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 보이는 결과 / “당신의 나라가 EU 회원국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론 조사 결과(단위: 퍼센트) / 모름 -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 - 나쁨 - 좋음 / 출처: 유로바로미터
아마도 회원국 탈퇴의 위기를 여러 번 거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
[6], 유럽 주변 세계의 위기가 고조되는 것 때문일 수도 있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현재 유럽에 대한 어떤 믿음 같은 것이 되살아나고 있다. 2018년 9월 EU 전역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퍼센트가 EU 회원국인 것이 좋다고 답했다. 1992년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응답자의 11퍼센트만 나쁘다고 답했는데, 이는 금융 위기 이후로 가장 낮은 수치이다(표 1 참조). 브렉시트 소동은 EU 탈퇴를 고심하던 다른 나라들을 확실히 붙잡아 두는 효과를 내고 있다. 한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를 주장하던 정당들은 계획을 철회했다. 그런데 EU에 대한 지지율이 오르기 시작한 건 영국의 국민 투표 4년 전인 2012년이었다.
EU의 좋은 점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긴 하지만, EU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경제 블록이다. 물론 그 안에는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경제 성장의 부진, 탄소 배출 문제, 세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EU 내에서도 세력이 커지고 있는 권위주의, 약한 군사력, 부족한 세계 수준의 첨단 기술 기업, 그리고 이민 통제와 관련한 무능함 같은 것들 말이다.
화성인, 아니 유럽인
만약에 화성의 누군가가 이런 상황을 본다면 ― 베이징이나 워싱턴이라고 해도 좋다 ― 위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EU 통합을 강화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럽은 미국도, 중국도 아니다. 유럽은 각 나라의 크기도 제각각이고, 다양한 언어,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와 기질을 자랑하는 여러 민족 국가들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있는 곳이다. 개별 독립국에서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거대 공동체 안에서도 구현하려는 시도는 ‘데모스(demos)’의 결핍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대 네메아인들에게 친숙한 이 용어는 스스로를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시민이라는 의미다. 재정과 통화 정책, 방위 정책, 그리고 시민권이 완전히 통합된 초국가를 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베버를 비롯한 유럽 의회 의원들은 이 선거를 범유럽적이면서도 대통령 선거에 준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유권자들은 지역주의적 투표를 계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10년간 불안한 상황을 겪은 유럽의 정치 지형은 일관성은 없지만 조금은 더 결속력 있게 재편된 것 같다. 유럽은 이제 더 이상 확장하려는 목적이 없으며, 어떻게 해서든 통합을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보호받는 것이다. 브뤼셀 의사당의 복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보호해 주는 유럽(A Europe which protects)”이라는 표현을 이제는 선거 유세 현장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유럽 시민들이 경제 혼란, 기후 변화, 러시아와의 관계, 이민 문제 등 외부의 다양한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필요로 하고, 원한다는 인식은 널리 공유되어 정치적 차이를 뛰어넘고 있다. 어떤 정치인들은 보호를 위해 통합을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단순한 협력 관계를 바란다. 하지만 강경 우파인 오스트리아의 자유당(FPO)처럼 한때는 강경했던 반EU 정당들조차도 현재는 EU에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최소한 국경 통제와 대테러 정책에 있어서만큼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것이다.
동시에 오래된 좌우, 친·반유럽 전선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분열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전선은 상황을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은 점진주의자들과 급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들 사이에 그어져 있다. 물론 어떤 변화를 추구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변화를 보여 주는 ‘데모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의 도시이자 유럽 분위기의 바로미터인 오스트리아 북부 오버외스터라이히(Oberösterreich) 주도 린츠(Linz)로 가야 한다. 세계 노동절이었던 지난 5월 1일, 친유럽 성향의 사람들과 중도 좌파인 사회민주당(SPO) 사람들이 바로크 양식의 중앙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동지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설치된 눅눅한 텐트 안에서는 자유당의 행사가 최고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두 행사의 주최측이 좌파인지, 우파인지 또는 친유럽인지, 반유럽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이 도시를 가르는 도나우강만큼이나 뚜렷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상황은 간단치 않다. 두 행사에서 정치인들은 성의 없이 뻔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중앙 광장에서는 사회민주당 소속의 린츠 시장인 클라우스 뤼거(Klaus Lüger)의 시정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대형 텐트에서는 자유당의 주위원장인 만프레드 하임부흐너(Manfred Haimbuchner)가 EU의 트랙터 운전석 너비 규제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냈지만 별로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토해 낸 열변 가운데에는 오버외스터라이히 사람들뿐 아니라 유럽 사람들 모두와 관련이 있는 미묘한 사안이 두 가지 있었다.
사회민주당과 자유당 모두 유럽이 보통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로 협업하는 유럽이 될 때만 우리는 공통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회민주당 연단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이 발언에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은 고향 마을에서 더 이상 편안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하임부흐너가 이런 상황에서 뭔가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자 자유당의 텐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이런 문제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에 대해서도 호응했다. 유럽에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유럽 한가운데에 자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유럽의 심장부로 갈 것입니다.” 그가 상상하는 “여러 나라들이 모인 유럽”의 심장부는 원래는 도나우강 너머에 모인 이 집회 참가자들이 원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EU에서 완전히 탈퇴하는 것을 추진했던 이 정당은 이제 놀랍게도, EU 안에서의 중심적인 역할을 원하고 있었다.
보호받는 유럽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당들의 견해에는 차이가 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 좌파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보호를 주장하고, 우파들은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보호를 주장하며, 중도 진영에는 두 가지 의견이 혼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대립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경제 체제 안에서 시장과 사유 재산의 역할을 둘러싼 오랜 인식 차이가 그 틈을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럽인들이 보호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공통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스페인의 좌파 정당 포데모스(Podemos)가 내놓은 유럽 의회 선거 공약집은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보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독일의 중도 우파인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
[7]은 “우리의 유럽이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며 독일과 유럽 모두를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유당의 선거 리플릿에는 유럽 깃발이 철조망 위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조금은 험악한 이미지가 실려 있다.
보호가 필요한 혼란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인식의 차이가 있다. “유럽 의회 선거는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뤼거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에 유럽의 상황이 민족주의로 전락한다면 우리와 같은 도시들은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의 발언에 담긴 의미는, 유럽이 꾸준히 통합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당의 텐트 안에서는 빠른 템포의 아코디언 음악 소리에 고조된 사람들이 유럽의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에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우린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강경 우익 성향인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Heinz-Christian Strache) 오스트리아 부총리
[8]가 크게 외쳤다. 이 자리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색색의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지난겨울부터 초봄까지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던 반체제 시위인 노란 조끼 저항 운동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얼마나 변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유럽인민당과 카운터파트인 중도 좌파 진영의 사회민주진보동맹(S&D) 등 오랫동안 유럽 의회를 장악해 온 정당들이 체제를 뒤흔들 것으로 보이는 세력들에 맞서고 있다. 체제를 뒤흔들 세력들은 좀 더 흥미롭다. 이들의 성향은 프랑스의 장 뤽 멜랑숑(Jean-Luc Mélenchon)과 같은 좌파부터 자유당 같은 우파 집단, 그리고 EU 탈퇴주의에서 잔존 개혁주의로 탈바꿈한 이탈리아의 극우 세력 동맹당(Lega)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선거 판세가 주변부만 있고 가운데는 비어 있는 도넛 형태는 아니다. 독일 녹색당 같은 중도주의 정파들 역시 급진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규모 측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이 이끄는 정당인 레퓌블리크 앙 마르슈(La République En Marche)다. 이탈리아 동맹당의 마테오 살비니(Matteo Salvini)와 마찬가지로, 마크롱 역시 유럽 대륙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공약을 발표했다. 살비니는 국경 통제 강화와 “유럽 문화”의 보호를 외치고 있다. 마크롱은 국경을 개방하는 솅겐(Schengen) 조약의 재검토, 유럽 최저 임금제 도입, 인공지능 산업에 대한 투자, 유럽 안보위원회의 설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두 지도자 모두 각자가 추진하는 체제 재편을 위해 선거 이후의 차기 유럽 의회에서 새로운 정치 그룹을 만들고자 한다.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구세력들은 의석을 잃을 것 같다(표2 참조). 체제를 뒤흔들 세력들이 그 표를 가져갈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유럽 각국의 의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분열 현상은 이제 국제적인 형태로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유권자들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분열을 반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