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역습
나델라가 최고 경영자로 취임하던 날 마이크로소프트의 주가는 36달러(4만 3000원)를 조금 웃돌았다. 하지만 5년이 지난 2019년 5월에는 130달러(15만 5000원)를 넘어서면서 시가 총액 1조 달러를 돌파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어떻게 이런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을까?
마이크로소프트 부활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시 ‘윈도우 퍼스트 전략’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점이다. 윈도우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영혼이나 마찬가지다. 창사 이후 마이크로소프트를 지탱해 온 최고 상품이었다. 즉, 윈도우 퍼스트는 마이크로소프트 전략의 핵심축이었다. 하지만 윈도우 퍼스트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윈도우폰을 비롯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모바일 전략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윈도우에 대한 집착이 이용자들의 욕구와는 상반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나델라는 윈도우 퍼스트를 윈도우 앤드(Windows and)로 바꿨다. 스마트폰용 윈도우에 대한 집착을 과감하게 버리고 애플이나 구글의 모바일 운영 체제에 자신들의 소프트웨어를 덧입히는 쪽에 주력했다. 다양한 오픈소스 프로젝트도 추진하면서 모바일 생태계 속에서 지분을 확대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단순히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동안 고수한 가치를 버렸다고 봐서는 안 된다. 윈도우 퍼스트 전략 포기는 회사가 지향했던 궁극적인 가치를 달라진 상황에 맞게 변형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변화는 나델라가 취임 직후 전 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잘 드러난다.
“혁신의 속도를 높이려면 우리의 영혼, 즉 우리만의 독특한 가치를 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모바일 퍼스트, 클라우드 퍼스트 세상을 위한 생산성 기업이자 플랫폼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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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윈도우 퍼스트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영혼인 윈도우를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달라진 세상의 생산성 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앤드 전략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부활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클라우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스티브 발머 전임 최고 경영자 시절에 이미 클라우드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나델라가 2011년 클라우드 사업을 총괄한 것도 역시 발머의 적극적인 권고 때문이었다.
하지만 발머 시절 마이크로소프트 전략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윈도우 퍼스트였다. 클라우드 사업이 중요하긴 했지만 회사 전체 전략에서는 늘 윈도우에 밀렸다. 나델라는 1980년대 PC혁명, 1990년대 네트워크 혁명에 이어 2010년대에는 컴퓨터 자원을 표준화하고 공유하는 클라우드 혁명이 본격화될 것으로 판단해 무게 중심을 윈도우에서 클라우드로 완전히 옮겼다.
2018년 3월 단행된 조직 개편은 클라우드 퍼스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치다. 당시 나델라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성장을 견인해 왔던 윈도우 사업을 애저(Azure) 클라우드와 오피스 부문으로 나눴다. 또 클라우드 사업 활성화를 위해 영업 사원들의 보상 체제까지 대폭 수정했다. 라이선스 비용 기반으로 매출이 생기는 만큼 기존 체제로는 실적을 제대로 반영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이런 전략은 그대로 성과로 이어졌다. CNBC에 따르면 2019 회계 연도 마이크로소프트 전체 매출에서 애저 클라우드 사업 비중이 10퍼센트를 웃돌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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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마이크로소프트는 폐쇄적인 생태계를 고수했다. 모든 작업이 윈도우 담장 안에서 이뤄지도록 했다. PC 시대를 지배했기 때문에 굳이 문호를 개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는 손끝에서 모든 정보를 얻도록 해주겠다는 야심 찬 꿈을 제시했다. 모든 책상 위에 컴퓨터를 놓겠다는 비전도 함께 제시했다. 하지만 정보를 얻을 땐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을 사용해야만 했다. 책상 위에 놓인 모든 컴퓨터에도 윈도우가 설치돼 있어야만 했다. 빌 게이츠의 뒤를 이은 발머는 더 호전적이었다. 그는 경쟁자들을 적으로 간주했다. 발머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이폰을 사용하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
나델라는 달랐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드롭박스, 레드햇, 세일즈포스뿐만 아니라 클라우드 시장의 경쟁자 아마존에도 문호를 개방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발머 시절 악의 세력으로 간주된 리눅스와도 손을 잡았다. 오픈소스 대표 업체인 레드햇과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형성했으며 지난해엔 오픈소스 공유 플랫폼인 깃허브를 인수했다.
2019년 들어서도 나델라의 이런 행보는 계속됐다. 5월에는 레드햇이 주최한 행사에 깜짝 등장해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보다 한 달 전에는 또 다른 경쟁 업체 델의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방의 플랫폼이 인기를 끈다면 바로 그 플랫폼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쓸 수 있도록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다.
달라진 마이크로소프트를 이야기할 때 흔히 꼽는 세 가지 변화는 윈도우 일변도 탈피, 클라우드 주력, 개방 정책이다. 그런데 미국 경제 전문 매체 CNBC는 이 세 가지 요인 외에 다른 성공 비결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CNBC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인 정보에 덜 의존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페이스북, 구글 같은 기업들이 개인 정보 유출이나 남용 문제로 곤란한 상황에 빠지고 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비슷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빙(Bing) 검색 엔진이나 MSN 사업이 바로 그런 영역이다. 하지만 클라우드를 비롯한 핵심 사업 영역에선 데이터를 확보할 필요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최근 개인 정보 남용이나 규제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다. EU가 지난해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을 도입한 이후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주요 미국 IT 기업들이 연이어 소송에 휘말린 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아무런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았다. 한때 악의 제국으로 불렸던 마이크로소프트가 이젠 구글, 페이스북 같은 경쟁사들에 비해 착한 기업 이미지를 갖게 됐다.
나델라가 꿈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
나델라는 최고 경영자로 취임하자마자 클라우드 사업에 집중 투자했다. 클라우드가 PC와 서버 이후를 책임질 새로운 사업 분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시금 세계 최고 기업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클라우드 이후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델라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는 혼합 현실(mixed reality)과 인공지능, 그리고 양자 컴퓨팅 기술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투자 중이다.
혼합 현실은 현실과 가상 현실, 증강 현실을 모두 포괄하면서 사용자와의 인터랙션을 더욱 강화한 기술이다. 의료와 교육, 제조업 부문에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인 혼합 현실을 효율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비디오, 오디오 등의 장비를 조합해 현실, 가상 현실, 증강 현실의 정보를 획득, 몰입감을 극대화시킬 장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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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렌즈(Hololense)는 마이크로소프트가 혼합 현실 대중화를 위해 야심 차게 내놓은 장비다. 2015년 처음 공개됐고, 2019년에는 좀 더 향상된 버전인 홀로렌즈2가 나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홀로렌즈를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앱을 함께 선보였다. 또 앱 개발자들의 편의를 위해 클라우드 서비스인 애저와도 연계한 전략을 펼치고 있다. 바로 애저 커넥트 개발자 키트다.
혼합 현실은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리는 미래 컴퓨팅 환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과 환경, 그리고 사물을 인식하는 센서를 중심으로 새로운 컴퓨팅 환경을 구축함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글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바둑 대결에서 승리하기 훨씬 전부터 많은 기업들이 미래 핵심 기술의 하나로 인공지능을 깊이 있게 연구해 왔다. 마이크로소프트도 마찬가지다. 2014년 인공지능 비서인 코타나(Cortana)를 선보인 것을 필두로 다양한 기술들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는 각종 서비스와 인프라 전반에 인공지능 기술을 탑재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나델라는 《히트 리프레시》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인공지능 비전을 네 단계로 설명한다.
① 코타나 같은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방식을 변경한다.
② 오피스 365, 다이내믹스 365 같은 애플리케이션에 인공지능을 탑재한다.
③ 전 세계 모든 개발자들이 패턴 인식 능력, 지각 능력, 인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
④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공지능 슈퍼컴퓨터를 제작해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궁극적으로 개인 비서 인공지능을 꿈꾼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사람들이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비전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방대한 데이터 분석이 굉장히 중요한데, 클라우드를 비롯한 마이크로소프트의 기반 기술들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그리는 인공지능 기술의 미래는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인공지능은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어떤 기업보다 인공지능 기술의 윤리를 강조한다. 윤리적인 인공지능이란 가치가 제대로 뿌리내려야만 인류에게 도움이 될 기술 혁신이 가능할 터이기 때문이다.
혼합 현실, 인공지능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는 양자 컴퓨터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0과 1로 구성된 비트가 기본 단위인 일반 컴퓨터와 달리 양자 컴퓨터는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갖는 큐비트(qubit)로 구성된다.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갖게 되면 데이터를 병렬적으로 동시 처리할 수 있어 처리 가능한 정보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따라서 양자 컴퓨터가 제대로 구현될 경우엔 현재 컴퓨터가 갖고 있는 많은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을 것으로 기대된다.
양자 컴퓨터 실현을 위한 경쟁은 이제 막 출발한 상태나 다름없다. 그만큼 가야 할 길이 멀다. 또 인공지능, 혼합 현실처럼 일반인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차세대 전략임에도 아직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복잡한 계산을 단숨에 수행할 수 있는 양자 컴퓨터가 실현될 경우엔 그동안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가령 불치병으로 꼽히는 HIV 치료를 위한 백신을 만드는 데도 양자 컴퓨팅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또 환경 자원을 고갈시키지 않는 비료 개발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식량 부족 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극적인 성공을 이끈 기본기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근 20년은 상당히 극적이다. 세계 최고 자리에서 밀려나 기업 위기 상황까지 내몰렸다가 다시 세계 최고 기업으로 부활했다. 어쩐지 애플이 떠오른다. 매킨토시로 초기 PC 시대 강자로 군림했던 애플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에 밀리면서 회사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애플은 돌아온 스티브 잡스의 통찰력에 힘입어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애플을 밀어내며 신흥 강자로 떠오른 마이크로소프트는 PC 시대를 완전히 지배하며 2000년대 이후까지 세계 최고 기업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변화된 바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애플이 주도한 스마트폰 강풍에 PC 시장 자체가 흔들리면서 마이크로소프트가 벼랑 끝 위기로 내몰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또 한 번 멋진 성공 신화를 써냈다. 성공은 극적이지만,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극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것부터 충실하게 실천한 것이 화려한 부활의 밑거름이다.
나델라의 도전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새로 고침’이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호의 선장이 되자마자 모바일 퍼스트, 클라우드 퍼스트를 외쳤다. 여기까지는 흔한 성공 스토리처럼 들린다. 그게 그 시기에 가장 적합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델라의 모바일 퍼스트, 클라우드 퍼스트가 기존 판을 완전히 깨는 것은 아니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정보 혁명 등 창업 당시부터 목표로 세웠던 것들은 최대한 살렸다. 뛰어난 소프트웨어 기술을 비롯한 회사의 강점도 잘 유지하며 모바일 시대에 대응했다.
부활은 나델라가 누구보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잘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혈관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피가 흐른다. 이사회가 처음 나델라를 스티브 발머의 후임 최고 경영자로 선택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체제 내에서의 개선 수준에 머무를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나델라는 새로 고침 버튼을 눌렀다. 강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버릴 것을 확실히 버리는 전략이었다. 물론 쉬운 전략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선 어정쩡한 변화에 머무를 우려도 있다. 새로 고침 전략이 멋지게 성공하기 위해선 나델라처럼 냉정한 현실 분석과 과감한 실천이 결합돼야 한다.
노키아는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의 절대 강자였다.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은 직후인 2007년 4분기엔 휴대폰 시장의 40퍼센트를 점유했다. 2위 업체를 멀찍이 따돌린 수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노키아는 최절정기에서 불과 6년여 만에 휴대폰 사업 자체를 포기하며 무기력하게 몰락했다.
흔히 노키아의 몰락은 스마트폰 대응 실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키아는 결코 스마트폰 돌풍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경쟁자 못지않게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노키아는 과거의 성공을 버리지 못했다. 핵심 수익원이었던 피처폰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의 성공을 상수로 놓고 전략을 짜다 보니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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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델라 시대의 마이크로소프트는 달랐다. 여전히 윈도우와 오피스는 주 수익원이었지만 이를 과감하게 혁신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영혼이나 다름없던 윈도우를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뤘다. 또 클라우드 시대에 맞춰 윈도우를 비롯한 소프트웨어 판매 방식도 단품 판매 대신 구독형 모델로 바꿔 버렸다. 당장 손에 들어오는 돈이 줄어들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달라진 환경에 맞는 비즈니스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더 큰 그림을 위해 눈앞의 달콤한 과일을 포기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과일이 서서히 말라 죽어 가는 나무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것이라면, 제아무리 화려했던 과거의 산물이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노키아는 내리지 못한 그 결단을 마이크로소프트는 과감하게 내렸다. 바로 그 차이가 마이크로소프트를 세계 최고 기업으로 부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