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늘보들의 대륙, 1인당 GDP(단위: 1000달러, 2010년 물가 기준) 출처: 유엔중남미경제위원회(ECLAC), 세계은행
부진의 기저에는 낮은 생산성과 경직된 규제, 소규모 기업들의 확장과 효율화를 촉진하는 인센티브의 부족,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부패한 정치 구조가 있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노동력의 증가로 지역 경제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구학적 혜택은 이제 거의 끝났다. 2020년대에 이르면 많은 국가에서 생산 인구의 감소가 시작될 것이다. 경제가 불안해지면서 빈곤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소득 불평등 수치의 감소세도 둔화되었다. 이는 기존 정치의 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암울한 상황을 배경으로,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민주주의의 병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보다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모든 계층에서 정치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회학자이자 브라질의 전직 대통령인 페르난도 엔히키 카르도주(Fernando Henrique Cardoso)의 말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정치 구조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더 이상 부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일부는 중재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소통하는 소셜 미디어 중심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과다. 여기에 정치적 관습도 한몫을 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오랜 군사 독재와 포퓰리스트의 역사가 있다. 때로는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Juan Perón)처럼 그 둘이 하나로 합쳐진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재자 전통은 2세기 전의 길고도 치열했던 독립 전쟁, 험난한 지형에서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어려움에 기인한다. 많은 나라들이 천연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던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식민 통치와 노예제의 잔재 속에서 극단적인 소득 불평등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다. 풍부한 천연 자원과 불평등의 결합은 포퓰리스트들이 활용하기 좋은 분노를 낳았다.
그런데 라틴아메리카에는 또 다른 정치적 전통이 있다. 중산층 중도 노선의 하나인 이것은, 민주 공화국으로 거듭날 때 만들어진 입헌주의 원칙을 공고하게 하고자 하는 오랜 투쟁의 과정에서 다져진 전통이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은 지난 40년 동안 많은 나라들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기세를 키워 왔다. 바로 정치인들은 진실해야 하고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보는 전통이다. 현재 정치인들이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유권자들은 브라질의 노동자당이나 멕시코의 제도혁명당과 같은 지배 정당들을 버렸다. 옥스퍼드대학교의 로렌스 화이트헤드(Laurence Whitehead)는 “자기들끼리 잇속을 챙기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공공의 이익을 말하는 위선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가가 부유해지면 부패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권에서는 특이하게도 주로 중산층 지역에서 부패가 만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역의 특징은 지나칠 정도로 규제가 강압적이라는 것인데, 실무적인 차원으로 가면 공무원들에게 재량권이 폭넓게 주어져 있다. 원자재 호황은 국가의 재정 원천이 더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정치인들이 훔칠 수 있는 돈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베브레시(Odebrecht) 등 브라질과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건설 기업 뇌물 사건에서 시작된 라바 자투(Lava Jato·세차라는 뜻)라는 이름의 수사는 부정부패의 규모를 대중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남미 지역 정치권 전체가 썩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사실 이는 지연된 사회 변화의 문제를 보여 주는 수사였다. 권력자에게 너그러운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은 이제 민주주의의 산물인 독립적인 사법부와 탐사 저널리즘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부패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페루에서는 네 명의 전직 대통령들이 수사를 받고 있다. 그중 한 명인 알란 가르시아(Alan García)는 지난달 리마의 자택에 그를 체포하러 온 경찰이 들이닥치자 자살했다.
중도가 사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포퓰리스트들은 이러한 스캔들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들이 사법부와 언론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민중의 구원자라는 후광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주로 중도 정당들이다. 이들은 좋은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분투해 왔다. 민주화 초기의 개혁에 대한 열망은 최근 정치권에 나타난 두 개의 조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바로 분열과 분극화다.
새로 구성된 브라질 의회에는 30개의 정당이 입성했다. 다섯 개 정당이 원내에 있었던 1982년과 비교하면 크게 늘어난 결과다. 단원제 의회인 페루에서는 130개 의석이 11개의 정파들로 나뉘어 있다. 한때는 민주당과 보수당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던 콜롬비아 의회에는 현재 16개의 정당들이 들어와 있다. 칠레의 안정적인 제도 역시 조각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의 한 가지 이유는, 대통령은 직선제로, 입법 의원들은 비례 대표로 선출하는 이상스럽기도 하고 독특하기도 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제도다. 소속 정당을 바꾸는 데에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정치가 돈을 버는 수단이 되거나, 뻔뻔하게도 자신의 사업적 영리를 취하기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페루에서는 영리를 목적으로 정당에 돈을 내고 들어가기도 한다. 리마의 파시피코대학교의 정치학자 알베르토 베르가라(Alberto Vergara)는 이로 인해서 정당의 정체성과 국가 민주주의의 대의성이라는 속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말한다.
낡은 좌우 구분법이 더 이상 유일한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는 점은 또 다른 요인이다. 복음적 보수주의자들이 낙태나 동성애 권리와 같은 이슈들을 놓고 자유민주적 세속주의자들과 맞서고 있다. 지난 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양당 체제였던 코스타리카에서는 작년에 있었던 대선에서 정치적 경험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복음주의 기독교 가스펠 가수가 결선 투표까지 올라갔었다(패배하기는 했다). 분열의 결과, 집권당은 인기는 없지만 반드시 필요한 개혁을 밀어붙이는 데 필요한 의회 내 다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치러진 선거들을 보면 남아메리카에서는 오른쪽으로,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왼쪽으로 급선회한 것을 볼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정상적인 민주주의하에서 가능한 정권의 교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정치적 분극화라는 형태로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온건 개혁 중도파 붕괴의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치는 더 불안정해졌다.
하지만 낙관적인 전망도 가능하다.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는 더 회복력이 있는 편이다. 여론 조사 결과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독재 정부를 반기는 이들이 전체의 5분의 1에서 4분의 1 사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몇몇 국가들에서는 견제와 균형이 안전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정부는 군 장성들과 경제 자유주의자들, 사회적 보수주의자들로 구성된 금방이라도 무너질 수 있는 조합이다. “보우소나르 세력은 정당도, 아무것도 아니고, 잠깐의 유행에 불과합니다.” 전직 대통령 카르도주의 말이다. 그는 의회와 자유로운 언론, 그리고 사회 단체들의 대항력에 신뢰를 걸고 있다. “항상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되지만, 현재의 제도권이 독재의 선상에 올라타지는 않을 것입니다.”
AMLO에 맞서는 야당 세력이 약하고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이제 막 시작된 시점인 멕시코에서는 우려가 훨씬 더 크다. 하지만 경제가 악화되면 대통령에 대한 인기는 시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중도 세력들이 모든 곳에서 전멸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