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 ; 희망은 시작됐다
현실이 된 희망
“조깅하다 갑자기 멍해졌고, 약속이나 단어도 기억하지 못했어. 내 일부가 사라지는 느낌이야.”
의사로부터 알츠하이머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앨리스는 내내 불안했다. 결국 한밤중에 남편을 깨워 이렇게 고백한다. 그는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의 변화에 크게 슬퍼한다. 세 아이를 훌륭하게 키운 엄마, 다정한 아내, 대학교수. 부족할 것 없는 앨리스의 삶은 그날 이후 완전히 흔들린다. 그래도 앨리스는 현명하다. 기억을 잃어 가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마주한다. 하지만 관객은 안다. 알츠하이머가 전달하는 무언의 공포를.
배우 줄리언 무어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영화 〈스틸 앨리스〉의 이야기다. 신경의 퇴화는 피할 수 없다. 나이 들수록 다양한 퇴행성 질환에 노출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건 퇴행성 뇌질환이다. 알츠하이머가 대표적이다. 뇌의 인지 기능 장애로 스스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를 치매라고 하는데, 알츠하이머가 전체 치매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초기엔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잊는 정도지만 기억은 서서히 또 점점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 결국은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몸을 제어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는데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해친다. 알츠하이머를 ‘가장 슬픈 질병’이라 부르는 이유다.
퇴행성 뇌질환은 평균 수명 증가의 산물이다. 오래 사는 행복이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된 셈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2018년 전 세계 치매 환자는 약 5000만 명이었지만 2030년 7800만 명까지 늘어난다. 2050년엔 1억 3900만 명까지 증가할 거란 게 WHO의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IMARC에 따르면 퇴행성 뇌질환 치료제 시장은 2020년 63억 4000만 달러(8조 6000억 원)에서 2026년까지 연평균 6.5퍼센트씩 성장한다. 알츠하이머 치료제 시장만 2030년 130억 달러까지 커질 거란 글로벌 데이터의 조사도 있다.
알츠하이머의 명확한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유전자 변이 때문에 발생하는 베타 아밀로이드 플라크beta amyloid plaque나 신경 세포 내부의 결합 단백질인 타우 덩어리(tau tangles)와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20세기 초 독일의 정신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가 처음으로 확인한 이 단백질의 문제를 놓고 아주 오랜 기간 연구가 계속됐지만, 여전히 정답은 찾지 못했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알파 분비 효소에 의해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둘로 갈라진다. 반면에 비정상적인 경우 베타·감마 분비 효소에 의해 절단되지 않으면서 세포 밖에서 서로 뭉쳐 올리고머oligomer를 형성한다. 이렇게 뇌에 침착한 올리고머나 ‘아밀로이드 플라크’의 생성을 차단·제거하는 게 치료 방법이다. 애초에 머크와 일라이 릴리 등 글로벌 제약사는 베타 분비 효소의 분비를 억제해 병적인 아밀로이드의 생성을 막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모두 효과를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거듭된 임상 실패로 아밀로이드 타깃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됐지만, 여전히 알츠하이머 치료제 연구에선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2023년 1월 기준으로 알츠하이머 치료 물질로 등록된 건 187개다. 이 중 33개는 임상 3상이 진행 중인데, 현황을 보면 가장 많은 건 역시 아밀로이드 관련 연구다.
최근엔 베타 효소 억제에서 올리고머 제거로 전선이 넓어졌다. 한마디로 잘못된 아밀로이드 생산을 억제하기보다는 치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2021년 이후 알츠하이머 환자의 베타 아밀로이드를 타깃으로 하는 항체 치료제 두 개가 미국 식품의약국의 승인을 받으며 연구는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중추신경계 분야 선두 제약사인 바이오젠Biogen과 일본의 에자이Eisai가 공동 개발한 ‘아두헬름Aduhelm’은 FDA 자문위원단의 부정적 권고에도 2021년 초기 알츠하이머 치료제로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인지 기능 개선 효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고, 뇌부종·뇌출혈 등의 부작용 우려도 나왔다. 결국 상업화에는 실패했는데, 유럽의약품청(EMA)은 아두헬름이 효과가 명확하지 않고, 부작용이 많다는 이유로 아예 승인을 거절했다.
절치부심한 두 회사는 2023년 7월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추는 알츠하이머 치료제 레켐비로 또 한 번 FDA의 승인을 받는다. 제대로 된 알츠하이머 치료제가 없다는 점이 고려돼 아두헬름과 마찬가지로 가속 승인 절차로 일단 신약 승인을 받았다.
레켐비의 임상 3상은 알츠하이머 초기 단계 즉, 경도 인지 장애 또는 경도 치매 환자 1795명을 상대로 진행했다. 18개월간 2주에 한 번 정맥 주사로 약물을 투여받은 환자는 위약(가짜 약)을 투여받은 대조군에 비해 인지 능력 저하가 27퍼센트 늦게 진행됐다. 약 5개월가량 알츠하이머 진행을 늦춘다는 걸 확인한 셈이다.
치료 효과는 확인됐지만 레켐비는 임상 중에 뇌출혈로 세 명의 환자가 사망하면서 안전성에 또 꼬리표가 붙었다. 특히 APOE4라는 유전자를 보유한 환자의 경우 아밀로이드 관련 발병률이 훨씬 더 높게 나타났다. FDA가 관련 부작용을 알리는 경고 라벨을 부착하는 조건을 단 것도 이 때문이다. 1년 투약에 2만 6500 달러(3600만 원)나 드는 비싼 약값과 초기 환자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점은 한계로 꼽힌다.
다음으로 FDA의 승인이 유력한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일라이 릴리의 아밀로이드 베타 표적 치료제인 도나네맙Donanemab이다. 신속 심사 과정에서 보완 요구를 받아, 현재 임상 3상 결과를 토대로 정식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2023년 5월에 발표한 임상 3상 결과는 일단 레켐비보다 뛰어났다. 통합 알츠하이머 평가 척도(iADRS)로 일상생활 수행 기능을 평가한 결과 18개월 차 투약군의 병변 진행이 위약군 대비 35퍼센트 지연됐고, 치매임상평가척도 박스총점(CDR-SB)에서도 인지 및 기능 저하가 36퍼센트 감소했다.
흥미로운 건 도나네맙이 경증 인지 장애 환자군, 75세 미만의 환자에게서 보다 좋은 치료 효과를 나타냈다는 점이다. 이는 질환의 정도가 특정 임계치를 넘기 전에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알츠하이머의 중요한 특성을 또 한 번 알려 준다.
레켐비의 승인에 후발 주자인 도나네맙까지 등장하면서 알츠하이머 치료제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화할 거란 기대도 커졌다. 하지만 현실적인 한계는 여전하다. 특히 치료 대상 환자 선별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한 점은 개선이 필요하다. 다양한 알츠하이머 환자를 포괄하지 못하고 엄격한 조건으로 치료 환자를 제한하는데, 이는 연구 속도를 늦추는 주 요인 중 하나다.
뇌부종이나 뇌출혈의 위험 즉, 안전성 문제도 꼭 풀어야 할 숙제다. 무엇보다 레켐비와 도나네맙은 알츠하이머를 개선하거나 역전시키는 치료제가 아니라 질병의 악화 커브를 보다 완만하게 하는 정도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좀 더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아밀로이드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알츠하이머 연구의 또 다른 바이오마커(단백질 등 체내 변화를 알아내는 여러 지표)는 타우 단백질이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척수액을 분석해 보면 타우 단백질의 농도가 정상인 대비 세 배 가까이 높다. 알츠하이머를 진단할 때 중요한 바이오마커로 사용하는 이유다.
다음 숙제, 타우 단백질
타우는 신경 세포의 미세 소관 다발을 안정화하는 결합 단백질이다. 이 타우가 과인산화(단백질에 인산이 과도하게 붙은 상태)로 인해 결합 능력을 상실하고 떨어져 나가는 게 문제다. 알츠하이머에 있어 타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합 능력을 상실한 타우가 서로 엉켜 신경 섬유 덩어리를 형성하는 게 알츠하이머를 유발한다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타우는 세포에 존재하는 리소좀과 UPS(유비퀴틴 프로테아좀 시스템)를 통해 분해된다고 알려져 있다. 과도하게 생산된 비정상적 타우를 이들이 제대로 제거하지 못하면 신경 세포 독성을 야기한다.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든, 타우 단백질이든 응집이 신경 독성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최근 국내 한 대학 연구진은 타우 단백질의 절단으로 생성된 신경 독성 물질이 정상적인 타우 단백질까지 신경 독성 물질로 전환시킨다는 동물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실험 동물의 뇌에 타우 덩어리를 주입하면 뇌의 다른 영역으로 확산하는 현상을 보이는데, 이는 절단된 신경 독성 단백질이 응집을 유도한다는 걸 의미한다.
미국의 한 대학에선 변형된 타우 덩어리가 ‘소교세포(microglia·중추 신경계에서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세포)’의 염증 경로를 촉진해 타우 덩어리를 확산시킨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타우 덩어리가 신경 퇴행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을 규명하려는 시도였는데 과잉 활성화된 소교세포를 안정화한다면 인지 및 기억 결함 진행을 억제할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한 연구다.
최근엔 아밀로이드 베타와 타우의 관계를 밝혀 보다 근본적인 치료법을 개발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아밀로이드 베타의 증가가 병적인 타우의 확산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이 점차 지지를 받으면서다. 두 변이 단백질을 기준으로 하위 유형별로 환자를 분류해 서로 간의 복합적인 관계를 깊게 이해하려는 시도다. 이에 따라 앞으로의 연구 흐름은 아밀로이드 베타와 타우가 각자의 가설을 입증하는 동시에 두 타깃의 상호 관계를 밝히는 정밀 의학으로 발전해 갈 전망이다.
알츠하이머는 치료만큼이나 조기 진단이 중요하다. 현재 연구 중인 치료제는 대부분 초기 알츠하이머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치료 효과가 높기 때문이다. 간단한 진단법으로 초기에 병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심각한 환자를 많이 줄일 수 있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진은 타우 양전자 단층 촬영(PET)이 아밀로이드 PET나 자기 공명 영상(MRI)보다 초기 알츠하이머 예측 효과가 더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일라이 릴리의 도나네맙 임상 3상에서도 환자를 PET로 타우를 정량화해 분류했다. 타우 단백질이 유용한 예측 도구라는 의미다.
2023년 7월 열린 알츠하이머협회 국제콘퍼런스(AAIC)에서는 알츠하이머 국제협회(IAA)와 미국 국립노화연구소(NIA)가 새로운 진단법을 제시했다. 알츠하이머와 관련된 신경 교섬유 산성 단백질, 인산화된 타우를 EDTA라는 항응고제 혈장과 비교해 최대 85퍼센트의 환자를 식별하는 검사법이다. 간단한 혈액 검사이기 때문에 기존의 뇌척수액 분석이나 PET 스캔 방식과 비교해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글로벌 제약사도 소위 ‘물을 먹는’ 장벽 높은 시장이다. 국내 바이오테크 역시 일부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미국에서 알츠하이머 치료제 ‘AR1001’의 임상 3상을 진행 중인 아리바이오가 가장 앞서 있다. 미국 전역 75개 치매 임상 센터에서 유효성과 안전성을 검증하고 있는데, 최초의 경구용 치료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가장 슬픈 질병을 치료하려는 시도의 결과는 현재까진 슬프다. 확실한 치료 효과를 기대할 만한 치료제가 없기 때문이다. 시판 중인 약도 질병의 속도를 늦추는 데 그치고 있다. 진행을 멈추고 더 나아가 역전시킬 치료제를 개발하려면 발병 원인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 부쩍 활발해진 줄기세포 유래 ‘뇌 오가노이드’(미니 브레인이라 불리는 유사 장기) 연구는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에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전망이다.
2023년 AAIC에서는 유전자 편집 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접목한 알츠하이머 관련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질병의 유발과 발생 위험을 높이는 단백질의 유전자를 유전자 가위로 제거해 신경계의 기능을 개선한 동물 실험 결과다. 이 역시 새로운 접근법이 될 수 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돌리는 여정은 험하겠지만, 언제나 그랬듯 인류는 조금씩 정답을 향해 가고 있다.
메디컬 에스테틱 ; 인류 불변의 욕망
인간의 욕망이 만드는 시장
1급 생화학 무기 보톡스(Botulinum toxin·보툴리눔 톡신)는 독성을 가진 단백질이다. 신경 전달 물질을 차단해 근육 세포의 활동을 무력화한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강한 독성을 가졌지만, 적당량을 쓰면 치료 물질로 변신한다. 1988년 미국 제약사 앨러간Allergan이 앨런 스콧 박사로부터 보톡스 판매 권리를 사들인 뒤 치료에 활용한 게 시작점이다. 처음 쓴 건 안과였다. 눈 근육에 이상이 생기는 사시斜視와 눈꺼풀 경련 환자에게 주입했는데 탁월한 효과를 나타냈다.
진짜 ‘대박’은 주름 개선 효과였다. 안면 근육에 이상이 생긴 환자에게 보톡스를 주입했더니 주름이 펴졌다. 근처 근육이 마비돼 의외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효능과 안전성을 확인한 미국 식품의약국은 2002년 피부 주름 개선제로 보톡스를 처음 승인했다. 미용 치료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화하는 신호탄이었다.
‘메디컬 에스테틱medical aesthetic’은 피부 질환 환자 등에게 전문적인 처방과 치료를 하거나 화장품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걸 통칭한다. 쉽게 말해 의학적 치료와 스킨 케어를 함께 이르는 개념이다. 전문의가 상담과 검사를 통해 환자의 피부 상태를 진단한 뒤 의료 기기를 이용해 치료와 스킨 케어를 병행하는 과정을 거친다.
메디컬 에스테틱 시장이 구조적으로 성장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안티에이징anti-aging’ 욕구다. 나이가 들면서 피부 세포의 기능이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노화한 피부를 되돌리고 싶은 의지 또한 강해진다. 전 세계적으로 고령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탄탄한 수요층이 형성됐다.
의료 기기의 발달로 치료 효과가 좋아지고, 침습적 시술(주사나 각종 관 삽입 등 신체의 관통이나 절개가 필요한 치료법)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통해 회복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덕분에 환자의 부담도 줄었다.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두 가지 치료법을 패키지로 묶은 복합 시술이 주목받는 건 최근의 변화로 꼽을 수 있다.
피부 노화는 크게 내인적 노화와 외인적 노화로 구분한다. 전자는 나이, 후자는 자외선 같은 외부 환경이 주요인이다. 내인적 노화는 콜라겐 등이 감소해 표피는 물론 진피층(표피 아래 두꺼운 세포층으로 피부의 탄력과 윤기를 결정)이 얇아지고 세포 분열 능력이 저하되는 게 특징이다. 이와 달리 자외선에 피부가 노출되며 콜라겐과 엘라스틴이 손상돼 주름이 늘고, 기미와 주근깨가 생기는 걸 외인성 노화로 본다. 피부 표면이 거칠어지고 피부 조직이 늘어지는 게 대표적인 증상이다.
일단 손상된 피부는 약물이나 치료 기기, 화학적 필링(chemical peeling), 에스테틱 시술 등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최근의 큰 관심사는 의료 기기 발전과 에스테틱 시술이다. 피부 미용 치료 기기는 에너지원별로 크게 레이저Laser, 초음파 기기(HIFU), 고주파 발생기(RF)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춘추 전국 시대, 레이저
원래 레이저는 빛의 증폭이라는 물리적인 현상 자체를 말하지만, 현장에선 이를 이용해 만든 단파장 레이저 빔beam을 주로 의미한다. 광원에서 방출된 빛을 매질(기체·액체·고체 등 어떤 파동 또는 물리적 작용을 다른 곳으로 옮겨 주는 매개물)을 이용해 증폭시킨 뒤 파장과 출력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쓴다고 이해하면 된다. 1960년 미국 물리학자 시어도어 메이먼이 루비 레이저를 환자 치료에 쓴 게 첫 도전이었는데 이후 안과와 피부과를 중심으로 널리 사용하게 됐다.
초창기엔 레이저를 모든 걸 고치는 만병통치약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를 이용해 환자와 그 가족을 울리는 사기 범죄도 잦았다고 한다. 효과를 부풀리는 것인데 레이저가 각종 피부 질환 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건 사실이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특히 의료용 레이저는 산업용보다 출력이 낮고, 적용 대상도 인체 내 조직이다. 각 조직에 있는 수분이나 지방·색소 등에 따라 흡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효과나 부작용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
엄밀히 단일 파장은 아니지만 다파장의 빛을 이용하는 IPL(Intense Pulsed Light)도 빛 에너지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레이저와 같은 범주로 본다. 초음파나 고주파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별도의 소모품도 필요 없다. 하나의 기기로 흉터나 여드름, 색소 침착, 문신 제거 등 다양한 질환에 대응하는 것도 장점이다. 레이저가 모든 병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기로 자리 잡은 이유다.
레이저 빛이 조직에 닿을 때 조직에서 빛을 흡수하는 물질을 발색단(chromophore)이라고 하는데 멜라닌 색소나 혈색소, 기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각 발색단은 특정한 흡수 파장을 갖고 있어 이를 이용하면 맞춤형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다. 최근엔 이런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기기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대표적인 국내 레이저 기기 제조 업체로는 루트로닉이 있다. 1997년 설립한 국내 1세대 레이저 업체로 이미 미국과 유럽 시장에 진출해 1000억 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대표 제품인 클라리티2를 비롯해 할리우드 스펙트라, 더마V 등 다양한 제품군을 갖추고 있다. 수술용 레이저 강자인 원텍도 최근 성장세가 가파른데 동남아시아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고주파 기기는 30~50만 헤르츠㎐의 전류를 이용해 피부 심층부에 열을 발생시키는 방식이다. 피부 미용 업계에서 자주 쓰는 써마지thermage가 바로 고주파 시술을 뜻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고주파 치료 기기인 솔타메디칼의 제품 이름과도 같다.
주 효능은 피부 탄력 강화와 주름 개선이다. 레이저와 달리 국소 부위를 공략하기 때문에 표피 손상이 적은 게 장점이다. 고주파 기기는 전극 구조에 따라 모노폴라(Monopolar·단극), 바이폴라(Bipolar·양극)로 구분하는데 원텍의 올리지오가 대표적인 모노폴라 방식이다. 모노폴라는 비非침습 방식, 바이폴라는 미세 침을 이용한 최소 침습 방식이다.
반면, 초음파 기기는 사람이 들을 수 없는 20킬로헤르츠㎑ 이상의 음파를 열로 전환한 뒤 피부 속 근막층(SMAS)에 쏘는 방식이다. 고주파처럼 다른 조직을 손상하지 않고 지방 세포만 공략할 수 있어서 통증이 적고 회복도 빠르다. 복부나 옆구리 허벅지 등 지방이 많은 부위의 체외 충격파 치료나 지방 세포 파괴술에 사용한다. 초음파로 안면 피부 표면 아래에 열에너지를 전달하면 작은 열 응고가 생기는데 이로 인해 피부의 탄력이 증가하고, 콜라겐과 엘라스틴이 합성된다.
이런 원리를 이용해 주름이나 흉터, 탄력이 저하된 안면 부위를 치료한다. 흔히 말하는 미용 목적의 ‘리프팅’ 시술에 널리 쓰인다. 울쎄라(Merz), 슈링크 유니버스(클래시스), 더블로(하이로닉) 등이 대표적인 제품이다. 아래에 있는 근막층을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하 지방층의 지방을 녹인다. 얼굴 근육을 전반적으로 리프팅하는 효과로 주목받는다. 2009년 울쎄라의 출시 이후 널리 상용화됐기 때문에 레이저나 고주파 기기보다 상대적으로 글로벌 보급률이 낮은 편이다.
2012년 초음파 기기 슈링크를 출시한 클래시스는 당시 시장을 압도하던 울쎄라 대비 비용을 5분의 1로 낮추면서 주목 받았던 업체다. 2021년엔 2세대 장비 ‘슈링크 유니버스’를 선보였는데 점 조사 방식인 슈링크와 달리 선 형태 조사도 가능하게 해 리프팅 효과를 향상했다는 평가다. 지방이 많은 부위의 치료 효과를 높이면서 시술 속도도 약 두 배 이상 빨라졌다.
고주파와 초음파 둘 다 핵심 목표는 리프팅과 주름 개선이다. 고주파는 진피층을 자극해 콜라겐의 수축과 생성을 유도하고, 초음파는 탄력이 저하된 피부를 수축시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피부 침투도와 치료 효과도 차이가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두 시술을 패키지로 묶어 피부 겉과 속을 동시에 노리는 시술이 인기를 끈다.
이제는 이미 일상이 된 보톡스와 필러
신체의 이상이나 피부 조직을 바로잡기 위해 특정 부위를 변형시키거나 형체를 만드는 에스테틱 시술도 날로 성장하고 있다. 보톡스와 필러filler가 대표적이다. 어느새 미용 치료의 대명사가 된 보톡스 시장은 2019년 기준 51억 달러(7조 원) 규모로 커졌다. 이후에도 매년 약 13퍼센트씩 성장해 2025년엔 107억 달러(14조 5000억 원)로 확대될 전망이다.
보톡스는 운동 신경과 근육이 만나는 부위에 주입한다. 인체에 유입된 보톡스는 신경 세포 내 근육 수축 작용을 조절하는 아세틸콜린 분비를 억제하고, 신경 자극이 근육에 전달되는 것을 막는다. 신경 전달 물질 억제로 발생한 근육 이완 작용을 이용해 눈가나 미간의 주름을 제거하는 원리다. 일시적으로 근육을 마비시켜 근육의 힘을 약화하고, 이를 통해 약 3~6개월 정도 주름이 줄어든 효과가 지속한다. ‘단기 주름 치료제’인 셈이다.
최근엔 미용에서 치료로 보톡스의 전장이 넓어지는 중이다. 국내에선 아직 미용 목적의 보톡스가 90퍼센트를 넘어서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치료 목적이 53퍼센트를 차지한다. 빅파마 애브비는 보톡스를 상용화한 앨러간을 2021년 인수한 뒤 다한증·편두통 등 적응증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시장 성장의 키가 미용이 아닌 치료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탈모 같은 큰 시장을 선점하려는 업체 간 경쟁도 치열하다.
국내 기업도 빠르게 추격하고 있지만 애브비의 아성엔 아직 못 미친다. 국내 투자자에게 보톡스는 오랜 기간 기회이자 위험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대웅제약과 메디톡스, 국내를 대표하는 두 보톡스 제조 업체가 장기간 소송전을 이어 오면서다. 두 회사는 각각의 보톡스 제품 ‘나보타’와 ‘메디톡신’의 보툴리눔 균주 출처를 두고 7년 넘게 법적 분쟁을 이어 오고 있다.
갈등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전망이지만 나름의 성장세는 이어 가는 중이다. 대웅제약은 2023년 상반기 보톡스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1.6퍼센트 증가해 753억 원을 기록했다. 휴젤을 제치고 처음으로 매출 1위에 올라섰다. 구상대로 편두통을 나보타 적응증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면 글로벌 진출에 날개를 달 수 있다. 애브비에 이어 두 번째 사례인데, 이후 근 긴장 이상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등으로 적응증을 다양화할 계획이다.
2022년까지 국내 보톡스 점유율 1위 자리를 지켜 온 휴젤 역시 최근 유럽과 캐나다·인도네시아·호주 등 글로벌 시장 개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톡스 치료제 레티보의 품목 허가도 신청했는데, 2021년 FDA로부터 보완 요구를 받은 뒤 2년 만의 재도전이다. 국내 보톡스 시장을 개척했던 메디톡스는 7년 만에 신제품 뉴럭스를 내놨다.
피부 미용에 사용하는 필러는 크게 자가 지방 이식, 콜라겐, 히알루론산 유도체(HA필러) 등으로 구분한다. 자가 지방 이식은 주름 제거나 입술 확대 등을 위해 자신의 엉덩이나 복부에서 지방을 채취해 시술 부위에 주입하는 시술이다.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그러다 1980년대 앨러간이 콜라겐 필러로 FDA 승인을 받으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어린 송아지의 피부에서 추출한 뒤 정제한 콜라겐을 피부 함몰 부위의 진피 내에 직접 주사하는 방식이다. 물론 시술 전에 알레르기 반응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또 한 번 트렌드가 바뀐 건 인체 내의 성분 중 하나인 히알루론산(hyaluronic acid)으로 만든 레스틸렌Restylane이 FDA의 승인을 받은 2003년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히알루론산 필러는 가장 대중적인 제품이 됐다. 단단한 젤 질감의 탄성을 갖고 있어 진피에 주입되면 주름 개선과 볼륨 회복 등의 작용을 한다. 콜라겐과 달리 피부 반응 검사 없이 사용할 수 있고, 흡수 속도가 빠른 게 장점이다.
휴젤에 따르면 2016년 22억 달러(3조 원)였던 글로벌 필러 시장은 2023년 43억 달러(5조 8000억 원)로 커질 전망이다. 대체로 필러 시술 비용은 보톡스보다 비싸지만 히알루론산 필러의 보급으로 안전성을 확보하면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단점으로 지적된 시술 시 통증도 최근엔 많이 개선됐다는 평가다.
앨러간은 보톡스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챘다. 이런 앨러간의 안목에 미리 투자한 사람은 큰 성공을 거뒀을 터다. 2019년 애브비는 앨러간 인수를 발표했는데 대금이 630억 달러(당시 환율로 73조 원)에 달했다. 당시 종가 기준 주가에 45퍼센트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지만, 이 투자는 현재로선 성공적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위해 아낌없이 쓰는 경향은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외모가 곧 경쟁력이라는 인식에 따라 과감히 지갑을 여는 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리지 않는 공통적인 소비 현상이다.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아 나가는 K-문화의 성장에 따라 K-메디컬 에스테틱도 한층 더 ‘볼륨 업’될 전망이다. 소위 돈 되는 아이템이 무엇인지 관심 있게 지켜볼 만하다.
마이크로바이옴 ; 장내 미생물의 힘
호주에 서식하는 코알라는 평생 유칼립투스 나뭇잎만 먹고 산다. 아기 코알라에겐 이유식으로 자신의 대변을 먹인다. 유칼립투스 나뭇잎에는 독성이 있는데 아기 코알라의 장내에는 이를 해독할 수 있는 미생물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 코알라의 대변에는 독소가 제거되고, 잘게 부서진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다량의 장내 미생물이 포함돼 있다. 성장하는 코알라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음식이다. 엄마의 대변으로부터 해독 작용을 하는 미생물을 갖게 된 아기 코알라는 비로소 유일한 먹거리인 유칼립투스 나뭇잎을 스스로 먹을 수 있게 된다.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은 미생물 군집(Microbiota)과 유전체(Genome)의 합성어다. 동식물, 토양, 바다, 대기 등 모든 환경에 존재하는 미생물 군집과 관련 유전 정보를 뜻하는데 주로 인체 내에 공존하는 각종 미생물의 집단을 가리킨다. 미생물은 우리 몸과 밀접하게 상호 작용하면서 건강에 영향을 주는데 보통은 서로에게 이롭다. 적당량을 섭취하면 인체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유산균)가 대표적이다.
특히 인체의 장은 다양한 종류의 미생물이 밀집한 서식지로 인간이 활발한 신진대사와 면역 체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장내에는 인체 면역 세포의 약 70퍼센트가 모여 있는데 여기 서식하는 마이크로바이옴의 무게만도 대략 1.5~2킬로그램이다. 뇌보다 무겁다. 미생물과 면역 세포가 함께 모여 있으니 둘 사이에 긴밀한 상호 작용이 일어날 거란 점은 쉽게 예상해 볼 수 있다.
인체는 210여 개의 장기와 2만 3000개의 유전자, 그리고 수십조 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인체 속에 분포한 마이크로바이옴은 1000여 종이 넘고, 200만 개 이상의 유전자와 30조 개 이상의 유전자가 모여 하나의 생태계를 형성한다. 종의 다양성과 유전자 수 측면에선 마이크로바이옴이 우리 인체를 압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생물이 인체의 면역 시스템에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고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선 정보량이 워낙 방대해 파악하기 쉽지 않다. 조금씩 연관성을 밝혀 내고 있지만 아직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미생물의 영향도 중요하지만, 거꾸로 유전자 변이 등의 요인이 미생물의 생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것이 장내 미생물 군집의 환경 변화를 불러오고, 질병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다. 바꿔 말해 변화된 장내 미생물 집단을 정상화하면 질병 치료가 가능하다.
마이크로바이옴 활용 분야는 헬스 케어·화장품·식품 등 다양하지만 가장 큰 관심사는 아무래도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다. 뚜렷한 방향성에도 연구 개발은 더딜 수밖에 없었는데, 차세대 염기 서열 분석법(NGS)이 개발돼 보급된 2010년 전후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미생물 유전체 서열이 밝혀져 다양한 미생물의 종과 아류가 분류됐고, 이들이 인체 면역 체계와 어떻게 교류하는지에 대한 연구에 속도가 붙었다.
또한 공생 미생물 균주의 유전자 서열 정보가 축적되며, 다양한 균주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 가능해졌다. 이 덕분에 2006년 262건에 불과했던 전 세계 마이크로바이옴 관련 특허 건수는 2016년 2만 1000건으로 급증했다.
이런 과정에서 장내 미생물이 분비하는 특정 성분이 수지상 세포 같은 면역 세포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인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장 상피층에 도달한 수지상 세포는 상피층 세포 사이를 뚫고 자신의 돌기를 장내로 뻗는다. 그를 통해 다당류와 같은 미생물 대사의 산물을 감지한다. 이 정보를 이용해 T세포 등 후천적 면역 세포의 학습과 분화를 유도하고, 결과적으로 인체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면역 체계는 거꾸로 장내 미생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내의 면역 세포인 B세포에서 분비되는 특정 항체와 펩타이드는 미생물의 기능과 구조를 바꾼다. 항체가 미생물 집단의 균형을 조절하고, 안정적인 장내 미생물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셈이다. 이런 안정적인 미생물 환경과 면역 세포의 왕성한 활동이 선순환해야 인체가 건강을 유지한다.
초창기 NGS를 이용한 마이크로바이옴 연구는 몸에 유익한 미생물을 찾는 것에 집중했다. 최근에는 미생물 집단의 분포 변화를 밝혀내고, 이를 질병 치료에 이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또한 초반에는 미생물이 가장 많이 서식하는 장내 미생물 연구가 주를 이뤘지만, 지금은 간·심혈관·혈액 등으로 확장하고 있다.
정상인과 환자의 미생물 집단 구성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우세한지 혹은 어떤 미생물이 높은 분포를 보이는지 발견하는 게 핵심이다. 정상인보다 유독 환자에게서 특정 미생물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면 그를 타깃으로 한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
실제로 장내 미생물 집단이 염증이나 DNA 손상을 조절하고, 다양한 대사 산물을 분비해 암 진행을 늦춘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예컨대 대장암 환자의 경우 정상인과 다른 장내 미생물 불균형이 관찰된다. 유익종은 적고, 유해종은 다수 발견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정상적인 면역 체계의 균열을 야기한다. 현재 임상 2상 이후 단계에 있는 90개의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파이프라인을 보면 감염증이 26퍼센트, 위장관 질환이 18퍼센트로 높다. 암이나 피부 질환은 각각 10퍼센트의 비중을 차지한다.
장내 마이크로바이옴이 신경 전달 물질을 조절해 뇌 신경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이크로바이옴-장뇌축 이론(MicroBIOME-gut-brain axis·MGBA)이다. 이 연구를 통해 장내에 서식하는 마이크로바이옴이 치매나 우울증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밝혀졌다. 난공불락이었던 각종 뇌 질환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최근에는 유럽연합이 진행한 프로젝트를 통해 ‘NLRP6 인플라마좀’이라는 면역 세포와 미생물 신호 전달 센서의 상호 작용이 장내 미생물 환경 조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장내 면역 세포의 특정 센서를 매개로 한 숙주와 미생물 간 상호 작용을 잘 보여 주는 연구 결과다. 치료제 개발을 위해서는 장내 미생물과 인체의 정보 전달 방식을 이해하고, 항상성에 균열을 초래하는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바이오 시장 조사 업체 이밸류에이트 파마Evaluate Pharma는 2022년 200만 달러 수준에 불과했던 마이크로바이옴 의약품 시장 규모가 2028년 17억 7100만 달러(2조 4000억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아직 개화 단계인 만큼 조사 기관에 따라 예측 편차도 큰 편인데 치료제 승인 여부가 시장 성장 속도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파이프라인이 늘고, 개발에 뛰어드는 바이오테크도 급증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미국 식품의약국 최종 문턱을 넘어선 신약은 두 개뿐이다. 2022년 11월 스위스 페링 파마슈티컬스가 개발한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 감염증(CDI) 치료제 리바이오타Rebyota가 첫 번째다. CDI 세균은 심한 설사와 대장염 등을 유발한다. 국내에는 환자가 드물지만, 미국에서는 연간 16만 명 이상의 환자가 발생하고 매년 2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발률이 높아 위험성이 큰 질병으로 분류된다. 리바이오타는 건강한 기증자의 대변으로 만든 치료제다.
이어 2023년 4월 나스닥 상장사인 세레스Seres가 같은 CDI 치료제로 두 번째 승인을 받았다. 좌약 방식인 리바이오타와 달리 세레스의 보우스트Vowst는 경구제 형태다. 보우스트는 임상 3상의 1차 유효성 평가 지표인 CDI 재발률을 위약(41퍼센트) 대비 훨씬 뛰어난 11퍼센트로 낮춰 효과를 입증했다.
다만 지금까지 허가된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는 어떤 기전으로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치료 물질의 작용 기전이 명확하지 않다는 건 약물의 유효성 확보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신약을 승인하는 규제 기관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현재 임상을 진행 중인 여러 마이크로바이옴 치료 물질이 효능 입증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가 난치병 치료의 새로운 대안이 되리란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바이오의 무덤에 가까웠다. 사례를 보면 어두운 면이 더 클 수도 있다. 마이크로바이옴 신약을 개발하던 다수의 바이오테크가 임상에서 실패했고, 기술 이전된 후보 물질도 여럿 반환됐다. 이 분야 선두 주자였던 4D파마와 칼레이도는 나스닥에서 상장 폐지됐다. CDI 타깃으로는 후발 주자인 페링과 세레스가 좋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 외 적응증의 벽은 높은 게 사실이다.
다른 신약 영역도 비슷하지만 마이크로바이옴은 특히 R&D 초기 단계다. 자금력의 한계와 부족한 임상 경험, 상업화 확률 등을 고려하면 기술 수출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기술 수출 가능성을 높이려면 물질이 정확히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지 규명하는 게 필수적이다.
줄기세포 ; 놓칠 수 없는 시장
2019년 일본 국립세이이쿠의료연구센터는 배아 줄기세포를 간세포로 만들어 요소회로 이상증을 앓고 있는 신생아에게 임시로 이식하는 시험을 했다. 이 병은 요소 관련 효소가 부족해 고암모니아혈증과 중추 신경계 독성이 나타난다. 간 이식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신생아의 경우 체중 6킬로그램이 될 때까지 이식이 불가능하다. 시간을 벌어야 하는 셈이다.
세이이쿠연구센터는 생후 6일째에 배아 줄기세포로부터 분화된 1억 9000만 개의 간세포를 이식해 신생아의 생명을 유지한 뒤 아버지의 간 일부를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줄기세포 치료제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잘 설명해 주는 임상 사례다.
식물이 싹을 틔워 뿌리와 줄기의 형태를 갖추고 나면 줄기는 또 다른 줄기와 가지, 그리고 잎으로 변화하며 성장한다. 인간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하나의 개체로 완성된다. 성장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상처 입거나 정해진 수명을 다하고 죽은 세포를 대신할 다양한 종류의 세포를 만들고 교체한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의 수정란에서 출발해 생명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세포로 분화하는 미분화 상태의 세포를 줄기세포라고 한다. 어릴 적 뛰어놀다 다친 상처가 감쪽같이 나았던 것은 우리 몸에 존재하는 줄기세포가 스스로 복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약 210가지 종류의 세포로 이뤄져 있는데, 이들은 한 개의 세포에서 분화한 세포다. 수정된 세포는 난할(세포의 분할)을 거듭해 속이 비어 있는 공 모양의 배반포를 형성한다. 그 안에는 액체와 아기로 성장할 세포인 내부 세포 덩어리가 들어 있다. 세포는 또 분열과 분화를 거듭하고, 8주가 지나면 태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최종적으로는 210여 가지 세포로 분화해 하나의 개체를 이루게 된다. 이 배반포의 내부 세포 덩어리로부터 만든 줄기세포가 바로 ‘배아(신체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되는 태아의 전 단계) 줄기세포’다.
그러면 줄기세포는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을까. 먼저 줄기세포라 칭하려면 자가 재생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세포의 생김새는 물론 기능도 같은 딸세포(세포가 분열해 새로 생긴 세포)를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줄기세포는 종류에 따라 자가 재생 능력에 차이를 보인다. 배아와 임신 8~12주에 유산된 태아에서 추출한 배아 줄기세포를 적절한 조건으로 배양하면 무한대로 증식한다. 반면 뒤에서 설명할 성체 줄기세포는 10계대 정도까지만 분열할 수 있어 증식에 한계가 있다.
줄기세포의 두 번째 특징은 분화 능력이다. 배반포의 내부 세포 덩어리가 다양한 세포로 분화해 우리 몸의 조직과 기관을 형성하듯, 줄기세포는 그 자체로 직접 기능하지 않고 다른 세포로 분화한 뒤 기능한다. 예를 들어 줄기세포가 외부로부터 침범한 바이러스를 직접 공격해 죽이거나 수명이 다한 혈관의 내피 세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줄기세포가 특정한 기능을 하기 위해선 그 기능을 갖는 세포로 먼저 분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줄기세포는 무한히 발행되는 화폐와 같다. 화폐는 그 자체로 기능하지 못한다. 배고프다고 돈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돈으로 야채나 고기 등 식재료를 사고, 최종적으로 음식으로 만들어야 먹을 수 있다. 돈으로 물건도 사고 여행도 간다. 이처럼 줄기세포는 그 자체로 기능하지 않지만 다양한 세포로 분화해 곳곳에서 일한다.
대표적인 줄기세포인 조혈 모세포는 산소를 실어 나르는 적혈구, 암이나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림프구, 그리고 식균 작용을 하는 백혈구 등으로 분화해 일하게 된다. 만일 줄기세포가 분화하는 능력이 없다면 갑작스러운 상처에 대응할 수도 없고, 수명이 다한 세포를 교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줄기세포의 분화 능력은 다시 만능성과 다능성 등으로 구분한다. 만능성이란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로 분화가 가능한 능력을 뜻한다. 앞에서 설명한 배반포 내부 세포 덩어리에서 수립된 줄기세포가 만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만능성을 지닌 걸 만능 줄기세포라 한다.
만능성을 지닌 배아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을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시험관 아기를 만들기 위해 채취한 뒤 사용하지 않은 난자를 기증받아야만 연구가 가능하다. 기증된 난자를 인공 수정해 배반포가 만들어지면 안쪽의 내부 세포 덩어리에서 배아 줄기세포를 분리한 뒤 성장을 돕는 다른 세포층 위에서 배양한다.
이때 배아 줄기세포가 다른 세포로 분화되는 것을 막는 용액을 넣어 준다. 수가 늘어난 복제 배아 줄기세포를 다시 접시에 나눠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원하는 양의 배아 줄기세포를 생산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배아 줄기세포를 냉동 보관했다가 원하는 여러 조직으로 분화시켜 치료 목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배아 줄기세포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난자로부터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항상 윤리적인 문제가 뒤따른다.
다능성 줄기세포는 두 가지 이상의 최종 세포로 분화가 가능한 걸 말한다. 신체의 여러 적소(謫所·줄기세포가 그 기능을 유지하도록 돕는 특정 미세 환경)에 분포하다가 각 조직에 필요한 세포로 분화해 기능한다. 성체 줄기세포가 다능성 줄기세포의 특징을 갖고 있다. 골수에서 발견되는 조혈 모세포는 적혈구·백혈구·림프구 등 여러 혈구 세포로 분화하는 대표적인 성체 줄기세포다. 성체 줄기세포는 적소에 대기하다가 기존 세포에 치명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된다. 배아 줄기세포가 모든 걸 살 수 있는 현금이라면 성체 줄기세포는 상품권과 흡사하다.
골수에 분포하는 세포 중 골세포로 분화하는 중간엽 줄기세포(mesenchymal stem cell)도 성체 줄기세포 중 하나다. 중간엽 줄기세포는 다양한 조직을 연결하는 결합 조직으로 골수·근육·지방·연골·뼈 등에 분포한다. 면역 거부 반응이 없어 활용 범위가 더욱 넓은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성체 줄기세포는 성인의 조직으로부터 얻을 수 있어 배아 줄기세포와 달리 윤리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있다.
제대혈, 즉 아기의 탯줄에도 줄기세포가 들어 있다. 이 제대혈에는 혈액 성분인 백혈구와 혈소판 등을 만드는 조혈 모세포와 뼈·연골의 재생이나 신경 세포 조직 재생에 이용하는 중간엽 줄기세포가 다량 포함돼 있다. 탯줄의 의료적 가치가 재발견되면서 아기가 태어난 뒤 제대혈을 냉동 보관했다가 향후 발생할지 모르는 암과 유전병 치료에 대비하는 것도 흔해졌다.
배아 줄기세포는 만능성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윤리적 이슈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만능성이 독이 되면 암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게 불안 요소다. 성체 줄기세포는 이런 문제에선 비교적 자유롭지만 분화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한 게 바로 유도 만능 줄기세포(iPS Cell)다. 분화가 끝난 체세포(몸을 구성하고 있는 전 세포 중 생식 세포를 제외한 세포)를 다시 프로그래밍해 만든다. 만능 줄기세포에서만 발현하는 특정 유전자를 만능성이 없는 체세포에 넣어 만능성이 있는 세포로 만드는 방식이다. 세포 분화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는 일종의 역분화다.
유도 만능 줄기세포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네 가지 유전자의 조합은 ‘야마나카 칵테일’이라고 부른다. 이 방식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단순하게 설명하면 성인의 세포에 야마나카 칵테일을 넣어 만능 줄기세포로 역분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유도 만능 줄기세포는 형성되는 형태나 유전자 발현 패턴이 만능 줄기세포인 배아 줄기세포와 거의 비슷하다.
약 20년 전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이후 한국 줄기세포 연구는 암흑기를 거쳤다. 일종의 금기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배아 줄기세포 연구는 크게 위축됐지만 지금도 핵을 제거한 난자에 환자의 핵을 삽입해 안과 질환 치료제를 만드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대부분 성체 줄기세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배아 줄기세포 연구도 명맥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유도 만능 줄기세포를 중심으로 연구 속도를 높이고 있다. 다수의 글로벌 바이오테크도 유도 만능 줄기세포를 T세포 치료제나 NK세포 치료제와 같은 다양한 항암 세포 치료제로 활용하려 시도하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줄기세포의 최대 장점은 근원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문제가 생기면 새 걸로 바꿀 수 있다. 게임 체인저가 등장할 가능성이 큰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