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미디어 유저들은 다른 사람이 먼저 다녀온 경험을 보면서 그 장소가 가볍게 뒷산 오르듯 방문할 만한 곳인지, 기분 전환이 될 만큼 탁 트인 느낌을 주는지, 어린아이를 데리고 갈만한 곳인지,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등을 탐색한다.[6] 내가 가지 않았어도 누군가의 여행 얘기를 듣는 것처럼, 우린 그 장소에 대한 인상과 생각 그리고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소셜 미디어는 새로운 방문객을 유인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7] 어딘가로 떠나기 전에 검색창을 열고 그 장소를 검색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이젠 여행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달리 말하면 장소 탐색의 단계에서, 소셜 미디어 활용은 필수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장소 방문 후기나 감상을 남기는 일이 일상화된 이후 지방자치단체들도 같이 바빠졌다. 지역을 방문한 흔적이 온라인에 남기 시작하면서 지역별 관광 통계는 지자체가 눈여겨보는 통계가 됐다. ‘한국관광 데이터랩’[8]은 지역별 관광 현황을 방문자 수와 특성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 언급량과 트렌드도 분석해 제시한다. 우리 지역의 인기 관광지가 어딘지, 맛집이 어딘지까지 신용카드 데이터와 내비게이션 데이터를 분석해 알려 준다. 이러한 지역 장소 방문 정보의 세밀함과 엄밀함 그리고 방대함은 지역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우리 지역 장소의 매력이 어떻게 다른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지역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를 비교할 수 있게 됐다. 관광 현황 통계는 부문별 점수와 등수가 매겨진 ‘장소 매력 성적표’다.
우리 지역이 몇 등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방문한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어떤 체험을 했고 무엇을 맛있게 먹었는지, 다음에 또 방문할 생각이 있는지 파헤쳐야 한다. 지역에 방문한다는 것은 관광객 유치를 의미하며, 이는 지역 내 소비 증가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포털을 활용한 장소 마케팅이 뜨거워졌다. 더 근사하고 눈길을 잡아끄는 콘텐츠로 방문객 수를 늘려야 한다.
사진이, 기억에 남을 이미지가 중요해졌다. 매일 콘텐츠를 고민하는 개인 소셜 미디어 유저들도 마찬가지다. ‘좋아요’와 팔로워 증가를 견인하는 멋진 콘텐츠는 사진에서 출발한다. 지역의 유명 장소들, 지역 홍보물과 관광 홈페이지의 지역은 일정한 방향의 아름다움을 지닌 채, 특정한 프레임에 담겨 인터넷 포털과 소셜 미디어에 전시된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도시와 장소, 지역을 알리는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와 사람들의 인스타그램, 블로그에 올린 사진들은 꽤 닮았다.
‘좋아요’가 쌓이면 장소를 잃는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서 더 많은 ‘좋아요’를 얻기 위해 우린 ‘모두 좋아할 법한’ 장소를 찾고, ‘누구나 공감할 것 같은’ 예쁜 이미지를 만든다. 적당한 품질과 납득할 만한 가격을 갖춘 기성품처럼, 내가 가본 장소들은 소셜 미디어란 판매대 위에서 비슷한 포즈로 진열돼 있다. 사진을 찍을 땐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내가 소셜 미디어에서 자랑한 장소들은 그저 그런 공간처럼 보일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공간을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로 정의[9]한다. 존재의 위치와 사건의 발생을 가정한다는 면에서 공간은 가능성을 지닌 빈자리 혹은 여지(room) 라 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움직임이다. 축구 선수가 ‘공을 패스하면서 공간을 넓혀 간다’고 말하듯이, 공간은 이동하면서, 움직임에 의해 새롭게 생기고 확장된다.
공간이 움직임(movement)이라면, 장소는 정지(pause)다. 움직임 중에 정지가 일어나면 그곳은 장소가 될 수 있다.[10]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가면 장소가 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간 공간은 그저 점과 점의 연결, 거리(distance)일 뿐 ‘장소’로 인식되지 않는다. 움직임이 멈췄다는 면에서 이미 장소는 시간을 움켜쥔다. 멈춘 자리에서 보낸 시간이 그 공간의 목적이나 특징, 의미나 가치를 만들어 낸다. 흔히 ‘장소’를 ‘의미 혹은 가치가 담긴 공간’으로 정의하는데, 의미와 가치를 형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이 말 역시 시간이 장소를 만든다는 뜻이라 하겠다.
시간은 장소를 정의하는 데 중요하다. 공간에서 내가 가만히 있더라도, 공간과 나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공간의 복합적인 사회문화적 의미를 탐구해 온 인본주의 지리학은 장소를 물리적 환경과 인간과의 상호 작용으로 이해한다.[11]
이러한 장소의 본질을 탐구해 온 에드워드 렐프 는 공간에서의 활동이 만들어 낸 상징과 감정을 장소 형성의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장소가 물리적 환경 혹은 어떤 위치(location) 이상의 의미를 가지려면 다른 장소와 구분되는 어떤 특징이 인지돼야 한다. 그 특징은 물리적 형태나 외관이기도 하겠지만, 거기서 일어나는 일, 즉 사람들의 활동과 활동이 지닌 상징과 감정을 통해 구성된다.[12] 자연, 건물, 물건을 비롯한 물리적 환경, 사람, 사건과 정서까지 말이다. 이렇게 장소는 이런 요소들의 복합적 상호 작용의 결과물이다.
집 앞 공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흙과 풀 냄새, 벤치와 그네의 촉감과 벗겨진 페인트칠,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 등 다양한 자극이 다가온다. 공간의 물리적 특성(땅, 사물, 건물 등이 가진 물질적 특성이나 기운)은 나의 오감을 통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느껴진다. 오감을 동원해 감각한 공간은 나에게 어떤 감정을 남긴다. 렐프는 이 과정을 애착이 생기는 과정이라 표현했는데, 공간에서 생성된 감정은 친근감이나 소속감 또는 좋아하는 마음이나 즐거움 등으로 다양하다. 물론 슬픔과 공포, 분노도 있다.
공간에서의 경험은 감정을 만들고 그것은 공간의 특성과 개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곳을 떠나더라도 머릿속에서 꾸준히 재현되는 기억이 된다. 기억에 남은 ‘장소가 된 공간’은 의미가 있다. ‘여긴 내게 의미 있는 곳이야’라고 말할 때, ‘의미’는 기억과 감정의 복합체다. 공간이 지닌 물질과 물질의 특성, 그 안의 사람들, 분위기까지, 이 모두를 한꺼번에 느끼는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에 기반해 비로소 장소는 인식된다. 그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장소가 지닌 특성, 즉 장소성이 만들어진다.
결국 ‘장소성(sense of place 또는 placeness)’은 나와 공간 사이에 만들어진 관계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지나는 골목이나 이미 알고 있던 곳이라 해도 어떤 사건을 통해 나와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곳은 특별해지고, 새로워진다. 익숙하고 흔한 곳에서 낯설고 새로운 면을 찾아낼 때, 그 낯설고 새로운 면에 이름을 붙여 볼 때, 나와 그 장소는 관계를 맺게 된다.
장소는 공적이기도 하지만, 그 속성은 내밀하다. 장소는 감각으로 만들어지는 감정, 혹은 정서로 기억된다는 점에서 몸과 관련이 깊다. 초봄 쌀쌀한 밤 공원의 벤치는 누구에게나 딱딱하고 차갑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나눠 낀 채 노래를 듣는 순간의 경험은 내밀하다. 몸은 체온과 노랫소리, 숨소리가 섞인 장소를 감각한다. 그 경험 이후의 벤치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장소와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 내밀한 감정과 감각을 기억하는 이에게, 그 공원과 벤치는 다시 찾아가 음악을 듣고 싶은, ‘장소’가 된다.
행동과 몸의 감각 그리고 감정이 장소를 규정한다는 면에서 장소성의 형성은 수행성에 근거한다. 나만이 느낀 내밀한 감정과 그 감정을 이끌어 낸 행동, 이 맥락에서 장소는 동사다. 우린 같은 장소에서 다른 사건을 겪고, 다른 걸 느끼고,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장소-하다[13]’를 통해 장소는 정해진 기능,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움직임과 감각이 섞인,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즉흥적으로 변하고 때때로 다르게 감각되는 생명체처럼 장소는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느끼는 공간이나 살아 있는 공간은 쓰이는 공간이나 활용되는 공간으로 대체됐다. 느끼는 시간은 아깝고, 즉흥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은 활용 목적이 불분명한 낭비의 공간처럼 여겨진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장소성을 열심히 연구하고 ‘개발’하고 싶어 하는 요즘이지만, 도시들이 관심을 가져 온 장소성 연구는 장소의 활용에 주목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특정한 방향성을 지닌 활용에 주목한다.
아주 많은 사람이 ‘좋다’, ‘멋지다’, ‘즐겁다’, ‘아름답다’고 엄지를 치켜올릴 수 있는 장소의 어떤 성격을 추구한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만한, 좋아할 만한, 즐겁고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과 체험이 있는 그런 장소성을 추구한다. 그 즐거움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떤 실체를 가졌는지는 질문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이런 식의 즐거움과 매력은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확실하게 굳어졌다. 교통의 발달로 시공간은 확장되면서 또한 동시에 좁아졌지만, 이러한 시공간의 재조직을 더 가속화한 것은 인터넷의 발달이다.[14]
파리와 뉴욕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 그러니까 파리의 장소성과 뉴욕의 장소성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통해 흔해졌다. 그 장소에서의 감정과 즐거움, 특이한 분위기와 정서는 그곳을 경험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장소성을 공유한다. 한 장소에 대한 엇비슷한 느낌과 생각과 사진들이 온라인에서 계속 생산된다.
심지어는 저 먼 곳에 있는 파리의 장소성을 옥천이나 나주같이 뜬금없는 곳으로 가져와 재현하는 일도 흔해졌다. ‘파리의 그 ‘갬성’ 다 아시죠? 여기 똑같이 재현했습니다!’ 이런 투의 인테리어와 공간 조성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옥천이나 나주에서 파리의 장소성을 느끼는 건 가능할까? 이런 장소성은 진짜 파리가 줄 수 있는 분위기와 감성, 장소적 독특함일까?
렐프는 장소의 특성이 ‘팔리는’ 시대가 이윤 창출을 위한 가짜 장소성들을 만들어 냈다고 비판한다. 라스베이거스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파리의 에펠탑이 있고, 내가 사는 도시 쇼핑몰과 백화점은 피렌체, 소호 거리와 샹젤리제 거리를 건물 한가운데에 가져다 놓는다. 판에 박힌 이미지에 근거한 획일적 공간 구성은 키치(kitsch)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한 공통의 감각을 일깨우려니 어쩔 수 없다. 다 아는 만큼 저속하거나 밋밋하고, 의미도 없지만, 그래도 이 장소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게 해야 한다. 방문객들이 그 장소를 한 줄로 쉽게 기억해야 하니까, ‘아, 거기, 뉴욕 센트럴 파크 같은 곳!’ 이렇게 말이다. 그래야 쉽게 홍보할 수 있다. 방문이 이어져야 그 장소든, 그 장소 안의 물건이든 팔 수 있게 된다.
똑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똑같은 방향성으로 인식되는 장소는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장소에 꽤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장소에 대한 엄청난 얘기들(여행안내서, 관광 홍보물, 블로그 포스트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등)도 쏟아진다. 하지만, 사실 그것들이 살아 있는 장소는 아닌 것 같다. 렐프는 많은 장소들이 피상적이고 판에 박힌 이미지로 경험되고 있고, 결국 불명료한 배경으로만 있다고 지적하며, ‘장소성의 상실’ 혹은 ‘무장소성[15]’을 주장한다.
획일성을 추구하는 공간 조성은 쉽게 드러나는 만큼 비판하기도 쉬운 듯하지만, 너무나 세련되게 조성된 요즘의 ‘무장소성’은 콕 집어 비난하기 어렵다. 나와 멀리 떨어져 뉴욕 어디쯤 있던 레트로풍 카페는 이제 쉽게 우리 동네 골목으로 재배치된다. 노출 콘크리트와 리드미컬한 음악이 흐르는 레트로풍 카페 거리는 충분히 예쁘다. ‘독특하다! 특별한 감성이 있다! 힐링된다!’고 친구와 웃으며 얘기한다. 즐길 만한 특색을 잘 갖췄지만, 이게 이 공간만의 독특함인지, 이 공간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진짜 특성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헷갈린다. 이런 불명확함을 만드는 데 소셜 미디어가 한몫했다. 사람들은 공간과 관계 맺기를 멈추고, 그 공간이 제공하는 최상의 순간만 소비하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 전시하기에 바쁘다.
소셜 미디어 속 장소 전시는 사실 관객 혹은 다음 소비자를 위한 것이다. 지금 내 팔로워들이 필요한 것을 예리하게 짚어 전시해야 한다. 멋진 장소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제시해야 한다. ‘인증샷’과 ‘인생샷’ 안에는 보여 주고 싶은 멋진 장소의 모습과 그걸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금방 파편화돼 흩어질 뿐이다. 내 사진과 해시태그와 짧은 블로그 글을 본 다음 방문자도 결국 같은 사진을 찍어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전시할 테니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만들어지지 못하는 장소는 결국 시들해질 뿐이다.
장소와 장소 경험의 본질적 특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어졌다. ‘좋아요’를 노리는 장소 얘기들 속에는 정작 장소가 없다.
지리적 능력은 장소를 만든다
소셜 미디어가 사진을 세상 끝까지 퍼나르면서 장소의 고유함이 사라졌다고 한탄할 수 있지만, 사실 이건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 소셜 미디어 속 사진이 늘 현장과 현실을 모사(copy)하고 똑같이 찍어 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어떤 특성을 활용하면 이 장소 상실감은 ‘공간을 생산’할 수 있는 설렘으로 전환될 수 있다. 도시 공간을 비판적으로 사유한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공간이 그저 수동적으로 비어 있는 그릇이거나, (돈과) 교환 가능한 소비재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공간은 그것을 발견하고 활용하는 사람을 통해,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일을 통해 새로운 공간으로 태어난다. 르페브르는 이러한 공간의 특성을 ‘공간이 생산에 개입한다’[16]고 표현했다.
공간이 능동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와 만들어진 사건에 반응하면서 특별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바뀐다면, 우린 그 결과를 사진과 글로 남겨 둘 수 있다. 사진을 활용하되 다른 시각과 방법론을 결합한다면, 소셜 미디어가 창궐한 온라인 공간 안에서도 새로운 장소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장소성은 지극히 사적인 것일 수도, 탄성이 나오게 아름다울 수도, 괴상하고 신기할 수도, 혹은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즐거움일 수도 있다. 사진으로 인해 장소성을 잃었다고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을 것인가?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 당신은 이미 찍고 쓸 준비를 하고 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는 지난 2016년 북극해에서 특별한 연주를 선보였다. ‘Elegy for the Arctic’, ‘북극을 위한 비가’란 제목의 짧은 피아노 곡이 연주됐다. 연주 직전, 빙하는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린다. 에이나우디는 손을 풀다 말고 그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가느다랗고 애절한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북극의 빙하는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무너진다. 다른 어떤 설명이 없어도 이 3분짜리 연주 영상은 많은 감정과 이해와 설명을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