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
6화

있습니까, 나만의 도시를 만드는 방법?

지금 지방 도시 대전의 정체성은 ‘모방’과 ‘노잼’이다. 대전의 힙하고 핫한 장소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서울을 기준 삼아 대전의 매력을 측정한다. 서울만큼 멋지고 서울만큼 근사해야 가볼 만하고, 즐길 만한 장소가 된다. 그렇게 서울을 생각하며 대전의 매력적인 장소를 생각하다 보니 많은 것들이 서울과 비슷해졌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 이곳저곳에서 보던 엇비슷한 것들이 대전을 채운다. 대전 방문은, 대표적인 어떤 곳(이를테면 성심당 같은)을 ‘찍고 오는 것’으로 충분하다. 많은 장소와 다양한 장소 감상, 나만의 장소 이야기는 없고, 유명한 한 장소에 대한 인증만이 넘친다. 그래서 대전은 ‘노잼의 도시’가 된다.

대전만 노잼이 아니다. 청주도, 울산도, 광주도, 스스로를 ‘노잼의 도시’라 부른다. 대전이든 울산이든 광주든 잘 알려진 그곳 하나만으로 다 설명된다. 사람들은 사실 그 장소 외에는 특별한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다른 도시 사람들이 그렇게 대전과 울산과 청주, 광주를 생각해 왔다.

모방과 노잼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서울이 되려고 서울을 모방해 왔지만, 서울이 될 수 없는 지방 도시들은 노잼일 수밖에 없고, 노잼에서 벗어나려 다시 서울을 좇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래서 지방 도시들이 마주한 어려운 화두는 ‘고유한 지역 정체성’ 혹은 ‘지역 특색’ 찾기다. 고유한 지역, 도시만의 특성을 내세우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지방 도시,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울산에는 ‘공업 도시’란 정체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공장이 많아서일까, 사람들은 쉽게 울산을 공기 나쁜 도시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살아 보면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울산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울산은 사실 자연이 가까운 도시다. 바다와 쉽게 친해질 수 있고, 대숲과 옹기는 울산이라는 도시에 여유와 다른 빛깔을 부여한다.[1] 그렇다면 ‘공업 도시’라는 울산의 정체성은 틀린 걸까?

정체성은 한 줄로 설명될 수 없다. 정체성은 외부 자극에 반응해 변화하기도, 어떤 측면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기도 한다.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며 매 순간 구성되는 정체성의 자체 특성을 생각하면, 도시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겠다는 그 목표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지방 도시들이 애타게 찾는 그 정체성, 특색, 고유함의 실체를 조금 더 치밀하게 여러 각도로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지역의 특색은 아주 오랜 설화나, 유적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최근 새롭게 들어선 건축물이나 잘 알려진 축제를 말하는 것일까? 오랜 유적이나 역사는 문화적 뿌리지만, 현재와의 접점을 좀처럼 찾기 어려워 요즘 사람들과 공명하지 못한다. 새 건축물이나 축제와 같은 문화적 경험은 역사와 맥락 없이 대뜸 지역 사회 안으로 침투한 이질적인 것들로 느껴진다.

도대체 어디에, 이들 사이 어디쯤 ‘지역 정체성’이란 게 있는 걸까? 절대 변하지 않는 이 지역만의 고유한 정체성, 정수 essence가 과연 있을까? 누군가 ‘대전의 정체성은 이것!’이라던가, ‘대전의 뿌리는 여기!’라고 주장한다면, 질문이 쏟아질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얘기하시죠?’ ‘당신에게 그걸 정할 권한이 있나요?’ ‘난 대전에서 태어나 60년 살았는데, 동의할 수 없는데요?’

단번에 정의하기도, 합의하기도 어려운 ‘도시 정체성’ 혹은 ‘고유한 지역성’이란 단어를 밀쳐 두고 사람들은 지역(정체)성을 어떤 단어나 이름으로 고정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지역의 고유함, 특색 혹은 지역성 등은 상업적으로 브랜드화하기 위한 콘텐츠가 됐다. 중앙 정부도 “새로운 지역의 특색과 고유 자원을 살릴 수 있는 로컬 브랜딩”을 제안한다.[2] 그래서 지역의 정체성은 관광 안내 브로셔에 등장할 캐릭터 같은 것으로 압축됐다. 투자를 위해 기업과 중앙 정부에 어필할 수 있는 홍보 문구로 요약됐다. 물질적 성취로 드러나는 어떤 것, 즉 돈으로 바뀔 수 있는 가치로 환산되기도 했다. 이렇게 단순해진 지역 특색을 만족스럽게 잘 정의된 지역성, 도시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역 정체성이나 특색, 지역성 등은 고정돼 있어서 만지면 느낄 수 있고, 가면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역 정체성은 사실 나와 내 주변의 이웃들이 일상을 매일 살면서 만들어 가는 중인 어떤 ‘과정’ 혹은 삶 그 자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완성본이 없는 것, 고정되지 않은 것, 살아가는 행위, 실천을 통해 계속 구성하고 만들어 가는 과정만이 있는 게 지역성이고 도시 정체성이다. 그래서 지역성은 하나의 단어나 문구나 캐릭터로 압축될 수 없다.

대전의 정체성을 보거나 만지거나 들은 사람은 없다. 대전의 정체성은 만지는 것, 들리는 것, 느끼는 것들이 복합적으로 섞여 만들어진다. 할아버지와 얘기 나누며 문득 튀어나오는 사투리에서, 오래된 식당이 내놓은 제철 밥상에서, 조카가 소풍 가는 엑스포 공원에서 사람들은 대전을 듣고, 만지고, 먹고, 느낀다.

지역성은 구성돼 가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지역(정체)성은 변하고 섞이고 때론 순간적이어서 금세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안정되고 일관된 정체성을 원하지만, (그렇게 보일 때도 있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늘 이주해 오고, 낯선 문화와 언제든 만나 섞일 수밖에 없는 이 도시가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기는 불가능하다. 도시와 지역 정체성은 늘 흔들리고,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감각은 계속 생겨난다.

그렇다고, 지역성이나 정체성, 지역과 나의 일체감 (소속감) 같은 건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속 편한 상대주의로 모든 걸 포용하는듯한 제스처를 취하면 좋을까? 혹은 도시에 이질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모든 것들을 버리거나 배제하면서 우리 도시, 우리 지역만의 정체성을 완성하면 될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완성품이 아닌 지역 정체성 혹은 지역성을 만드는 ‘나만의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과 도시의 정체성이 결국 내 삶 그 자체라면, 이 도시에서 ‘진짜 삶을 사는 것’이 곧 고유한 지역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만들어진 상품을 사는 것처럼, 완성된 도시 정체성을 구입하는 일에 우린 너무 익숙하다. 잠시 그 상품이 맘에 들 수는 있어도, 그 상품은 진짜 내 것이 아니다. 기성품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낸, 스스로 살아 낸 도시의 삶이 모이면 어느새 풍성하고 거대한 도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지금 사는 곳을 알고 즐기는 나만의 방법론을 탐색해 보자. 주체적으로 목적과 이유를 생각하고 재미를 느낄 방법을 고안하자. 다시 말해, 도시와 즐거운 ‘관계’를 만드는 나만의 방법론을 개발하자. 서울이 아니라서 특색이 필요한 ‘디나이얼 지방출신’에게 필요한 건 정신 승리 같은 자긍심이나 손쉬운 다양성, 혹은 상대주의가 아닌, 지배적인 사고의 틀을 뚫고 나아갈 방법론이다. 도시를 알아야 할 이유와 하고 싶은 목표를 세우고, 행동하고, 느끼고, 깨닫는 과정을 실천하는 게 필요하다. 그렇게 도시와 나 사이에 관계가 생길 때, 즐거움이나 슬픔, 애틋함 등 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서가 생긴다. 그 정서가 기록되고, 기억되고, 몸에 체득돼 시간이 지났어도 그 도시가 그리워질 때에야, 비로소 이곳이 ‘나의 도시’가 된다.

도시를 이해하고, 느끼고, 가지는 방법, 당신은 가지고 있습니까?

 

도시 앤솔로지


도시와 꾸준히 관계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도시를 여러 사람의 같이 만드는 일종의 ‘합동 예술 작품’이나, ‘협업의 결과물’로 본다. 2009년 시작된 ‘리슨투더시티 콜렉티브’는 빠른 근대화와 도시화를 겪어 온 한국 사회가 도시를 어떻게 취급해 왔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미술, 건축, 인문학과 도시 계획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하는 리슨투더시티 콜렉티브는 여러 시각과 재능을 활용해 도시를 목격하고 기록해 왔다.[3]
ⓒ리슨투더시티 홈페이지
리슨투더시티가 2016년 진행한 서대문형무소 주변 ‘옥바라지 길’ 기록 작업은 한 지역이 사라지고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이 다양한 삶과 서사의 중첩과도 같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4] 특히 38년 동안 옥바라지 골목에서 산 주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기억 지도’는 사라지는 공간을 디자인적으로도 잘 드러낸다. 주민들이 표현한 그 장소에서의 삶이 입말로 표현돼 있어 ‘옥바라지 길 얘기를 들으며 함께 걷는’ 느낌이 든다.

이 지도를 읽으면, 옥바라지 길이 38년을 그곳에서 살아 온 사람에게 어떤 곳이었는지 공감할 수 있다. 그 사람이 거기서 만들어 낸 이야기와 정서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그 장소를 잠시나마 함께 소유한 것과 같다. 그래서 ‘기억 지도’를 읽은 사람은 옥바라지 길을 걸은 사람이 되고, 그 길과 관계를 맺은 사람이 된다.

리슨투더시티의 참여적 활동은 자신들만의 뚜렷한 목표와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꾸준하고 치열하게 고민해 온 방법들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도시에서의 삶과 도시의 물리적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소수자의 시선으로 질문하고 목소리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구체화한다. 그들의 작업은 도시 기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열었고 ‘아카이브적 전환(archival turn)[5]’의 사례를 보여 줬다.

흔히 도시의 역사나 도시의 모습을 기록할 때, ‘발전된 모습’ 혹은 ‘발전해 온 모습’을 기록하곤 하는데, 이러한 접근은 우상향의 선형적 도시 발전을 암시한다. 그러나 도시의 발전은 우상향 직선을 그리지 않는다. 도시의 발전 방향과 모습은 ‘방사형’이다. 사방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선 중심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탈중심적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리슨투더시티의 민족지학(ethnography) 방법론과 다양한 기록 영역으로의 확장성은 도시의 모습을 거미줄처럼 포착해 기록하고 있어, 우리에게 아카이브적 전환의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도시 장소를 경험하고 그 결과를 표현해 내는 사람들은 어디든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같은 곳에 있었지만 내가 느낀 것은 당신과 다르니까’, 또는 ‘다 다른 사람들이지만 지금 우린 같은 것을 느끼니까’ 사람들은 표현하고 싶어진다. 물론 도시의 어떤 장소에서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이 눈부시게 아름답거나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사회적으로 특별한 가치가 있어서 반드시 표현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예쁘지 않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지 않더라도 그 장소를 똑바로 바라보고 거기에서 살아온 내 모습과 내 느낌을 직시하는 ‘용기’가 있다면 이미 방법론의 절반은 구축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용기가 만들어 낸 장소의 사진과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2018년 9월 14일 이른 아침 대전 중구 목동 막다른 골목길에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6] 재개발 결정 후 철거가 진행되고 있던 이 동네에 피아노 연주가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옛 대전지방법원 근처였던 이곳에는 법원 관사 등의 오래된 주택이 많았다. 낮은 높이의 담벼락과 구불구불한 골목길 어딘가엔 1세대 건축가 박만식이 지은 1960년대의 주택도 있었다.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되는 9월 14일, 무너져 내리고 있는 집들 사이, 막다른 골목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어느 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피아니스트는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의 〈위로(Consolations) No.3〉를 연주했다.
피아노 퍼포먼스 〈막다른 골목〉의 한 장면
여상희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7]이 기획한 ‘막다른 골목’은 길고양이 구조로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갈 곳 잃은 고양이들을 구조하다 동네를 더 세심하게 살펴보게 됐고, 어느 빈집에서 발견한 버려진 피아노를 수리해 사라지는 동네와의 작별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기획과 연주, 촬영과 피아노 조율, 포스터 디자인까지 모든 과정이 순수 재능 기부로 준비됐다.

피아노 연주는 잠시 철거 시간을 늦추긴 했지만, 결국 철거 소음과 섞일 수밖에 없었다. 육중한 기계의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 벽돌이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소리, 철근이 부러지고 꺾이는 소리 가운데 가늘게 흐르는 피아노 멜로디는 목동이란 공간에서 살고 숨 쉬었던 모든 존재에게 담담하게 안녕을 고했다.
피아노 퍼포먼스 〈막다른 골목〉의 포스터
‘막다른 골목’ 퍼포먼스를 기획한 박혜성(대전문화재단)은 목동 재개발 지역과의 이별 퍼포먼스가 수많은 장소와 만나고 헤어지는 도시인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장소 감정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대전에 산 지 10년쯤 됐다. 소중한 것들을 두고 온 것 같은 마음에 한동안은 주말마다 기를 쓰고 서울에 갔다. 서울이 별난 곳이어서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간이 장소가 되는 순간은 참 쓰잘 데 없는 소소한 인연들로 만들어진다. 난 여전히 누군가에게 ‘서울 사람’이다. 변화하기 전 탄방동을 모르고, 옛 유성의 배밭 풍경을 못 봤으니까. 그러나 내가 대전에서 보낸 10년은 이방인으로서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이 도시의 어떤 공간들은 이제 내게 소중한 장소가 됐다. 대전은 플랫폼 같고, 나는 머물렀다 떠나기를 반복하는 도시 인간이며, 무엇이든 스쳤다가 사라지는 것은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2018년의 ‘막다른 골목’ 퍼포먼스는 목동과의 짧은 인연이 남긴 정서, 소멸하는 것이 남긴 흔적, 시간차를 두고 겹쳐 있는 어머니의 학창 시절과 나의 직장 생활에 대한 그리움 등을 기억하고 싶어서 뜻이 맞는 이들과 했던 프로젝트였다. 어차피 사라질 것을 굳이 ‘잘’ 보내려 하는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다. 목동이라는 장소를 기억하고 싶었던 사람들과 함께 기획한 작은 의례였다.”

낡은 주택가 철거 현장은 도시민에게 흔한 풍경이고, 외면하는 장소다. 거길 뭐하러, 뭐 볼 게 있다고 가나? 번듯하고 깔끔한 새 아파트가 어서 들어서길 기다리는 게 맞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기록하고 기억할 가치가 없는 것이란 편견은 상식 같다. 하지만 철거를 기다리는 집 거실에는 아이가 클 때마다 벽에 그려둔 눈금이 있고, 선물로 받아 잘 말려둔 꽃이 걸려있고, 채 걷지 못한 커튼이 안방 창틀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곳에도 여전히 삶이 있다.

피아노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실천한 사람들은 장소가 품었던 (여전히 품고 있는) 삶을 느끼고 기억하고 싶었을 것이다. 도시 공간은 물상의 세계만이 아닌, 거기 있는 사람들과 물상의 만남 혹은 사람끼리의 조우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피아노 퍼포먼스는 철거되는 건물이 아닌 그 장소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들을 위한 위로였다. 피아노 퍼포먼스는 목동의 옛집이 사라지는 순간을 함께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때 특별한 정서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져 기록됐다. 사람들은 피아노 퍼포먼스를 보면서 목동의 집과 골목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도시 해킹하기


모든 도시는 아름다운 모습을 꾸준히 찾아 전시해 왔다. 관광공사나 마케팅 공사는 전문가들을 고용해 도시의 멋진 모습으로 잘 가공된 사진과 영상을 만들었고, 관광 안내 브로셔와 홈페이지에 실어 더 많은 사람이 보도록 했다.

‘공식적으로’ 내놓은 도시의 멋진, 기록될 만한 모습들은 보는 사람을 충분히 감동시킨다. 웅장하고 화려하다. ‘우와, 대전이 이렇게 멋지구나!’ 소리가 절로 나오는 사진들이다. 이런 감동을 주고 싶은 마음은 다 비슷한 탓인지, 항공에서 찍은 사진이 많다. 우리가 봐야 할 장소의 멋짐은 이렇게 거대하고 웅장하며, 화려하고 압도적이라는 듯 말이다.

이 사진 앞에서 난 작아진다. 난 날아올라 엑스포 한빛탑과 갑천을 볼 수 없다. 내 눈에 이 모든 광경이 다 담기지도 않는다. 아름답고 멋지지만, 이 사진 속 엑스포 공원과 갑천은 내가 볼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나의 것이 아닌 것 같다.
대전 엑스포 공원의 지금 모습(좌)과 1993년 모습(우) ⓒ대전의 역사·기록 모음 〈대전 사진 아카이브: 대전찰칵〉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 모습 앞에서 우린 이렇게 말한다, ‘너무 멋져요! 이 말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아요. 정말 멋져요!’ 최고의 찬사지만, ‘멋지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는 건 최악의 평일 수도 있다. 이 장소에 대한 다른 말들이 활발히 생겨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감탄사 외에 여러 말과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또 다른 사진, 감상, 느낌, 뜻밖의 방문과 만남이 생기지 않을까? ‘모두에게’ 어필하고 싶은 장소 사진은 사실 모두의 비위를 맞추느라 밋밋해진다. 잊히기도 쉽다. 모두에게 팔리고 싶은 마음을 들킨 사진은 매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다양하고 많은 작가가 필요하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세세하게 뜯어 보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도시를 분석한 결과를 보여 줄 사람들 말이다. 훈련된 전문가들이 만들어 낸 근사한 이미지를 복사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과 방법으로 익숙한 장소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실험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들은 장소를 경험하고 알아가고 내 것이 되어가는 과정을 즐긴다. ‘낯섦’과 ‘새로움’이 ‘힙함’의 핵심 요소라면, 익숙한 장소를 낯설게 드러내는 이 사람들의 시도는 힙하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꾸준히 대전의 공간을 세세히 뜯어 보고, 낯선 방법으로 결국 그 장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온 사람이 있다. 주식회사 ‘윙윙’의 권인호[8]는 이 과정을 ‘스페이스 해킹, 도시 해킹’이라고 부른다. 그가 도시 공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자신이 사는 도시 대전을 직접 느끼고 진짜로 알기 위해서다. 진짜 도시 공간을 안다는 건, 직접 공간에 가서 느끼고 이해하는 실천의 과정을 가지는 것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 공간과 관계를 맺고, 공간에 이름을 붙이고, 그리고 마침내 공간의 ‘진짜 주인’이 되는 경험을 한다고 말한다.
권인호가 찍은 충남방적 대전 공장 내부
“인류의 절반이 도시에 산다. 그런데 도시가 존재하고 움직이는 원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죽는 우리는, 역설적으로, 도시의 깊은 내면과 속살을 알지 못한다. 도시의 원초적 바닥, 그 아래, 하수구와 지하실, 건물의 옥상, 레이더까지 직접 보고 느끼고 알고 싶었다. 여기 폐공장 부지에 아파트 단지가 아닌 다른 공간이 생길 수는 없는지, 원도심 한복판의 커다란 건물은 왜 수년째 방치되어 있는지, 직접 들어가 느끼고 이해하고 싶었다. 이미 정해진 규칙에 의해 이름이 붙여지고 쓸모가 정해진 공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스스로 정의하고 이해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권인호가 찍은 공장 안에서 본 바깥 풍경
권인호의 도시 해킹 작업은 기존 도시 공간이 지닌 역할과 의미를 해체하고 새로운 의미와 이름을 부여해 공간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공간은 이렇게 쓰였고, 그 쓰임이 다해 버려진 곳’ 또는 ‘여기까지가 안이고 저기는 바깥’이란 공간 규정에 질문을 던진다. 당연하게 여기던 경계와 구조에 대한 그의 질문은 신선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빈 공장 내부를 보면 에너지 넘치던 작업장의 움직임이 떠오르고, 따스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공장 사람들의 시선도 짐작할 수 있다. 빈 교실의 찢어진 커튼과 장난 섞인 낙서 사진에는 발랄한 10대 여학생들이 떠난 교실의 복합적 정서가 담겨 있다.
권인호가 찍은 충남방적 대전 공장 부지 내 산업체 학교 (옛 충일여자고등학교) 교실. 이곳은 공장 여직원들이 다니던 산업체 부설 학교 건물로, 1979년 개교한 이래 한때 학급 수가 100여 개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였다. 2005년 폐교한 후 공포 체험 현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권인호의 도시 공간 탐험 선정 기준은 유명세나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잘 알려진 곳이지만 버려진 곳이거나 관심받지 못하는 곳인 경우가 많다. 곧 사라지는 장소들도 많다. 15년째 도심 한가운데 방치된 미완성 중대형 건물(메가시티)이나 유등천변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 같은 곳들이 그가 탐험하는 주요한 공간들이다. 낡고 녹슬었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공간이지만, 권인호의 말대로, “안 보기 어려운 건물”이며 마치 “나는 여기 있다!”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 곳들이다. 사람들은 애써 이 건물들을 안 본 척한다. 반면 스페이스 해킹을 하는 사람은 엄연히 존재하는 그 장소로 향한다. 그들은 그 장소가 무엇을 여전히 담고 있는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주체적으로 상상한다.

도시의 겉을 맴도는 게 아니라 도시 내부로 성큼 걸어 들어가는 용기는 도시 장소를 기록하는 새로운 상상력으로 발전한다. 대전 대덕구에 위치한 청년 공유 공간 ‘청년벙커’는 2022년 지역 기반 영화 제작 워크숍을 열었다.[9] 이들이 영화제를 통해 지방 도시의 장소를 조명하는 방식은 전형적이지 않았다. 워크숍에서 만들어야 하는 영화의 조건은 이랬다. ‘SF적 상상력’을 발휘하면서도 초저예산(10만 원)의 한계에 도전해야 하며, 대전이란 공간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는 것. ‘SF적’이란 표현은 아마추어 연출가들이 모든 걸 시도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를 줬다.

단편 영화 〈21%〉는 암울한 미래의 어느 시점을 대전의 현재 공간으로 가져온다. 어색한 조합이 한 화면에 펼쳐지면, 관객은 내가 매일 보던 일상 공간이 SF적 이야기와 만나는 뜻밖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21%〉, 정윤재 연출, 2022 10만 원 스페이스 해킹 SF적 영화 상영회 상영작
권인호의 ‘스페이스 해킹’ 작업과 ‘SF적 상상력에 기반한 도시 영화’는 이미 지정된 공간의 특성이나 성격을 알고 있지만 이를 거스르고, 공간 사이 정해진 경계도 허문다. 내가 느낀 것을 중심으로 새롭게 공간을 정의하는 스페이스 해킹이나, 낯선 상상력으로 익숙한 곳을 재구성하는 SF영화 제작 실험은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미 아는 세계와 모르는 세계는 완벽히 쪼개진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관련 있고, 섞여 있다.

기계와 작업 노동으로 채워진 방적 공장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다. 하지만 내가 직접 들어가 경험한 그 장소 안에는 어둡고 연약한 슬픔이 있고, 따뜻하고 살가운 그리움과 동경도 있으며, 청춘의 생기와 찢긴 희망 같은 것도 있다. 이 감정들은 미처 몰랐던 세계에서 온다. 스페이스 해킹은 이미 아는 세계와 모르는 세계를 이분법으로 경계 짓고, 저쪽으로 한 번도 넘어가지 않는다면 몰랐을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이러한 실험은 장소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고 장소를 확장한다.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나의 위치는 역동적이고 주체적이다. 이렇게 자유롭게 장소의 안과 밖을 지우고 새로 경계선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았던 정체성을 만드는 역량은 기존의 장소성과 새로운 장소성 사이에 선 나의 “위대한 균형 감각”[10]을 드러낸다.

지역 안에서 낯선 것을 찾는 트랜스로컬(translocal)한 시도는 지역을 확장한다. 트랜스로컬리티(translocality)는 지역이라는 경계를 세워 두고 그 경계 안에는 동질적인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시도로서, ‘경계를 넘는(transcend)’ 경험이 가져오는 역동성을 적극적으로 찾는다. 트랜스로컬리티는 공간 구분의 어떤 층위(행정 구역, 지리적 경계 등)에 묶이지 않고 경계의 의미를 해체한다. 경계를 해체한다는 것이 그저 ‘다 우리 것’이란 의미는 아니다. 해체의 과정을 통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전까지 무가치했거나 삭제된 것들이 재현되고 거기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트랜스로컬리티는 “위계적이고 억압적인 공간 질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저항적 사유”에 대한 열망이기도 하다.[11] 트랜스로컬리티는 특정 지역을 대상화하거나 어느 지역이 우월하거나 가치 있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 장소에서 진짜 삶을 찾아내고 느끼는 것에 집중한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경계 안팎을 연결하며 문화적 횡단을 실천하는 이들은 장소를 위계와 경계가 아닌 존재 그 자체로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장소에는 목소리가 부여된다. 그제야 우리는 장소를 대상화하지 않고, 위계 없이, 그 지역(장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2030 여성, 스마트폰을 든 탐험가


‘어떻게 도시의 장소성을 알고 만드는가’란 질문은 ‘누가 방법론을 고안하고 실행하는가’의 질문과 연결돼 있다. 고민하고 실행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도시 장소에 접근하는 이유와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들을 위한 도시 공간은 많아지고 있다. 자가용 운전자를 위한 길과 공간 배치, 아이와 함께한 가족을 위한 레저 공간 조성, 여성 소비자를 위해 꾸며진 공간들은 깨끗하고 좋아 보인다. 실제로 이용해 보면 좋은 점도 많다. 하지만, 이 공간들은 진짜 좋은가?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레슬리 컨(Leslie Kern)[12]은 현대 도시들은 ‘여성 친화적’으로, 더 힙하게 변해 왔으며 ‘남성적 특성이 제거된’ 안전한 공간을 지향해 왔지만 사실 이러한 도시 장소들은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여성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라고 지적한다. 예쁜 카페와 유모차를 편히 밀고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여성들에게 안전함과 즐거움을 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안전함과 즐거움은 사실 이 장소에 갈 수 있는 특정 여성, 즉 시간과 돈이 있는 어떤 여성들에게만 열려 있다는 것이다.

도시는 누구나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배타적이기도 하다.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기획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다수’의 입장과 시각 그리고 요청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들 차를 가지고 있으니 차도와 인도를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단차를 둬야 하고, 노인을 위한 휴식 공간보다 주차장을 더 확보해야 한다. 어린이가 있는 3~4인 가족을 생각한 놀이터와 주택 설계, 주택 보급이 우선이며, 젊은 이성애자 커플을 타깃으로 축제를 홍보하고 관광 이벤트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다양한 입장과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일상을 통해 구성해 가는 것이 도시라면, 그 ‘다수’도 이질적이며, 우린 언제든 ‘다수’ 밖의 ‘소수’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날 환영하지 않는, 허락하지 않는 공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왜 저기에 갈 수 없나?’란 질문을 해야 한다. 어떤 힘이 나를 멈추게 하는가를 폭로하는 것은 도시를 구성하는 폭력적이고 거대한 시선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도시를 탐험하고 목격하고, 기록하는 사람 중엔 카메라를 든 2030 여성들이 많다. 소셜 미디어 텍스트 마이닝을 통해 대전의 힙·핫플레이스를 탐색했을 때, 도시 장소 탐색의 결과물을 소셜 미디어에 자주 올리는 이들이 젊은 여성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의 도시 장소 이야기는 디저트 카페나 편집숍에만 머물지 않는다. 청년 세대 여성들은 도시 장소에 대한 주요 평가자이자, 존재 자체가 방법론인 도시 장소성 발화자다. 이들이 한국 사회 구조에서 자리한 위치, 그 위치에서 비롯된 입장과 시각은 따로 훈련받지 않아도 독특하면서도 비판적이며, 충분히 새롭고 혁신적인 장소 감각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2018년 〈지역 리서치 프로젝트-불난 집〉[13]에 김재연 사진작가와 함께 ‘콜렉트’란 팀을 구성해 참여했던 전북대학교 대학원의 권순지는 지역의 장소를 새롭게 조명하고 이야기를 발굴하는 여성의 시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전역 주변에 있는 중동은 한때 흥했던 동네지만, 지금은 성매매 집결지가 있는 ‘사라지는’ 동네다. 사람들은 이 동네를 피해서 돌아가고, 안 보고 싶어 한다. 지도에서 사라진 듯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비가시화된 이 동네를 많은 여성들이 스쳐 지나갔다. 불이 난 흔적을 보면서 불이 날 수밖에 없었던 이 공간의 삶을 생각했다. 동네 할머니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중동과 중동에서의 삶을 알게 됐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공간과 삶, 인정받지 못한 ‘지워진 동네, 중동’을 기억하고 싶었다.”

도시 장소를 발견하거나 장소와 관계를 맺는 일이 기쁨과 즐거움만 주는 건 아니다. 권순지는 중동을 알아가면서 장소 때문에 슬펐고, 불쾌했고, 화가 났다. 그가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중동의 할머니들 때문만은 아니다. 특별한 여성들만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어딘가로 내몰린다는 흔한 생각과는 달리, 그런 시선과 대우를 평범한 여성인 자신도 일상에서 흔하게 경험해 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권순지의 장소 감정은 중동의 삶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됐다.
권순지가 찍은 중리동 골목길 빌라촌 ⓒ〈노출과 침범〉
2019년 문화기술지를 활용해 대전의 동네를 기록하는 프로젝트[14]에 참여한 ‘머물다가게’의 임다은은 월평동을 기록하기 위해 길을 걷다가 멈춰 섰다. 길바닥에 흩어져 있는 성매매 알선 홍보물(일명 ‘찌라시’) 때문이다. 찌라시에는 임다은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 얼굴과 몸이 상품처럼 전시돼 있었다. 임다은은 이 길과 공간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느꼈다.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도심 외곽의 유흥가 어디쯤에만 있을 것 같은 공기는 사실 내 곁에 있다. 중동으로 밀려난 삶이 안온한 나의 삶과 연결돼 있다는 걸 알면 그 동네가 달리 보이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 거리에서 느꼈던 감정을 금방 잊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성 청년들에게는) 오래도록 남는다. 그 감각이 거기에 갈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이들에게 남겨진 그 거리의 장소성은, 언제든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확인시키는 매우 ‘정치한(political)’ 것이 된다. 장소 사이 경계는 알게 모르게 뚜렷하게 그어지고, 갈만한 장소와 그렇지 못한 장소 사이 거리는 더 벌어진다.
임다은이 찍은 월평동 길바닥 ⓒ〈찌라시〉
이처럼 도시의 장소성을 느끼고 기록하는 과정은 나의 위치와 입장을 자각하는 순간의 기록이다. 기록자는 장소를 경험하면서 자신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장소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내가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장소와 관계를 맺으며 알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이다.

2019년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한 ‘뉴타입 이미지웍스’의 김혜나는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일상생활의 공간이었던 조치원을 적극적으로 경험하면서 ‘‘나’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다’고 말한다.

“매일 다니던 학교 가는 길, 동기들과 우르르 몰려가던 술집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골목에서, 카페와 축제가 있었던 공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체험한 일들은 우연한 접점이었고 예상하지 않았던 감정이 튀어나오게 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하다 보니, 그 장소 안에서 일어난 일이 나와 사람들과의 관계, 나와 공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무엇을 느꼈는지 생각하다 보면 그 공간에 위치한 ‘나’를 보게 된다. 컴컴한 동네 무서운 줄 모르는 건, 아예 늦은 시간에 돌아다닐 생각을 하지 않는 ‘취약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새로 생긴 조치원역 앞 프랜차이즈 카페에 열광하는 나와 친구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열광’이 결국 ‘결핍’의 반영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린 주체적으로 나서 본 경험이, 소비할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 본 경험이 너무 적었다.”

신체적 역량이나 경제적 자원과 상관없이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 갈 수 없다. 그곳에 갈 수 없는 사람은 그곳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구성할 권리는 르페브르가 주장한 ‘공간 주권(space sovereignty)[15]’의 주요 요소다.

모두에게 열려 있음을 표방하는 도시에서 은근한 불화를 겪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도시 장소에서 사람, 건물, 골목길과 상호 작용하면서 내가 주변화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학생, 직장인이었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도시 장소를 탐구하려고 카메라를 들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연다. 그때 이전에는 감각하지 못했던 것을 감각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이 도시의 주인이 되어본 적 있었나? 혹시 주인이 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방해 온 것은 아닐까. 모방 끝에 결국 그 도시를 ‘노잼’이라 느낀 것은 아닐까. 직접 주체적으로 도시 장소성을 만들고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나만이 알고 느낀 것을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다면 ‘노잼 도시’는 없다.
[1]
쩡찌, 《지역의 사생활 99. 울산: 폰 콜》, 삐약삐약출판사, 2021, 81~82쪽.
[2]
유호경, 〈로컬 브랜딩, 지방 소멸 해결사 될까〉, 이코리아, 2023. 3. 24.
[3]
리슨투더시티, 《미학 실천: 리슨투더시티 비평집》, 2023.
[4]
리슨투더시티, 《미학 실천: 리슨투더시티 비평집》, 2023, 257~271쪽.
[5]
리슨투더시티, 《미학 실천: 리슨투더시티 비평집》, 2023, 21쪽.
[6]
홍서윤, 〈재개발 지역서 울려퍼진 치유의 멜로디-대전시, 재개발 철거 중인 목동 3구역서 위로의 퍼포먼스〉, 《충청투데이》, 2018. 9. 17.
[7]
박혜성은 목동 재개발 지구에서 있었던 피아노 퍼포먼스 ‘막다른 골목’에 다음의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안준호· 박혜성(기획), 박상희(피아노 연주), 정다운(영상 촬영), 안수희(사진 촬영), 여상희(사진 촬영과 기록 수집), 남명옥(연기 퍼포먼스), 이승규(피아노 조율), 윤석빈 외(포스터 디자인). 정다운 감독이 제작한 퍼포먼스 영상은 비메오에서 볼 수 있다.
[8]
권인호의 블로그에는 대전을 중심으로 전개해 온 ‘스페이스 해킹 대전’에 대한 생각과 기록이 있다.
[9]
대전 대덕구 청년 공유 공간 청년벙커의 ‘10만원 스페이스 해킹 SF적 영화’ 제작 워크숍 안내문 참조.
[10]
이연숙(리타), 〈위대함 또는 유머: 세계를 둘로 쪼개기〉, 《이반지하 작가비평 국립현대미술관 레지던시 2022》, 2022, 146~150쪽.
[11]
문재원, 〈트랜스로컬 주체성과 경계의 재구성〉, 《현대미술학회》 26(2), 2022, 69쪽
[12]
레슬리 컨(황가한 譯),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열린책들, 2022, 159~163쪽.
[13]
콜렉트(김재연·권순지), 〈불난 집〉, 《2018 지역 리서치 프로젝트》, 대전문화재단, 2018, 49~86쪽.
[14]
주혜진·최성은, 《대전·세종지역 청년인구감소의 지역 내 불균형-성인지적 관점을 활용한 논의의 확장》, 대전세종연구원, 2019.
[15]
주혜진·김혜나, 〈도시는 어떻게 ‘남성’의 것이 되었나?: 공간 기억으로 구성한 도시 정체성〉, ‘제19회 도시연구세미나: 여성과 도시’ 발표 자료집, 2020,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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