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인 것은 영국의 정치만이 아니다. 영국 정치가 터 잡고 있는 구조 역시 문제다.
6~7월 사이, 약 12만 4000명의 영국인들은 투표 용지를 받게 된다. 투표 용지에는 보수당 하원 의원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하는 한 사람은 총리가 되어 다우닝가 10번지에 입성할 것이다. 나머지 6600만 명의 영국 거주자들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영국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선거를 치르지 않고 총리를 바꿨다. 그러나 지난 5월 24일 보수당 대표직을 내려놓겠다고 밝힌 테리사 메이 총리의 후임을 뽑는 상황은 좀 다르다. 과거 새 총리는 선출된 하원 의원들이 뽑았다. 그러나 1998년 이후 보수당 하원 의원의 역할은 후보자를 두 명으로 추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메이 총리가 당선됐을 때처럼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최종 선택은 보수당원인 선거인단의 몫으로 남는다. 이들은 연금 수령이 가능한 비교적 높은 연령대에, 3분의 2 이상이 남성이며, 울버햄튼(Wolverhampton) 인구의 딱 절반이다. 그리고 영국을 대표하는 선거인단이 되기에는 인종적으로 다양하지 않다. “이상하지 않나요?” 당의 젊은 의원 중 한 명인 숀 거너(Shaun Gunner)가 말했다. “내 가족과 친구들은 총리를 선택할 권한이 없어요. 나도 그렇고요.”
당선된 총리를 축출하기 쉽거나, 총리의 권한이 명확하게 공식적으로 제한된다면 거너 의원과 동료들은 그나마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둘 다 불가능하다. 보수당 의원들이 당원들에게 총리를 좌지우지할 힘을 준 것은 동족 살해나 자살 행위와 같다. 2011년 고정 임기 의회법(Fixed-term Parliaments Act)
[1] 제정은 하원 내 신임 투표가 열리던 관습을 없애 버렸다. 이로써 하원은 정부를 어떻게 교체할지, 정부가 붕괴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영국 의회의 절차에는 총리가 심술을 부린다면 의회 다수의 찬성 없이도 ‘노 딜(no-deal)’ 브렉시트
[2]를 밀어붙일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헌법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영국 헌법은 굉장히 불분명하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마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여왕이 말한 바와 같이 “영국 헌법은 항상 헷갈리게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평상시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문제가 된다. 그리고 브렉시트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다수당인 국민당(SNP)은 겉으로 보기에 소용이 없어 보이지만 브렉시트에 반대한다. 북아일랜드 다수당인 민주연합당(DUP)은 브렉시트에 대한 보수당의 해법은 거부하지만, 소수 집권 여당인 보수당을 지지한다. 그 결과 국민 투표에서 찬성표를 받은 브렉시트를 둘러싼 법안은 지속적으로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다. 5월 23일 치러진 유럽 의회 선거에선 영국의 주요 두 정당(보수당과 노동당)은 25퍼센트도 득표하지 못했다.
[3]
이런 시대적 상황은 헌법을 시험하고 있다. 슬프게도 영국의 헌법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시험을 통과하기 어려워 보인다. 영국 헌법이 지난 20여 년이 넘는 기간, 경솔하게 결정한 변화를 전례 없이 자주 겪은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배저트[4]를 넘어서
흔히 영국의 헌법을 ‘불문 헌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많은 영국인들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우리 모두의 친구》에 등장하는 자기 만족적인 인물 존 포드스냅(John Podsnap)처럼, 이런 헌법을 신의 가호가 내린 영광스런 배지 같은 것으로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사실 대부분의 헌법은 성문법이지만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며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권리 장전(1689)과 같은 법령은 학자들이 ‘성문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권법(1998)과 유사하다. 즉 엉망이라는 뜻이다. 의회가 이런 법령에 어떤 내용을 덧붙였는지는 빅토리아 시대 하원 사무총장인 토마스 어스킨 메이(Thomas Erskine May)의 보고서처럼 기록된 문헌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군주가 어떤 인물들로 정부를 구성했는지와 같은 많은 정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소속 정당이 없는 상원 의원이자 역사학자인 피터 헤네시(Peter Hennessy)는 관례와 절차가 무엇보다 헌법에 ‘정신적 상태(state of mind)’를 부여한다고 말한다. 수십 년 동안 영국의 지배 계급 남성들은 그들이 크리켓 경기만큼이나 정치에 대해서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헌법의 접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영국의 정치가 윌리엄 글래드스톤(William Gladstone)의 말을 빌리면 “그 일(정치)을 하는 사람들의 선의”에 기반한 생각이다. 헤네시 상원 의원은 이를 정부의 ‘굿 챕(Good Chap, 좋은 녀석)’ 이론이라 불렀다.
과거 수 세기 동안 ‘좋은 녀석들’은 대부분 스스로 행동했다. 그들은 가끔, 조금씩, 그리고 대중의 강력한 감정에 반응하는 차원에서 시스템을 개혁했다. 1832년의 국민 대표법(대개혁법)은 1867년과 1918년으로 가면서 귀족뿐 아니라 남성 전체로 선거권을 넓혔다. 1928년의 국민 대표법은 모든 여성이 같은 권리를 누리도록 했다. 20세기를 지나면서 세습 귀족들의 권한과 숫자는 줄었다.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에서 이런 점진적 변화는 사라졌다. 1997년 선언문에서 노동당은 국민 권리를 공식화하고 영국의 여러 국가와 지방에 권한을 위임하기로 약속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국민 투표 이후 다시 살아난 스코틀랜드 의회는 엄청난 권한을, 웨일스에 새로 구성된 국회는 상대적으로 약한 권한을 확보했다. 북아일랜드에 평화를 가져온 성 금요일 협정(The Good Friday Agreement, 영국과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평화 협정) 역시 많은 방식으로 헌법적 지위를 바꿔 놓았다. 잉글랜드에서만 법적 효력이 있는 행정 기구들은 잉글랜드 선거구를 대표하는 하원 의원 다수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1998년 인권법과 2000년 EU 기본권 헌장은 시민들의 권리를 한층 강화했다. 과거 의회의 ‘좋은 녀석들’에게만 의존했던 자유는 사법부의 강화한 권한에 의해 보호되기 시작했다. 법관 의원들이 입법과 사법 모두에 관여하고 있는 데서 파생된 갈등은 새로운 대법원을 설립해 사법 기능을 분리하는 것으로 해결됐다.
[5]
개혁의 폭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개혁이 아무렇지 않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권력 이양 국민 투표 관련 법안을 발표하던 날을 회상하면서 “그러고 나서 우리는 영국 영화 산업을 부활시키기 위한 일곱 가지 계획을 발표했죠”라고 쾌활하게 덧붙였다. 당시 내각부 장관이었던 리처드 윌슨(Richard Wilson)은 그 법안이 의회로 넘어오는 속도에 대해 “숨이 멎는 듯했다”고 회상했다. 서둘러 진행한 대법원 신설에 대해 영국 대법원장 데이비드 노이버거(David Neuberger)는 “위스키 한 잔을 놓고 내린 최후의 결정”이었다고 조롱하는 말투로 말했다.
2010년 취임한 데이비드 캐머런은 속도를 조절했다. 그러나 명시된 공약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이 있었던 블레어의 개혁과는 달랐다. 캐머런의 개혁은 대부분 보수당이 연합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자유민주당을 설득할 목적으로 나온 임시방편들이었다. 고정 임기 의회법은 언제든 총선을 열 수 있었던 총리의 권한을 없애 버렸다. 결과적으로 보수당이 선거 승리 후 자민당을 배신할 가능성이 줄었고, 자민당은 안심할 수 있었다. 영국 전체로는 역대 두 번째였던 선거 개혁 국민 투표는 캐머런 총리가 반대 진영을 이끌었고 결국 이겼다. 이 역시 자민당을 겨냥한 미끼였다.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국민당 다수와 맞닥뜨렸을 때도 캐머런 총리는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을 위한 국민 투표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이겼다.
오랜 세월 이어진 헌법적 안정 상태는 왜 끝났을까? 한 가지 답은 헌법적 불안정성에서 얻은 교훈이 적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인들은 성문 헌법을 갖춘 프랑스나 미국이 스스로 분열하는 것을 목격했다. 20세기 초반에는 전체주의가 부상하는 것을 목격했다. 런던의 퀸 메리(Queen Mary) 대학의 역사학자 로버트 손더스(Robert Saunders)가 주장했던 것처럼 영국인들은 섬세한 영국 헌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