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지방 도시 대전의 정체성은 ‘모방’과 ‘노잼’이다. 대전의 힙하고 핫한 장소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서울을 기준 삼아 대전의 매력을 측정한다. 서울만큼 멋지고 서울만큼 근사해야 가볼 만하고, 즐길 만한 장소가 된다. 그렇게 서울을 생각하며 대전의 매력적인 장소를 생각하다 보니 많은 것들이 서울과 비슷해졌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 이곳저곳에서 보던 엇비슷한 것들이 대전을 채운다. 대전 방문은, 대표적인 어떤 곳(이를테면 성심당 같은)을 ‘찍고 오는 것’으로 충분하다. 많은 장소와 다양한 장소 감상, 나만의 장소 이야기는 없고, 유명한 한 장소에 대한 인증만이 넘친다. 그래서 대전은 ‘노잼의 도시’가 된다.
대전만 노잼이 아니다. 청주도, 울산도, 광주도, 스스로를 ‘노잼의 도시’라 부른다. 대전이든 울산이든 광주든 잘 알려진 그곳 하나만으로 다 설명된다. 사람들은 사실 그 장소 외에는 특별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다른 도시 사람들이 그렇게 대전과 울산과 청주, 광주를 생각해 왔다.
모방과 노잼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서울이 되려고 서울을 모방해 왔지만, 서울이 될 수 없는 지방 도시들은 노잼일 수밖에 없고, 노잼에서 벗어나려 다시 서울을 좇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래서 지방 도시들이 마주한 어려운 화두는 ‘고유한 지역 정체성’ 혹은 ‘지역 특색’ 찾기다. 고유한 지역, 도시만의 특성을 내세우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지방 도시,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울산에는 ‘공업 도시’란 정체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공장이 많아서일까, 사람들은 쉽게 울산을 공기 나쁜 도시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살아 보면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울산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울산은 사실 자연이 가까운 도시다. 바다와 쉽게 친해질 수 있고, 대숲과 옹기는 울산이라는 도시에 여유와 다른 빛깔을 부여한다.[1] 그렇다면 ‘공업 도시’라는 울산의 정체성은 틀린 걸까?
정체성은 한 줄로 설명될 수 없다. 정체성은 외부 자극에 반응해 변화하기도, 어떤 측면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기도 한다.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며 매 순간 구성되는 정체성의 자체 특성을 생각하면, 도시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겠다는 그 목표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지방 도시들이 애타게 찾는 그 정체성, 특색, 고유함의 실체를 조금 더 치밀하게 여러 각도로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지역의 특색은 아주 오랜 설화나, 유적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최근 새롭게 들어선 건축물이나 잘 알려진 축제를 말하는 것일까? 오랜 유적이나 역사는 문화적 뿌리지만, 현재와의 접점을 좀처럼 찾기 어려워 요즘 사람들과 공명하지 못한다. 새 건축물이나 축제와 같은 문화적 경험은 역사와 맥락 없이 대뜸 지역 사회 안으로 침투한 이질적인 것들로 느껴진다.
도대체 어디에, 이들 사이 어디쯤 ‘지역 정체성’이란 게 있는 걸까? 절대 변하지 않는 이 지역만의 고유한 정체성, 정수 essence가 과연 있을까? 누군가 ‘대전의 정체성은 이것!’이라던가, ‘대전의 뿌리는 여기!’라고 주장한다면, 질문이 쏟아질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얘기하시죠?’ ‘당신에게 그걸 정할 권한이 있나요?’ ‘난 대전에서 태어나 60년 살았는데, 동의할 수 없는데요?’
단번에 정의하기도, 합의하기도 어려운 ‘도시 정체성’ 혹은 ‘고유한 지역성’이란 단어를 밀쳐 두고 사람들은 지역(정체)성을 어떤 단어나 이름으로 고정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지역의 고유함, 특색 혹은 지역성 등은 상업적으로 브랜드화하기 위한 콘텐츠가 됐다. 중앙 정부도 “새로운 지역의 특색과 고유 자원을 살릴 수 있는 로컬 브랜딩”을 제안한다.[2] 그래서 지역의 정체성은 관광 안내 브로셔에 등장할 캐릭터 같은 것으로 압축됐다. 투자를 위해 기업과 중앙 정부에 어필할 수 있는 홍보 문구로 요약됐다. 물질적 성취로 드러나는 어떤 것, 즉 돈으로 바뀔 수 있는 가치로 환산되기도 했다. 이렇게 단순해진 지역 특색을 만족스럽게 잘 정의된 지역성, 도시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역 정체성이나 특색, 지역성 등은 고정돼 있어서 만지면 느낄 수 있고, 가면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역 정체성은 사실 나와 내 주변의 이웃들이 일상을 매일 살면서 만들어 가는 중인 어떤 ‘과정’ 혹은 삶 그 자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완성본이 없는 것, 고정되지 않은 것, 살아가는 행위, 실천을 통해 계속 구성하고 만들어 가는 과정만이 있는 게 지역성이고 도시 정체성이다. 그래서 지역성은 하나의 단어나 문구나 캐릭터로 압축될 수 없다.
대전의 정체성을 보거나 만지거나 들은 사람은 없다. 대전의 정체성은 만지는 것, 들리는 것, 느끼는 것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만들어진다. 할아버지와 얘기 나누며 문득 튀어나오는 사투리에서, 오래된 식당이 내놓은 제철 밥상에서, 조카가 소풍 가는 엑스포 공원에서 사람들은 대전을 듣고, 만지고, 먹고, 느낀다.
지역성은 구성돼 가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지역(정체)성은 변하고 섞이고 때론 순간적이어서 금세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안정되고 일관된 정체성을 원하지만, (그렇게 보일 때도 있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늘 이주해 오고, 낯선 문화와 언제든 만나 섞일 수밖에 없는 이 도시가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기는 불가능하다. 도시와 지역 정체성은 늘 흔들리고,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감각은 계속 생겨난다.
그렇다고, 지역성이나 정체성, 지역과 나의 일체감 (소속감) 같은 건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속 편한 상대주의로 모든 걸 포용하는듯한 제스처를 취하면 좋을까? 혹은 도시에 이질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모든 것들을 버리거나 배제하면서 우리 도시, 우리 지역만의 정체성을 완성하면 될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완성품이 아닌 지역 정체성 혹은 지역성을 만드는 ‘나만의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과 도시의 정체성이 결국 내 삶 그 자체라면, 이 도시에서 ‘진짜 삶을 사는 것’이 곧 고유한 지역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만들어진 상품을 사는 것처럼, 완성된 도시 정체성을 구입하는 일에 우린 너무 익숙하다. 잠시 그 상품이 맘에 들 수는 있어도, 그 상품은 진짜 내 것이 아니다. 기성품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낸, 스스로 살아 낸 도시의 삶이 모이면 어느새 풍성하고 거대한 도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지금 사는 곳을 알고 즐기는 나만의 방법론을 탐색해 보자. 주체적으로 목적과 이유를 생각하고 재미를 느낄 방법을 고안하자. 다시 말해, 도시와 즐거운 ‘관계’를 만드는 나만의 방법론을 개발하자. 서울이 아니라서 특색이 필요한 ‘디나이얼 지방출신’에게 필요한 건 정신 승리 같은 자긍심이나 손쉬운 다양성, 혹은 상대주의가 아닌, 지배적인 사고의 틀을 뚫고 나아갈 방법론이다. 도시를 알아야 할 이유와 하고 싶은 목표를 세우고, 행동하고, 느끼고, 깨닫는 과정을 실천하는 게 필요하다. 그렇게 도시와 나 사이에 관계가 생길 때, 즐거움이나 슬픔, 애틋함 등 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서가 생긴다. 그 정서가 기록되고, 기억되고, 몸에 체득돼 시간이 지났어도 그 도시가 그리워질 때에야, 비로소 이곳이 ‘나의 도시’가 된다.
도시를 이해하고, 느끼고, 가지는 방법, 당신은 가지고 있습니까?
도시 앤솔로지
도시와 꾸준히 관계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도시를 여러 사람의 같이 만드는 일종의 ‘합동 예술 작품’이나, ‘협업의 결과물’로 본다. 2009년 시작된 ‘리슨투더시티 콜렉티브’는 빠른 근대화와 도시화를 겪어 온 한국 사회가 도시를 어떻게 취급해 왔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미술, 건축, 인문학과 도시 계획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리슨투더시티 콜렉티브는 여러 시각과 재능을 활용해 도시를 목격하고 기록해 왔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