생은 불안을 가중한다.[8] 불안은 개인에게 막연한 두려움이다.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을 수 있다’거나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실체 없는 불안은 사회적 불안이 개인의 삶으로 전이된 결과다.[9]
존중 품귀 사회
최근 들어 한국 사회에서 불신은 서로 믿지 못하는 단순한 수준을 지나, 반감을 동반한 불신으로 깊어지고 있다. 국민대통합위원회 연구 팀이 성별, 계층, 지역 및 생애 과정이 서로 다른 성인 남녀 105명을 인터뷰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이 한국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과 감정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10] 한국을 어떤 사회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공정 사회나 평등 사회, 민주 사회와 같은 긍정적인 답변보다 불신 사회, 경쟁 사회, 학력 중심 사회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양극화와 부패, 과로 같은 키워드도 함께 등장했다. 이런 사회에 느끼는 감정은 불신과 분노, 실망, 혐오 등이었다. 그리고 불신은 한국 사회의 양극화라는 계급적 상황과 결합해 서로에 대한 적대감으로 비화하고 있었다. 빈부 격차가 개인의 노력이나 재능과는 무관하게 고착화되어 있으며, 상하층은 자산이나 거주지뿐 아니라 교육, 소비, 의식에서도 단절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 응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관계도 차이가 있죠. 상층하고 하층이 나뉘어 있기 때문에 상층은 기름이고 하층 사람들은 물이에요. 그러니까 물이 기름을 쫓아갈 수 없고 기름이 물 아래로 내려올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게 분명하게 나뉘어 있어요. 레벨이 안 맞아서 놀기도 싫은 거야. (주부, 61세)
우리 사회의 불신이 서로를 믿지 않는 수준을 넘어 증오감을 동반한 적대 의식이 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부실한 위험 관리 시스템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 수많은 피해자가 있어도 처벌은 강자를 피해 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기득권은 노력이라는 말로 장시간 노동과 임금 착취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계급 격차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유행어가 된 ‘헬조선’은 부조리 가득한 한국이 지옥 같다는 자조다.
세상이 앞으로 바뀌지 않을 것 같을 때, 절망은 원한(ressentiment)이 된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더라도 보다 나은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면 현실을 바꾸기 위한 연대의 사회 운동이 촉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는 불만이 극에 달해 원한에 이른 상황인데도 저항이나 희망보다 포기의 정서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정규직은 줄어들고 계약직, 보조직, 시간제 근무 등 새로운 형태의 자영업이 증가하는 현실에서 착취당할 기회도 없는 무업자(無業者)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무력감 또는 회피로 귀결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포기의 정서는 내화된 공포를 보여 준다.
계급 격차는 봉건 시대의 신분제처럼 대물림되고 있다. 개인의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격차는 갑질을 낳고, 대다수의 을은 ‘무언가 불의의 것이 일어났다’고 느낀다. 사회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모멸로 인한 고통이 개인 차원의 경험일지라도, 타인에 대한 인정이나 무시가 한 사회의 규범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감정이라고 했다.[11] 사람들은 무시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데, 박탈감이 원한으로 심화되면 그 방식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사회 질서를 회복하는 긍정적인 방향보다 손쉬운 단죄의 대상을 찾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상층은 하층을, 하층은 상층을, 여성은 남성을, 남성은 여성을, 청년은 노인을, 노인은 청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비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