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귀환
2018년 11월 30일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귀환을 만천하에 알린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마이크로소프트는 오랜 라이벌 애플을 제치고 미국 기업 시가 총액 1위에 등극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종가 기준으로 시가 총액 1위에 오른 것은 2010년 이후 8년 만이었다. 예전처럼 경쟁자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어서 애플, 아마존과 한 치 양보 없는 경쟁을 벌여야 했으나, 돌아온 마이크로소프트는 16년 만에 처음으로 시가 총액 1위로 한 해를 마무리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약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9년 4월 15일에는 애플, 아마존에 이어 미국 기업 중 세 번째로 시가 총액 1조 달러(1190조 원)를 돌파했다.
사람들에게 마이크로소프트는 잊힌 기업이나 다름없었다. 인텔과 함께 ‘윈텔 듀오’로 불리며 PC 시대를 주도했던 추억의 기업. 한때 무지막지한 반독점 행위로 악의 제국이라고 불리다가 스마트폰 열풍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이 마이크로소프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영향력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이끄는 애플이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연이어 내놓으면서 모바일 혁명을 주도하는 동안 급격히 약화됐다. PC 앞에 앉던 이들이 스마트폰으로 눈을 돌릴 때도 마이크로소프트는 여전히 주력 상품 윈도우(Windows)와 오피스(Office)에 의존했다. 구글, 애플, 아마존이 21세기를 대표하는 혁신 기업으로 주목받을 때 마이크로소프트는 옛 성공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식 기업 취급을 받은 이유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부활은 그래서 더 극적이다. 이 부활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화려했던 과거를 봐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PC 시대를 어떻게 열었는지, 또 얼마나 무기력하게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왔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을 45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무자비한 지배자
1974년 12월 어느 토요일 아침, 하버드 대학 신입생 빌 게이츠(Bill Gates)는 친구 폴 앨런(Paul Allen)과 함께 잡지 한 권을 읽고 있었다. 강력한 미니컴퓨터의 등장을 알리는 표지 기사가 실린 잡지였다. 그 잡지를 본 둘은 컴퓨터 언어 개발에 착수하기로 의기투합했고, 이듬해인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했다.
그 무렵엔 소프트웨어가 상품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소프트웨어를 컴퓨터 살 때 공짜로 끼워 주는 제품 정도로 생각했다. 당연히 마이크로소프트도 제대로 된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당대 최고 기업 IBM이 구원의 손길을 뻗치기 전까진 말이다. 1980년 7월, IBM은 극비리에 개발 중이던 개인 컴퓨터용 운영 체제를 마이크로소프트에 맡겼다. 그렇게 IBM PC가 탄생했다. IBM PC의 인기는 엄청났다. 그해 시사 주간지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PC를 선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IBM은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IBM PC에 설치된 운영 체제 MS-DOS 배포권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넘긴 것이다. MS-DOS는 IBM PC에 침투한 트로이 목마나 다름없었다. IBM PC가 팔릴 때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꼬박꼬박 사용료가 입금됐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래픽 기반 운영 체제인 윈도우를 선보인 건 그로부터 5년 뒤인 1985년. 마이크로소프트의 거침없는 행진은 빌 게이츠를 31세의 나이에 세계 30대 갑부로 떠오르게 했다.
물론 초기 마이크로소프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인터넷 바람이 불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위기설이 널리 퍼졌다. 넷스케이프가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라는 브라우저를 내놓으면서 인터넷 혁명을 주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 95에 익스플로러를 끼워 파는 전략으로 맞서 넷스케이프를 시장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PC 시대의 지배자가 인터넷 혁명까지 주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운영 체제에 브라우저를 끼워서 판매한 것이 독점 금지법 위반에 해당된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1998년 미국 법무부가 마이크로소프트를 기소했고, 미국 정부와 마이크로소프트 간의 길고 지루한 법정 공방이 시작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판 과정에서 마이크로소프트가 PC 업체들을 협박한 사실까지 폭로됐다. 사람들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악의 제국, 빌 게이츠를 잔혹한 자본가라며 비난했다.
법정 공방 2년 만인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는 법원에서 회사 분할 판결을 받았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운영 체제와 응용 소프트웨어 회사로 쪼개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송에 참여한 20개 주와 일일이 협상한 덕분이었다. 대신 그해 빌 게이츠가 최고 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가 마이크로소프트 2대 최고 경영자로 취임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엔 유럽 연합(EU)에서 반독점 재판을 받아야 했다. 미국보다 반독점 행위에 대해 훨씬 더 강력하게 대처하는 유럽에서 마이크로소프트는 4억 9700만 유로(6600억 원)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받았다. 또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뺀 윈도우를 출시해야 했는데, 이 조치로 마이크로소프트는 브라우저 시장 지배력을 사실상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위세는 대단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와 오피스, 그리고 브라우저 등 PC를 기반으로 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특히 2001년 선보인 윈도우 XP는 윈도우 역사상 최고 명품으로 꼽힐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해 말 내놓은 엑스박스 게임기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임 시장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세 번의 실패
미국과 유럽의 압박이 마이크로소프트를 불편하게 만든 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압박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정상에서 밀려난 건 아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진짜 위협은 변해 버린 시장 상황이었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시장의 무게 중심이 PC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동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과거의 성공에 취해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폰을 출시했다. PC 시대 운영 체제를 완전히 장악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폰이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용자가 모바일에서 PC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길 원했다. 그래서 PC용 앱이 모바일에서도 그대로 구현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또 PC와 모바일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유니버설 앱도 함께 선보였다. 앱 하나로 모든 플랫폼을 잇겠다는 전략이었다.[1]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실패했다. 애초에 PC와 모바일은 화면 크기부터 달라 사용자의 경험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는 PC 시대의 성공 방정식을 스마트폰에 그대로 접목한 실수를 인정하며 윈도우폰을 포기했다. 그사이 애플은 아이폰을 통해 PC와는 완전히 다른 사용자 경험을 만들어 내며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할 수 있었다.
2013년 마이크로소프트는 노키아 휴대폰 사업 부문을 인수했다. 한때 피처폰 시대 세계 최고 업체였던 노키아는 애플, 구글에 밀려 시장 3위로 추락한 상태였다. 노키아는 당시 최고 경영자가 “불타는 플랫폼 위에 서 있다”는 내부 메모를 돌릴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스티브 발머가 노키아 인수를 추진한 목적은 명확했다.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린 뒤 애플, 구글을 견제할 또 다른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노키아 휴대폰 사업 부문 인수 역시 실패했다. 이 실패로 마이크로소프트는 1만 8000명에 가까운 인원을 해고해야 했다. 노키아 인수 5개월 뒤 발머에 이어 마이크로소프트 3대 최고 경영자로 취임한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는 당시 결정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스티브는 팀원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 공개 투표를 원했다. 나는 노키아 인수를 반대하는 쪽에 표를 던졌다. 나는 스티브를 존경했다. 또한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려 확실한 세 번째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논리도 이해했다. 하지만 어째서 우리가 규칙을 바꾸는 대신 휴대폰 부문에서 세 번째 생태계를 탄생시켜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애플과 구글이 시장의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건 규칙을 바꿨기 때문이다. 아이폰은 성능 경쟁에 치중하는 대신 사용자 인터페이스(UI)와 이용자 경험(UX)으로 승부했다. 앱스토어를 통해 제3의 개발자들이 다양한 앱을 만들도록 한 것 역시 기존 시장 문법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런 점에선 구글도 마찬가지였다. 구글은 오픈소스를 개방하며 다양한 스마트폰 생산 업체를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운영 체제를 공짜로 제공하는 대신 자신의 생태계를 키우면서 광고 수익을 올리는 방식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달랐다. 그들은 과거의 성공에 지나치게 안주해 어떠한 틀도 깨지 않았다. 윈도우폰 출시나 노키아 인수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여전히 199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준 사건이었다. PC 시대 문법으로 모바일 시대에 대응했던 스티브 발머에겐 마이크로소프트를 영광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힘이 없었다. 발머가 인터넷과 콘텐츠 사업 강화를 위해 추진한 야후 인수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연이은 전략 실패로 한때 700조 원에 이르렀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시가 총액은 2010년에 들어 250조 원까지 줄었다.
결국 스티브 발머는 12개월 내로 최고 경영자직에서 사퇴하겠다며 후임 물색을 요청했다. 발머의 사퇴 선언이 나오자 마이크로소프트 차기 최고 경영자 후보들이 물망에 오르기 시작했다. 앨런 멀러리(Alan Mulally) 포드 최고 경영자와 스티븐 엘롭(Stephen Elop) 노키아 최고 경영자 등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마이크로소프트가 거물급 외부 인사를 3대 최고 경영자로 영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궁지에 몰린 회사를 살리기 위해선 외부 인사가 더 적합하다는 게 대체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때까지 외부에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클라우드 및 엔터프라이즈 담당 수석 부사장 나델라를 3대 최고 경영자로 지명했다.
새로운 리더, 나델라
몰락하던 IT 공룡 마이크로소프트는 2014년 2월 나델라가 최고 경영자로 취임하면서 빠르게 변했다. 《블룸버그》는 2018년 5월 2일 “현재 시가 총액 1위인 마이크로소프트가 나델라상스(Nadellaissance)를 맞이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나델라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2]
나델라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이끌었던 빌 게이츠나 스티브 발머와는 많이 달랐다. 초대 최고 경영자 빌 게이츠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들을 시장에서 몰아냈다. 자선 사업가로 변신한 지금의 빌 게이츠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2대 스티브 발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애플, 구글 같은 기업들을 적으로 간주했다. 오픈소스 진영의 축인 리눅스 역시 발머에겐 시장에서 쫓아내야 할 존재였다. 발머는 전쟁을 이끄는 강력한 전사를 자처했다. 당연히 적들과의 타협이나 협력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나델라는 회사 공식 행사 때 아이폰을 꺼내 들 정도로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나델라에게 적과의 파트너십은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제품과 혁신을 위한 필수 요소다. 나델라는 최고 경영자로 취임한 지 두 달 만인 2014년 3월, 애플 iOS 운영 체제에 오피스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구글, 페이스북과도 손잡았다. 고립된 악의 제국이 ‘함께하는 혁신 기업’으로 변신하는 신호였다.
소프트웨어 황제이자 PC 혁명의 불씨를 지핀 신화 시대의 인물 빌 게이츠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직원들을 이끌며 마이크로소프트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빌 게이츠의 대학 친구인 스티브 발머는 열정 넘치는 지도자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 행사 때 무대 위에 올라 관중 앞에서 “윈도우, 윈도우”를 연호할 정도로 힘이 넘쳤다. 두 지도자는 대화와 소통보다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회사를 이끄는 유형이었다.
나델라는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직원들의 말을 듣고, 함께 소통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나델라의 함께하는 리더십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위기에서 구하고, 상처받은 직원들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나델라는 무엇보다도 경청을 중요하게 여겼다. 최고 경영자로 취임하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저서 《히트 리프레시》에는 이런 과정이 잘 묘사돼 있다.
“나는 직위나 소속을 가리지 않고 수백 명의 직원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익명으로 의견을 공유할 수 있도록 포커스 그룹을 꾸리기도 했다. 경청은 내가 매일 실천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앞으로 몇 년간 내 리더십의 기초를 다질 요소였기 때문이다.”[3]
창업자 빌 게이츠도 나델라의 이런 행보를 높이 평가했다. 게이츠는 《히트 리프레시》 서문에서 “나델라는 사용자와 전문가, 경영진과 끊임없이 대화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나델라가 늘 경청하며 함께하는 리더십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건 그의 아들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의 중요성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나델라에게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아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공감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내야 했다.
나델라는 마이크로소프트 최고 경영자가 된 이후 윈도우에 쏠려 있던 회사의 무게 중심을 클라우드와 인공지능 같은 신성장 사업 쪽으로 옮겼다. 그는 ‘모바일 퍼스트, 클라우드 퍼스트’를 외쳤다. 이 전략이 효과를 내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IT 산업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부활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나델라가 과거와 완전히 결별한 건 아니었다. 그는 회사의 전략을 ‘새로 고침’했다. 브라우저 화면의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면 페이지의 근간이 되는 내용이 업데이트된 내용과 함께 남아 있다.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혁신을 할 줄 알았던 나델라는 새로 고침 기능처럼 기존 강점들을 버리지 않으면서 시장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큰 혼란 없이 윈도우 중심 접근 방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새로 고침 리더십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