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소비자
3세대 팬덤의 가장 큰 특징은 팬들이 원하는 아이돌 그룹을 만들고, 데뷔시키고, 콘셉트나 의상, 분위기, 그룹의 정체성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다는 점이다.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소비자 행동주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JBJ는 소비자들의 집단 지성으로 데뷔하게 된 상당히 이례적인 그룹이었다.
기존 아이돌은 당연히 데뷔한 다음에 좋아하게 되었고, 기획사의 영향력이 컸어요. 그런데 JBJ는 팬덤이 조합을 만들고 얘네가 가치 있다는 걸 어필했고, 거기에 소속사 후너스(JBJ 멤버 김상균의 당시 소속사)가 관심을 보였죠. 그러다 로엔 엔터테인먼트에서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다시 팬들이 대폭발을 했어요. 애들이 인터뷰에서 그룹 하고 싶다고 하니까 팬들이 ‘이건 미친 듯이 (서포트를) 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네이버 실검(실시간 검색어) 올리기예요. 검색어에 올렸어요. 그걸 또 (JBJ 조합의 멤버) 김동한이 캡처해서 올리고, 팬들은 좋아서 난리 나고. 팬들은 내 가수의 기획사가 자본이 부족하고, 기획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인데, 애들이 자꾸 (JBJ에) 관심을 보이니까요. (D)
JBJ는 팬들이 만든 조합에 기획사가 투입되면서 데뷔가 결정되었다. 여섯 멤버의 소속사가 모두 달랐던 만큼 이들의 매니지먼트 방식은 독특하다. JBJ는 로엔 엔터테인먼트와 CJ E&M이 공동 투자를 맡고, 제작과 마케팅은 CJ E&M이, 총괄 매니지먼트는 로엔 엔터테인먼트 산하 레이블인 페이브 엔터테인먼트가 분리해 담당하는 구조로 데뷔했다.[1]
〈프로듀스 101〉이 사용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은 팬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한다. 워너원은 그룹명, 팬클럽 이름, 데뷔 곡, 유닛 이름, 숙소 룸메이트 매칭까지도 팬들의 투표로 함께 만들어 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3세대 팬덤은 산업이 팬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지, 팬덤의 피드백을 활용해 산업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갤러리에서 누가 떡볶이 모델로 JBJ를 쓸 건데, 멤버들 특징이랑 여러 가지 콘셉트 잡을 만한 자료를 달라고 하더라고요. 익명 게시판이라서 우리가 너를 어떻게 믿고 그런 노동을 하냐고 무시했는데, 나중에 자기가 직원이니까 한 번만 믿어 보라고.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홍보 책자 같은 자료 다 주고, 콘셉트 이야기하고……. 그런데 그게 진짜였던 거죠. 바로 떡볶이 모델이 됐어요. (D)
팬들의 참여가 산업의 생존 모델이 되면서 산업이 팬덤의 정서와 행위, 공동체 조직 방식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2] 산업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것을 공모적 소비자 행동주의라고 한다면, 3세대 팬덤은 소비자 행동주의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팬들은 소속사뿐만 아니라 스타와 방송사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점점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이는 국민 프로듀서라는 위치 인식에서 비롯된 주체성의 결과다.
우리가 우리 가수를 지키고 관리한다는 마인드인 것 같아요.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거라고 기대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요구를 신속 정확하게 들어주면 유능, 그렇지 못하면 무능하다고 판단하죠. 팬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기대의 차원을 넘어선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유는, 일단 첫째로 내가 이 가수를 만들었다는 국민 프로듀서로서의 마음이 팬덤의 시작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서 내가 픽한 단 한 명을 온 힘을 쏟아 ‘데뷔시켰다’고 강하게 믿고 있으니까. 내가 데뷔시켰으니 나의 기대치를 충족해 주길 바라고, 내가 픽한 소중한 가수니까 소속사에서 일 처리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고, 내가 데뷔시켰으니 당연히 나의 요구를 수용할 여지를 보여야 하고, 그런 마인드 같아요. 둘째로, 설령 데뷔 과정에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돈 써서 앨범 사고, 시간 써가며 스밍하고, 댓글 관리해서 이미지 관리하고, 돈 모아서 선물 주고, 이미지 좋아지라고 대신 기부까지 하는데 내 말 잘 들어줘!’ 라는 생각인 거죠. (P)
새로운 팬덤은 팬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소속사의 역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타가 속한 곳이 중소 기획사이고, 가수를 매니지먼트하는 법을 잘 모른다고 생각되면 팬들은 소속사에게 댓글 관리 방법부터 팬덤 문화까지, 다양한 요소를 알려 준다. 협력과 긴장을 넘어서 하나씩 가르치고 원하는 것을 얻어 가며 공모하는 문화다. 이런 문화는 소속사가 팬들의 의견을 더 수용할 가능성이 있는 중소 기획사일수록 더욱 강해진다.
이러려고 데뷔시킨 줄 알아?
워너원의 경우에는 팬들의 소속사에 대한 감시와 불만이 많은 편이었다. 새 앨범이 발매되기 전 관리 부주의로 일어난 음원 유출 사건이나 소속사 직원의 행동으로 인한 마찰 등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고, 팬들은 소비자 권리로서 그에 대한 피드백을 요구해 왔다. 이러한 요구는 2세대 팬덤에서도 일어난 일이지만, 2세대 팬덤이 사실상 기획사와 어느 정도 협력하며 갈등을 봉합해 왔다면[3], 3세대 팬덤은 기획사뿐 아니라 방송국까지 적대적으로 대하면서 스타를 권력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럴 때 팬들의 행동 근거가 되는 문장은 ‘우리가 이러려고 데뷔시킨 줄 알아?’이다.
‘탈○○(소속사)’[4]같은 말이 나오는 거 자체가 대단한 거죠. 예전에는 기획사를 나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애를 키웠는데, 그렇게 방송에서 수납 당하고, 그러려고 데뷔시킨 게 아니잖아요. (I)
불만이 쌓이면 팬들은 소속사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소비자 행동주의가 가장 빠르게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공간이 트위터다. 소속사 혹은 스타의 트위터 계정에 팬들이 직접 의견을 답글로 달면, 소속사나 스타가 이를 확인할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그래서 소속사가 트위터에 일반적인 공지를 올리면 그에 대한 답글로 현재 문제가 되는 상황에 대한 피드백 요구가 이어진다. 그 저변에는 팬들이 SNS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처럼 ‘우리가 이러려고 데뷔시킨 줄 알아?’라는 인식이 있다.
팬들은 소속사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공유 금지 게시물을 공유해 타격을 주기도 한다. 워너원 공식 팬 카페 내부에 멤버들이 올린 글과 사진 등의 자료는 다소 까다로운 절차의 ‘등업’을 완료한 회원이나 일정 금액을 내고 팬클럽 신청을 한 인증된 회원만이 볼 수 있는 게시물이다. 이는 팬 카페 외부로의 공유나 이동이 금지된 소속사의 공식 저작물이다. 하지만 소속사에 불만이 쌓인 팬들은 트위터에 임시 계정을 생성하고 이 게시물들을 공유한다. 일종의 문화 전파 방해(culture jamming) 행위다. 문화 전파 방해는 풀뿌리 조직들이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잡음을 넣음으로써 기업들이 주도하는 미디어의 흐름에 도전하거나 방해하는 시도를 가리킨다.[5] 그뿐만 아니라 ‘고독한 방’으로 불리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에서도 불특정 다수에게 워너원 공식 팬 카페 내 공유 금지된 게시물들이 유출된다. 시장 경제에서 미디어 생산자들은 텍스트를 판매하지만, 팬은 텍스트 공유를 통해 이러한 경제를 자주 우회한다는 젠킨스의 분석과도 일치하는 현상이다.[6]
2세대 팬덤이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확대했다면, 3세대는 참여 문화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의 근간은 팬덤이 스타를 직접 데뷔시키고 기획했다는 데에 있다. 팬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방송과 스타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제 기획사와 방송사는 미디어 업계에서 소비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워너원이 케이블 프로그램을 통해서 데뷔한 신인 그룹임에도 지상파 3사 프로그램에 모두 진출한 데에서 팬덤의 강력한 힘을 실감할 수 있다.[7] 물론 이러한 결과가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간혹 소속사가 ‘쌍방향 수용자’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팬덤의 개입을 억제하는 경우도 있다.
팬들은 자신의 열정을 공표하고 좋아하는 텍스트를 공유하면서도 산업의 전략에 단순히 자금원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경계한다.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소비는 경험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 팬들은 구매 자체를 위해, 구매에 대한 열정을 증명하기 위해 구매하지 않는다.[8]
예를 들어 JBJ 팬들은 프로젝트 그룹의 갑작스러운 해체 통보에 저항하는 시위에서 기획사가 프로젝트 그룹의 계약 연장 가능성을 계속해서 암시함으로써 팬들로 하여금 실적(음원 성적, 음반 판매량, 음악 방송 1위 등)을 낼 것을 압박해 소비 활동을 조장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팬들은 매니지먼트사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기 위해 더 많은 소비를 실제로 해냈고(팬들의 표현으로 ‘오버 덕질을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왔다. 음악 방송 1위, 앨범 초동 판매량, 음원 순위 모두 신인 아이돌 그룹이 낼 수 있는 평균적인 성적을 훨씬 웃돌았다. 그런데도 계약 연장은 불발되었고, 해체 통보 또한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팬들은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팬덤에 대한 소비 압박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사회 문제에 결부시켰다. 수많은 회사가 계약직 직원에게 실적이 나올 경우 계약을 연장하겠다는 압박을 주어 성과를 종용하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왔음에도 계약을 연장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이 사건이 JBJ와 매니지먼트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계약직과 청년 취업에 연결된 사회 문제임을 강조한 것이다.
JBJ의 팬덤은 소속사의 일방적인 결정을 수용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미를 해독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소비자 행동주의를 보였다. 이러한 팬들은 미디어 학자 맷 힐스(Matt Hills)의 분석처럼 자신을 식별력 없는 나쁜 소비자들과 구별한다.[9] 하지만 이 소비자 운동은 결국 기획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JBJ의 활동 또한 연장되지 않았다. 여전히 팬덤의 힘으로는 거대한 소속사를 움직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위계질서가 사라진 대안 공동체
개별 수용자가 파편화되었다고 해서 서로 교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사안에 따라서 자유롭게 붙었다 떨어지는 느슨한 연대를 실현한다. 워너원 멤버에서 아쉽게 탈락한 여섯 명의 연습생으로 구성된 그룹 JBJ의 팬들이 이러한 연대를 잘 보여 준다. 이들 팬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팀이나 다른 멤버의 팬덤과 기꺼이 연합하고 집단 지성을 구현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고 난 후에는 다시 흩어진다.
원래 처음에 (디시인사이드) ‘남자 연습생 갤러리’에서 떨어진 애들끼리 즐겁게 놀았어요. 떨어진 애들 팬들끼리 서로 기사 나면 댓글 달아 주러 가고. 품앗이하듯이. 왜냐면 서로의 화력이 낮은 걸 아니까요. 태현이 팬이 프듀 갤(프로듀스 101 갤러리)에서 조합을 만들면서 ‘이렇게 놀자’고 하면서 더 시작되긴 했는데, 꼭 JBJ 조합이 아니더라도 떨어진 멤버들끼리 여러 조합을 만들어서 놀았어요. 우리가 제2의 I.O.I를 꿈꾸자면서. 얘네 조합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어떤 팬이 ‘그래서 애들끼리 친해?’ 물어봤는데, ‘몰라. 팬들끼리 친해.’ 이렇게 답을 했었어요. 애들끼리 친한지는 모르겠지만 팬들끼리 친한 게 중요한 거죠. (웃음) (D)
이처럼 JBJ는 사실 ‘팬들끼리 친해서’ 만들어진 조합이었다. 이들은 집단 지성이 그러하듯 주어진 의미 중에서 취사선택하여 서로 다른 다양한 해석을 비교하고 토론한 후, 가장 만족스러운 조합을 만들어 냈다.[10]
우진이의 경우에는 같은 소속사인 이대휘 팬덤과 연합해서 함께 악플러 고소 요구 및 증거 자료 제출을 한 적이 있어요. (P)
이와 같은 연대는 P의 경우처럼 소속사가 악플 고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팬덤 간 연합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한 팬은 이를 ‘공동 구매 문화’(C)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소비자를 모으듯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모였다 흩어지는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파편화된 팬덤의 느슨한 연대가 가능하게 된 문화적 토대는 평등함이었다. 아이돌 팬덤 활동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주로 언급되는 트위터와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로의 팬 커뮤니티 이동 및 확장[11]은 팬들의 권력 관계를 상당 부분 해체했다. 이들 커뮤니티의 특성은 팬덤 활동의 근간이 되는 정보와 자료가 경계 없이 모두에게 공유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팬덤 내 위계질서가 부분적으로 해체될 가능성이 생긴다. 디시인사이드 커뮤니티를 지속하는 내부 규칙은 셀털 방지와 친목 금지, 고정 닉과 유동 닉의 차별 금지 등이다. 셀털 방지는 ‘셀프 털이 방지’의 줄임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어떠한 단어나 사진, 이야기도 커뮤니티 내에서는 금지된다는 규칙이다. 친목을 자제하고, 고정적인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사람과 닉네임이 없는 방문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커뮤니티를 오랜 기간 활성화시키는 힘이다. 누가 언제 방문해도 위화감이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뮤니티 내에서 특정 인물이나 그룹으로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다. 닉네임은 불리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자본으로서 가치를 갖지 못한다.[12] 이러한 특징은 프로젝트 그룹의 팬덤이 최대한 많은 팬을 유입시키도록 영업하는 데에서 출발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최대한 많은 개별 시청자들을 팬덤 내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명 ‘영업’을 해야 했던 국민 프로듀서들은 자연스럽게 권력을 분산시키는 규칙에 순응했다.
워너원이 데뷔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팬 수다를 생성하고, 연습생을 홍보하는 장이 된 디시인사이드 내 〈프로듀스 101〉 갤러리와 데뷔 이후 담론을 형성하고 실천하는 역할을 한 워너원 갤러리, 그리고 데뷔 조에 속한 워너원 멤버 및 개인 연습생들의 ‘마이너 갤러리’ 모두 이처럼 수평적인 환경을 만들어 왔다. 갤러리는 최대한 많은 개별 시청자를 팬으로 유입시키는 데에 적합하기도 했다. 갤러리는 팬덤이 향유하는 공간이지만, 누구든 접속할 수 있고 회원 가입이 필요 없으며, 글을 쓰고 관찰하는 데 용이하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에게도 열려 있다. 팬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팬덤 내부의 모습이 잘 나타나는 공간이기 때문에 대중의 투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독한 방’이라는 이름의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역시 이러한 특성에 한몫했다. 대화 금지를 원칙으로 하는 고독한 방에서는 오롯이 스타의 사진 혹은 동영상이나 음원 파일만이 공유된다. 팬들은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정보나 자료가 있으면 자유롭게 채팅방을 오가며 요청할 수 있다. 팬덤 내 정보와 자료 공유가 대가 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다 보니 팬덤 내 위계는 자연스럽게 약해진다.
특히 누군가가 위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을 때, 이러한 커뮤니티는 확실히 개별 팬들에게 자유를 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장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아비투스(habitus)는 학습되어야 한다. 장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장이 공유한 원칙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13] 예를 들어 팬덤은 고독한 방에서는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이미지로만 소통해야 한다는 규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갤러리 내에서는 은어나 ‘검색 방지’, ‘셀털 방지’에 대한 규칙을 체화해야 한다. 이는 위계를 없애는 데 필요한 문화적 자본 축적(cultural capital accumulation)의 과정이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팬은 이 규칙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문화학자들이 상징적 폭력이라고 설명하는 현상이다.
처음에 그게 제일 적응 안 됐어요. ‘셀털 방지’라고 (사진 같은 거 올릴 때) 방 벽지, 바닥재까지 가리더라고요. 저는 예전 팬덤을 경험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팬덤 내에도 권력 구조가 있었고, 그로 인해 문제가 있어서 셀털을 강하게 제재하는 분위기더라고요. 팬클럽 회장, 파 이런 단어는 오히려 지금 팬덤에는 생소한 개념이에요. 얼마 전 워너원의 각 갤러리 대표들이 친목질과 권력질을 했다고 강하게 규탄받은 적도 있고 그 일로 박우진 갤의 부갤매(부 갤러리 매니저)를 다시 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예전 같으면 소위 말하는 팬클럽 회장이나 대표 격인 갤러리 매니저나 카페 매니저 같은 걸 다들 하고 싶어 할 것 같은데, 요즘은 기피하는 분위기이고, 권력을 행사한다기보다는 희생하고 노동한다는 개념이 강하더라고요. 그리고 아이돌을 소비하고 응원하는 방식도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고, 강한 규칙이 존재해요. 예전 방식대로 팬질을 하면 ‘아줌마 티를 내지 말라’며 강한 ‘고나리’를 하고, 이미 갖춰 놓은 팬덤의 룰을 따를 것을 강하게 요구하더라고요. 갤(갤러리)의 닥눈삼이 가장 대표적일 거예요. 그냥 입 다물고 이미 갖춰 놓은 문화에 따르고, 배우고, 익히라는 거죠. 그것에 거부감이 들어 덕질에 입문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P)
예전에는 소속감을 중시했어요. 그래서 파에 들어간 애들도 있고, 사생 짓 하는 애들도 있고. (그런 친구 이야기를 들어 보면) 거기 가는 이유는 그 앞에서 만나는 언니들이 좋아서였던 거 같아요. 요즘은 인터넷이 워낙 발달해서, 전화로 연락해서 만나는 파 같은 조직보다는 점 조직처럼 더 크게, 넓게 이야기하니까 익명성이 보장되죠. 소수로 만나기보다는, 넓게 서로를 모르면서 만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덜 중요해지고, 훨씬 자유로워졌어요. 파 소속이면 내 역할이 있고, 오빠들이 싫어져도 탈덕도 못 하는데, 이제는 탈덕과 입덕이 자유로운 거죠. (J)
아는 사람이 총대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진짜 딱 사안만 해결하고 흩어지더라고요. 사안이 중요한 거지, 우리가 누구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 팀 트위터에도 제일 크게 써놓은 게 ‘우리는 그 어느 곳도 대표하지 않는다’예요. 진짜 인상 깊었어요. (Q)
그룹 팬덤 문화가 강했던 과거에는 팬덤 내 계층 구별이 확실했다. 그러나 개인을 좋아하는 것, 타 그룹을 동시에 좋아하는 것에 대한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파편화된 개인은 팬덤 내 수행에서 더욱 자유로운 행동 규약을 갖게 된다. 또한 과거 팬덤은 홈 마스터, 팬클럽 회장과 같은 생산자 그룹이 있고, 이를 소비만 하는 소비자 그룹이 있는 계층 구조였다.[14] 하지만 새로운 팬덤 문화에서 이런 지형은 비교적 수평적으로 변했다.
새로운 커뮤니티의 등장은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대표자나 권력자 중심의 문화 대신 ‘총대 문화’를 구축했다. 누군가 나서서 공동의 일에 총대를 메고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총대 문화에서는 사안마다 책임자와 일할 스태프를 정하고 그 이벤트가 끝나면 흩어진다. 결과적으로 아주 느슨하고 자유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이 새로운 팬덤은 팬덤 내 위계질서에서 상위에 위치했던 홈 마스터도 더 이상 권력자로 보지 않고 ‘귀찮고 어려운 일을 대신해 주는 고마운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들은 홈마의 권력이 사라진 가장 큰 이유로 트위터 활성화와 카메라의 대중화를 꼽는다.
홈마가 딱히 권력자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냥 어차피 트위터 들어가면 널린 게 사진인데. 확실히 과거에는 홈마가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니까 거기에 가입하고 인증받고 사진 받는 게 다 홈마 마음대로니까 권력적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냥 트위터에 사진 올리고 끝이니까, 권력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저는 그냥 안 보면 그만인데. 그래서 ‘시녀 짓 하지 말라’는 말이 공공연해진 거 같아요. (I)
예전에는 카메라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었다면, 요즘에는 휴대폰으로도 웬만한 DSLR보다 잘 나오니까요. 저도 몇 번 사진 찍어서 올리고 그랬는데, 너도나도 찍어서 올릴 수 있으니까……. (G)
‘시녀 짓’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진다. 시녀 짓은 홈마나 ‘네임드’로 불리는 유명 팬에게 과도하게 굽실거리는 팬들의 행위를 말한다. 콘서트 티켓을 홈마에게 아무 조건 없이 양도한다거나, 스타의 굿즈를 사서 선물하는 행위 등이다. 워너원 팬덤에서는 콘서트 티켓 예매를 앞두고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홈마의 사진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홈마가 일반 팬들에게 쉽게 티켓을 얻는 행위가 옳은지에 대한 토론이다. 이 토론에서는 콘서트 표를 양도하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단지 ‘홈마’라는 이유로 양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과도한 경쟁에 노출된 사람들이 공정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 홈마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노력 없이 좋은 자리를 구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는 주장이다.