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팬에서 국민 프로듀서로
엠넷 〈프로듀스 101〉은 트랜스미디어(transmedia) 스토리텔링 전략을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트랜스미디어는 콘텐츠가 미디어의 경계를 넘어 서로 결합하고 융합하는 현상이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동일한 이야기의 다른 부분을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며, 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1] 〈프로듀스 101〉은 생방송의 흥분과 재미를 더욱 부각하기 위해 팬들이 인터넷과 모바일 투표에 참여하도록 유도했고, 웹에서 팬들이 직접 연습생에 대한 정보와 이슈를 생성하고 유통하도록 만들었다. 방송사의 전략대로 팬들은 웹상에서 각종 ‘팬 수다(fan buzz)’를 만들어 냈고, 방송사는 다시 이러한 반응을 프로그램에 십분 활용함으로써 폭발적인 반응과 몰입을 이끌었다.
[2]
〈프로듀스 101〉과 같이 수용자의 참여에 크게 의존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콘텐츠는 타깃층이 넓다. 기존 아이돌 그룹의 주 소비층이 10대였다면, 대중을 상대로 방영하는 TV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101〉은 그보다 훨씬 폭넓은 연령대를 겨냥하고 있다. 물론 아이돌 그룹 팬덤의 연령과 성별 분포는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다. 2007년 원더걸스가 데뷔한 후 팬덤의 연령대는 20대와 30대로, 성별은 여성에서 남성 팬덤으로 팽창했다.
[3] 그러나 〈프로듀스 101〉은 시청자를 ‘국민 프로듀서’로 호명하면서 수용자층을 더욱 확장했다. 이 부름에 사실상 40대까지 응답하면서 팬덤의 연령대도 다양해졌다. 대다수의 인터뷰 대상자도 공개 방송이나 콘서트 같은 공간에서 40대 팬의 존재를 확인했고, 이들은 초등학생 딸과 함께 팬이 되기도 했다. 또한 20대 후반 이상의 팬들은 과거의 팬 경험을 토대로 자연스레 새로운 팬덤에 합류한 경우도 있었지만, 생애 처음으로 아이돌 그룹의 팬이 된 사람도 많았다. 이 점에서 소비층이 확실히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팬 활동을 안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빠질 수가 있었지? 저도 모르겠어요. 신기한 것 같아요. 왜냐면 방송 보고 단순히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라, 지금 코어가 됐거든요. (F, 20대 후반, 3세대 팬덤 경험, 비공식 굿즈 제작 경험)
투표 때문이지 않을까요? (데뷔가) 그 투표로 된 거잖아요. ‘내가 얘한테 이만큼 기여했다’, 뭔가 유대감 같은 게 더 생겨서. 옛날 같았으면, 그냥 가볍게 봤으면 ‘어, 쟤 잘생겼네?’ 하고 끝이지. 내가 얘에 대해서 궁금해서 막 찾아보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저는 연예인을 좋아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 (E, 20대 후반, 3세대 팬덤 경험, 비공식 굿즈 제작 경험)
3세대 팬덤 구성원의 연령은 40대까지 확장되었다. 연령 측면에서의 확장과 함께 케이 팝(K-Pop) 열풍은 글로벌 팬덤까지 흡수했다. 물론 해외로의 팬덤 확장은 프로젝트 그룹과 함께 나타난 3세대만의 특징은 아니다. 과거 동방신기나 보아도 아시아 팬덤을 확장했고, 엑소(EXO)나 방탄소년단은 북미 등 서구로까지 팬층을 넓혔다. 이미 존재했던 한류 현상에 프로젝트 그룹이라는 형태가 추가되면서 해외 팬덤에도 일정 부분 변화가 생겼다.
중국에도 〈프로듀스 101〉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투표는 한국에 있는 핸드폰으로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같이 한국에 유학 와 있는 친구들을 통해 투표를 부탁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저도 몇 번 부탁을 들어준 적이 있는데. 한 번 투표해 줄 때마다 한국 돈으로 1000원에서 2000원씩 받았어요. 웨이보(微博)에도 연습생들한테 투표해 달라는 글이 정말 많이 올라왔었어요. 워너원은 중국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을 봤죠. (R, 20대 후반, 3세대 팬덤 경험, 중국인 팬)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들이 한국 콘텐츠인 〈프로듀스 101〉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이 프로그램의 포맷이 중국에 수출되면서 중국 팬덤이 중국판 프로젝트 그룹 형성에 똑같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한국 프로그램은 하루 안으로 다 자막이 달려서 (중국에) 풀려요. 그래서 그걸 다 봤고, 〈우상연습생〉(중국판 〈프로듀스 101〉)이 나왔을 때 똑같이 SNS 홍보하고 투표하고 했어요. 중국에서도 엄청 인기 많았어요. (R)
포맷 수출은 이미 한국판 프로그램을 모두 시청했던 중국 팬들에게 경험적 선례를 제공했다. 팬덤의 연령대를 높이고, 팬 활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팬으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적극적인 수용자층을 넓힌 셈이다.
기획, 전략, 노동
과거에는 스타라는 상품이 먼저 만들어지고, 팬들은 그 후에 예능 프로그램 등을 통해 스타의 매력을 확인해 갔다. 하지만 〈프로듀스 101〉의 수용자들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서바이벌 오디션을 통해 먼저 각 연습생의 인간미와 스토리를 확인하고, 그 후에 직접 스타라는 상품을 만들어 나간다. 리얼리티 형성 과정에서 스타와 팬덤이 동시에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팬덤에는 스타에 대한 끈끈한 감정적 연대가 생긴다.
이러한 팬덤 형성 과정은 재퍼(zappers)에서 로열(loyals)이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4] 재퍼는 끊임없이 채널을 돌리는 가벼운 시청자를 뜻한다. 반면에 로열은 장기적인 헌신을 보여 준다. 산업 관계자들은 점점 재퍼보다 로열을 훨씬 중요하게 여긴다. 과거에는 팬이 일반적인 대중을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광고주가 점점 시청률이 아니라 타깃 소비자의 선호도가 높은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디어 업계는 로열을 유인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왔는데, 그 전략 중 하나가 시청자를 국민 프로듀서로 호명해 참여를 유도하는 일이었다.
〈프로듀스 101〉은 얼핏 보면 재퍼들을 겨냥한 것처럼 보이는 짧은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교적 길이가 짧은 경연들로 구성되어 이전 회차의 내용과 관계없이 시청할 수 있다. 하지만 경연이 진행되고, 회가 거듭될수록 이 프로그램은 심화 수준의 시청자 참여를 유도하는 시리즈물이 되어 간다.
[5] 시청자를 국민 프로듀서로 부르는 것이 참여의 출발점이었다. 국민 프로듀서들은 회가 거듭될수록 단순히 투표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연습생의 데뷔를 위한 갖가지 전략을 기획하게 되었다.
각종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비롯한 SNS에서는 프로그램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연습생들의 과거와 현재가 팬들의 수많은 2차 생산물(영상, 만화 등)과 게시물을 통해서 공유된다. 팬들은 몰랐던 정보를 다른 팬들 덕분에 알게 된다. 정보 공유가 활발해지면서 팬들이 직접 만들고 공유한 콘텐츠가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았던 시청자들을 유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는 젠킨스가 적극적인 소비자의 특징으로 분석하는 집단 지성의 측면이기도 하다.
[6] 웹상에서 팬들은 방대한 규모의 협업과 토의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개인의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커뮤니케이션한다. 집단 지성은 미디어 산업에서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는 소비자 수다(buzz)를 만들어 내고, 그에 따라 소비는 집단적인 문화 현상이 된다. 팬덤 공동체의 지식 생산 능력 또한 전보다 강력해진다. 이를 통해 기획자로서의 새로운 권력을 얻기도 한다. 〈프로듀스 101〉에 출연한 각 연습생은 데뷔 전부터 팬들의 치밀한 기획과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영업’되고 있었다. 기획사의 홍보물이 아니라 팬들이 집단 지성을 발휘해 직접 기획하고 만든 연습생의 콘셉트와 홍보 영상이 새로운 팬의 ‘입덕 계기’가 되는 셈이다.
사실 프로그램 볼 때, 처음부터 성운이를 좋아하진 않았어요. 그냥 피디가 강조하고 보여 주는 대로 좌지우지돼서 좋게 비춰 주는 애한테는 더 호감이 가고, 일명 ‘악마의 편집’을 당하는 연습생이나 아예 비중이 없는 애들은 누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되거나……. 그런데 나중에 친구가 디시(디시인사이드) 갤러리를 알려 주더라고요. 갤러리 덕분에 다른 연습생들의 ‘입덕 포인트’를 많이 알게 되었어요. 팬들이 (하성운 연습생에게 다양한 매력이 있다는 뜻에서) ‘초면 갑’이라거나 ‘성운이네 다섯 쌍둥이’ 같은 콘셉트로 입덕 글을 배포했는데, 저는 그거랑 과거 영상 속 귀여운 모습들 보고 진짜 코어 팬이 됐어요. 그거 말고도 실력, 비주얼, 별명, 성격 같은 걸 콘셉트화해서 많이 배포했고, 모르긴 해도 그런 게 많은 팬의 입덕 포인트가 되지 않았을까요? (Q, 20대 중반, 2‧3세대 팬덤 경험, 광고·서포트 참여, 트위터 활동가)
〈프로듀스 101〉은 많은 부분을 팬들에게 빚지고 있다. 방송에 활용되는 연습생의 별명부터 캐릭터와 특징, 웃음 포인트까지 편집에 활용되는 대부분의 요소는 팬이 만들어 낸 것이다. 제작자는 각 연습생의 팬 커뮤니티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별명이나 매력 포인트 등을 파악하고 프로그램에 반영한다. 팬 수다를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녹여 냄으로써 더 큰 팬 수다를 만드는 구조다. ‘우리의 이야기가 실제로 방송에 나왔다’는 인식은 더 깊은 몰입을 불러일으킨다. 프로그램에 활용된 팬들의 이야기에 팬이 다시 적극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이는 생방송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방송사의 전략이기도 했지만, 제작자가 출연진의 캐릭터를 일일이 파악하거나 만들어 내지 않아도 팬 커뮤니티에서 찾아보거나 물어보면 해결될 만큼 제작 과정을 편리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했다.
동한이가 디시 갤러리랑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그 기자가 연습생 갤러리에 찾아와서 ‘동한이에 대해서 좀 알려 달라’, 아니면 ‘동한이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냐’고 글을 쓴 거예요. 맨 처음에는 사람들이 못 믿으니까 ‘웬 핑프냐. 검색해서 네가 찾아’ 하면서 욕 댓글을 달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진짜 기자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JBJ 조합을 아느냐, 팬들이 만든 조합인데’ 그렇게 알려 줬고. 그걸(JBJ의 존재를) 기자가 동한이한테 전해줘서 동한이가 그거 하고 싶다고 인터뷰하고……. (D, 30대 초반, 1‧2‧3세대 팬덤 경험, 광고·서포트 참여, 팬 이벤트 주최 경험)
JBJ는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출연했던 연습생 6명(노태현, 켄타, 김상균, 권현빈, 김동한, 김용국)으로 구성된 글로벌 보이 그룹이다. 이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것이 아니라, 팬들이 직접 멤버를 구성하고 광고함으로써 데뷔했다. ‘정말 바람직한 조합’이라는 뜻의 그룹명 JBJ 역시 팬들이 만든 이름이다. D의 말처럼 팬들은 기자에게 꽤 괜찮은 인터뷰 자료를 제공해 줬을 뿐 아니라, 하나의 아이돌 그룹을 기획하는 역할까지 해냈다.
기존 아이돌이 부단한 미디어 노출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고 충성도 높은 팬덤을 만들어 왔다면
[7],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의 경우 팬덤이 아이돌의 이미지를 함께 만들어 간다. 국민 프로듀서라고 불리는 순간 자신들이 정말 아이돌을 기획하고 매니지먼트하는 프로듀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수용자들은 몇 분 되지 않는 방송 분량에 의지하는 대신 자신이 지지하는 아이돌을 홍보할 수단을 직접 만들어 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아이돌의 ‘셀링 포인트’가 되었다. 이를 토대로 팬들이 직접 광고를 지하철역에 게재하기도 했다.
프로그램 방영 기간부터 시작된 팬들의 기획 참여는 프로젝트 그룹의 데뷔 이후에도 이어졌다. 프로젝트 그룹 팬들의 행동과 발화는 기획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진다. 가령 그룹의 한 멤버가 다른 연예인과 사적인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되면, 팬들은 그 사진을 단순히 감상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우선 팬들은 사진에 찍힌 연예인들이 방영을 앞둔 예능 프로그램의 고정 멤버라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그 사적인 만남을 근거로 해당 프로그램 게스트로 자신의 스타를 추천한다. 일종의 스케줄 매니지먼트 방식이다. 다른 예로, 좋아하는 스타가 출연을 앞둔 예능 프로그램에 필요한 물품을 ‘조공’하는 방식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스타의 매니지먼트사에서 준비하고 관리해야 할 부분에 팬덤이 관여하는 셈이다.
데뷔 이후의 홍보와 마케팅에서도 팬들의 전략은 계속된다. 각 팬덤에는 스밍단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존재한다. 좋아하는 가수가 음원 사이트에서 차트 인 할 수 있도록 조직 차원에서 노래를 반복적으로 스트리밍한다. 그뿐 아니라 음악 방송 1위 선정 방식, 언론에 보도되는 화제성 지수 집계 방식 등을 분석해서 팬들이 그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스타를 소비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혹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가 담긴 글을 게시하면서 글 안에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영업’하는 내용을 함께 첨부한다. 일종의 끼워팔기 방식이다.
저희는 한 시간 단위로 음원 사이트를 돌아가면서 총공을 하거든요. 헬퍼나 스밍단이 되려면 총공 팀에 만 원 이상 기부하고, 멜론 인증 아이디를 2개 이상 기부해야 하는 조건이 붙어요. 근데 이건 좀 특수한 케이스고, 저희 언니는 다른 그룹을 좋아하는데 비활동 시기에도 스밍(스트리밍)을 해요. 새벽에 팬들이 차트 안에 넣어 놓으면, 차트 100을 듣는 일반인들이 듣고, 지속적으로 듣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더라고요. ‘내 아이돌의 노래를 들어 주세요’ 이런 마음이죠. 이렇게 하면서 팬들끼리 으쌰으쌰 하고, 결과도 잘 나오면 ‘나의 소비와 노동이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구나’ 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거 같아요. 계속 순위가 오르는 게 눈에 보이니까. 그래서 더 빠져들게 되죠. (L, 20대 중반, 2‧3세대 팬덤 경험, 스밍단 헬퍼, 팬 이벤트 주최 경험)
팬덤 내에서 이벤트나 나눔을 하면 (스타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는지 확인하는) ‘노동’ 인증을 받아요. 그야말로 가끔 이게 팬질인지 노동인지 헷갈릴 때가 있을 지경이에요. 데뷔 이후에는 정말 안 하는 게 없어요. 음원 스밍, 댓글 관리, 연관 검색어 관리, 기사 관리 등 소속사 홍보팀에서 할 법한 업무부터 시작해서, 스타 관련 악플은 하나하나 다 pdf 파일로 만들어서 모아서 소속사에게 보내요. 고소하라고요. 사건 사고가 터지면 강하게 피드백을 요구하고, 소속사의 피드백이 시원치 않을 경우에는 재차 피드백을 요구하죠. (P, 20대 후반, 3세대 팬덤 경험, 광고·서포트 참여)
조공이나 스밍단 같은 활동은 과거의 팬덤에서도 발견되는 방식이지만, 3세대 팬덤은 한 단계 발전한 기획력을 다양하게 발휘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를테면 이들은 광고주가 인터넷 게시물 키워드의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광고 모델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게시물에 ‘워너원이 광고하는 아이스크림’과 같은 구절을 반드시 넣어서 작성한다. 또한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한 스타의 무대 영상이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오지 않을 경우에는 동영상 사이트에 무대 영상 클립이 올라가는 기준, 즉 방송국 내부 규칙을 알아내고 방송국에 직접 전화를 걸어 동영상을 올려 달라고 요청한다. 기획자이자 홍보 전문가로서 팬들의 능력이 어디까지냐가 팬덤 활동의 범위를 결정짓는 셈이고, 그런 측면에서 팬덤의 활동 범위는 무한하다.
팬들의 전략은 서로에게 공유되며 학습 효과를 강화한다. 많은 팬이 이러한 문화를 도제식으로 학습하면서 더 전문적인 전략가가 되어 간다.
그런 스밍 문화나, 팬들이 노동력을 발휘하는 문화는 사실 학습되는 거 같아요. 예를 들면 내가 다른 2세대 아이돌 좋아할 때, 음반 판매량을 높이려고 핫트랙스랑 팬클럽 할인 협약 맺는 걸 했었거든요. 근데 그걸 지금 좋아하는 아이돌 판에 어떻게 하는지 슬쩍 알리고 팬들이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거죠. 그렇게 서로 학습시키고, 더 좋은 거 있으면 서로 공유하고 이렇게 내부적으로 알음알음 알아 가요. 더 좋은 게 있으면 차용하고. (D)
전략적 팬덤은 스타에게 도움이 되고자 할 때, 특히 민감한 사안을 이야기할 때 ‘불판(혹은 뒷갤)’을 열고 대책을 세우기도 한다. 불판은 특정 주제에 대해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면서 의견을 주고받는 인터넷 공간이다. 이 불판이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은 논의를 할 때 사용하는 ‘뒷갤’과 연결될 경우에는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 갑자기 특정 사안에 관해 토론할 것임을 알리고, 팬 활동에 깊게 관여된 이들만이 풀 수 있는 어려운 암호를 걸어 인터넷 페이지를 개설한다. 이 페이지는 미리 공지되지 않고 갑작스럽게 열리기 때문에 팬 커뮤니티에 상시 머무르는 팬만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어려운 암호를 풀어낸 팬들은 의사 결정 회의에 참석하는 참모가 된다. 팬덤의 이러한 전략적인 면모는 소비자 행동주의를 실현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소비자로서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기 위한 전략으로 집단 지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스타 라이브[8]’ 때도 그렇고, 뭐 터지면 뒷갤에서 이야기하더라고요. 우리 멤버는 그때 논란이 없었는데, 대놓고 우리 멤버 갤에서 불판 열면 좀 이상해 보이잖아요. 대표성을 띠니까. 그런데 (다른 팬덤) 도와주고 정리는 해야 하니까, 우리 팬덤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될 때 뒷갤을 쓰는 거 같아요. 그리고 대부분 글로 안 올리고 댓글로 달려요[9]. 검색 안 걸리게. 그리고 나중에는 글 삭제하죠. (A, 30대 초반, 1‧2‧3세대 팬덤 경험, 광고·서포트 참여, 트위터 활동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의 팬덤은 스타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기획 단계에서 스타에 대해 깊은 연대감을 느끼게 되고, 높은 충성도를 가지게 된다. 이는 스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게 해주겠다는 자기 인식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프듀 동창회, ‘35인 콘서트’ 할 때, 우리가 ‘JBJ 데뷔시켜 달라’는 로고를 박아서 슬로건이랑, 물티슈랑, 부채랑 다 제작해서 나눠 줬어요. 그때 상균이네 회사 후너스가 가장 자본을 많이 가진 회사라서 (데뷔를 시켜 줄) 유력한 회사였는데. 그 회사 관계자가 와서 관심을 보이고 그 물품을 다 받아 간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데뷔시켜 달라고 창립 기념일에 도시락 보내고……. ‘JBJ 데뷔시켜 달라’는 광고 냈을 때도 ‘우리가 자금력이 있다는 걸 어필하자’, 이만큼의 돈을 투자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광고를 기획했어요. 그래서 삼성역에 광고 3개를 걸었어요. 트위터 계정도 만들었어요. 해외 팬덤용으로요. 해외 팬덤이 이만큼 만들어졌다는 걸 알려야 소속사한테 돈이 된다는 걸 알리는 거니까. 이렇게 우리가 푸시하면, 애들이 또 그걸 알아주고 인터뷰에서 ‘JBJ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니까. 계속 쌍방이 되면서 데뷔가 이루어진 거죠. 저는 그 과정이 너무 즐겁고 진짜 매일 울고 웃고 그랬어요. (D)
팬들의 투표로 워너원이 탄생했고, 프로그램 종영 후에도 팬덤의 적극적인 기획과 영업으로 프로그램 외부에서 JBJ가 탄생했다. 이처럼 실제로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킨 국민 프로듀서들의 영업과 기획은 연습생이 데뷔하고 난 후에, ‘내가 스타를 키워 냈다’는 자기 인식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팬덤은 모든 행동을 스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팬덤이 움직일 때는 늘 스타가 ‘하고 싶어 하니까 해주자’라는 인식이 수반된다. 양육자로서의 태도다.
현빈이 팬들이 사실은 처음에 모델로서의 현빈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현빈이 모델 시키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애가 아이돌 하고 싶다고, JBJ 하고 싶다고 인터뷰 때마다 이야기하니까 ‘우리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냐’ 하면서 시켜 준 거죠. (D)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니까. 하면 좋겠다. 그냥 다 똑같을 걸요, 현빈이 팬은. 하고 싶으면 하고. 뭐, 하기 싫으면 굳이 무리해서 하지 말고. (S, 20대 중반, 1‧2‧3세대 팬덤 경험)
〈프로듀스 101〉에 출연했던 권현빈 연습생은 원래 모델 전문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었다.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얻은 후에도 팬들은 모델로서의 모습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많은 팬들은 그가 JBJ라는 아이돌 그룹을 하고 싶어 하니까 ‘시켜 주려고’ 노력하는 양육자로서의 태도를 갖게 되었다.
국민 프로듀서의 가장 큰 역할은 스타의 기획자이자 양육자가 되는 일이었다. 이들은 프로젝트 그룹의 그룹명, 팬클럽 이름, 그룹의 유닛 이름까지도 직접 정했다. 물론 이 과정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을 하려는 제작자가 팬덤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구사한 하나의 전략이었지만, 여기에서 팬들은 ‘스타가 하고 싶어 하니까 투표하자’는 생각을 기반으로 다양한 참여에 응답하고 있었다. 이러한 팬들의 자기 인식은 스타를 소비하는 방식과 집단적인 팬 실천에서 보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셀러브리티 팬덤에게 스타와 팬 사이의 관계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워너원과 같은 프로젝트 그룹의 팬덤에게 ‘투표를 통해 스타를 직접 데뷔시켰다’는 인식은 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다. 그래서 이들은 스타와의 감정적 연대도 강하고, 애착도 크다. 그리고 이렇게 스타라는 텍스트 안에서 팬덤이 개입하는 빈 공간이 커질수록 팬덤은 스타와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미디어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피에르 레비(Pierre Levy)의 지적처럼, 개방된 작품에서 수용자는 빈 공간을 채워 넣는다.
[10] 과거 아이돌 팬덤의 주된 행동 양식이 우상에 대한 열광이었다면, 지금의 팬덤은 조건 없는 애정보다는 양육하고 있다는 감정을 더 강하게 느낀다. 기획사와 함께 스타를 키워 나가는 것이다.
저의 최애 박우진을 위해 온 가족의 아이디를 동원했고, 저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투표를 하고, 남자 친구와 지인들에게 표를 구걸했어요. 박우진 직캠을 순위에 올리기 위해 동영상 스밍에도 적극 참여했고, 그냥 무조건 (워너원 데뷔 멤버가) ‘얘가 되면 좋겠다’였어요. 솔직히 다른 멤버는 누가 되든 관심 없으니, ‘내 새끼’만 데뷔하면 좋겠다. 아들을 낳으면 이런 기분이려나……. 진짜 얘는 잘되면 좋겠고, 얘의 환상적인 면모를 모르는 사람들이 안타깝고, 제발 이 아이의 매력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고. 그래서 얘가 꼭 데뷔했으면 좋겠고. 내가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생각하는 이 아이가 꼭 잘돼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싶고, 또 이렇게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이 아이도 알았으면 좋겠고. (P)
JBJ 세계관 자체가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에요. 너희가 우리를 불러 준 순간 우리가 나타났다. 그래서 데뷔 곡 〈판타지〉도 첫 가사가 ‘너희는 몽상가가 아니다’ 이렇게 시작하거든요. 우리가 맨날 얘네 데뷔시키려고 광고 내고 이것저것 할 때, 우리끼리 망상한다고 자조하고 그랬는데, 얘네가 데뷔 곡에서부터 ‘그거 망상 아니다’, ‘너희가 우리를 불러 줘서 우리가 이렇게 진짜 나타났다’ 이런 거거든요. JBJ는 팬이 만들었고, 팬이 기획했고, 팬이 광고하고 다 했어요. 의미가 진짜 다르다고 생각해요. (D)
이 과정에서 팬들은 자연스럽게 스타와 심리적 가까움을 느끼게 된다. 동경하는 스타보다는 비교적 동등한 관계로 느끼는 것이다. 스타는 〈프로듀스 101〉 프로그램이 진행되던 때부터 데뷔를 위해 팬들과 공모해 왔다. 프로그램의 에피소드 중 ‘콘셉트 평가 곡’ 미션은 각 연습생이 어떤 곡을 공연할지 팬들의 투표로 정해지는 방식이었다. 이때 몇몇 팬덤은 연습생이 SNS에 원하는 미션 곡의 번호를 표시해 주면 그 곡에 투표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몇 명의 연습생들이 그런 표시를 SNS에 올렸다가 제작진에게 알려지면서 페널티 차원에서 해당 연습생들의 평가 곡이 바뀌기도 했다. 이처럼 팬과 스타는 데뷔를 위한 전략적 공모를 펼쳐 왔고, 이것이 데뷔 후에도 유지되는 측면이 있다. 데뷔 과정 자체가 팬들에게 투표를 부탁하는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스타도 수용자의 피드백에 민감하고 팬들이 원하는 바를 즉각적으로 수행한다.
그렇다 보니 팬에 대한 스타의 피드백이 빠른 편이다. 워너원 멤버들은 막내 멤버의 분량을 늘려 달라는 ‘#우리의_막내를_지켜주세요’
[11]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지고 난 후에, 실제 방송에서 그 멤버에게 지속해서 말을 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 멤버는 단독 콘서트에서 “저희 워너원이 정말 서치왕이거든요”라고 말하면서 팬 사이의 이슈를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팬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글은 스타가 직접 수정하거나 삭제하기도 한다. 기획사나 제작자가 아닌 셀러브리티가 직접 팬들의 요구에 발 빠른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팬들이 인식하는 스타와의 거리감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왔다.
JBJ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들한테 피드백이 온다는 사실이 재미있어서인 거 같아요. 우리가 이런 걸 제안하면 바로 다음 날 걔네가 자기들도 좋다고 인증 샷을 찍어서 올리고. JBJ 데뷔시킬 때도 저희가 지하철 광고 내면, 애들이 꼭 다음 날 한 명씩이나 단체로 가서 인증 샷을 찍고 와요. 그런 피드백과 하나씩 만들어 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G, 30대 초반, 1‧2‧3세대 팬덤 경험, 개인 블로그 운영 경험)
동경하지 않고 관리하는 애정
이제 팬들은 스타를 무조건 지지하지 않고, 애정을 기반으로 관리하고 감독한다. 직접 기획하고 홍보해 가며 키워 낸 스타라는 점이 팬들의 개입을 가능하게 한다.
(팬들이) 적극적으로 이미지 관리 전략을 짜거나 하는 모습이 처음에는 낯설고 극성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아마 주체성이 가장 큰 원동력이겠죠. 소극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문화 향유자로서 나의 취향의 결정체인 내 가수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보고 싶은 거죠. (P)
이러한 측면에서 ‘양육’형 팬덤은 스타에게 점점 더 과도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이른바 ‘고나리(관리)’다.
일반 대중으로서 그간 제가 팬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은 ‘오빠 부대’의 전형이었어요. 아이돌을 동경하는 것이 팬덤의 주된 정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워너원) 팬덤 활동을 해보니, 동경이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어요. 거칠게 말하자면 가수와 팬이 상하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그 상하 관계가 거꾸로 된 느낌? 팬들은 당당하게 ‘내가 돈을 냈으니’, ‘내가 너를 데뷔시켰으니’라는 이유를 들어 가수에게, 더 나아가 소속사에게도 어떤 모습을 보일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요구하더라고요. 모 멤버에게 ‘너를 뽑아 주는 유일한 이유가 얼굴인데 감히 살이 찌면 어떡하냐’는 식의 발언, 특정 멤버를 배척하며 ‘어쩔 수 없이 세트 상품을 사는데 하나가 불량인 걸 두고 봐야 하느냐’라는 발언 등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이돌을 동경의 대상이 아닌 소비하는 상품처럼 대하더라고요. 그렇다고 꼭 부정적인 인상이 들었다는 건 아니고, 밖에서 본 팬덤과 안에서 본 팬덤이 달랐다는 의미예요. 밖에서 팬들의 유난이라고 느끼는 행동의 원인은 ‘우리 오빠들을 동경해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소비하는 아이돌이어서’에 더 가깝더라고요. (P)
팬들의 요구는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 간다. 일부 팬들은 스타가 볼 수 있도록 트위터에서 스타의 실명을 게재하면서 자신의 요구 사항을 올린다. ‘○○○은 관리 좀 하세요’ 같은 방식이다. P가 말하는 것처럼 팬들의 요구는 돈을 내는 사람으로서, 상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된다.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과거에는 우상인 스타에게 ‘감히’ 이런 요구를 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팬들이 소비자로서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팬들은 이러한 요구를 하는 일부 팬에 대해 ‘극성맞은 엄마’라는 표현으로 거리를 두기도 하고, 자조적으로 경계하기도 한다.
마음속으로는 요구하죠. 박우진 앞머리 내려라, 박우진 흑발 해라, 박우진 쟤랑 놀지 마. 이런 식으로요. 과거에는 아이돌이 저 하늘에 빛나는 별이라고 해서 스타였잖아요. 닿을 수 없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아름답고, 그저 내가 있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은 동경의 대상이었죠. 지금은 ‘내 새끼’고요. 내가 키운 거나 다름없는 내 새끼니까 내가 어느 정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박우진을 좋아하게 되면서 아들 가진 엄마의 마음을 약간 이해할 수 있게 됐거든요. 엄마에게도 다양한 모습이 있듯이 저는 엄청 극성맞은 엄마는 아니지만, 마음속으로는 바라는 게 한가득인 엄마인 것 같아요. 이게 과거와는 분명히 달라진 점이겠죠. ‘있는 그대로도 좋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모습을 더 보여 줘! 왜냐면 내가 데뷔시키고 내가 돈 대서 키우고 있으니까’가 이유예요. (P)
심지어 프로그램이 한창일 때는 이런 표현도 있었어요. ‘파양해야겠다.’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J, 20대 후반, 2‧3세대 팬덤 경험, 광고․서포트 참여)
3세대 팬덤의 핵심적인 특징은 양육에 있다. 2세대 팬덤의 연령대가 20대 이상으로 확장되면서 소비 능력, 즉 경제적 능력을 갖게 되었다면
[12], 3세대 팬덤은 양적 확장을 이루는 동시에 주체성과 기획 능력을 갖게 되었다. 국민 프로듀서라는 부름은 팬덤을 기획자이자 유통자, 전략가, 홍보가, 평론가 등으로 존재하게 했고, 이는 단순한 소비 능력을 뛰어넘는 팬덤의 위치를 만들었다. 젠킨스의 표현대로, 새로운 세대에 나타난 쌍방향 미디어 수용자의 대표 이미지
[13]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