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은 영국의 ‘불문(unwritten)’ 헌법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미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은 규칙을 정하려면 글로 적어야 한다. ‘의회의 어머니(Mother of parliaments)’라 불리는 영국 의회에선 아일랜드의 독립 전쟁을 제외하고 쿠데타, 혁명 또는 내전 없이 300년 넘는 기간 동안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다. 영국의 정치는 독립적인 의회 아래에서 진화하는 전통, 관습, 그리고 법에 의해 통치됐다. 정치의 안정성 덕분에 영국은 영국식 정부가 수 세기 동안 상식으로 다져진 굳건한 기초를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폭주하는 브렉시트의 논리는 영국에 헌법적 시한폭탄을 심어 놓았다. 헌법 개혁을 둘러싸고 영국 내에서 벌어지는 불협화음은 어려움을 가중시키면서 이 시한폭탄을 제거할 가능성마저 희박하게 만들고 있다. 영국인들은 적응력이 강하고 견고하다고 믿었던 헌법이 사실은 혼돈과 분열을 증폭시키고 공동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테리사 메이(Theresa May)가 보수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로부터 사흘 후인 6월 10일, 후임 선출을 위한 선거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유력 후보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을 포함한 일부 후보들은 영국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추가 협상 없이 10월 31일 유럽 연합(EU)을 탈퇴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결국 다음 총리를 뽑게 될, 그러나 대표성은 떨어지는 보수당원 12만 4000명은 국가를 양분할 수도 있는 문제를 풀어야 할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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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독립적이라고 하는 영국의 의회는 국가에 상당한 손해를 끼친다는 이유만으로 ‘노 딜(no-deal)’ 브렉시트
[2]에 반대한다. 노 딜 브렉시트를 중단하거나, 더 강력하게 밀고 나가려면 틀림없이 더 많은 의회의 책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행정부와 의회 중 어느 쪽이 승리해야 마땅한지 헌법의 판단은 불분명하다. 헌법은 둘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조차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이런 불확실성 뒤에는 영국의 헌법이 무수한 법과 관습, 그리고 규칙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모순 덩어리라는 사실이 있다. 법률은 의회 또는 하원 의장의 허락만으로 쉽게 개정될 수 있다. 이번 주에 의회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도록 하기 위해 사임하지 않겠다고 밝힌 하원 의장처럼 말이다.
[3] 대다수 의원들이 규칙을 불성실하게 다루면 민주주의가 훼손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던 시기가 있었다. 아마도 그래서 과거에는 의원들이 자제력을 발휘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가 확고부동한 것으로 보인 최근 수십 년 동안, 영국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경고를 잊었다. 대신 건성으로 헌법 대부분을 재창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와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이 집권할 당시 웨스트민스터 의회는 스코틀랜드, 웨일스, 그리고 북아일랜드 의회에 권한을 이양했다. 그리고 국민에게는 국민 투표로 권한을 넘겼다. 이 같은 혁신에는 선의가 깔려 있었고, 바람직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헌법 전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따른 혼돈은 브렉시트로 분명해졌다. 국민 투표는 EU를 떠나는 쪽을 택했지만, 세부 사항에 대한 조율은 남았다. 국민 투표는 브렉시트를 명령했지만, 브렉시트가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형식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하원 의원들이 국민 투표의 결과를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의무와 유권자들의 최대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 의무를 어떻게 조화시킬지는 불분명하다. 다른 국가들은 이런 실수를 피한다. 아일랜드 역시 국민 투표제가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헌법 46조는 명백하다. 국민은 세부안을 포함한 법안이 하원을 통과해야만 변화의 여부에 대해 투표할 수 있다. 영국은 이렇게까지 합리적인 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브렉시트는 EU의 통합을 위협하면서 더 심각한 헌법적 혼돈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유럽 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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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을 깨는 것은 헌법적 악몽이 될 수 있다. 헌법에 분리 독립 절차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스코틀랜드가 두 번째 국민 투표를 택하는 것은 실수일 수도 있다. 보리스 존슨은 국경의 북쪽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수많은 영국인들이 두 번째 브렉시트 국민 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테리사 메이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에 브렉시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총리가 된 보리스 존슨이 완강한 스코틀랜드의 분리 운동에 반대하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할까? 답은 불확실하다.
EU를 떠나는 일은 새로운 의심들과 함께 헌법에 많은 과제를 안긴다. EU 시민의 권리를 법적으로 담고 있는 기본권 헌장은 더 이상 영국 법정을 관할하지 않는다. 도미닉 랩(Dominic Raab)과 같은 일부 보수당 지도자 지망생들은 이 같은 권리를 명시한 영국 법안을 폐기하기를 원한다. 만약 의회가 억압적인 새 법안을 통과시킨다면 법원은 불만을 터뜨리겠지만 이를 막을 순 없다. 유럽의 법관들이 시시콜콜 참견하는 것이 불만이었던 유권자들은 또 다른 생각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권리 장전이나 성급한 헌법 개혁에 대한 요구 등이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인 우려로 이어진다. 영국의 불안하고 쉽게 개정되는 헌법은 브렉시트를 둘러싼 3년간의 갈등 속에 등장한 급진적 정치에 취약하다.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과 극좌에 있는 그의 동료들의 영국 개혁에 대한 야망은 확고하다. 그들이 경제와 공공 재정에 초점을 맞추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하지만 규칙은 규칙이다. 코빈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 또는 포퓰리스트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는 오직 의회 장악력을 통해서만 통제될 수 있다. 노동당은 이미 제헌 의회 소집을 요구하고 있다.
대다수 영국인들은 코앞에 닥친 시험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들은 영국 고유의 처리 방식이 결국은 안정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영국 헌법의 무한대에 가까운 유연성이 브렉시트라는 험로를 통과할 수 있도록 타협하는 걸 허락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유연한 헌법은 생각이 다른 상대를 사기꾼이나 반역자라고 비난하는 데에 활용될 가능성이 더 높다.
브렉시트는 오랜 기간 정치적인 위기를 초래해 왔다. 이제는 헌법의 위기까지 불러오려 하고 있다. 영국은 이런 사태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