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하는 유럽이란 어떤 의미인가?
올리브 숲과 사이프러스 나무들로 둘러싸인, 언젠가 고대의 열정적인 육상 선수들이 승리의 영광을 놓고 겨루었던 펠로폰네소스반도의 하늘은 연청색이었다. 그 아래에서 독일 바이에른주(州)의 중도 우파 정치인인 만프레드 베버(Manfred Weber)가 사색의 지혜를 구하려는 듯, 한쪽 손을 들어 올려서 네메아(Nemea) 지역에 남은 고대의 기둥들 가운데 하나를 어루만졌다. 그리스 중도 우파 정당의 대표인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Kyriakos Mitsotakis)는 “민주주의의 고향”에 온 그를 환영하며 맞이했다.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지도자의 일원이 되려는 그가 선거 운동을 시작하기에 제격인 장소였다. 사진 기자들은 좀 더 흥미로운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리저리 구도를 맞추고 있었다.
유럽 연합(EU)의 입법 기구인 유럽 의회 선거가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치러진다. EU에 남기 위해 헌신하는 27개의 EU 회원국은 물론이고, 탈퇴하려 애쓰고 있는 나라(영국)에서도 선거는 진행된다.[1] 약 400개의 정당에서 출마하는 5000명 이상의 후보들 대다수는 자국 내 정당에 소속되어 있다(유럽 의회 내 정파 그룹 소속과 약간의 무소속 후보들도 있다). 일단 의회에 입성하면 이 정당들은 큰 틀의 이데올로기 그룹으로 분류된다. 베버의 바이에른 기독사회연합(Christian Social Union in Bavaria)과 미초타키스의 신민주당(New Democracy party)이 소속된 유럽인민당(European People’s Party·EPP)은 그러한 연합 가운데에서 오랫동안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751명의 유럽 의회 의원들은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 의회 건물에서 EU의 행정 기구인 집행위원회가 상정한 법안들을 토론하고, 수정하고, 통과시키고, 예산안을 심사한다. 그들이 브뤼셀을 비우는 날도 있는데, 1년에 48일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일을 처리하는 유목 의회 시스템 때문이다.[2] 이런 과정에서 의원들은 보통 두 축을 기준으로 나뉜다. 일반적인 좌파와 우파, 그리고 좀 더 지역적인 친유럽과 반유럽이다. 유로화 위기와 2015년의 난민 위기 속에서 부상하고 있는 포퓰리스트 정당들은 이번 선거에서 반유럽 성향 정파가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는 흥분과 불안이 뒤섞인 전망을 촉발시키고 있다.
의회가 구성되면 EU 집행위원장을 선출하게 된다. 집행위원장은 의회 내 구성원 그 누구보다도 더 막강한 권한을 갖는 자리다. 그동안은 회원국들이 막후 협상을 통해 집행위원장 후보자를 선출해 왔다. 그러나 2014년 의회는 각 교섭 단체가 구성원들 중에서 슈피첸칸디다트(Spitzenkandidat)[3]라고 불리는 선호 후보를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가장 큰 교섭 단체에서 선택한 후보가 직위를 가져가는 구조다. 베버는 유럽인민당이 이번 선거에서 내세운 슈피첸칸디다트다. 그래서 그는 고대의 지혜와 체전의 현장에 방문했던 것이다. “야망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한 보좌관이 사뭇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메아는 유럽의 현 상태를 반영하는 울림과 메타포를 담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고대 유적에 대한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임시 조치인지 확실한 복원인지는 불분명하다. 아테네에서 차를 몰고 오다 보면 문을 닫은 공장들이 즐비하다. 이 지역의 청년 실업률은 30퍼센트에 달하는데, 이런 상황은 그리스를 EU 탈퇴 직전까지 몰고 갔던 유로존 위기를 떠오르게 한다. 이 도로는 난민 위기 때 터키를 떠난 난민들이 유럽으로 향하던 동맥이었다. 엘레프시나(Elefsina)만 너머로 보이는 피레우스(Piraeus) 항구의 대형 크레인 일부는 중국에 팔려 나갔다.
심연과 이면
이곳의 가장 강력한 상징은 ‘부재’다. 이곳에는 유권자도, 지지자도, 들뜬 선거 분위기도 없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스 사람들은 베버를 직접 후보 명단에서 고를 수 없다.[4] 이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유럽 의회 선거는 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민주주의 행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의 면면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유럽 의회 선거 결과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으며, 유럽 의회 선거를 자국 내 정치적 상황에 대한 호오(好惡)를 확인하는 일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앞선 2014년 선거에서 투표수가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 곳이 8개국이나 됐다.
하지만 그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지난 10년간 여러 위기를 거치면서 EU는 일종의 시험을 치렀고, 부족한 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위기들은 EU가 회복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보여 주었다. EU와 회원국들은 위기가 감지될 때마다 체제 유지를 위한 결정들을 내려 왔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정치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결정들이었다. 예를 들면,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화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선언했었는데, 이는 웬만해선 빚내는 것을 꺼리는 독일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EU에 투입한 지분이 상당했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5] 2016년의 브렉시트(Brexit) 국민 투표는 유럽 연합에서 비중 있는 나라가 탈퇴를 결정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EU의 대응을 통해 EU 회원국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응집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브렉시트로 인해서 그들 사이의 결속력은 더 단단해지기도 했다.
아마도 회원국 탈퇴의 위기를 여러 번 거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6], 유럽 주변 세계의 위기가 고조되는 것 때문일 수도 있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현재 유럽에 대한 어떤 믿음 같은 것이 되살아나고 있다. 2018년 9월 EU 전역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퍼센트가 EU 회원국인 것이 좋다고 답했다. 1992년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응답자의 11퍼센트만 나쁘다고 답했는데, 이는 금융 위기 이후로 가장 낮은 수치이다(표 1 참조). 브렉시트 소동은 EU 탈퇴를 고심하던 다른 나라들을 확실히 붙잡아 두는 효과를 내고 있다. 한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를 주장하던 정당들은 계획을 철회했다. 그런데 EU에 대한 지지율이 오르기 시작한 건 영국의 국민 투표 4년 전인 2012년이었다.
EU의 좋은 점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긴 하지만, EU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경제 블록이다. 물론 그 안에는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경제 성장의 부진, 탄소 배출 문제, 세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EU 내에서도 세력이 커지고 있는 권위주의, 약한 군사력, 부족한 세계 수준의 첨단 기술 기업, 그리고 이민 통제와 관련한 무능함 같은 것들 말이다.
화성인, 아니 유럽인
만약에 화성의 누군가가 이런 상황을 본다면 ― 베이징이나 워싱턴이라고 해도 좋다 ― 위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EU 통합을 강화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럽은 미국도, 중국도 아니다. 유럽은 각 나라의 크기도 제각각이고, 다양한 언어,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와 기질을 자랑하는 여러 민족 국가들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있는 곳이다. 개별 독립국에서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거대 공동체 안에서도 구현하려는 시도는 ‘데모스(demos)’의 결핍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대 네메아인들에게 친숙한 이 용어는 스스로를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시민이라는 의미다. 재정과 통화 정책, 방위 정책, 그리고 시민권이 완전히 통합된 초국가를 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베버를 비롯한 유럽 의회 의원들은 이 선거를 범유럽적이면서도 대통령 선거에 준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유권자들은 지역주의적 투표를 계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10년간 불안한 상황을 겪은 유럽의 정치 지형은 일관성은 없지만 조금은 더 결속력 있게 재편된 것 같다. 유럽은 이제 더 이상 확장하려는 목적이 없으며, 어떻게 해서든 통합을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있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보호받는 것이다. 브뤼셀 의사당의 복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보호해 주는 유럽(A Europe which protects)”이라는 표현을 이제는 선거 유세 현장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유럽 시민들이 경제 혼란, 기후 변화, 러시아와의 관계, 이민 문제 등 외부의 다양한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필요로 하고, 원한다는 인식은 널리 공유되어 정치적 차이를 뛰어넘고 있다. 어떤 정치인들은 보호를 위해 통합을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단순한 협력 관계를 바란다. 하지만 강경 우파인 오스트리아의 자유당(FPO)처럼 한때는 강경했던 반EU 정당들조차도 현재는 EU에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최소한 국경 통제와 대테러 정책에 있어서만큼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것이다.
동시에 오래된 좌우, 친·반유럽 전선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분열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전선은 상황을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은 점진주의자들과 급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들 사이에 그어져 있다. 물론 어떤 변화를 추구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변화를 보여 주는 ‘데모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의 도시이자 유럽 분위기의 바로미터인 오스트리아 북부 오버외스터라이히(Oberösterreich) 주도 린츠(Linz)로 가야 한다. 세계 노동절이었던 지난 5월 1일, 친유럽 성향의 사람들과 중도 좌파인 사회민주당(SPO) 사람들이 바로크 양식의 중앙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동지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설치된 눅눅한 텐트 안에서는 자유당의 행사가 최고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두 행사의 주최측이 좌파인지, 우파인지 또는 친유럽인지, 반유럽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이 도시를 가르는 도나우강만큼이나 뚜렷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상황은 간단치 않다. 두 행사에서 정치인들은 성의 없이 뻔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중앙 광장에서는 사회민주당 소속의 린츠 시장인 클라우스 뤼거(Klaus Lüger)의 시정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대형 텐트에서는 자유당의 주위원장인 만프레드 하임부흐너(Manfred Haimbuchner)가 EU의 트랙터 운전석 너비 규제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냈지만 별로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토해 낸 열변 가운데에는 오버외스터라이히 사람들뿐 아니라 유럽 사람들 모두와 관련이 있는 미묘한 사안이 두 가지 있었다.
사회민주당과 자유당 모두 유럽이 보통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로 협업하는 유럽이 될 때만 우리는 공통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회민주당 연단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이 발언에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은 고향 마을에서 더 이상 편안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하임부흐너가 이런 상황에서 뭔가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자 자유당의 텐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이런 문제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에 대해서도 호응했다. 유럽에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유럽 한가운데에 자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유럽의 심장부로 갈 것입니다.” 그가 상상하는 “여러 나라들이 모인 유럽”의 심장부는 원래는 도나우강 너머에 모인 이 집회 참가자들이 원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EU에서 완전히 탈퇴하는 것을 추진했던 이 정당은 이제 놀랍게도, EU 안에서의 중심적인 역할을 원하고 있었다.
보호받는 유럽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당들의 견해에는 차이가 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에서 좌파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보호를 주장하고, 우파들은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보호를 주장하며, 중도 진영에는 두 가지 의견이 혼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대립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경제 체제 안에서 시장과 사유 재산의 역할을 둘러싼 오랜 인식 차이가 그 틈을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럽인들이 보호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공통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스페인의 좌파 정당 포데모스(Podemos)가 내놓은 유럽 의회 선거 공약집은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보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독일의 중도 우파인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7]은 “우리의 유럽이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며 독일과 유럽 모두를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유당의 선거 리플릿에는 유럽 깃발이 철조망 위에 자랑스럽게 걸려 있는 조금은 험악한 이미지가 실려 있다.
보호가 필요한 혼란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인식의 차이가 있다. “유럽 의회 선거는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뤼거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에 유럽의 상황이 민족주의로 전락한다면 우리와 같은 도시들은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의 발언에 담긴 의미는, 유럽이 꾸준히 통합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당의 텐트 안에서는 빠른 템포의 아코디언 음악 소리에 고조된 사람들이 유럽의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에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우린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강경 우익 성향인 하인츠-크리스티안 슈트라헤(Heinz-Christian Strache) 오스트리아 부총리[8]가 크게 외쳤다. 이 자리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색색의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지난겨울부터 초봄까지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던 반체제 시위인 노란 조끼 저항 운동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얼마나 변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유럽인민당과 카운터파트인 중도 좌파 진영의 사회민주진보동맹(S&D) 등 오랫동안 유럽 의회를 장악해 온 정당들이 체제를 뒤흔들 것으로 보이는 세력들에 맞서고 있다. 체제를 뒤흔들 세력들은 좀 더 흥미롭다. 이들의 성향은 프랑스의 장 뤽 멜랑숑(Jean-Luc Mélenchon)과 같은 좌파부터 자유당 같은 우파 집단, 그리고 EU 탈퇴주의에서 잔존 개혁주의로 탈바꿈한 이탈리아의 극우 세력 동맹당(Lega)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선거 판세가 주변부만 있고 가운데는 비어 있는 도넛 형태는 아니다. 독일 녹색당 같은 중도주의 정파들 역시 급진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규모 측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이 이끄는 정당인 레퓌블리크 앙 마르슈(La République En Marche)다. 이탈리아 동맹당의 마테오 살비니(Matteo Salvini)와 마찬가지로, 마크롱 역시 유럽 대륙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공약을 발표했다. 살비니는 국경 통제 강화와 “유럽 문화”의 보호를 외치고 있다. 마크롱은 국경을 개방하는 솅겐(Schengen) 조약의 재검토, 유럽 최저 임금제 도입, 인공지능 산업에 대한 투자, 유럽 안보위원회의 설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두 지도자 모두 각자가 추진하는 체제 재편을 위해 선거 이후의 차기 유럽 의회에서 새로운 정치 그룹을 만들고자 한다.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구세력들은 의석을 잃을 것 같다(표2 참조). 체제를 뒤흔들 세력들이 그 표를 가져갈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유럽 각국의 의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분열 현상은 이제 국제적인 형태로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유권자들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분열을 반영할 것이다.
그래도 웨스테로스[9]보다는 낫다
싱크탱크인 유럽 외교 관계 위원회(ECFR)는 유럽의 유권자를 네 개 그룹으로 분류했다. 재미있는 건 각 그룹을 부르는 명칭을 거버넌스 실패를 다루고 있는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자국 정부와 EU 모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스타크 가문에 해당한다. 자신들의 나라는 무너졌지만 유럽은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너리스 세력에 해당한다. 두 유형 모두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확신은 있지만 EU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유민들이다. 둘 다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천년 왕국 신앙을 믿는 스패로우들이다. 마지막 두 분파는 급진적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네 개의 분파는 모두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비율로 존재하고 있다(표3 참조). 스타크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들은 대륙의 중심부에 모여 있는 반면에, 스패로우들이 장악하고 있는 나라들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대너리스 세력은 동쪽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명백하게 나타나듯 자신들의 나라는 괜찮지만 유럽은 무너졌다고 믿는 자유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한 군데도 없다.
여러 세력들이 이합집산을 하면서 이런 모든 사정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새로 구성될 복잡한 유럽 의회에서 베버가 위원장직을 차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속한 유럽인민당은 최대 정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집행위원장을 임명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헌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2014년에도 현재의 장-클로드 융커(Jean-Claude Juncker) 위원장이 투표를 통해서 선출되었다.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은 슈피첸칸디다트라는 개념이나 융커 개인에 대해, 또는 둘 모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고, 집행위원장에게 의회 통제권을 주는 것을 여전히 반대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헝가리의 독재 통치자인 빅토르 오르반에 대한 베버의 지속적인 옹호와 변호가 계획을 망칠 수도 있다. 같은 유럽인민당 소속이면서 EU 집행위원회의 브렉시트 협상 대표인 미셸 바니에(Michel Barnier)가 위원장이 될 수도 있다. 자유 진영에는 EU 경쟁위원회를 잘 이끌어 오고 있는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Margarethe Vestager)라는 자유 민주 진영의 믿을 만한 후보도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를 열렬히 지지하는 세력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인가? 11월에 구성될 신임 집행위원회는 새로운 의회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조직이 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모두 28명으로 구성된 EU 집행위원들은 각 회원국이 한 명씩 지명하게 된다. 그리고 2014년부터 권력을 장악해 온 몇몇 포퓰리스트 정부는 브뤼셀에 방화범을 보내서 EU에 불을 지르고 싶어 할 것이다.
지난주 루마니아에서 열린 EU 정상 회담의 국방, 연구, 사회권, 기후 변화와 유럽의 이웃 지역에 대한 합의를 포함한 현 집행위원회의 향후 5년 계획은 일찌감치 폐기될 수도 있다. 유럽 의회와 각국 정부들로 구성되는 EU 이사회, 그리고 집행위원회 안에서도 기득권 세력과 반란 세력 사이의 경쟁 구도가 형성될 것이다.
새로운 위기가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EU를 만들어 가는 또 하나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독일 마셜 기금(German Marshall Fund)의 잔 테쇼(Jan Techau)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전망한다. 유럽과 러시아의 전쟁, 새로운 유로화 위기, 급증하는 이민자들이 유럽에 가하는 통합에 대한 압력, 2040년이면 이들이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세력이 될 것이라는 전망 등이다. 극단적인 전망이긴 하지만 배경에 대한 진단에는 일리가 있다. 유럽은 힘겹게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왔다. 유권자들은 경제 전쟁이 유럽에 관한 논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과 유럽 협력체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럽은 스스로의 이익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발전시켰고, 그 과정에서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